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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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7번의 상징성은 잉글랜드, 그 중에서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만들어졌다. 그동안 유나이티드의 7번으로 뛰었던 선수들은 팀의 핵심이자 현대 축구를 빛낸 주역들이기도 하다. 본래 10번이 에이스로 상정하는 편이나 레알 마드리드,[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은 몇몇 구단은 7번을 에이스로 상정하기에 7번의 활약에 따라 해당 구단의 성쇠를 판가름하기도 한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7번 중 가장 최근에 은퇴한 이는 마이클 오언이다.
본 항목에서는 맨유 7번 출신들의 '''선수 커리어 중 맨유 시절'''에 한해서만 논한다. 선수 커리어와 지도자 커리어는 별개이므로, 은퇴 후의 '''지도자 커리어에 한해서는''' 타 클럽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한다. 맨유 출신 선수들이 지도자로서 리그에 기여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 항목은 큰 역사적 흐름으로 맨유 7번을 논하고 있는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커리어가 진행되고 있는 현역 선수에 대해서는 짧은 설명으로 요약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잇따른 실패로 인해 맨유의 7번은 저주에 걸렸다는 평이 많다.
2. 역대 7번
2.1. 알프 스코필드
- 기간: 1900-1907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7번 계보의 시초.
- 1900년 에버튼에서 이적해 온 스코필드는 이적 첫 해에 6골을 넣었고, 단숨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오른쪽 공격수로 뛰었는데, 스코필드를 본 사람들은 이렇게 회상하곤 했다.
"그는 왼쪽 수비수를 매우 비참하게 만들었다."
2.2. 빌리 메레디스
- 기간: 1906-1921
- 세계 최초의 슈퍼스타
- 웨일즈 마법사
- 축구가 시작된 이래 세계 축구 최초의 슈퍼스타라고 일컫는 빌리 메레디스. 축구사 최초의 슈퍼스타 중 한명. 세계 최초의 프로 축구 리그인 ‘잉글리시 풋볼 리그’ 창립 당시에도 선수로써 뛰고 있었다. 당시 1세대 (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슈퍼 레전드로 빌리 메레디스와 스티비 블루머가 쌍벽을 이루었다.
- 스티비 블루머의 외모는 축구 선수 특유의 터프한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스티브 블루머와는 달리, 메레디스는 누가 보더라도 축구선수로 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에 달리기 실력도 상당했던 것.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의 모습에 관중들은 항상 환호를 보냈으며,그는 '그라운드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 웨일즈 출신의 드리블의 마법사 메레디스는 맨유의 왼쪽 측면을 지배했다. 라이트 윙어로써 드리블과 크로스가 대단했고, 윙어의 원초적인 표본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다름이 아니다. 뛰어난 돌파력을 바탕으로, 정확한 롱패스를 활용하는 스타일이었다.
- 1906년에 맨유로 이적했던 그는 2번의 잉글랜드 리그 우승과 더불어 1번의 FA컵, 2번의 커뮤니티 쉴드 우승을 가져갔고,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빌리 메레디스는 최초의 리그 올해의 선수상에 선정된 바 있으며, 국가대표와 클럽에서 무려 50살 가까이 뛰었다.
- 라이언 긱스와 더불어 웨일즈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1명으로 당시 영국에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획득했다.라이언 긱스의 웨일즈 마법사라는 별칭은 바로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 빌리 메레디스는 1907년 새로운 선수 연맹을 창립했다.
2.3. 조 스펜스
- 기간: 1919-1933
- 기록: 510경기 168골
- 최초로 7번의 상징성을 불어넣은 사나이, Mr.Soccer
- 세계 1차 대전, 세계 2차 대전을 겪은, 격동의 시대의 희망을 준 선수.
- 군복무의 모범. 군필자
- 육군에 징집되어 기관총 사수로 복무했다. 군 복무 기간 중 그는 게스트 선수로 출전했고, 소속 부대에서 Army Cup을 수상했다. 그러나 1919년 3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스펜스는 북동 지역 아마추어 팀인 Scotswood를 떠나 맨유에 입단했다.
- 1919년, 세계 1차대전으로 4년간 중단되었던 축구 프로 리그가 다시 시작되었다.
- 1919년 맨유에 입단한 스펜스는 당시 나이 21세였다. 21세의 스펜스는 1919년 8월 30일 열린 잉글랜드 1부리그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 그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Lancashire Section, Bury와의 데뷔전에서 네 골을 넣으며 5-1 승리를 이끌은 것. 그의 공식적인 데뷔 전은 리그 프로그램이 재개된 8월로 기록되어있다.
- 조 스펜스는 첫 시즌에만 무려 32경기에 출장해 14골을 넣었고, '자신의 축구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맨유에서 보낸다. 그는 한결 같은 모습을 보이는 모델이었고 데뷔 이후 510 경기에 출전하여 168 골을 기록했다.
- 그는 그 당시 팬들에게 Mr.Soccer로 불렸다. 일각에서는 조 스펜스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7번에 상징성을 불어 넣은 첫번째 선수로 보고있다.
- 조 스펜스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은 몇 안되는 스타이다. 세계 1차 대전과 세계 2차 대전 그런 격변의 전쟁 시기에 축구 선수 생활을 했지만, 맨유에서 그는 흥겨운 경기를 선사하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 조 스펜스는 (2009년 기준) 클럽 최다 출장 선수 10명 중에 속했다. 그의 481회 리그 경기 출장 기록은 빌 폴크스(Bill Foulkes)에 의해 갱신될 때까지 40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 선수 은퇴 후에는 맷 버스비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맨유로 복귀해 코치와 스카우팅 역할을 맡았다.
2.4. 지미 델라니
- 기간: 1946-1950
- 1946년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프랑스 출신 공격수인 델라니는 1948년 FA컴 결승전에 출장해 맹활약하며 2번째 FA컵 우승 트로피를 팬들에게 안겨주었다.
