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병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박순병의 형이다.
2. 생애
박일병은 1893년 3월 3일 함경도 온성도호부 변포면 당골(현 함경북도 온성군 향당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지린성 연길현 용정촌[3] 에 설립된 서전서숙(瑞甸書塾)[4] 을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하여 1910년 오일생학교(五日生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13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 시기 유근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6년 간도로 가서 조선귀족 자작 민영휘에게 협박장을 보내 검거되었으며, 석방된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일본역사와 철학을 공부하였다. 1918년 일시 귀국하여 회령군 검사국에 구류되기도 했으며, 1919년 3.1 운동이 서울에서 발발하자 이에 참가하여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 같은 해 4월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급진주의적인 학생들과 주로 교유하였고 1920년에는 김찬(金燦)·송봉우(宋奉禹) 등과 함께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한 학생들을 규합,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조선으로 귀국한 박일병은 경성부 견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과 낙원동(현 종로구 낙원동) 등지에 거주하면서 동아일보 기자 겸 논설부장으로 활동했으며, 6월 장덕수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 발기인을 맡았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였으며, 대종교청년회 회장, 조선청년연합회 집행위원, 고학생갈돕회(鐵鋸會) 고문, 서광잡지사(曙光雜誌社) 촉탁, 민립대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교육회 이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다 1921년 11월 경기도 고양에서 열린 소작인 대회에 참가해 소작인에 대한 지주의 악습 폐기, 소작료 이외에 받는 것을 교정할 것, 소작료는 생산량의 40%만 납부할 것 등을 주장한 뒤 공산주의에 경도된 그는 동아일보 사원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배척당하여 퇴사하였고#, 1922년 1월 윤덕병(尹德炳)·신백우·이준태(李準泰) 등과 함께 무산자동맹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2년 12월 장덕수·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한 후 집행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23년 5월 노동자 계몽을 위한 노동사(勞動社)를 결성하고 기관지 『노동자』를 발행하였다. 그해 8월에 김종범(金鍾範)·정운해와 함께 평양에서 평양 양말 직공 조합 동맹 파업 사건을 지지하고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1924년 2월 김찬(金燦)·윤덕병·백광흠(白光欽) 등과 함께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4월에는 조선 청년 총동맹 창립대회 전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7월에는 홍명희, 홍증식(洪增植), 구연흠 등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인 신사상 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결성했는데, 이후엔 화요회(火曜會)로 개칭했다.
1925년 4월 화요회·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는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고 합동 상무위원을 뽑아 이를 공동 운영하였는데, 이 때 박일병은 김찬·김경재(金璟載)와 함께 화요회를 대표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25년 8월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26년 4월 화요회·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 등의 통합단체인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여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26년 6월 일제 경찰이 조선공산당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하자 그 또한 같은 해 7월 23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고,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재정통산 150일)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그해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를 취하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시력을 거의 잃어 1929년 8월 26일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그 후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말년을 불우하게 보내다 1937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박일병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