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영화)
1. 개요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났던 고려의 무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겪게 되는 모험담을 그린 작품으로 중국 올 로케이션 촬영으로 화제가 되었다.
극 중 시대적 배경은 1375년 고려 우왕 치세기로, 한반도에서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중국 대륙에서는 원(元)나라에서 명(明)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이다. 고려는 공민왕 시해사건과 명사신 살해사건으로 인해 명나라와 관계가 악화되자 사신을 보내지만, 관계가 좋아진 후에도 일부 사신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실제로 고려에서 보낸 사신이 명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역사를 토대로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 챔프에서 연재된 강호패도기의 고려 무사 이백과 작중의 호위무사 여솔이 서자면서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여자를 구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한다는 내용이 비슷하여 나름대로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 시놉시스
3. 등장 인물
4. 줄거리
고려의 부사 이지헌(송재호), 그의 호위무사 여솔(정우성), 국왕과 궁성을 호위하는 부대인 용호군의 장수 최정(주진모), 최정의 부관인 가남(박정학), 국경지대를 방위하는 군대인 주진군 일행과 대장 진립(안성기) 등 무사 9명과 그 일행 12명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귀양을 간다.
사신 일행은 귀양가던 길에 감시하는 명의 군사들이 원 제국 기병의 습격으로 모두 죽고 원 제국 기병들이 고려인들에게는 원한이 없다는 이유로 몽골 기병들이 쏜 화살에 운없게 맞아죽은 일행을 제외하고는 모두 목숨을 살려주지만 사막에 고립된다.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최정은 대부분의 고려 사신들의 죽음을 이유로 독단으로 귀향 결정을 내려 객잔(客棧)이라는 곳으로 가까스로 가는데, 고된 여정으로 사신의 마지막 생존자 이지헌이 죽게 된다. 객잔에서 원기병에게 납치당한 명나라의 공주 부용(장쯔이)이 자기를 살려달라는 신호를 하자, 최정은 부용을 구출하여 명나라에 명분을 세우고 고려로 돌아갈 방책을 세운다. 그러나 부용을 구출하기는 하지만 그에 따른 희생이 너무 지나치게 크고[1] 최정의 독단적인 행동이 이어지자 무사들은 불만이 높아가고[2] 또 부용을 사이에 두고 여솔과 최정의 갈등이 심해진다.
참고로 명나라 부용공주는 자기 호위중에 계속해서 고려 무사 여럿과 명나라 주민들이 죽자 황궁안이 갑갑했고 황궁 밖으로만 나가면 모든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는 완전히 바보같고 정신나간 소리만 말해서 이를 보던 많은 시청자들을 기막히고 엄청 분노하게 했다. 아니, 아무리 전쟁을 몰라도 그렇지 전쟁 중에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바보 멍청이가 도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원나라 기병이 쫓는 가운데, 부용이 고려로 가는 배를 주겠다고 하여 간신히 해안 토성에 도착하지만 이미 폐허상태이고, 뒤쫓던 원기병도 토성까지 이른다. 원 기병들은 고려인들이 명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어쩔수 없이 원 제국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며 부용 공주만 내준다면 모두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하지만, 갈등 끝에 최정이 거부해버리자 결국 무사들은 원기병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싸우게 된다.
5. 평가
'''한국 사극 액션에서는 단연 손꼽히는 명작'''이다. 광활한 대륙에서 벌이는 생존의 사투를 뛰어난 액션과 연출로 완성시킨 작품인 것은 훌륭한 점이다. 특히나 영화 무사만큼의 완성도 넘치는 전투 액션을 보여준 한국 사극은 별로 없다. 중국의 창술 액션이 가미된 것은 사실이나 한국의 어설픈 사극액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배우들이 직접 액션을 연기했다는 점도 고평가될 요소. 올리버 스톤 감독은 영화 알렉산더를 제작하면서 배우들에게 무사를 일일히 보게 했을 정도로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고,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금요일은 수다다>에서 견자단이 <영웅>에서 연기한 창술 연기 역시 이 영화의 영향 하에 있다 이야기했을 정도다. 또한 세력이 약화된 몽고와 명나라의 대치 상황, 아랍인들과의 교류 등이 그 당시의 배경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사기스 시로의 음악 또한 일품이다.
캐릭터의 성격이나 오그라드는 몇 장면들, 배우의 연기[3] 나 개연성, 제대로 살리지 못한 오락성 등에 대한 여러 비판점도 있지만, 그러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의 기대치를 만족하는 오락성은 걸출하다는 평을 받았다.
6. 흥행
나름대로 괜찮은 수작이나 시기를 잘못 만나 흥행하지 못하고 참패하였다. 추석 관객을 노리고 일찌감치 2001년 9월초에 개봉하여 관객 반응이 좋았지만, 2주뒤 개봉한 <조폭 마누라>의 예상치 못한 흥행에 극장에서 밀려났다. 거기다 터져버린 9.11 테러로 현실에서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악재가 터진다(...). 관객들도 이런 시기에는 러닝타임도 길고 심각한 분위기의 사극을 보는것 보단 그저 웃고 즐기며 가볍게 볼수 있는 코미디 영화를 선택하는 쪽이었다. 이때 <조폭 마누라>의 성공으로 가족들이 모이는 추석에는 그저 웃기고 쌈박질하는 영화가 최고라는 이상한 공식이 세워져서 이후 몇 년동안 추석 시즌 극장가엔 저질 조폭 코미디물이 범람하는 충무로의 제작자들의 추태를 보여줬다.[4]
그나마 프랑스에서 개봉하여 70만 관객이 관람하면서 프랑스 개봉 한국영화 최대 흥행작이 되기도 했으며 중국에선 줄거리를 그대로 베낀 영화까지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 관객으로 추산했기에 서울 85만 관객에 보통 평균으로 지방까지 3배 정도로 계산했기에 전국 250만 추정으로 넣어 DVD에 전국 250만 관객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본 70만 관객이랑 이 표기는 상관없다. 그러다가,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미국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등을 휩쓴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이 프랑스에서 160만이 넘는 관객을 기록하여 한국영화 프랑스 개봉 최대 흥행작이 되었다.