- 스코틀랜드 베스트 11을 6번이나 뽑힌 기록이 있다.
2.5. 조니 베리
- 기간: 1951-1958
- 뮌헨 비행기 참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다.
- 맷 버스비 감독의 유나이티드에서 중요한 선수 중 1명이었던 베리는 맨유에서 3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 어린 시절 조니 베리는 그의 고향 팀인 올더쇼트로부터 ‘축구를 하기에는 너무 작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던 베리는 이적 첫 해 36경기 출전하면서 6득점, 맨유가 리그 우승하는데 기여했다.
- 시니어 플레이서로써 베리의 활약은 맷 버스비 아이들의 시초라 할 정도로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그는 토미 테일러와 데니스 바이올렛 같은 선수들이 1955/56시즌 두 번의 우승과 1956/57년 세 번째 우승하도록 기반을 닦아 주었다.
- 그는 뮌헨에서 입은 부상으로 짧은 경력을 마감했다. 1958년 뮌헨 비행기 사고가 일어났고, 조니 베리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지만, 두개골 골절, 턱 골절, 팔꿈치 골절, 골반 및 다리 골절 등 너무 큰 부상을 당했다.그 사고 이후 후유증으로 58년도에 은퇴를 한다. 맨유에서 7년을 보내면서 총 276번 출전했다.
2.6. 조니 자일스
- 기간: 1957-1963
- 유나이티드가 자랑하는 유스 시스템의 대표적인 선수 중의 1명.
- 조니 자일스는 맨유 유스팀을 거쳐 성인팀에 데뷔했으며, 뮌헨 참사 이후 최초의 트로피(FA컵)를 드는데 크게 공헌했다.
- UEFA 공식 역대 명예의 전당 골든 플레이어로 선정됐으며, 아일랜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뽑혔다.
2.7. '''조지 베스트'''
- 기간:1963-1974
- 기록: 470경기 179골
- 수상: 발롱도르 1위 1회, 발롱드르 3위 1회, FWA 올해의 선수 1회, 1부리그 득점왕 1회, PFA 공로상, 골든풋, FWA 공로상
- 우승: 1부 리그 2회, 채리티쉴드 2회, 유러피언컵 1회
- 북아일랜드에서 온 유나이티드의 구세주이자 자타공인 역대 최고의 7번
- 맨유 발롱드르 삼각편대로 영국축구의 대명사 - 조지 베스트, 보비 찰튼, 데니스 로
- 5번째 비틀즈 멤버
- 1950~60년대에 걸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첫번째 황금기를 준비하고 있던 매트 버스비 경의 눈에 띄어 1961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 팀에 입단, 1963년 17세의 나이로 1군에 승격하고 곧바로 주전자리를 꿰찼다.
- 뮌헨 참사로 주전 대다수를 잃으며 오랜시간 슬픔에 빠져있던 유나이티드 팬들은 혜성처럼 나타나 그라운드 위를 자유자재로 질주하는 한 청년에 열광하게 된다. 스피드, 균형, 시야, 뛰어난 컨트롤, 기회를 만드는 능력,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의 득점 등은 그가 가진 재능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나머지 절반은 경기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열정, 끊임없는 발 재간 그리고 환희였다. 펠레는 United의 7번 선수를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말했다.
- 66/67시즌 챔스 준준결승에서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벤피카(Benfica)를 물리쳤다. 리스본의 거인 팀에게 유럽 최초의 홈 구장 패배를 안긴 5-1 승리에서 두 골을 기록한 그는 ‘El Beatle’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현란한 드리블과 마무리능력, 상대 수비수를 압도하는 기술과 스피드, 마른 체격에도 절대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근성과 당시 전세계적 스타였던 비틀즈를 닮은 외모까지 겸비했던 그의 주위엔 항상 수많은 여성팬들이 몰려들었다
- 1967년에 두 번째 타이틀을 땄고, 일 년 후 1968 유러피안 컵 결승전에서 베스트는 또 다시 벤피카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연장전에서 선취골을 넣어 스코어를 2-1로 만들었고, 결국 팀은 4-1 승리를 이루어냈습니다. PFA 및 European Footballer of the Year를 수상한 베스트는 그 시즌에 28골을 넣으며 United 최다 득점 선수가 되었고 이 기록은 이후 네 시즌 동안 깨지지 않았다.
- 1970 FA컵 5라운드 Northampton Town 전의 8-2 승리에서 여섯 골을 넣음으로써 United 선수로서 전후(post-War) 단일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했다.
- 세계 2차 대전 이후 잉글랜드 축구 중흥기를 이끌다 뮌헨 참사 이후 또다시 어려움에 봉착했던 잉글랜드 축구와 맨유에게 조지베스트는 보비찰튼, 데니스 로와 함께 그 당시 잉글랜드 축구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 엄청난 공격진들이 이끌던 유나이티드의 막강화력에 사람들은 붉은 유니폼의 악마라며 "붉은 악마 (Red Devil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나이티드에서 최고의 선수시절을 보낸 조지베스트는 당시 펠레가 자신보다 뛰어난 선수란 인정과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유나이티드를 최고의 팀으로 만들었다.
▲ 조지 베스트 다큐멘터리
2.8. 윌리 모건
- 기간:1968-1975
- 기록: 236경기 25골
- 유나이티드 암흑기 시절 팬들의 희망이었다.
- 윌리 모건이 올드 트래포드에 입성했을 때는 맷 버스비의 맨유가 챔스에서 우승했던 바로 다음 시즌이다. 많은 팀들이 그를 원했다. 버스비 감독이 그를 맨유에 합류시켰다.
