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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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宮崎 吾朗.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아들로 [1] 1967년 1월 21일생.
본래 직업은 공원이나 녹지를 설계하는 건설 컨설턴트였으며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에도 2019년 부터 아이치현에 건설중인 지브리 파크 제작에도 참여했다. #
아버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에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면서 자랐다. 한 때는 애니메이터를 꿈꾸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말려서 [2] 그 꿈은 포기했다.
어린 시절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기획 견학에 자주 따라간 적이 있어서 오시이 마모루와도 안면이 있었다. 고로는 이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보다는 오시이 감독의 작품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도 오시이 마모루 감독과는 친분이 깊다.
2. 행적
1998년에 지브리 미술관의 종합 디자인을 맡았고, 스즈키 토시오가 그를 지브리 미술관에서 일하도록 설득했기 때문에 2001년에 완성된 지브리 미술관의 관장으로 일했다. 스즈키 토시오의 말에 의하면, 지브리 미술관의 건축을 미야자키 고로가 맡게 된 이유도 지브리 미술관의 구상과 디자인을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했는데, 워낙 까다롭고 완고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격 때문에 다른 건축업자들은 학을 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꼬리를 말고 도망쳤는데, 미야자키 고로만은 "뉘예~ 뉘예~" 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훌륭하게(...)지브리 미술관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라고.
이 때의 긍정적인 인상이 계기가 되어 후일 스즈키 토시오는 게드전기의 감독직을 고로에게 맡기는 실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미야자키 고로의 감독으로서 경력이 형편없어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는 고로에게 야마시타 아키히코를 스승으로 붙여주게 되고 이 작품은 고로가 이상하게 만드는 걸 야마시타 마사히코가 수정하는 방향으로 제작된다. 물론 흥행과 평가는 모두 망했고 작화만 좋은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3]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전작 게드전기에 비해 훨씬 발전했다는 평을 듣지만 역시 감독직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여전히 아버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정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인 듯. 어린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가 항상 바쁜 탓에 집에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잡지 아니메쥬와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아버지와의 유일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고 한다.
스즈키 토시오가 말하는 비화 중의 하나로, 지브리 미술관 건설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초안을 잡은 미술관이라 이래저래 참견을 하고 사사건건 고로와 충돌했는데, 어느 날은 서로 팩스로 문서를 주고 받으면서 싸우다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내 말대로 하라'는 식으로 팩스를 보내니, 고로가 '''オレはあんたに育てられたおぼえはない!''' (직역하자면 "나는 당신한테 키워진 기억은 없어!", 조금 의역하자면 '''아빠가 나한테 뭘해줬다고!''' 정도가 되겠다) 라고 팩스로 답변을 보내왔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길길이 화를 냈고, 옆에서 지켜보던 스즈키 토시오는 그 장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2.1. 게드전기
2005년, 스즈키 토시오는 지브리의 신작 예정작인 게드전기의 선전용 포스터를 한 장 그려보라고 미야자키 고로에게 부탁한다. 그러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옆 모습을 좋아하고 두 물체 중 한 쪽에서 바라보는 구도를 선호한다는 거짓말을 하며 옆 모습에 중립적인 시각을 넣어 달라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큰 물체와 작은 물체가 같이 정면을 보고 서 있는 구도를 좋아한다. 이때부터 스즈키는 미야자키 고로에게 게드 전기의 감독을 맡길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이 포스터는 영상화 허가를 구하기 위해 토시오와 하야오가 원작자인 어슐러 르 귄과 찾아가 만났을 때, 하야오는 자신이 그린 이미지 보드를 꺼내들면서 원작자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과 고로가 그린 그림을 비교하며, 자신이 훨씬 원작을 이해하고 있다면서 "이 그림이 맞죠?"라고 원작자에게 물어봤다. 