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 통치
1. 개요
'''武斷統治'''[1]
경술국치 이후 1919년까지 지속된 조선총독부의 식민 정책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 육군 헌병을 경찰로 동원[2] 하여 치안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헌병경찰 통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본 육군 헌병대[3] 는 민생 치안 업무도 경찰과 함께 수행했다.
2. 내용
2.1. 배경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기 시작했고, 이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의 반발 역시 점차 격렬해진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반발하여 을사의병이 일어난 데 이어,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대항하는 의병세력이 다시 한번 전국을 휩쓴다. 정미의병의 경우, 해산된 대한제국의 구 사병들이 신식 무기를 소지하고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전투력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을 보여주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과 같은 대규모 작전을 진행할 정도여서, 일본에게는 상당한 위협감을 안겨준다.
결국 일본은 대한제국을 최종적으로 병합하기에 앞서 한국인들의 저항 심리를 꺾을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것이 바로 남한대토벌작전이었다.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한반도 내 의병 세력은 치명타를 입었으며, 간신히 일본의 추격망을 벗어난 소수의 의병들은 만주나 연해주와 같은 국외로 세력을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대토벌작전의 종결 이후 한시름을 놓게 된 일본은 마침내 1910년 한국을 병합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삼아버린다. 일본의 우려와 달리, 을사년이나 정미년과 같은 전국적인 단위의 격렬한 반발은 없었지만 한국인들 내부에서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엄청나리라는 것은 자명한 상황이었고, 초대 조선총독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다케 장군은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한반도 안에 뿌리 내리기 위해 강압적인 통치를 실행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2.2. 정책
대한제국 말기 있었던 헌병사령부의 육군 헌병대 병력을 '헌병경찰'로 전환하여 전국에 배치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1년인 1911년 12월 말엔 각 도에 헌병대 본부를 하나씩 설치하고 헌병분대, 헌병 분견소, 헌병 파견소, 헌병 출장소에 이르기까지 총 934개의 지점에 이르는 헌병대가 배치되어 조선인들을 통제했다. 헌병이 일반 경찰의 행정 업무까지 전담하였으며, 경찰 기구의 요직 역시 헌병 장교들이 독점했다. 일반 경찰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쪽수부터가 헌병이 더 많았으니[4] 권력이 누구에게 기울어져 있었을지는 안봐도 뻔하다. 이들에게는 치안 확보, 불순 세력 검거, 징세와 같은 광범위한 업무 권한이 주어졌으며, 특히나 즉결처분을 시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악명높았다.[5] 대표적 즉결 처분은 바로 태형으로, 조선인에게만 시행한다고 총독부 부령으로 규정해놓은 대표적인 민족차별정책이었다. 조선인 한정으로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잡아다가 뚜드려 팼으니 여기저기서 반발이 빗발치는건 당연지사. 물론 일개 병에게까지 이런 권한을 주지는 않았고, 헌병 분대장 직책의 하사관이나 장교들에게만 주어졌다. 또한 일본은 이 헌병 경찰 제도를 민족분열책으로도 사용했는데, 바로 조선인들을 헌병 보조원으로 고용했다. 이 조선인 헌병 보조원들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일본인보다도 더 악랄하게 자국민들을 억눌렀으며, 이를 통해 획득한 권세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친일세력의 근간으로 자리잡는다. 이건 식민지 경영해 본 국가라면 어디나 해 본 제도이긴 하다.
- 일본군 주둔
일본은 육해군을 조선 곳곳에 배치하여 무단 통치의 무력으로 사용하였다. 1906년 대한제국 시절 식민지 강점을 위해 육군 2개 사단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1915년 이를 각 육군 제 19사단과 제 20사단으로 편제하여 조선에 상주하도록 하였다. 19사단은 사령부와 휘하 38여단을 함경북도 나남에 배치하고 휘하 37여단은 함흥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20사단은 사령부와 휘하 40여단을 용산에 두고 휘하 39여단을 평양에 두었다. 그리고 예하 병력들을 중대와 소대 단위로 나누어 전국의 주요 도시 및 지역에 거미줄처럼 배치하고 이는 무단 통치의 무력적 기반이 된다. 해군 역시 경성에 해군무관부를 두고, 진해에 요항부를 설치해 중요 시설로 관리했으며, 부산 등 주요 항구도시와 제주도 등에 눌러앉았다.
