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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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사실상 지금의 KBS를 만들어낸 사장이자 수신료 거부운동을 차단시킨 원흉으로 감사원 사무차장/감사위원을 지낸 홍두표와는 단순 동명이인이다.[1]
현재 TV조선 회장이다. 한국 TV 방송계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자 20세기 후반기에 정권이 바뀌면서도 승승장구했던 인물로 '''20년씩이나 사장으로 연속으로 재직했다.'''. 그야말로 처세술의 달인. (TBC-코바코-KT&G-중앙일보-KBS-관광공사 순) 본업은 방송쪽이지만 위낙 경영면에서 인정을 받았다보니 자신의 업무분야와 상관없는 전매공사(한국담배인삼공사)와 관광공사 사장직을 맡은 전적이 있다.
2. 생애
일제강점기 당시 경기도 수원군 출신이며 인천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에 KBS 방송개국요원으로 KBS-TV 개국에 참여해 프로듀서 생활을 시작했다. 1964년에 동양방송으로 이직했으며 1972년 편성국장으로 승진했다. 당대 여러 악조건속에서도 동양방송을 대형방송사로 만들어냈고[2] 이를 바탕으로 1979년에 (주)중앙일보-동양방송 상무이사, 1980년 2월 15일에는 전무이사, 9월 15일에는 방송부문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승장구했으나 꼴랑 부임 두 달만에 회사 자체가 언론통폐합에 의한 신방겸영 금지 조치에 따라 KBS로 넘어가면서 강제적으로 짤려나가는 아픔(?)도 겪었다.
그래도 능력은 인정받던 인사였기에 1981년에 새로 신설된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직에 올랐고 1986년 전매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3] 1년만에 한국전매공사로 공사화되면서 전매공사 사장직에 올랐으며 노태우 정부 시기에 전매공사에서 한국담배인삼공사로 이름이 바뀐 뒤에도 총 6년을 재임했다. 임기 동안 구조조정이라는 난제를 슬기롭게(?) 해결했는데 직원들을 해고시킨 대신에 해당 직원들의 자식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방식. 요즘 같으면 자식들에게 직장 세습이니 조삼모사니하면서 욕할수있는 상황이었지만, 어땠거나 덕택에 고참직원들을 대거 신참으로 물갈이하면서 조직의 활력이 높아졌다는 평을 들으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92년에 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문민정부가 들어서 KBS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 회장직에 오르면서 금의환향했다. KBS 보도국을 대대적으로 쇄신시켜나면서 관제방송이라는 이미지를 벗는데 기여했고 1TV 저녁 일일연속극이 연이어서 흥행하는 호재까지 겹치며 그 이전까지 관제방송 이미지로 시청률이 저조했던 KBS 뉴스 9의 시청률이 크게 오르게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4년 7월 KBS 1TV 광고를 전면적으로 폐지시키고 그 대신에 수신료와 전기료를 합산징수시키는 안을 통과시키기게 만들어서(시행된건 그 해 10월부터) '''수신료 거부운동을 차단시켰으며 장노년층들이 TV를 틀면 KBS1로 채널을 고정하게 만들게 했다.'''
1TV 광고를 폐지하면서도 수신료를 올리지 않고 그대로 받게 한것이 멍청한 짓처럼 보이지만 당대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사실 90년대 초반에는 1980년대 시청료 거부운동의 여파가 남아있었던데다가 관제방송 이미지가 위낙에 컸기에 수신료 징수율이 50% 중반 정도였고, 더군다나 그러면서도 수신료 징수원들을 고용해야했기 때문에[4] 손해보는 비용이 1TV 광고해서 얻는 수익보다 월등히 많았다.