옆에 있던 스즈키는 진심으로 하야오를 주먹을 때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고 심정을 고백 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고로는 마침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고, 게드 전기의 계획안에 끌려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에도 뒷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수십 년 전부터 이 작품을 영상화하기를 원했지만, 원작자 어슐러 K. 르 귄이 애니메이션은 디즈니 수준의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것을 몇 번이고 거부한 탓에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후일 자신의 작품의 일본어판 번역자의 소개로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감동을 받은 뒤에야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자신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좋다는 뜻을 전하게 된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미 어스시 연대기의 영상화에 흥미를 잃었고,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다른 작품에서 다 써 먹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새삼스레 이 소설을 만들 수가 없다며 감독직을 맡기를 거부했다. 이에 스즈키 토시오가 '하야오가 거절했어도 스튜디오 지브리가 거절한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다른 감독을 내세워 작품의 영상화를 추진하게 되었으며, 그 때 머리속에 떠오른 인물이 바로 미야자키 고로였다. 스즈키 토시오의 말에 의하면, "미술관도 훌륭히 완성해냈으니, 영화도 그럴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붉은 돼지에서 17살로 경험이 적은 피오가, 자신이 비행기 설계를 하는 것을 주저하는 붉은 돼지 포르코에게 "비행기 설계를 하는데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까? 영감(靈感)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포르코는 영감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고로가 경험이 없다고 고로가 감독을 맡는 것을 맹반대하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은 영화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고로가 그린 포스터 그림을 보여주면서 스즈키 토시오는 그가 이 작품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하였지만, 지금까지 특별히 애니메이션 제작에 종사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금치 못했고 햐아오 또한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하야오는 고로가 영화를 감독할 수 있을 만큼 경험을 쌓지 못했으며, 영화의 발달사 전체에 걸쳐서 등장하는 용어를 단 두 개도 말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고로는 영화 감독을 맡게 되었다. 지브리의 직원들은 처음에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한 적도 없는 미야자키 고로가 감독을 맡는 것에 단지 하야오의 아들이라는 연줄이라는 이유로 감독이 된 것에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행히 고로는 리더쉽을 발휘해서 반발하는 직원들을 잘 꾸려서 작품을 완성했다고 스즈키 지브리는 대외적으로 해명했지만, 실제로는 어땠는지, 당시 지브리의 속사정은 알 수 없다.
게드 전기는 일본에서 흥행은 대박이었지만(관객 6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4] '''평은 심각하게 좋지 않았으며 일본을 뺀 전세계 흥행은 참혹했다.'''
비록 극장에서 흥행에 실패해서 적자가 나도, 나우시카, 토토로, 라퓨타는 2차 시장(비디오, DVD, 관련 서적, 캐릭터 상품 등)으로 손해를 만회하고 흑자로 전환했는데, 스즈키 토시오는 게드 전기 2차 시창 상품 전개를 할 때는 이번 영화는 안 팔릴 거라고 주저하는 관련 회사 간부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리고 역시나 2차 상품은 안 팔렸다.
원작자인 어슐러 K. 르 귄은 애니메이션 <게드전기>에 대해서 "Yes, It`s good movie. Not my book. It is your movie(좋은 영화네요. 이건 제 책이 아니라 당신의 영화지요)."라는 평을 남겼다. 인터뷰에 의하면 미야자키 고로는 그 당시에 이걸 칭찬으로 알아들었던 모양이지만, 원작자인 어슐러는 웹사이트에서 이 영화를 강력하게 비판하기까지 하였으며 소설과 영화를 아예 별개로 만든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로 던진 말이었던 듯하다. 즉, 스토리 각색이 문제가 아니라, 어스시의 마법사의 주제의식까지 망가뜨린 원작파괴 작품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5]
한술 더 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시사회를 보던 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단순히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후 하야오 감독의 말을 봐선 주인공인 아렌 왕자가 아버지인 국왕을 죽였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보고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떠올렸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결국 흥행과 별개로, 2006년 말 게드 전기는 일본의 분슌 아유 시상식에서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영화상''' 2관왕의 영광을 받는 기회를 얻었다.