- 각종 권리 제약
이미 한일합병 이전에 조선통감부를 통해서 발의된 신문지법, 출판법, 보안법등을 통해 조선인들의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죄다 억압했고[6] 이러한 기조는 1910년대 내내 유지된다. 한국문학사에서 1910년대가 휑~ 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맥락과 밀접히 연관된다. 이는 조선인의 기본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으로 조선인을 자국민으로 여기기보단 일본인의 노예로 취급했다는 반증이다. 조선인의 반발이 있으면 바로 군경을 동원해 찍어눌렀다.
1912년부터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7] 으로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면서 조선에서 근대적인 토지 소유 제도가 확립되었다. 토지조사사업 항목에서도 나와있듯이 '일본이 제대로 공시도 안하고 신고마감을 해버려서 억울한 농민들이 땅을 많이 빼앗겼다.'라는 식의 일반적인 인식은 현재 한국 근대사학계에서는 거의 대부분 논파된 상황이다. 민유지에서 총독부 소유로 넘어간 땅은 극히 적었으며 총독부 소유 토지 증가는 대한제국 시절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농토의 규모가 제대로 파악된 데 따른 현상이다. 토지조사사업이 일으킨 가장 큰 문제는 토지의 수탈보다는 소작농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인정되던 소작농들의 권리가 상당부분 부인되고 지주들의 권리만 인정되었기 때문[8] 이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른바 식민지지주제의 확대라는 면에서 많이 설명되고 있다.
- 어업령, 산림령, 회사령
이러한 토지 소유권 이외에도 어업령, 산림령, 회사 허가제(회사령) 등이 내려졌고 이는 민족자본이 육성되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되었다. 웃기게도 일본 중소기업들도 회사령 때문에 조선에 회사를 설립할 수 없어서 꽤나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령이 폐지되는 이유는 바로 일본 중소기업들의 진출 움직임 때문이기도 하였다.
- 우민화 교육
민족교육의 온상이었던 서당과 사립학교들은 총독부에 의해 대다수가 폐지됐으며, 대한제국 정부가 발간한 구한말의 각종 교과서와 민간에서 발행한 역사서 및 위인전은 대부분이 금서로 지정된다. 한국인들의 중등교육에도 인색하여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고등학교 개념)[9] 설립 신청은 총독부에게 퇴짜를 맞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각종 전문학교들도 대부분 일본인들로 채워졌다. 일제 강점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인 칼을 찬 학교 선생님이 바로 이 시기에 볼 수 있었던 모습이다.[10]
3. 제도 자체의 거대한 실책
일본 제국의 식민정책 자체가 거대한 실책을 떠안고 시작하였다는 것의 가장 큰 증거가 무단 통치이다. 일본 제국은 조선을 식민 지배하는 과정에서 시작부터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일본 제국이 저항과 반발을 군대로 누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주 근본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군대는 언제나 공권력이 동원 가능한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로 기능하였으며, 군대로 누르면 적어도 표면적인 반발이 적어지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최소한 수십 년, 최대 수백에서 수천 년까지도 지배해야 할 식민지에서 군대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큰 실책이었다.
군대로 식민지배를 시작할 경우, 적어도 식민지는 문물이나 문화 등에서 본국에게 압도를 당하며 그것을 자각하고 있거나 최소한 자각하는 단계에 서 있어야 한다. 문제는 반대로 이제까지 조선이 거의 2,000년 동안 일본보다 문물, 문화 등을 압도해왔으며, 일본이 조선을 능가한 것은 겨우 십수년이라는 사실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의 힘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망하고 주저앉을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조선은 저 미개한(?) 왜놈들이 감히 조선을 지배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다수였다.
