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나폴리 전쟁

 


'''나폴리 전쟁'''
'''시기'''
서기 1435년 5월 ~ 1436년 9월
'''장소'''
이탈리아, '''나폴리''', '''로마'''
'''교전국'''
[image] '''동로마 제국'''
[image] 구호기사단
[image] 신성 로마 제국
[image] 헝가리 왕국
[image] 교황령
[image] 베네치아 공화국
[image] 밀라노 공국
[image] '''아라곤 왕국'''
[image] 나폴리 왕국
[image] 제노바 공화국
'''지휘관'''
[image]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
[image] 안토니오 플루비안 데 리비에레[1]
[image] 후녀디 야노시
[image] 에우제니오 4세
[image]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image] 르네 드 앙주
[image] '''알폰소 5세'''
'''병력'''
6,000명
11,000명
'''피해'''
사상자: 4,000명
사상자: 2,400명
'''결과'''
아라곤 왕국의 패배, 드라가시스 황제의 파문 철회.
'''영향'''
교황청의 입지 강화와 '''동서교회 통합'''
아라곤 왕국의 영토 확장 제한과 나폴리 왕국에 대한 영향력 소멸
1. 개요
2. 들어가기에 앞서
3. 로마 순방
4. 나폴리 계승 전쟁
5. 로마 전투
6. 교회 통합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의 이탈리아 전역에서 벌어진 아라곤파vs반아라곤파 연합 간의 나폴리 전쟁에 대해 다루는 문서. 대략적으로 에우제니오 4세의 즉위 직후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나폴리에 대한 야욕을 다시 드러내는 1435년 5월 이후부터 1436년 9월까지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2. 들어가기에 앞서


작중, 즉 르네상스 태동기인 15세기의 이탈리아는 이슬람 세력의 재흥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의 처참한 실패, 고중세와 흑사병 유행을 잘 넘긴 세속국가들의 급성장 등의 이유로 교황권이 크게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유럽, 특히 북이탈리아에 대한 교황령의 영향력이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도시국가들은 밀라노,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과 같은 비교적 체급이 큰 이탈리아 내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이는 외세인 프랑스와 아라곤의 내정간섭을 막기 위해 1454년 맺어진 로디 조약으로 40년 정도의 소강기를 거친 후 대이탈리아 전쟁으로 폭발한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위에서 언급한 '뭉치기'의 주요 축에 대해 짚고 넘어가보자 한다.
1. 밀라노 공국+사보이 공국+만토바 백국 vs 베네치아 공화국+피렌체 공화국+교황령+스포르차 가문 = 네 차례에 걸친 '롬바르디아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대립구도로, 밀라노 공국의 비스콘티 가문이 멸문하고 암브로시아 공화국이 잠깐 수립되었다가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명장이었던 프란치스코 스포르차가 피렌체 및 베네치아에 우호적인 신정부를 수립하고 로디 조약을 체결하면서 끝났다. 작중에선 제3차 롬바르디아 전쟁이 좀더 질질 끌리다가 주인공의 개입으로 끝난다.
2. 아라곤 왕국 vs 교황령+밀라노 공국+카스티야 왕국+프로방스 백국+제노바 공화국+기타 여러 이탈리아 소국들 = 나폴리의 앙주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자 상속권을 부여받은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개입을 시도하고, 원래부터 확장지향 성격이라 수 년만에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등을 휩쓴 알폰소가 나폴리까지 집어먹을 경우 이탈리아 전체가 아라곤한테 먹힐 것이라고 판단한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지시 하에 대아라곤 코올리션이 맺어졌던 나폴리 계승전쟁을 의미한다. 실제 역사에선 1442년 알폰소가 근성으로 나폴리 전체의 정복에 성공하면서 끝이 났고,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는 외세,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의 개입에 많이 취약해졌다.
3. 제노바 공화국 vs 베네치아 공화국 = 전통적인 베네치아-제노바 간의 대립관계에서 기인했고, 작중에서도 허구한 날 나오는 전선이다. 전쟁 자체는 1381년의 키오자 전투에서 제노바가 털리면서 외교전 중심으로 전환했고, 제노바의 보호자였지만 동시에 스포르차 이후 친베네치아 성향으로 돌아선 밀라노, 친베네치아 성향이었지만 롬바르디아 전쟁 과정에서 사보이한테 먹힌 몬페라토, 친베네치아 성향이지만 작중 시점인 1430년대부터 베네치아를 크게 위협하는 금융세력으로 성장하는 피렌체 등이 균형추 역할을 했다.
현재 작중에서 드러나는 대립관계는 2번의 대아라곤 코올리션과 3번의 제노바vs베네치아 구도가 섞여서 만들어진 것이고, 1번의 롬바르디아 전쟁의 구도 또한 주인공의 개입으로 로마냐를 밀라노가 얻으면서 어떻게든 봉합하기는 했지만 아직 감정의 골이 남은 도시국가들이 로마냐 반환을 요구하는 등 종종 부각된다. 따라서, 이런 복잡한 외교관계를 유념해두고 밑의 스토리 전개를 읽길 바란다.