2.2. 코쿠리코 언덕에서
그 후 버로우 상태였다가 5년만에 신작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내놓았다. 이 애니메이션으로 35회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전작인 게드전기보단 상당히 나아졌다. 마찬가지로 전작과 더불어 일본을 뺀 흥행은 여전히 참혹했다. 그러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원작부터가 1960년대 일본 학생 운동을 다루는 매우 내수 성향이 강한 작품이라 해외 흥행은 그냥 포기했다고 보는게 좋다. 그래도 데뷔작인 게드전기의 처참한 평가[6] 를 받았던것에 비해 코쿠리코의 언덕에서의 평론가 평가나 유저 평가도 호평을 받았다.[7]
게드전기와 달리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끝까지 영화를 보고 심지어 영화 중간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포착되기도 했다. 정작 영화가 끝난 다음에는 엉망이라며 대차게 까버리고 미야자키 고로를 보고 "미숙한 녀석" 이라는 평가를 내리긴 했지만...[8] 지브리의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는 이걸 보고 아버지를 울렸으니 결국 미야자키 고로가 이긴거라고 평하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 제작 당시를 다룬 다큐멘터리 꿈과 광기의 왕국에서 '''"자신은 실수로 이 업계에 들어온거라고 생각한다"''' 라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내 작품을 영상으로 만들고 싶다", "애니메이션을 그리고 싶다" 같은 명분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기에 자신의 역량과 능력에 대한 의문과 경력이 없다는 문제 등으로 인해 어떠한 명분으로 대의를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작품을 만든다는 즐거움이란 마음은 존재하지만 그보단 '''"지브리를 위해서"'''란 생각이 더 강했다고. 그렇게 돼서 "지브리와 지브리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는게 대의명분이 되어버렸고, 영화를 만든다는거 자체가 자신을 위한다는 생각에는 의구심이 있다고 한다.
2.3. 2D에서 3D로, 산적의 딸 로냐와 아야와 마녀
한동안 잠잠했다가 2014년 가을 TVA 산적의 딸 로냐를 공개했다.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제작하는게 아닌 폴리곤 픽쳐스에서 제작되었다. 벼랑 위의 포뇨의 작화 감독이였던 곤도 가쓰야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는 등 지브리와 아예 관계가 없진 않다.
코쿠리코 언덕에서 이후로 아무런 활동도 없던 미야자키 고로를 보고 당시 도완고(현재 카도카와와 합병}의 대표인 가와카미 노부오가 "지브리에 있으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향에서 못벗어나니 무사수행이라고 생각해라" , "어차피 나와서 만들꺼 3D 기술로 만들어버려라" 라고 권유했다고 하며. 처음에는 고로는 바보같다고 생각했으나 어차피 젊은 시절부터 애니메이터로 일한것도 아닌데 새로운 기술을 외면한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산적의 딸 로냐의 제작에선 CG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 보였으나, 큰 방향을 끌지 못하고 묻혔다. 그래도 에미상의 키즈 어워드, 아시아 텔레비전 어워드의 2D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산적의 딸 로냐 이후에는 직접적인 작품 활동에 대한 소식은 없었는데 서유기: 대성귀래(몽키 킹: 영웅의 귀환)의 티엔 샤오펭 감독과 3D 애니메이션에 대한 대담을 하거나 직접 일본어 더빙 감수를 맡기도 했다.
2020년 칸 영화제에서 아야와 마녀라는 신작을 공개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코로나19로 영화제는 취소되었지만 NHK에서 겨울 방영 예정이라고 하며 2020년 6월 4일 아야와 마녀(애니메이션)이 공식으로 공개되었다. 3D 기술로 셀 효과를 표현한 산적의 딸 로냐와 달리 본격적인 3D 표현을 사용하여 기존 지브리 그림체의 느낌이 많이 희석되어 보이는게 특징.
