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익

 

* 정치인/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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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容益
일본식 이름: 美村文雄
1905년 1월 18일 ~ 1977년 4월 6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정치인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2. 생애


1905년 강원도 강릉군 사천면 덕실리#에서 참봉을 지낸 아버지 박화동(朴華東)과 어머니 강릉 김씨 김진성(金振聲)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3월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를 수료한 후, 1930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하였다.
이후, 1930년 경상북도 산업과 산업부 속 겸 달성군 속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1년 경상북도 산업부 산업과 속 겸 성주군 속에, 1932년 1월 대구부 내무과 속에, 1939년 7월 성주군 속 내무과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9월에는 군수로 승진하여 경상북도 봉화군로 부임했으며 1943년 3월 경상북도 예천군로 옮겨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총 4476 명 중 1270명이 속한 관료 부문에 포함되게 되었다.#
8.15 광복 후 1947년에는 경상북도 상공국장을 지냈으며, 1952년에는 임업계에 종사하여 대한임업개발주식회사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4년 5월에는 강원도 강릉군 을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 3대 민의원에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당 최헌길 후보를 꺾고) 당선했다. 1958년 5월에는 강원도 명주 선거구에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제 4대 민의원에 재선했다. 그 해 9월, 자유당 원내총무와 국회운영위원장을, 1959년 7월에는 자유당 총무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4.19 혁명 후 1960년 5월, 3.15 부정선거 자금에 관여한 혐의를 받아 입건되었으며,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1961년 12월에는 군사정권의 혁명재판소 상고심판부에서 거액의 불법 선거 자금을 조달한 혐의가 씌워져 혁명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구형 받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사면받았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강원도 강릉시-명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최익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1977년 4월 6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