(당시 윌리 모건에겐 공격본능으로 가득 찬 축구의 파라다이스였다) 정말 엄청난 팀 아닌가? 로, 베스트에 찰튼이라니! 그런 선수들과 같이 뛰는 건 정말 특권이지. 내 이름이 그런 선수들과 함께 출전 명단에 올라가있다고 생각해봐. 누가 싫어하겠어? 난 아직도 그때 그 팀이 맨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이었다고 생각하네. 솔직히, 컨디션이 절정이었을 때는 못 이길 팀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 도허티 감독이 맨유에 왔을 때 윌리 모건은 이미 영웅적 존재가 되어있었다. 짐 홀튼, 로 마카리, 마틴 부찬, 그리고 이제 팀의 주장 윌리 모건이 버티고 있었다. 당시는 데이비드 보위, 루 리드, 록시 뮤직이 선풍적 인기를 끌던 글램 록의 시대였다. 모건은 팬들에게 단순히 축구뿐만이 아닌 패션 아이콘이었다. 벽돌을 밑에 박은 듯한 신발을 신고 다녔다.
- 윌리 모건은 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새로 영입된 다른 선수들은 맨유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위축되었지만, 윌리 모건은 맨유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자기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맨유 선수라고 생각했다.
- 그의 드리블 자세는 독특했다. 어깨를 기울이고 팔꿈치를 뒤로 뺀 채, 손은 마치 대결을 앞둔 총잡이마냥 들고 있었다.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땔 수 없게 만들었다. 빠르고 유연하며 정교한 슈팅까지 갖춘 이 스코틀랜드 서부 콜필드 출신의 윙어는 전형적인 드리블러 타입의 윙어였다. 맨유 팬들은 그의 재능을 금방 알아차렸고 곧 그의 모든 움직임에 환호하기 시작했다. "윌리, 윌리, 우리에겐 윙어 윌리 모건이 있어"라는 응원곡이 들리기 시작했다.
● (65세가 된 윌리 모건이 맨유 시절을 회고하길) 잘 들어봐. 얼마 전 내 손자녀석 하나가 다락방에서 놀다가 옛날 내 주급명세서를 찾았더라고. 아마 당시 영국에서 가장 주급을 많이 받는 선수이었을 거야. 그때 최고 세율이 파운드당 97.5펜스였어. 일정 금액이 넘어가면 1파운드를 벌어봤자 내게 떨어지는 금액은 2.5펜스밖에 안 되는 거야. 믿을 수 있겠나?
● 삶이 정말 내게는 너그러웠어. 내가 얼마나 행운아였는지는 말도 못하지. 축구로 돈을 번다.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 그게 바로 '운이 좋다'라는 거야. 가죽 다루는 능력을 봐선 탄광에 들어갔어도 충분히 제 몫을 했을 테지만.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야."
● 그 시간들 다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모르겠어. 맨유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누비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말이야. 정말 어제 같아. 아직도 느낄 수 있어. 냄새도, 맛도 생생해. 그거 알아? 지금도 현역으로 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야. 정말이라니깐. 겉이야 주름투성이 노인이지만, 내 속은 아직도 젊은 날의 윌리 모건 그대로거든. 자네 생각에 퍼거슨 감독이 내 생일 선물로 한 경기 뛰어보라고 해줄 것 같나?
● (도허티 감독의 세대교체 정책으로 윌리모건이 맨유를 떠난 후) 내가 39세였을 때, 맨시티와 리즈의 영입 제의를 받았어. 둘 다 거절했지. 나를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갈 길을 가고 싶었거든. 재미있는 건 그러고 7년간 지나서 올드 트래포드에서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데 누가 와서 그러는 거야 '왜 여기 있는 거에요? 부상 중인가요? 그래서 안 뛰는 거에요?'라고. 팬들도 내가 은퇴했다고 생각하지 못한 거야.
- 은퇴 후 그는 골프에 빠졌다. 버스비 감독과 자주 라운딩을 즐겼던 그는 언제나 의욕이 넘치는 선수로 80~90년대를 골프에만 매달렸다. 가끔 골프 대회를 주선하기도 했다(그는 지금까지도 매년 열리는 하워드 킬 자선 골프 대회의 창립자이다)
2.9. 스티브 코펠
- 기간: 1975-1983
- 기록: 322경기 53골
- 수상: PFA 올해의 팀 2회
- 우승: FA컵 2회, 채리티 쉴드 2회
- 퍼거슨의 제자
- 스티븐 코펠은 경제사 이론을 공부. 트란페어 팀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대학에서는 학위 공부를 하며 축구팀 코치까지 병행하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은 1975년 맨유가 그에게 오퍼를 하며 맨유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 코펠은 축구를 하면서 공부 역시 열심히 했다. 코펠이 트랜메르에서 활약할 당시 그는 "아르바이트로 축구를 했다"라고 인터뷰를 했는데, 이후 맨체스터로 이적한 후에도 공부를 소흘하게 하지 않았다.
- 코펠은 기술이 뛰어났으며, 기민했으며 시야 역시 매우 빼어난 당대의 미드필더였다. 또 코펠은 1977년 부터 1981년 까지 206경기 연속 출장기록을 가지고 있을정도로 강철체력을 자랑했다.
- 70년대 잉글랜드 최고의 윙어. 'The Wingman'이라는 그의 별명은 코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말이였다.
- 77년도에는 밥 페이즐리가 이끄는 리버풀의 역사적인 트레블을 막아냈던 사건으로 유명한 당시 FA컵 결승전에도 있었다. FA컵 결승전은 코펠과 맨유에게 매우 의미있는 결승전이었다. 당시 리버풀은 잉글랜드 최초로 트레블을 노리고 있었고, FA컵 결승전에서 맨유를 상대하게되었다. 그러나 리버풀은 맨유에게 1-2로 패배했고, 결국 트레블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리고 1999년 맨유는 잉글랜드 최초의 트레블 타이틀을 획득한다.