3. 로마 순방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허무하게 마무리된 뒤 그간 지연되던 로마 순방 준비 소식을 베네치아 주재상인에게 전하려던 전령들이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용히 할리드와 무르타티들을 보내 역매복을 성공시킨다. 이 과정에서 암살단의 배후가 오스만도 아닌 제노바이며 황제는 (이미 짐작하긴 했지만) 그들이 베네치아의 빈 자리를 장악해 제국이 제노바 원로원에게 의존하도록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며칠 후 소식을 겨우 접한 베네치아 측이 테살로니카에서 준비한 상선으로 로마로 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제노바의 주재상인이 찾아와 온갖 미사여구들을 갖다붙여 은유적인 경고를 보내고[2] 이 경고를 뒤로 한 채 드라가시스 황제는 수행원 20명을 태우고 마침내 여정을 시작, 아테네에 들러 구호기사단 소속 기사들과 합류하고 두번째 경유지인 안코나로 떠난다.
다행히 처음 우려했던 습격도 없이 무사히 도착한 안코나에서 직접 알리폰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급보를 접한 베네치아 상선 선장이 허겁지겁 황제에게 달려오나 이미 황제는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다. 황제는 현 시점에서 왕위 계승 정당성에 심각한 결점이 있고, 이런 약점을 메꾸어 줄 교황의 지지가 절실한 까닭에 행동을 서둘러야만 하는 알리폰소의 상황을 이용해보자는 복안을 구상하며 마침내 최초의 도시 로마로 입성한다.
로마로 입성하면서 만난 제국 출신 난민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결전을 준비해야 하기에 각오를 다지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온 주인공은 에우제니오 4세가 가브리엘레 추기경이었다는 것에 놀란다. 그것도 잠시, 밀라노가 병력을 일부 돌렸다는 소식에 어려워진 교황청의 처지를 두고 많이 난감해 하는 교황의 고민을 황제는 아주 손쉽게 해결해낸다. 황제는 에우제니오 4세에게 로마냐를 포기하는 대신 밀라노를 얻는다면 응하겠냐는 질문을 하고 베네치아의 태도를 우려하는 교황에게 베네치아도 응할 것이라며 북이탈리아의 혼란의 종식과 밀라노를 안겨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곧 현실이 되어 나폴리 문제만큼 큰 사안이었던 북이탈리아의 혼란이 한 순간에 종식된다.
난처한 상황이 손쉽게 풀리자 내심 황제를 지지하고 있던 에우제니오 4세는 더 적극적으로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황제의 능력을 의심하던 추기경단도 다들 감탄하면서 아라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추기경단 역시 교황과 황제가 나폴리의 왕으로 추천한 앙주 가문의 "르네 드 앙주"를 별 불만 없이 받아들인다. 이 소식을 들은 알리폰소는 크게 분노하고, 어리석은 싸움을 걸어온 제국에게 기꺼이 응해주겠다며 칼을 꺼내들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손을 잡고 군사를 모음과 동시에 제노바의 지원을 받고 마침 제노바 부근에 지나가던 르네 공을 납치한다.[3][4] 당연히 이런 군사 행동은 알리폰소를 계도[5]해야 한다는 명분을 주게 되었고, 거기다 절묘한 타이밍에 헝가리에서 후녀디 야노시도 찾아와 황제와 만나면서 이 둘은 오스만 축출 이후 발칸 국경선에 대한 간단한 협의[6]를 한 뒤, 교황청의 재정 지원을 토대로 로마에 있던 제국 출신 난민과 스위스 용병으로 추정되는 혼성 용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징벌군을 결성하고 아라곤에 대한 군사 행동을 시작한다. 교황이 황제에게 내린 어마어마한 직함[7]은 덤.


