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상

 

[image] ''' 한국방송공사 ''' ''' 사장 '''
제10~11대
홍두표


제12~13대
''' 박권상 '''


제14대
서동구

[image]
朴權相
1929년 10월 25일 ~ 2014년 2월 4일
1. 개요
2. 생애
3. 공적과 과오
4. 저서
5. 수상경력
6. 참고 자료


1. 개요


대한민국언론인이며 자유언론의 기수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929년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전주북중학교[1]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2년 합동통신 기자로 입사하여 언론인 생활을 시작해 1958년 세계통신 정치부장, 1960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1962년부터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이직하여 1969년 편집국장대리, 1971년 편집국장을 거쳐 1973년 영국특파원으로 발령나기도 했다.
1977년 귀국 후 통일문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돌아왔다가 1980년 1월부터 논설주간까지 지냈으나 그해 8월, 신군부에 굴복한 사측에 의해 강제해직되었다. 그리하여 전두환 정권 동안 영국 옥스퍼드대 세인트안토니스 칼리지, 미국 조지워싱턴대 중소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였다. 1988년 노태우 정부의 KBS 이사직 제안을 거절하고 1989년에 주간지 시사저널 편집인으로 언론계에 복귀했고, 이후에도 중도진보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1989년 관훈클럽 최병우기념사업회 및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현 장지연기념회) 설립에 각각 참여해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94년 동아일보사 비상임고문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이듬해 1월부터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장을 맡다가 국민의 정부 출범 후 4월부터 홍두표 전 사장의 뒤를 이어 한국방송공사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2003년에 임기를 1년 앞두고 사임하였다.[2]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영국 BBC나 일본 NHK를 롤모델로 삼아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만드는 데 매진해 KBS가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1998년만 빼면 전 시기에 걸쳐서 흑자를 기록했고 2002년도에 사상 최대액의 흑자액을 기록하면서 경영적인 측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보수측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개혁리포트> 등 군사독재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프로그램들을 적극 편성해 극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사저널 주필로 지냈을 때와의 인상과는 다르게 예상외로 보수적인 면을 드러내다보니 노조와의 충돌이 꽤나 빈번했다는 후문이다.[3][4] 임기가 남아있는데도 KBS 사장직에서 물러난것도 노조와의 충돌로 인한 스트레스와 신정부 출범에 따른 부담감 때문이라고 세간에서 대체적으로 견해를 드러냈다.
2014년 2월 4일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가 몸담았던 시사저널그의 일생을 비중있게 다뤘고, 장례식은 KBS장으로 치러졌다. 2015년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박권상기념회'를 세웠다.