- 1982년 피파월드컵 예선전 헝가리전은 잉글랜드에게 굉장히 중요한 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뛰던 코펠은 비극을 당하고 만다. 헝가리 선수의 태클의해 코펠의 무릎이 산산조각 나게 된 것이다. 코펠은 이 부상을 "like someone had put a firework in my knee and it had gone off 마치 누군가가 무릎에서 불꽃놀이를 한 것 같았다" 라고 표현했다.
- 1982년 월드컵 등에서 얻게된 무릎부상으로, 결국 1983년 불과 28세의 젊은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 .코펠은 1977년부터 1981년까지 207경기 최다 연속 출장한 필드플레이어라는 기록을 가지고 오늘날 까지도 맨유의 역사에 남아있다. 코펠은 맨유에서 373경기 70골, 국가대표팀에서 42경기 7골을 기록 한 채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 스티브 코펠의 축구선수로써의 인생은 끝나고 말았지만, 그는 감독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1984년 6월, 코펠은 크리스탈 팰리스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당시 28세 하고도 10개월에 불과한 코펠은 축구 역사상 가장 젊은 감독이라는 기록을 또한번 남겼다.
- 1984년부터 1993년까지 크리스탈 팰리스 감독으로 있으면서 팀을 이끌었다. 당시 1990년에는 Fa컵 결승전까지 오르는 지도력을 보여주면서 코펠은 감독으로써도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 아스날의 레전드로 유명한 이안 라이트를 키워냈던 장본인이다.
- 크리스탈 팰리스의 가장 존경 받는 영웅은 선수가 아닌, 스티브 코펠 감독이다. 코펠에게 크리스탈 팰리스는 네 번에 걸쳐 팀을 맡긴 바 있는데, 아예 1984년부터 1993년까지의 시간을 “코펠 시대”로 명명하기까지 했으니 그 인기를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 우리나라에서는 설기현 선수의 레딩 FC 시절 감독으로 유명하다.
▲ 스티브 코펠이 감독으로 있었던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제작한 영상. 3:40경 크리스탈 팰리스 감독으로 맨유를 만난 스티븐 코펠을 확인 할 수 있다. 크리스탈 팰리스는 FA컵에서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난타전 끝에 리버풀을 4-3으로 제압하고 결승에 올랐다. 이때 결승골을 집어넣은 사람이 앨런 파듀. 그리고 FA결승전에서 맨유를 만나 준우승을 했다. 영상에서는 당시 크리스탈 팰리스 분위기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클럽인 맨유를 만난 것은 꿈을 실현한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2.10. '''브라이언 롭슨'''
- 기간: 1981-1994
- 기록: 461경기 99골
- 수상: PFA 올해의 팀 6회
- 우승: 1부 리그 2회, FA컵 3회, 리그컵 1회, 채리티 실드 3회, UEFA 컵위너스컵 1회, UEFA 슈퍼컵 1회
- 유나이티드의 영원한 주장
- 숱한 스카우트 제의를 마다한 채 맨유를 이끈 의리의 주장, 캡틴 마블
- 영국 축구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미드필더라고 불린다. 정확도 높은 패스와 슈팅, 미드필더 장악력 등 미드필더로서 갖춰야 할 자질들을 두루 갖춘 그는 맨유서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끈 경험이 있다
- 잉글랜드의 축구 전문가들이 잉글랜드 국가대표의 역사를 통틀어 베스트 팀을 선정할 때, '로보(Robbo)', '캡틴 마블'이라는 애칭을 가진 브라이언 롭슨의 이름은 보비 찰튼, 보비 무어 등과 함께 빠지지 않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 왼발을 사용하는 롭슨은 그야말로 만능 선수였다. 그라운드를 쉬지 않고 누비며 상대의 공격 길목을 차단하고, 일대 일 상황에서는 정확하고 강력한 태클로 공을 빼앗는 능력도 탁월했고, 공격시에는 직접 드리블을 시도해 그대로 상대 골문으로 돌진하거나 정확한 패스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문전에서는 정확한 슈팅으로 득점까지 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박스 투 박스 플레이어(box to box player)'였다.
- 그는 빠르게 성장하여 레이 윌킨스(Ray Wilkins)에 이어 팀 주장이 되었다. 레이는 풍부한 이해력의 소유자로서 브라이언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게임을 읽는 성숙한 능력을 한층 더 발전시켜 주었다.
- 타고난 리더였던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끝없는 승부욕의 소유자였으며 맨유의 붉은 유니폼을 입었을 때나,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흰 유니폼을 입었을 때나 가리지 않고 항상 120%의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그는 맨유에 있던 내내 정신적인 멘토 역할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수행했고, 실력적인 면에서도 그의 중원 조율 능력은 맨유를 다시금 정상으로 올려놓는 데 톡톡히 일조했다.
- 최고의 동기부여 능력을 지닌 롭슨은 전성기 때 지칠 줄 모르는 체력, 공격과 수비에서 창의력이 돋보이는 패스 기술, 태클 시 제어된 적극성, 적절한 페이스와 강력한 슈팅 및 헤딩 능력까지 겸비한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미드필드 지역부터 넘치는 에너지로 공격 진영까지 침투를 이어가며 많은 골을 넣기도 했다.
- 롭슨은 선수 생활을 하면서 100여 년의 리그 역사상 많은 득점을 기록했고, 이 중에는 블라인드 사이드 런에서 시작하여 에어리어로 파고드는 골이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맨유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팀을 훌륭하게 이끄는 주장이었다. 롭슨은 잉글랜드 A 매치에 90회 출전했고, 월드컵에도 세 번이나 출전했다. 그가 대표팀 간 경기에서 넣은 26개의 골 중에는 1984년 터키 전의 해트 트릭과 1982년 월드컵 프랑스 전에서 27초 만에 넣은 골도 포함되는데, 이는 본선 경기 중 두 번째로 빠른 골이었다.