광고폐지와 일일연속극 시청률의 상승의 영향으로 KBS 뉴스 9의 시청률이 MBC 뉴스데스크를 추월했고 이외에도 3대 스페셜(역사스페셜,환경스페셜,일요스페셜)중 하나인 일요스페셜도 이때 신설한데다가 재임기 막판에 KBS 대하드라마도 성공시켜서 나름대로 공영방송으로써의 입지를 굳혀나갔고 KBS의 매출액도 경제호황과 함께 역대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면서 연간 1000억원대의 흑자액을 기록했을 정도다. 다만 다른 사장들과 마찬가지로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쓴 편은 아닌데, 사실 애니메이션 자체가 버는 돈에 비해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점도 있고 이때까지도 애니메이션 쿼터제가 시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강제규정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신 KBS 2TV는 상업화가 진전되어서 이때의 TV편성표를 보면 KBS 2TV가 MBC나 SBS보다도 오락프로그램의 비율이 높은 상황이었고 덕택에 2TV에서 전쟁이나도 정규프로를 방영할것이라는 농담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외국프로그램의 표절은 빈번했다는 문제점은 있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 프로그램을 베끼는것은 MBC나 SBS도 마찬가지였던 상황이었고 길게보면 TV방송 초기부터 이어져내려오던 문제점이라 특별한건 아니지만. 그 외에 1994년 아시아방송연맹(ABU) 이사기관으로 선임되어 NHK, CCTV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 아시아 방송계 위상을 드높였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윗선의 눈치를 아예 안봤냐면 그건 또 아니라서, 1994년 10월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 때 해당 사고 소식을 뒤로 한 채 김영삼 대통령의 성수대교 붕괴사고 담화를 헤드라인으로 보냈으며 얼마 뒤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당시에 정규방송을 5분 일찍 시작했다고 공보처에게 징계를 받는 사건이 벌어져서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심지어는 2월 7일 민자당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김영삼 대통령 동정을 헤드라인으로 틀어 소위 '땡김뉴스'라고 욕을 먹었다.
이외에도 재임후반기 들면서 눈치를 보는 경향이 강해지기도 하여 1996년에 추적 60분 '쌍용 사과상자' 편이 쌍용그룹 측의 외압으로 불방되었고, 1997년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때 96년 총선 출구조사의 악몽으로 예측조사를 발표하지 못한일도 생기기도 했다. 심지어 1995년 4월 7일자 KBS 뉴스라인에서 방송된 여야 대변인 초청 대담 중 야당 대변인 발언 일부를 삭제해 '알아서 기기'의 표본을 몸소 보였다.
지금이라면 케이블 채널 아니면 상상 할수 없지만, 1996년에 당시 일요일 아침에 방영하던 영화 더빙 코너 일요특선을 9년만에 종영했다. 당시 자사 성우들이 활동할수 있는 더빙 프로그램 하나를 없애 버린것 였는데 문제는 이것으로 시작으로 이후 후임인사들도 홍두표처럼 지금 자사 성우들이 활동(더빙) 을 단계별로 많이 줄어지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결국 한국 방송계는 자체제작 예능이나 드라마 등 오락프로 일색으로 점차 채워지게 되었다.[5] 이후 토요명화 같은 더빙 프로그램를 종영시킨 것도 사실상 이때부터 예견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래도 KBS 일선 제작진 사이에서 정연주와 함께 평가가 좋은 편인데[6] , 임기 내내 현장 제일주의를 고수하여 사장실에 TV 15대를, 집에도 TV 5대를 각각 두며 꼼꼼히 제작상황 등을 체크했다. 주요 프로그램들은 웬만하면 꼭 시청했으며 미쳐 일이 있어서 프로그램을 못보면 새벽 1시까지도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된 프로그램들을 시청했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7] 덧붙여 TV를 보던 도중에 괜찮은 프로그램이 있다 싶으면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들을 불러서 손수 격려를 해주면서 봉투를 건네주곤 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하튼 1997년 하반기에 경기침체와 2TV 시청률 부진이 이어지면서 경영실적이 별로 안 좋아졌고, 같은 시기 오익제 월북 관련보도 문제로 새정치국민회의와 충돌이 벌어진 데다, 제15대 대통령 선거 예측조사 발표에 대해서 어버버거리다가 그대로 발표못하는 악재가 이어지다가 1998년 상반기 프로그램 개편을 개판으로 진행한 뒤에[8] (...) KBS 사장에서 사퇴했다. 이후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을 모델로 내세운 광고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그런대로 임기를 채울 것 같았는데 1999년 비리혐의로 불명예스럽게 강제퇴직을 당하며 잠깐 콩밥먹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새로 출범된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 초대 이사장직 선임도 무산되었다.