4. 나폴리 계승 전쟁


이후 교황청이 최대한으로 모아둔 의용군은 고작 4천여명으로 이미 8천명까지 증강된 아라곤보다 열세인데다 이상할 정도로 질조차도 밀리는 상황.[8] 이 때문에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 판단한 황제는 후녀디에게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행보를 감시하고 이상 행동시 바로 경고해달라고 부탁해 후방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는 의용군 병사들에게 기초 훈련이라도 시키기 위한 시간 벌이 용으로 자신에 대한 파문 철회 연기와 함께 나폴리 왕국의 정당성에 대한 재판를 해보자는 명목으로 한달 뒤 성 베드로 성당 앞에서 열릴 임시 법정에 알리폰소의 출석을 요구한다.
이 재판이 함정이라고 생각한 알리폰소가 당연히 거부하자, 원래부터 안 올거라고 생각하던 추기경들은 황제를 힐난했지만 황제는 그 자리를 자신의 연설장으로 만들버림과 동시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의용군을 로마 시민들 뒤에서 진군시킨다. 의용군이 재판을 위해 모여 있던 교황과 추기경들의 축복을 받으며 출정함으로써 황제는 이 전쟁의 모든 정당성과 명분[9], 그리고 범국가적인 지지 여론을 획득할 수 있었고, 이 모든 휘광을 등에 업은 채 멋지게 베네벤토 지방으로 출진한다.
한편 자신이 완벽히 함정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알리폰소는 딥빡하면서 수도 나폴리시칠리아 섬과 붙어있는 칼라브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존버를 타며 나폴리 왕국 내에 있는 공작들을 일일이 설득한 끝에 겨우 1만을 넘겨 1만 1천명으로 군세를 불리고 여기 저기에 보급 기지를 구축하면서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 와중에 안코나를 거쳐 베네벤토 국경지대 부근에 주둔지를 차린 황제는 용병이 다수인 의용군의 군제를 모레아 식으로 개편하고, 이탈리아 출신 용병대장들을 참모로 활용하며[10] 오합지졸이라는 말이 어울리던 의용군을 어엿한 강군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와 함께 황제는 나폴리에서 존버중인 알리폰소를 강제로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교회 통합을 논의할 공의회가 곧 로마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흘려 알리폰소가 이를 저지하고자 로마로 진군하도록 유도했고, 계략대로 알리폰소가 나폴리에서 뛰쳐나오자 황제가 지휘하는 별동대가 무주공산이 된 아라곤의 보급 기지와 도시로 급속행군한다. 현지 귀족들에게 이미 자신의 파문이 철회되었다는 사실과 알리폰소가 로마에서 패배했다는 블러프를 엮어 항복을 이끌어낸 후 제대로 멘붕한 나폴리인들에게 황제는 알리폰소는 결코 그들의 진정한 국왕이 될 수 없음을 웅변하고, 이에 고무된 나폴리 사람들은 일제히 아라곤과 시칠리아인들에게서 등을 돌려 정당한 국왕이 돌아올 때까지 적법한 섭정으로서의 황제를 따를 것을 맹세한다. 그와 함께 아라곤의 보급기지가 압류당하면서 아라곤의 보급선이 완전히 차단됐고, 황제의 병력도 6천명까지 불어나자 황제는 이 군세로 로마를 위협하고 있는 알리폰소와의 정면 대결을 준비한다.