- 1984년에 롭슨은 유벤투스로 이적할 기회를 얻었지만 맨유에 남기로 결정했고 그 후로 1994년까지 팀에서 활약을 이어갔다.
- 숱한 스카우트 제의를 마다한 채 맨유를 이끌었고 그의 의리에 감동한 맨유팬들은 그를 '위대한 주장'이라고 칭송했다. 브라이언 롭슨은 82년부터 94년까지 무려 12년간 맨유 주장으로써 역대 최장기간 주장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맨유를 잉글랜드 명문 클럽으로 다시금 발돋움 할수 있게 만든 주인공 중 한명으로 회자되고 있다.
- 선수 은퇴 후 7년간 미들즈브러 FC의 감독직을 맡은 것으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브라이언 롭슨은 96-97시즌 팀을 FA컵과 리그컵 결승에 진출시켰다. 지금은 맨유 앰버서더로 활동 중이다.
2.11. '''에릭 칸토나'''
- 기간: 1992-1997
- 기록: 205경기 93골
- 수상: 발롱드르 3위 1회, PEA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1회, PEA 올해의 팀 1회, FWA 올해의 선수 1회
- 우승: 프리미어 리그 4회, FA컵 2회, 채리티 쉴드 3회
- 올드 트래포드의 왕
- 역대급 꿀 영입의 대명사. 그의 이적료는 100만 파운드
-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을 출연시켜 소비자에게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킨 광고는 90년 대 중반에 제작된 '악마 vs 인간'의 가상 축구 경기를 컨셉으로한 광고가 효시였다. 브라질의 호나우두, 이탈리아의 말디니, 네덜란드의 클라위베르트, 포르투갈의 피구 등 당대 내로라하는 스타 선수들이 대거 출연했다. 그러나 이 CF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슈팅 장면에서 옷깃을 세우고 'au revoir!'(잘가!)라는 한마디와 함께 통렬한 강슛을 날리는 선수, 주인공 역할은 바로 칸토나의 몫이었다. 칸토나의 발을 떠난 공은 골키퍼의 가슴을 관통하며 CF는 끝나는데 비록 당시의 칸토나는 프랑스 국가 대표에서 제외되어 출연 선수 중 유일하게 대표팀 선수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여러 스타 선수들을 제치고 CF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대중적인 인기와 스타성, 그리고 뛰어난 기량을 한 몸에 가진 선수인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 칸토나는 1992년 12월 맨유에 도착한 첫 날부터 7번을 달기 위해 온 선수 같았다. 롭슨의 은퇴 이후, 옷깃을 세운 채 황제처럼 필드를 들어서서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대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 출신의 에릭 칸토나로, 붉은 유니폼에는 선명하게 7번이 새겨져 있었다. 롭슨의 7번에는 힘겨웠던 눈물이 묻어 있다면, 칸토나의 7번은 영광을 의미했다.
-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맨유에서 활약했지만, 워낙 강력한 인상을 팬들에게 심어놓음으로써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 1992-1993 시즌 맨유에 입단하기 전까지 칸토나는 그야말로 트러블 메이커의 전형이었다. 프랑스 대표 로 뛸 당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던 앙리 미셸(현 코트디부아르 감독)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무능력한 감독"이라고 악평하며 1년간 대표팀 경기 출전정지 처분을 받아야 했고 마르세유에서 뛰던 시절에는 교체 아웃되자 불만을 품고 감독 얼굴에 유니폼 상의를 던지는가 하면 판정에 불만이 있으면 심판 머리에 공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그런 그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6개월을 뛰다 맨유로 이적해온 것이다. 그는 이전까지 자신이 몸담던 팀에서 채 1년도 버티지 못하던 풍운아였다. 그런 그가 맨유에서 만난 사람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 칸토나는 퍼거슨이라는 임자를 만나 자신의 뜻을 맘껏 펼쳤다.
- 칸토나를 지도했던 감독이나 구단주 모두가 그에 관해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칸토나는 제어불가능한 선수이다" 다혈질적인 성격, 강한 고집, 항상 자기 생각이 무조건 옳다,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 일례로 1988년 마르세유는 당시 프랑스 신기록인 1800만 프랑이라는 거액에 칸토나와 계약했다. 교섭의 자리에는 칸토나 자신도 참석했고, 그는 거기서 마르세유의 회장이며 사회당 소속의 국회의원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베르나르 타피에게 대들었다. 후에 타피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토나는 제어가 불가능한 선수라는 것을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 그런 그를 유일하게 잡아준 감독이 알렉스 퍼거슨경이다. 퍼거슨 왈 "확실히 칸토나에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점이 있다. 그는 남의 지시를 받지 않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팀에 가져다 준 최대의 공적은, 완벽을 목표로 한다면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 게다가 맨유가 칸토나를 영입하면서 리즈에 지불한 이적료는 단 100만파운드. 칸토나는 리즈에서 맨유로 이적하면서 7번을 받았다. 당시 7번을 달고 있던 롭슨은 12번으로 번호를 변경했다. 그리고 1997년에 은퇴할 때까지 칸토나는 5년 동안 매력적인 축구를 팬들에게 보여주며 프리미어 리그 무대를 지배했다.
- 칸토나는 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듬해 맨유로 이적했고 곧바로 주전 자리를 꿰찼고, 붉은 유니폼을 입은 첫 해 뛰어난 활약을 펼쳐 보였다. 맨유를 26년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그 이듬해에도 우승컵은 칸토나의 발끝에서 결정됐다. 이로써 그는 두 개의 클럽에서 2년연속 잉글랜드 리그 우승을 차지한 첫 선수가 됐다.