7. ost
일본의 작곡가 사기스 시로가 작곡을 맡아 극의 몰입감을 높여주는 훌륭한 배경음악을 넣고 있다. 특히 메인 곡인 '가남의 출정(A Fight For Our Motherland)'은 영화 무사가 극을 내리고서도 한 참을 각종 방송프로그램에서 효과음으로 쓰였다. 영화개봉이 오래되고, 흥행작이 아니다보니 온라인 음원은 찾기가 어려운 실정인데 유튜브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다.
8. 기타
그동안 한국 영화 최다 주연 배우를 도맡았던 안성기가 최초로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이기도 하며, 2001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는다. 이때 전 객석에서 기립 박수가 나오기도 했다.
김성수 감독은 자신의 페르소나인 정우성으로 하여금 태양은 없다 후속작이라 절친 이정재를 꼬드겨 무사에도 출연시키려 했다. 사실 주진모 배역은 이정재가 하기로 했는데 이정재가 고사하면서 주진모가 역할을 맡게되었다. 사막에서의 척박한 장기간의 촬영환경이 부담이 됐을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장면들이 통편집 당한 것도 있어 DVD 발매 소식이 나왔을때 팬들은 감독판을 기대했다. 감독 역시 긍정적으로 답했지만 결국 그런거 없다로 끝나고 말았다.. 대신 비디오와 DVD판 끝부분에 수십분 분량의 다큐형식의 제작일지가 들어갔다. 비록 짧긴 하지만 배우와 제작진 모두가 엄청 고생해가며 찍었다걸 보여준다.
특수효과에 제법 힘써서 적을 싹둑 벨때 목이며 팔이 마구마구 잘려나간다. 80년대, 아니 90년대 초반만 해도 그냥 마네킹을 대충 내던지는 거랑 달리 정교하게 만든 가짜 인형에서 피가 솟구치게 촬영했고 이후 태극기 휘날리며나 살인의 추억에서도 이러한 정교한 인형 기술이 더 발전되어 나온다. 참고로 살인의 추억에서 이걸 담당한 이가 말하길 이런 인형 1개 만드는데만 1천만원 정도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걸 만든 김성수 감독은 이후 <영어완전정복>을 만든 후 10년 가까이 영화판에서 자취를 감추다가 2013년 재난 영화 <감기>를 감독, 그리 좋지 않은 평과는 별개로 전국 311만 관객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해 재기했다. 2016년 다시 정우성과 의기투합하여 하드보일드 느와르 <아수라>를 감독했다.
고려는 여자들도 말을 탄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원나라 병사 중에 고려 말을 할 줄 아는 병사가 있는 것도 재현하는 등,[5] 여러 가지 의미로 당대의 고정 관념을 타파한 고증을 보여준 영화기도 하다.
중국 사막 촬영당시, 김성수 감독이 모래바람이 부는 장면에서 촬영을 강행해서 중국인 스태프들은 감독이 더 지독하다고 경악했다고 한다. 그밖에 한국 스태프들이나 배우들은 차가운 음료수를 요구했는데 사막 촬영에서 줄곧 찬 음료를 내주던 것이 무리라서 관계자들이 고생했다. 오로지 안성기만은 그냥 미지근한 물에 차를 타서 마시며 찬 물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배우나 음악 면에서 합작성이 강해 제대로 각국의 관객에게 제대로 어필되지 못한 탓에, 2000년대 초반의 저주받은 걸작이란 평을 듣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
[1] 특히 원의 기병들과 대적하기에 수와 전투력에서 모두 열세였다.[2] 진립도 최정이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다.[3] 당시 주진모의 대사전달이나 표정 연기를 두고 대학 연기 강좌에서 교수가 "저렇게 하면 안된다"며 자료 화면으로 썼을 정도.[4] 대표적인 영화로 가문의 영광이 있다. 카더라에 의하면 그때 제작진들과 국내 영화평론가들의 사이가 매우 안좋아서 일부러 혹평을 쓰거나 안 띄워줬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확실히 당시 영화 잡지의 평점이라던가 리뷰를 보면 대부분이 '고생해서 찍었네 ㅉㅉ', '너무 힘준거 아님?' 등등 , 영화의 완성도 보단 겉부분 평가 일색이긴 했다.[5] 영화 후반부에 원나라군이 농성하는 고려 무사들에게 투항 권고를 하는데 자기네 병사들 중에서 고려 말을 하는 병사를 불러서 고려 말로 성 너머로 외치면서 투항 권고를 한다. 거기다가 원나라 기병의 대장은 고려가 명나라와 원나라 사이에 끼어서 곤란한 입장에 처해있다는걸 충분히 이해한다고 까지 말하며 명나라 공주만 넘기면 아예 배를 타는곳까지 호위해준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실제로도 명나라 공주만 넘겨주면 고려인들은 굳이 죽이지 않고 원만하게 끝내려고 하는 대인배 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서 어느 시청자들은 이럴땐 차라리 너그럽게 나오는 원나라 기병들과 협상하는게 훨씬 낫겠다고 말할 정도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