3. 공적과 과오


임기 중반인 1998년에 역사스페셜, 1999년 환경스페셜을 신설하여 기존의 KBS일요스페셜과 함께 '3대 스페셜주의'를 확립시켰으나, 2003년 박 사장 퇴임 이후 역사스페셜 대신 <인물현대사>가 신설되면서 깨졌다. <VJ특공대>, <현장르포 제3지대>, <인간극장> 등 외주제작 프로그램 편성도 늘리고 <시청자칼럼 우리사는세상>과 <열린채널> 등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 방영도 활성화했다. 2000년 <태조 왕건>을 시작으로 '고려사 대하사극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진행했고, 같은 해 북한 조선중앙TV와 공동으로 분단 이래 최초로 서울-백두산-한라산 3원생방송 <백두에서 한라까지> 제작으로 남북 방송교류 활성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그는 위와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특정 고교 출신들을 KBS 상층부에 중용하고 공정방송위원회를 유예시키는가 하면, 차장 승진 고시 및 책임프로듀서제를 도입해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임기 후반에는 홍두표처럼 자사 성우들의 활동까지 점차 줄이기 시작해서 더빙빠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특히 해외 애니메이션 편성이 이때부터 줄기 시작하였고[5] 2001년 11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오후 6시에 고정 방영하였으나 이 이후 부터 매주 월~목 오후 6시에 톡톡 이브닝[6]을 편성하면서 애니메이션 방영이 한동안 잠시 30분 앞당겨(오후 5시 30분) 방영되기도 하였다.
2001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금요일에 국내 애니메이션를 방영하고 월~목 나흘 동안는 해외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는데, 마이크로맨이 종영 이후 목요일 시간에 국내 애니메이션 바스토프 레몬이 방영 시작으로 이후 극소수를 제외하곤 목요일에 해외 애니메이션 편성을 중단하고 국내 애니메이션으로 고정 되었고 다음해(2002년)에는 수요일에도 정의의 용사 카봇이 방영 도중 다른 요일로 이동 시킨후 역시 목요일처럼 해외 애니메이션을 중단시키고 그 빈 자리에 스페이스 힙합덕 방영 시작으로 국내 애니메이션이 편성하기 시작했다. 결국 후임 정연주때는 화요일마저 국내 애니메이션으로 고정되면서 남은 월요일는 방영 초반에 월~화 2회 연속 방영하던 원피스가 종영할 때까지 편성을 유지하였다. 결국 원피스는 '''마지막 해외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끝까지 안 하고 조기종영한 애니메이션도 슬슬 나오기 시작했는데, 우선 명탐정 코난이 78화까지만 방영하고 조기종영하였고 디지몬디지몬 테이머즈까지만 방영하고 종영하였으며, 이후 디지몬은 애니원, 챔프, 애니박스 등에서, 명탐정 코난은 투니버스에서 방영하고 있다. 2002년에 2002 FIFA 월드컵 특선 애니메이션 스페릭스 종영 후 후속으로 방영한 재키찬 어드벤처는 전체 95화 중에서 52화까지만 하고 조기종영되었고 동년에 방영한 크러시기어도 전체 68화 중에서 절반이 안 되는 33화(35화이지만 왜색으로 인해 2화가 방영되지 않음.)까지만 하고 조기종영하였으며 다음해에 방영한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인기 시리즈 중 하나인 미이라의 TV 만화 시리즈도 역시 끝까지 못하고 조기종영되었고 후임 정연주 임기 때 디즈니 만화동산를 포함한 '''서양 애니메이션 방영이 끊겼다.''' 그리고 해외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그의 임기 때 방영된 게 1998년 6월 5일 환경의 날에 특선으로 방영된 마더 최후의 소녀 이브와 2001년 10월 3일 개천절(당시 추석 연휴와 겹침)에 방영한 20세기 폭스 애니메이션 아나스타샤(재더빙) 밖에 없었다.
심지어 톡톡 이브닝 폐지 후 애니메이션 방영이 오후 6시로 복귀하였지만 일부 애니메이션의 편성 시간 변동도 있었는데 스페릭스 후속으로 방영한 재키찬 어드벤처가 스페릭스에 이어 매주 화~수 오후 6시에 방영했으나 각각 크러시기어정의의 용사 카봇의 방영 시작으로 30분 앞당겨졌고 연말에 52화로 조기종영할 때까지 이 시간대 방영을 유지했고 수요일에 방영하던 정의의 용사 카봇도 끝까지 방영했지만 방영 도중 월요일 오후 5시 30분[7]로 변경 되었고 화요일에 방영하던 크러시기어가 조기종영되면서 매주 월요일에 방영하던 요리킹 조리킹이 화요일까지 편성 확대하기도 하였다. 1992년부터 꾸준히 방영하던 디즈니 만화동산을 9년 만에 폐지하였다가 데블파이터[8]별나라 요정 코미가 방영한 이후 다시 재개하였으나 얼마 못 가 목요일 오후로 이동시켜버렸다.
결국 이 때부터 드라마 제작편수와 예능 프로를 늘리는 대신 해외 애니메이션 편성을 서서히 줄어지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편성도 많이 줄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케이블 채널의 경쟁에 어렵게 수입한 해외 애니메이션이라도 끝까지 해야 하는데 일부는 조기종영까지 하는 등 점차 자사 성우들의 활동을 줄이게 만들었다. 결국 이 문제는 후임 정연주 임기에 가서 한꺼번에 터진다.
애니메이션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나무위키 이용자들의 사회성 등을 고려하여 이 기나긴 비판은 그러려니 하자. KBS 사장은 오천만 국민의 수신료를 받아 돌아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방송국을 책임지는 자리로, 애니메이션 하나만 책임지기엔 너무 막중한 보직이다.