- 화려한 테크닉과 넓은 시야, 분위기를 한순간에 반전시킬 수 있는 절묘한 패스 능력,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 골을 노릴 수 있는 골 본능까지, 플레이메이커 임무뿐만 아니라 팀이 절실히 필요할 때는 직접 골게터 능력마저도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의 월등한 기량은 언제나 가장 돋보였다. 사실 화려한 테크닉을 지닌 선수들 중 대다수가 필요 이상으로 자기 중심적인 플레이를 고수함으로써 팀전체로 보면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경기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뛰어난 머리가 있어, 폭주를 자제하면서 팀전술에 치중했다. 하지만 필요 시에는 한순간에 상대 수비진을 유린하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한마디로 당시 다른 선수들과는 ‘격’이 달랐던 선수였다.
- 승부욕과 근성도 겸비하여 언제나 그랬듯, 그 특유의 카리스마로 상대로 압도하고 동료들을 이끌었다. 그 개성 강한 피터 슈마이켈과 로이 킨 등도 칸토나 그늘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칸토나 은퇴 후에도 올드 트래포드에는 칸토나를 응원하는 팬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로 팬들에게 칸토나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 잉글랜드에서의 성공이 세계적인 지명도와 부를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을 칸토나가 몸소 증명함으로써 지놀라, 베르캄프, 졸라 등 수준급의 용병이 프리미어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고 칸토나는 그런 선수들에게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 칸토나는 은퇴 후, 영화배우로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프랑스 비치 사커 국대대표 주장을 맡아, 파피 비치 사커 월드컵에서 2006년 프랑스 대표팀 감독으로 3위. 피치 사커에서도 7번은 그의 것이었다. 2011년 뉴욕 코스모 축구 단장으로 칸토나가 복귀했었는데, 그 때 폴 스콜스 기념 경기로 올드 트래포드로 와 팬들의 환영을 받으며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2.12. '''데이비드 베컴'''
- 기간: 1997-2003[2]
- 기록: 394경기 85골
- 수상: FIFA 올해의 선수 2위 2회, 발롱도르 2위 1회,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UEFA 클럽 올해의 선수, FWA 공로상 外
- 우승: 프리미어 리그 6회, FA컵 2회, 커뮤니티 쉴드 2회, UEFA 챔피언스리그 1회, 인터컨티넨탈컵 1회
- 잉글랜드 최고의 데드볼 스페셜리스트
- 축구 선수를 넘어 슈퍼 스타로
- 조지 베스트가 축구 선수들을 하나의 연예인으로 만들었다면, 데이비드 베컴은 연예인 중 '끝판왕'이었다. 이후 파파라치들이 베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지만, 사실 베컴은 경기 내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
- 항상 성실하게 연습에 임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을 빛내기 위한 개인기나 득점보다는 동료를 빛내주기 위한 어시스트와 패스에 주력하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팀 전체를 조직적으로 단합시키는데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베컴은 칸토나의 은퇴와 함께 7번을 부여받았다. '오른발의 마법사'인 베컴이 뛰던 당시 맨유는 우승을 휩쓸던 전성기였다. 데이비드 베컴은 조지 베스트 이후 7번 선수들 중 유일한 맨유 유스 출신 선수이기도 하다. 맨유 유스팀의 일원이 되어 팀을 이끌었고, 92년 5월 잉글랜드 FA 유스컵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퍼거슨 감독에게 눈도장을 찍는다. 이후 베컴은 93년 5월이 되어서 맨유 퍼스트 팀으로 승격했다. 하지만 당시 맨유는 매 시즌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었다. 아무리 유스팀에서 날고 기었던 베컴이었다해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있다는 맨유에서 그가 주전을 차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 퍼스트 팀 승격 이후, 경기에 결장하는 것이 잦아졌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그런 베컴을 본 퍼거슨 감독도 베컴의 재능이 썩는 데에 아쉬워했다. 결국 94-95 시즌에 베컴은 당시 리그 2 소속이었던 프레스턴이라는 팀으로 임대되었다. 프레스턴은 베컴을 주전 선수로 출전시켜줬고, 이는 그가 다시금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프레스턴에서의 경험으로 5경기 2골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임대 2달차가 되던 때에 맨유의 갑작스러운 복귀 요청으로 다시 맨유로 복귀했다. 주전 선수들이 모두 부상으로 쓰러진 것이었다.이에 퍼거슨 감독은 급히 프레스턴으로 임대가 있던 베컴을 불러들였고, 급한대로 그를 오른쪽 윙 플레이어로써 출전시킨다.
- 베컴은 어린 나이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킥력을 선보였고, 자신의 이름을 잉글랜드 전역에 각인시켰다. 그는 96/97 시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윔블던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골키퍼 설리반을 농락시키는 그 유명한 60야드짜리 초장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 베컴은 어느덧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잉글랜드의 미래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기대주로 손꼽히게 되었다.
- 특히 97년 2월, 첼시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대포알같은 중거리포는 유럽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의 오른발을 떠나 골문을 향해 무시무시한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볼은 눈깜짝할 사이에 득점으로 연결됐고, 그 시속이 무려 97.9마일(약 157km)로 측정되었다. 이쯤되면 야구에서도 '강속구'가 아닌,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의 직구 스피드에 버금가는 수치라 할만했다.
- 베컴의 활약에 힘입은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 이후, 시즌이 끝나자 몇몇 스타 선수들이 이적해버리고, 퍼거슨 감독은 영입 대신 유스 출신선수들을 기용할 것을 결정,이에 대해 영국 언론과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구단의 유스시스템에 확신에 차 있었다. 베컴 역시 그런 퍼거슨 감독의 신뢰에 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한 이적시장을 보내고, 시즌이 시작되었다. 시즌이 시작되자 베컴을 필두로 맨유는 예상을 뒤엎고 6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기량을 과시했다. 베컴을 비롯한 맨유의 유스팀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자 언론들은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거라고 입을 모았다.
-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매 경기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맨유의 아이들, 이른 바 '퍼거슨의 아이들'은 그렇게 등장했다.