그래도 풀려난 뒤 2000년 중앙일보 고문을 맡으며 2002년 JIBS 회장에도 앉았고, 2003년부터 5년간 로또공익재단(현 인터알리아공익재단) 이사장도 역임했다. JIBS가 지방방송사이다 보니 크게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없었고, JIBS 회장 임기를 마친 후 2011년 JTBC 회장으로 복귀했고 2013년부터 상임고문을 맡았다. JTBC 회장으로서는 방송초기이다 보니까 어수선한 티가 많이 날수밖에 없었는데, 상임고문을 맡은 후부뒤 JTBC가 잿팍을 터트렸지만 직접 공헌한 것은 아니기는 하다. 그러다가 2017년에 TV조선으로 자리를 옮겨서 2017년 5월 TV조선 회장에 취임했다. 여기에서도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으로 대박을 치면서 감은 죽지 않았다는 평이다.
1995년에 방영된 인기드라마 바람은 불어도의 제목을 홍두표가 직접 지었다는 일화도 있다.
3. 수상
- 국민훈장 동백장 (1986)
- 금관문화훈장 (1997)
4. 경력
- (2017년 5월 ~ 현재) TV조선 회장
- (2011년 3월 ~ 2013년 3월) JTBC 총괄 회장
- (2011년 3월) 중앙일보 방송담당 회장
- (2002년 ~ 2011년 3월) JIBS 회장
- (1998년 4월 ~ 1999년 5월) 한국관광공사 사장
- (1993년 3월 ~ 1998년 3월) 한국방송공사 사장
- (1992년 2월 ~ 1993년 3월) 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 · 발행인 · 편집인 · 인쇄인
- (1989년 3월 ~ 1992년 1월) 한국담배인삼공사 사장
- (1987년 4월 ~ 1989년 3월) 전매공사 사장
- (1981년 1월 ~ 1986년 8월)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 (1981년 1월) 한국방송광고공사 설립위원장
- (1980년 9월 ~ 1980년 11월) 중앙일보·동양방송 방송부문 대표이사 사장
- (1980년 2월 ~ 1980년 9월) 중앙일보·동양방송 전무이사
5. 관련 문서
6. 관련 자료
[1] 언론에 두 사람 관련 내용이 보도되면 사진이 바뀌어 올라오기도 했으며 당사자들에게 우편물이 바뀌어서 오기도 했을 정도이다.[2] 당시 관계당국으로부터 검열을 받아야되는건 물론이고 1970년대 중후반 들어서 일선 당국에서 특정 시간대에 특정 장르의 프로그램만 방송할 수 있다고 지시를 하는 등 지금보면 코미디 수준의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3] 부임 후에 조직의 목표와 논리를 따르기 위해 그토록 끊었던 담배를 피웠다.[4]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KBS도 NHK 식으로 징수원이 직접 수신료를 걷는 방식이었다. 물론 80년대 후반기부터 통합공과금제가 도입되는 곳도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퍼진것까지는 아니다.[5] 하지만 예능과 드라마도 경쟁사 포맷을 베낀 저질프로까지 양산해내 방송사 재정상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6] 다만 정연주는 일선 제작진이 아닌 간부진이나 기술직 사이에서 구조조정 작업 때문에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 단지 프로그램 편성, 아이템 선정에 있어서 일선 제작진들의 의견을 잘 들어줬기 때문에 PD나 기자들에게 평가가 좋은 것.[7] 홍두표가 사장으로 KBS 사장으로 재임했을 당시에는 인터넷과 PC통신 속도가 느려터졌기 때문에 VOD 서비스는 꿈도 못 꾸던 상황으로(VOD 서비스가 일부 시작된건 1997년, 사실상 시작된 시기는 1998년도다) 프로그램을 다시볼려면 미리 녹화를 하거나 KBS 영상사업단에 전화걸어 복사구매를 해야 했다.[8] 가요톱10과 슈퍼 선데이 등이 폐지된것도 이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