문명국이 (상대적으로 열세인)다른 문명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민족 간 동질성 확보이다. 민족, 종교, 역사, 혹은 하다못해 생활문화라도 퍼뜨려서 최대한 흡사한 국가로 만든 뒤, 그것을 구실로 삼아 삼켜버린 후, 설득되지 않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언론과 각종 활동에 대해 적당히 풀어주면서 서서히 잠식되게 만든 다음, 그때까지 잠식되지 않은 계층이 있다면 그때 무력으로 짓밟는 것이 가장 뒤탈 없는 식민지 경영 방침인 것이다.
일본은 이걸 '''정 반대로 진행했다'''. 일단 식민지로 만들고 나서 그냥 군대와 헌병을 앞세워 마구 찍어 누르다가, 불만이 기어이 눌리다 눌리다 못해 거하게 터지자 그제서야 언론과 활동을 풀어줬으며, 효과적으로 다수의 친일파가 생기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 친일파들마저 조선인들의 배격 대상이 되고 나서야 일본은 민족말살통치를 통해 민족 간 동질성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될 턱이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식민 지배를 어깨너머로만 배운 일본이 거하게 삽질을 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4. 폐지
일본의 강압적인 탄압책은 한국인들의 반발심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19년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한국인들의 분노는 3.1운동으로 크게 표출된다. 이후 신임 조선 총독인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 제독은 방향을 바꾸어서 문화 통치라는 새로운 방향의 통치를 내세우게 된다.
[1] 이걸 無斷, 그러니까 국제법적으로 또는 외교적으로 천부당만부당한 불법 통치를 자행한 시기라서 무단 통치라 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자에 익숙치 않은 청소년들이 특히 그러하다. 하술할 '헌병경찰 통치'라는 이칭은 이러한 혼동을 예방하기 위한 성격도 있다. 정 혼동된다면 '''일제 35년간 뭐 하나 정당한 통치가 있었냐(...)'''는 지적으로 바로잡도록 하자. [2] 물론 일반 경찰도 있기는 했다. 단지 본토 대비 헌병이 일반 경찰보다도 더 많았다.[3] 일본 해군에는 헌병대가 없었다.[4] 무단 통치가 종료되기 직전이었던 1918년 기준으로 일반 경찰이 6,500명, 헌병 경찰이 8,000명 정도였다. 출처 [5] 이걸 즉결처형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디까지나 사법적으로 그 자리에서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이지 내키는 대로 죽일 수 있단 뜻이 아니다. 일본 본토에서도 즉결처형은 사무라이들이 칼 차고 다니던 시절 지 마음에 안들면 농민들을 맘대로 처형하던 식의 전근대적인 미개한 수단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아무리 식민지 강압통치기간이라도 마구 죽이지는 않았다.[6] 그나마 있던 일진회와 같은 친일단체들도 한일합병 이후 총독부에 의해 해산된다..[7] 광무개혁 시기에도 한 번 시도를 하긴 했지만 워낙 나라꼴이 안팎으로 엉망이라 흐지부지됐다.[8]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야 토지가 그저 생산수단 혹은 자유롭게 처분가능한 재산의 한 종류일 뿐이지만, 토지를 삶 그 자체로 여기는 전근대 시절 농민들이 이러한 급격한 인식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하는 일은 근대화를 거쳤던 모든 국가들이 경험하는 유형의 문제이다.[9] 이 때의 '고등학교'는 지금의 중고등학교개념과는 다르다. 일본제국시절 고등학교는 대학교를 가기 위한 예과과정으로, 사실상 준대학생이다.그래서 조선에서의 중등교육기관으로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가 존재했다. 일본 내에서는 구제 중학교와 구제 고등여학교가 중등교육기관을 담당했다.[10] 많은 사람들이 그걸 30년대 이후 민족말살통치 시기의 풍경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민족말살통치 시기의 풍경으로는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는 학생들을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