- 맨유에서 계속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어느 때, 칸토나의 갑작스런 은퇴 결정으로 인해 많은 맨유팬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베컴에게 7번을 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고, 베컴 역시 7번 유니폼을 입고 이곳저곳 누비며 그 신뢰에 보답하며 결국 98-99 시즌 맨유 역사상 프리미어리그, FA 컵, 챔피언스리그 모두 우승하는 '트레블' 을 달성하였다.
- 이후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발탁되어 세트피스, 프리킥, 페널티킥 등으로 수많은 골들을 양산하며 잉글랜드 최고의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베컴의 존재는 맨유를 세계적인 인기 클럽으로 만들어줬다.
- 데이비드 베컴의 미들네임 로버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부' 보비 찰튼경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베컴의 아버지가 맨유와 보비 찰튼의 열성팬이었다.
- 베컴은 맨유의 7번으로 너무 유명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7번은 베컴이 클럽에 입단한 이래 네 번째로 부여받은 등번호였다. 그는 데뷔시즌 28번을 입었었고, 그 후 1995/96시즌부터 24번으로 바꾸며 정규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96/1997시즌부터 10번으로 번호가 승격되었는데, 바로 마크 휴즈가 달던 번호였다. 하지만 1년 후 테디 셰링엄이 맨유에 합류하고 에릭 칸토나의 충격적인 은퇴발표가 있은 후, 베컴은 자신의 등번호 10번을 셰링엄에 양보하고, 맨유에서의 나머지 생활을 7번 번호를 계승해 달고 뛰며 맨유의 상징적인 슈퍼스타가 되었다.
▲ 당시 베컴의 인기를 체감해보자.
▲ 칸토나에 이어 광고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맨유 7번, 베컴.
- 선수 은퇴 이후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 신생 구단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선수 시절 연예계까지 미쳤던 높은 인기는 선수 은퇴 이후에도 이어져 축구계 유명인사로 언론에서도 자주 모습을 보인다. 언론에서 베컴은 맨유시절의 추억과 라이언 긱스를 위시한 유스 동기들과의 인연, 그리고 은사 알렉스 퍼거슨에 대한 존경을 자주 이야기하며, 현재의 맨유를 향한 애정어린 격려와 조언을 주고 있다.
2.13.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기간: 2003-2009
- 기록: 292경기 118골
- 수상: 발롱도르 1회, UEFA 올해의 팀 4회, 브라보 어워드 1회, FIFA 올해의 선수상 1회, UEFA 클럽 올해의 선수 1회 外
- 우승: 프리미어 리그 3회, FA컵 1회, 리그컵 2회, 커뮤니티 쉴드 1회, UEFA 챔피언스리그 1회, FIFA 클럽 월드컵 1회
- 베컴 이후 7번 중 현존 최고의 축구계 슈퍼스타
- 국내 해외축구팬들은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선수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7번이다.[3]
- 2002-2003년 스포르팅에서 데뷔한 호날두는 03년 퍼거슨의 러브콜을 받고[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2003년 여름 호날두가 베컴의 등번호 7번을 물려받았을 때, 그는 잉글랜드에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무명에 가까웠다. 팬들은 맨유가 당시 알려지지도 않은 유망주에게 1천2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했다는 사실에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 퍼거슨의 눈에 띄어서 이적의 계기가 된 바로 그 경기
- 퍼거슨 전 감독의 신뢰를 받으며 끊임없이 노력해 7번을 달 자격을 증명했다. 이적 첫 해부터 40경기에 출장한 호날두는 이듬해엔 완벽한 주전 자리를 꿰찼고, 07-08년도엔 49경기에 출장해 42골을 넣었다. 그리고 그 해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 호날두의 맨유 통산 리그 골모음 (프리미어리그 한정)
▲ 호날두의 맨유 통산 모든 골모음
- 이후 역대급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 호날두는 비록 맨유에서처럼 화려한 드리블을 활용하는 크랙으로서의 플레이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오프 더 볼과 득점력을 끌어올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역사상 최고의 7번으로 자리잡았다.
2.14. 마이클 오언
- 기간: 2009-2012
- 기록: 52경기 17골
- 우승: 프리미어 리그 1회, 리그컵 1회, 커뮤니티 쉴드 1회
- 원더보이
- 발롱도르 잉글랜드 수상자라는 상징성을 가진 축구선수
- 잉글랜드의 원더보이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마이클 오언, 맨유의 상징 7번 계보의 일부가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에 간지 불과 1년만에 프리미어리그 뉴캐슬로 복귀었던 원더보이. 4시즌 후 뉴캐슬에서도 방출되고, 기어이 마이클 오언은 스스로 본인을 홍보하는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고, 개인훈련 영상을 유투브에 올리는 등 새로운 팀을 찾게 되었다. 선수 개인적으로는 이적이 절박했던 상황. 그러던 중, 계약 제의가 왔다. 맨유였다. 알렉스 퍼거슨은 같이 점심이나 한끼 먹자며 그를 불렀고, 화려했던 리버풀 시절을 떠올리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자신의 가치를 다시 입증하기 위해 오언은 맨유로 왔고, 팀의 조커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 오언이 과거 그라운드 위에서 그 누구보다도 빨랐던 건 바로 그의 순간 스피드 때문이다. 그의 순간 반응 속도는 경이적인 수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5]
- 공이 수비 뒷공간이나 자신의 앞에 떨어지게 되면 가속력과 유연함으로 순식간에 수비 라인을 돌파해 '원더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맨유에서는 나이도 찬 선수인데다 그 리버풀에서 전성기를 보낸 선수에게 맨유의 가장 상징성 있는 번호인 7번을 주어 반응이 상당히 부정적이었던 편. 게다가 주전도 아닌 로테이션, 조커에 가까운 선수여서 그 이전 호날두가 7번을 달고 종횡무진한 것에 비교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는 백업으로 나름 쏠쏠히 골도 넣어주며 나쁘지 않게 마무리 한 편. 특히나 그 뒤의 7번들이 하나같이 망해서 그나마 오언은 나쁘지는 않았다고 재평가되었다.