5. 로마 전투


이미 로마 교외에 병력을 전개한 아라곤군은 로마의 상징적 의미 때문인지, 약탈과 무리한 로마 공성을 일제 금하고 그냥 로마가 보이는 곳에 주저앉아서 우호적인 식량 보급만 받으며 성벽 안에 있는 시민들과 추기경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미 로마로 입성한 동방정교회 측 주교단과 드디어 시작한 공의회에서도 제국 측이 제시한 조건에 아라곤을 지지하는 추기경들이 일제히 반발하면서 계속 지연된다. 결국 로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도대체 황제는 어디서 뭘 하냐고 욕하는 찰나 드디어 황제의 군세가 언덕 저편에서 나타나 아라곤 군과 마침내 맞붙는다.
알리폰소는 황제가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정면으로 도전해오자 대단하면서도 동시에 가소롭다고 생각한다. 황제군이 후스 전쟁에서 써먹었던 전투수레를 모루로 쓰려하자 아라곤군은 특유의 투창 운용으로 최대한의 병력 손실을 입힌다. 전투수레를 끄던 와중에 절명하는 병사들이 속출하고, 전투수레가 아직 전개되지 않았는데도 아라곤의 경보병이 임박해오는 첫번째 위기에 다다르자 황제는 갑자기 전투수레를 부수고 통나무와 바퀴를 언덕 아래의 아라곤군에게 굴려버리는 임기응변을 발휘했고, 그 통나무를 피하느라 아라곤군이 잠시 주춤한 사이 황제군은 잔해 뒤로 방어준비를 갖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의 황제군은 강군 모레아군과 달리 병사들의 사기가 낮아 두려움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고, 이를 포착한 아라곤의 일선 지휘관들이 일제히 돌격을 명령함으로써 백병전이 시작된다. 전열 격돌 직전 아라곤의 일제 투창으로 방패병을 초전에 대량 상실한 황제군의 대열 일부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황제는 두번째 위기에 직면한다. 여기선 아라곤 군이 돌파구에만 집중된 전열을 미묘하게 바꾸는 한편, 황제가 이끄는 본진과 예비대를 아라곤이 형성한 돌파구 코앞까지 진출시킴으로써 주저앉던 사기를 다시 복구하는 데 성공한다. 우회하는 아라곤의 기병대도 최대한 발을 묶기 위해 궁수들이 있는 곳으로 유인한 뒤, 랜스 등으로 더 중무장한 나폴리 기병이 돌격해 백병전으로 타격을 입혀 후퇴시킨다.
분명히 우세한 전력인데도 이상하게 전황이 지지부진하자 알리폰소는 언짢아하고, 그 와중에 굳게 닫혀 있던 로마의 성문이 열리고 수많은 인원들이 걸어나오자 교황이 끝끝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거냐고 절규하며 후방에서 들이치기 전에 전방에 있는 황제군을 전력으로 밀어붙이라는 지시를 내린다. 시간을 오래 끄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만큼 체력 소모도 심각했던 황제군은 전열 곳곳에서 점점 밀리기 시작했고, 전사하는 인원보다 힘이 부쳐 쓰러져 (일시적) 전투불능이 되는 병사들이 속출하는 마지막 위기에 이른다. 황제는 배신을 우려했는지 알리폰소가 나폴리인들을 아직도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귀중한 전력인 기병대로 또다시 아라곤 기병대를 끌어내 주전장에서 고립된 그들만의 싸움을 벌이게 한다. 한편 후방에서 걸어나오던 무리가 비무장한 로마 시민으로 확인되자 바로 앞에 있던 나폴리 부대는 경계를 완전히 풀고 본진에 있던 아라곤 군들도 모두 의아해 한다. 이때 시민들 너머에서 울리는 정체불명의 행군소리를 들은 알리폰소는 함정이라는 걸 깨닫지만 그와 동시에 시민들 사이에서 마지막 1천 명의 예비대가 나타나 아라곤 본진을 공격, 완벽한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아라곤군이 역으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체력도 의지도 바닥났던 황제군은 다시 사기가 충천해 반격을 개시한다. 그 와중에 나폴리 부대가 끝까지 싸우지 않고 계속 관망만 하자 알리폰소는 분노하다가 이를 유도한 황제의 전술에 뒤늦게 전율하면서, 황제군을 무너뜨리기 직전이던 아라곤 전열을 본진으로 복귀시킨다. 한편 황제는 아라곤군의 철수 시도를 목격하고 갑자기 병사의 창을 빼앗아 아라곤 병사에게 던진다. 황제의 투창이 연이어 적중하자 황제군의 사기가 크게 올라갔고, 질서정연하게 철수하던 아라곤 군대는 그런 기상천외한 모습에 크게 동요한다.
마지막 상황에 이르러 아라곤군의 전열 대부분이 탈출했다며 저들이 본진에서 재정비해 다시 들이닥칠 때 필패할 것을 우려하는 용병대장에게 황제는 이 싸움은 나폴리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지 다루는 전투인데, 본진이 위험해지자 전열에서 철수하는 아라곤인을 나폴리 부대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며 웃는다. 마침 나폴리 부대를 둘러싸고 대치 중이던 로마 시민들이 평화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는 후냐디의 말을 시작으로 일제히 물러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나폴리 부대원은 어리둥절하다 뒤늦게 본진의 현황을 알게 된다. 순간 나폴리인들은 어떻게 할지 혼란스러워하다 이내 결심하고 칼끝을 아라곤 군대 쪽으로 돌리면서 이 전투에 종지부를 찍는다.