3. 기타
위에서 언급된 것과, 여러 인터뷰들을 보면 사실상 애니메이션 업계와는 연관이 없다가 스즈키 토시오의 입김 [9] 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남이라는 덕에 푸쉬를 받으며 지브리의 장편을 맡을 수 있던 것이다, 이건 굉장한 특권이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감독이나 연출의 지위에 올라가려면 제작진행이나 동화 애니메이터 같은 말단부터 시작해서 근 10년을 열정페이로 일해야나 할 수 있는 건데 그걸 아버지 이름빨로 단 1번에 해버린 것이니 비판이 만만치 않다. 키타쿠보 히로유키는 이 점을 대놓고 비판했으며 미야자키 고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경험도 재능도 없었기 때문에 평가는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이라는 타이틀과 "지브리와 지브리의 사람들을 위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감독직을 계속 했고, 두번째 작품임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확실히 나아진 평가지만, 역시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미야자키가 야마시타 아키히코, 콘도 카츠야같은 이름난 스승을 붙여주고 있고 본인도 노력파이긴 해서 일단 기본은 한다. 2010년대 한심한 신인 연출자가 늘어나는 것과 비교하면 분명 중상급 이상은 하는 연출자이다. 다만 아들빨 푸쉬를 받은 이상 반드시 성공시켰어야 할 첫단추인 게드전기가 너무 거하게 망해버렸고 아버지가 미야자키 하야오기도 하다 보니 대중에게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웃집 토토로를 제작하기 직전에는 지브리 애니메이션보다 오시이 마모루가 총괄하던 애니메이션 <시끌별 녀석들>을 훨씬 좋아했었다고 한다. 집에 DVD를 쌓아놓고, 2번째 극장판 '뷰티풀 드리머'는 몇 십번을 돌려보며 환상과 환영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18살 생일에는 주변 친구들과 <시끌별 녀석들>의 행사에 참여도 했던 모양이다. 또한 도라에몽의 팬으로 고로가 도라에몽을 좋아해서 미야자키도 고로가 산 만화책을 전부 읽었다고 한다. 이거 말고도 아버지 때문에 덕밍아웃을 꽤 많이 당했다.
[1] 장남으로, 동생은 판화가로 일하고 있다.[2] 어머니도 애니메이터였다. 하야오가 강권해서 은퇴했는데 본인은 후회했다고 한다.[3] 다만 야마시타도 콘티 경력은 있어도 연출 경력은 별로 없는 애니메이터라, 결국 간신히 지브리 평균 퀄리티를 내놓는데 그쳤다. 심지어 문외한과 일반인조차, '''다른 지브리 애니보다 애니메이팅이 떨어진다'''라는 혹평을 내놓았으니...[4] 하지만 흥행이 좋은 것은 이전부터 제작사인 스튜디오 지브리와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의 유명세로 흥행을 했지 관객들의 평이 좋지 않았다.[5] 대표적으로, 주인공 게드의 피부색을 밝은 색으로 표현해버린 '''폭거'''를 들 수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 흰색은 순수함, 순결함,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검은 색은 음흉함이나 사악함, 추함의 이미지와 연결되며(당장 한국에서도 '속이 검다' 라는 표현이라거나, '백설처럼 깨끗한' 과 같은 표현이 있음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색에 대한 선입견은 인종차별 문제등과 연관되어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특히, 르 귄이 속한 백인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그리고 원작자 르 귄은 어스시 시리즈 내에서 이런 색에 대한 선입견을 뒤틀어 무색인종을 난폭한 약탈자 야만족으로, 유색인종을 문화적 수준이 높은 민족으로 묘사하는 일종의 '관념의 역전'을 통해 작품의 주제의식을 드러냈던 것(이처럼 기존에 사람들이 가졌던 관념을 역전시켜서 묘사함으로써 이제까지 독자들이 당연시하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르 귄이 매우 선호하는 표현수법이다). 그런데 고로는 이런 작품의 주제의식을 무시하고 그냥 게드의 피부색을 '''살색으로''' 칠해버렸다(...). 즉, 시각 매체를 통해 문자매체인 원작의 주제의식을 보다 확고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감독 스스로 짓밟아 버렸다는 것.[6] 메타크리틱, 로튼토마토 같은 평론 사이트에서 게드전기는 평론가와 유저 점수 모두 40점대의 평가를 받았다.[7] 메타크리틱 71점, 로튼토마토 85점으로 유저 평가도 이와 유사하다.[8] 또 마냥 까기만 한 건 아니고 "서투르지만 이런 시기에 이 영화를 개봉한건 행운이였다고 본다", "이런 시기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게 느껴졌다" 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9]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 고로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과연 어떻게 될지는 더 지켜봐야 되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