2.15. 안토니오 발렌시아
- 기간: 2012-2013[6]
- 기록: 227경기 21골
- 수상: PFA 베스트11 1회
- 우승: 프리미어 리그 2회, 리그컵 1회, 커뮤니티 쉴드 2회
- 에콰도르산 흑표범.
- 토탈 풋볼을 외치는 현 축구계에서는 보기 드문 클래식 윙어의 플레이 스타일이면서 공을 잡은 뒤 측면을 따라서 광속 드리블 이후 수비수를 제치고 날리는 날카로운 크로스 이른바 '툭-툭-탁' 을 창조하는 등 연일 맹활약을 보였다. 11-12시즌 중반에는 맨유에 전념하겠다며 자신의 에이전트를 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있어서 7번의 상징성의 무게를 느끼고, 자신의 그릇이 아니라 판단, 스스로 번호를 반납했던 개념 선수이기도 하다. 화려한 에이스는 아니지만 팀에 필요한 플레이를 하며 자기 몫을 해주며 팀에 높은 기여를 하는 선수다. 그래서 맨유 팬들은 7번을 달고 뛰던 선수들 중에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그 이후의 선수들이...
2.16. 앙헬 디마리아
- 디마리아는 직전 시즌인 2013-14 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챔스 우승을 견인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낸 선수였다. 결국 그 활약으로 2014년 월드베스트에 들었으니 당시 디마리아의 활약과 위상, 그리고 맨유팬들이 가졌을 기대감을 알 수 있다.
- 모예스 시절의 암흑기를 지나 반할 감독의 첫 월드클래스 빅사이닝이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고, 초반에는 엄청난 활약을 하며 월드클래스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으나 거기까지였다. 부상 이후 폼이 급격히 떨어지고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반할 감독이 한곳에 정착시키기보단 다양한 포지션에서 뛰게한 것이 악수가 된데다 본인 주변의 잦은 사건들, 그리고 본인의 부진이 겹쳐 1년만에 파리로 도망치듯 이적하며 결국 실패한 7번이 되었다.
2.17. 멤피스 데파이
- 기간: 2015-2017.1.20
- 기록: 53경기 7골
- 자타공인 맨유 최악의 7번 중 하나.
- 에레디비시 시절 원맨쇼 수준의 활약과 유럽 최고 수준의 프리킥 성공률을 보여 주며 '포스트 호날두'라는 평가와 함께 맨유에 입성했다. 본인도 이러한 기대치를 의식한 것인지 7번을 직접 요구했다. 감독 또한 국대 시절에 함께했던 반할이었기에 실패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장점이었던 킥력마저 온데간데 없고 장점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활약을 보이며 1년 반만에 이적하게 된다.
2.18. 알렉시스 산체스
- 기간: 2017~2019
- 기록: 45경기 5골
- 메없산왕에서 77ㅓ억으로, 역대 맨유 최악의 No.7.
- 미키타리안과의 스왑딜 형식으로 왔기 때문에 이적료는 없으나 사실상 미키타리안을 영입할 때 사용했던 이적료 2630만 파운드가 든 것과 같다.[9] 주급이 무려 5억원인데[10] 그에 걸맞는 활약은커녕 후보 선수 정도의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솔샤르 부임 후에도 여전히 제 혼자 부진하며,[11] 유리몸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서술한 주급 문제가 생각보다 컸는데, 다른 팀원에 비해 꽤나 고액을 수령하며 팀의 주급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게 되었고, 이는 팀에 충성심을 보이며 사랑받던 안데르 에레라가 재계약 시즌 당시 고액 주급을 요구하며 결국에는 팀을 떠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 결국 2019-20 시즌 인터밀란으로 임대이적했다. 전반기는 다소 부진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시즌이 중단되었다가 재개된 이후로는 상당히 준수한 모습을 선보였다. 그런데 유리몸이 돼서 있으나 마나이다. 이후 인테르로 완전이적한다. 주급도 대폭 감소했다고 한다.
2.19. 에딘손 카바니
- 기간: 2020~
- 기록:
- 제 2의 즐라탄이 되는가 제 2의 산체스가 되는가, 맨유 7번의 저주를 이을 것인가 끊을 것인가
- 그렇게 산체스의 인테르 임대 이후 7번은 19/20시즌에는 공석으로 남아있었고, 산체스가 완적이적을 하면서 완전한 공석이 된다. 그리고 20/21시즌에 새로 받은 선수는 파리와 계약 해지 이후 팀을 찾던 카바니. 사실 맨유는 제이든 산초와의 이적설을 저번 시즌부터 마구 뿌리다가 결국 실패했고, 메이슨 그린우드, 다니엘 제임스를 믿고 가게 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임대해온 오디온 이갈로는 겨울에 임대가 끝나기 때문에 맨유는 경력있는 백업 스트라이커를 찾고 있었고, 카바니를 데려온다. 맨유와 밀란에서 경력있는 신입이 뭔지 제대로 보여줬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사례를 기대하고 데려온 듯한데, 팬들은 산초에게 줄 7번을 백업에게 준다고 해서 반응이 영 좋지 못한 상황.[12]
- 그러나, 아직까진 이제 이 저주가 깨지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활약이 준수하다. 아직 시즌 초지만, 마샬에 비하여 오프더볼은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며, 교체 경기와 더불어 선발로 나온 바샥세히르 전에서도 공격 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해도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뒤이어 소튼전에서는 2골 1도움을 기록하여 2-0으로 털리고 있었던 팀을 2-3으로까지 만들어서 역전승의 주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