4. 저서


  • 매스콤론(장용과 공동번역) - 에드윈 에머리 등 3명 공저. 을유문화사. 1963.
  • 근대국가와 언론자유(고명식과 공동번역) - 찰스 R. 라이트 저. 범문사. 1965.
  • 매스컴 사회학(번역) - 찰스 R. 라이트 저. 범문사. 1967.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저널리스트 11인선(송건호 등 10명과 공저) - 전예원. 1977.
  • 영국을 생각한다 - 동아일보사. 1979.
  • (속)영국을 생각한다 - 동아일보사. 1981.
  • 대학생과 해외유학(송동준 등과 공저) - 시사영어사. 1981.
  • 자유언론의 명제 - 전예원. 1984.
  • 미국을 생각한다 - 동아일보사. 1985.
  • 웃물이 맑은 사회를: 박권상 사회평론 - 홍성사. 1985.
  • 감투의 사회학: 박권상 민주화 논설선 - 지식산업사. 1987.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서독, 오스트리아, 그리스, 스페인 - 나남. 1987.
  • 영국을 다시 본다: 여왕의 땅 신사의 나라 - 원음사. 1987.
  • 권력과 진실 - 삼성문화개발. 1989.
  • 대낮에 등불을 밝히고: 박권상 칼럼집 - 동아. 1990.
  • 영국을 본다 - 원음사. 1990.
  • 박권상의 시론: <동아시론> 모음집 - 열림원. 1991.
  • 저자세, 고자세가 아닌 정자세로: 박권상 정치평론 - 웅진문화. 1991.
  • 대권이 없는 나라(전 2권) - 영림카디널. 1992.
  • 박권상 칼럼: 예측이 가능한 세상이었으면(전 2권) - 신원문화사. 1994.
  • 오늘 그리고 내일: 박권상 칼럼(전 2권) - 일요신문사. 1996.

5. 수상경력


  • 독립신문기념상 논설부문 (1970)
  • 중앙언론문화상 (1989)
  • 인촌문화상 언론부문 (1991)
  • 한국언론상 저널리즘 연구부문 (1997)
  • 관훈클럽 특별공로상 (1997)
  •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3)

6. 참고 자료


  • 영원한 저널리스트 박권상을 생각한다 - 박권상기념회 편. 상상나무. 2015.

[1] 과거에 전북 최고의 명문고로 통하던 전주고등학교가 명맥을 잇고 있다.[2] 후임 방송협 회장은 SBS 사장 송도균이 맡았다.[3] 민주화 이후에도 KBS 사장이 KBS 9시 뉴스 큐시트를 미리보면서 논조를 완화시키거나 하는 등의 이런저런 개입하는 관행이 여전히 남아있었는데 박권상 때까지도 남아있었다. 정연주가 사장이 된 이후로 사장이 9시 뉴스 큐시트를 미리 보는 관행이 없어졌다가 김인규 때부터 다시 부활했다고...[4] 1998년 개혁리포트 <조선일보를 해부한다> 에피소드 방영 과정에서 난항이 있었다. 2000년에 추적60분 매향리 미군사격장 관련 에피소드 방영으로 국방부로부터 고소당하자 해당 제작진들을 타 부서로 발령보냈고, '국방군사연구소는 왜 해체되었나' 편 방영도 연기시켰다. 2002년에는 <열린채널>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및 '에바다투쟁 6년-해아래 모든 이의 평등을 위하여' 편도 불방시키도록 했다.[5] 물론 이때부터 점차 해외 애니 및 영화는 케이블 채널로 넘어갔고, 대중들은 TV 시청 대신 인터넷 홈페이지나 P2P를 통해 다운로드해 원어판을 접했다. 대신 예능과 드라마 제작편수가 늘면서 한국은 '드라마 공화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예능과 드라마도 경쟁사 포맷을 베낀 저질 프로까지 양산해내 방송사 재정 상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 본격적으로 길환영 임기 때부터는 주말 드라마를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이 대부분 시청률이 부진에 빠지게 된다.[6] 지금 기준로 보면 생생정보통과 비슷한 프로그램이다.[7] 당시 월요일 6시에는 디지몬 테이머즈가 방영.[8] 다만, 데블파이터는 끝까지 하긴 하였으나 마지막회(48화)를 앞두고 47회에서 조기종영하는 희대의 사고가 터졌다. 물론 이후 마지막회(48화)는 별나라 요정 코미 마지막 회가 방영될 때 동시 방영하였으나, 이후 마지막회가 유실이 되어 다른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할 때도 마지막회(48화)를 영구히 볼 수 없게 되면서 사실상 큰 흑역사를 남겼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