6. 교회 통합


전투가 끝나고 포로로 잡힌 알리폰소는 에우제니오 4세에게 질책을 들은 뒤 수감되며 그사이 알리폰소의 패배에 겁을 먹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후녀디의 권고 한방에 잡혀있던 르네 드 앙주를 풀어준다. 풀려난 르네 드 앙주는 드라가시스에게 감사를 표하며 성공리에 즉위식을 치룬다. 거기에 승리는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우선 황제의 국가인 로마 제국의 동방 정교회 대표단의 입지가 높아졌고 밀라노와 나폴리라는 막강한 동맹국을 얻게 된 친제국파인 교황의 입지가 강화되어 교회 통합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거기다 유일한 문제인 파문 문제는 오스만의 실질적 위협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구호기사단, 세르비아와 왈라키아를 제외한[11] 모든 동유럽 국가들도 드라가시스의 파문 철회를 적극 지지하고 거기다 로마 제국이 오스만 술탄국을 몰아낼 최후의 성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아라곤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12]은 군자금을 보태겠다고 나섰고 잉글랜드 역시 마누일 2세와 한 약속을 지키겠다며 파문 철회지지에 소정의 자금을 보낸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로마 제국을 도와야 한다며 잔 다르크가 의견을 제시했고 이에 프랑스의 국왕 샤를 7세는 국토가 황폐화된 상황이었기에 금전이나 군사적 지원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교회통합을 적극 지지한다는, 제국에게 가장 필요했던 성명을 발표하면서[13] 힘을 보탠다.
한편 알리폰소의 처벌에 대해 드라가시스는 아라곤 왕국의 영지를 이베리아 반도의 기존 아라곤 영지, 시칠리아, 사르데냐, 몰타, 코르시카에 제한하고 이외의 육지에는 어떠한 권한도 없다는 사실상의 지중해에서 아라곤에 대한 사형 선고를 내리자는 제안을 하고 처벌의 엄청난 크기에 에우제니오 4세도 망설이나 르네 드 앙주가 드라가시스 폐하께서 말 안했더라도 자신이 제안 했을것이라며 적극 지지하자 마침내 교황은 이 벌을 알리폰소에게 내린다. 이에 알리폰소는 납득할 수 없다며 애걸복걸하지만 선대 여왕과 선대 교황, 현임 교황의 의지까지 거부하고 군대를 일으킨 선례도 없다며 단호하게 나온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질질 끌려나가고 아라곤 군대도 결국 철수한다.[14] 그리고 '''1436년 9월 2일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분열된지 382년만에 다시 통합을 이룬다.'''

[1] 당대의 구호기사단 단장으로 작중에서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그냥 단장으로 불린다.[2] 소금을 넉넉히 준비하라고 했다. 이는 고대 시절의 제국이 군사들에게 소금을 월급으로 준 것을 배경으로 한 경고로 '''습격이 있을 거니까 군사를 넉넉히 데려오라'''는 숨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황제는 이를 금방 간파하고 즉각 대책을 생각해내어 크게 웃으나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3] 사실 이 싸움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여러가지로 아라곤이 불리할 수 밖에 없다. 당장 외교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구호기사단, 베네치아가 주인공을 지지하는 가운데 교회통합이라는 막강한 명분을 손에 넣은 교황, 그리고 그 편에 합류한 밀라노도 있다. 반면 아라곤의 동맹은 베네치아와 밀라노만으로도 정리 될 제노바와 작중에 언급되지 않은 몇몇 도시국가들 뿐이다.[4] 그리고 외교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황제의 기량 자체가 아라곤보다도 막강한 오스만을 몇번이나 막아내며 명실상부한 유럽의 방파제라는 지위를 회복할 정도의 괴물급인데, 이걸 겨우 8천명 가량의 병력으로는 막을 순 없는 일.[5] 레콩키스타에 앞장서던 군주이기에 어느정도 변호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결국 추기경단은 파문 대신 계도만 해주어야 한다고 결의한다.[6] 도나우 강 이남과 세르비아는 제국이, 왈라키아 공국을 비롯한 도나우 강 이북은 헝가리가 가져가겠다는 것으로, 어차피 블라드의 왈라키아는 누구에게도 지배를 받지 않고자 박쥐같이 저항할 거 같기에 황제는 고민 없이 받아들인다.[7] '''교황청 전권 대리인''', 그리고 나폴리 왕국의 '''섭정'''.[8] 용병들이 생각보다 많이 모이지 않은게 컸다. 후냐디가 한 뒷조사의 결과 르네 드 앙주의 납치 직전 대대적인 용병대 계약갱신이 있었다는것이 밝혀졌는데 이것은 드라가시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알리폰소의 술책이었다.[9] 이 때문에 황제가 처음 나폴리 왕국령으로 들어갔을 때 백작, 남작, 후작 등 많은 소귀족들이 알리폰소를 배신하고 황제의 군세에 가담한다.[10] 옛날 똑같은 이탈리아 용병대장 출신인 이바니아와 함께 종군하던 경험을 활용한 것으로 보임.[11] 이 둘은 오스만의 속국이었기에 대놓고 파문 철회 요청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12]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으로 추정. 나바라 왕국은 이 당시 아라곤 왕국의 반속국이었으니 아라곤 왕국과 대립중인 제국을 도울 수 없으며 나스르 왕조는 이슬람 왕조인지라 저 성전을 지지할 이유가 전혀 없다.[13] 이는 교회 통합을 통해 생길 동방 총대주교(이전 동방정교회 총대주교)를 통해 교황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14] 그나마 로마에서 약탈이나 강권은 하지 않았기에 추가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떠날 수 있었다. 전에 있었던 치명적 약점이 여기서는 오히려 간신히 남은 전력이라도 보존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된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