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쇼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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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井将敬 (1948년 1월 12일 ~ 1998년 2월 19일)
일본의 정치인. 중의원 4선을 지냈다. 재일 한국인 출신. 증권 스캔들로 중의원에서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자 도쿄 미나토구의 호텔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1948년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경재(朴景在)이다. 아라이(新井)란 성은 통명으로 박(朴)씨들이 박혁거세가 우물 속의 알에서 나왔다는 고사에서 따서 많이들 썼다고 한다. 조선학교 대신에 일본의 중학교, 오사카부립 키타노 고등학교[2] 를 졸업했다. 1966년에 조선적에서 일본인으로 귀화하였다. 본래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재수하여 도쿄대학 이과1류[3] 에 입학했다. 젊은 시절엔 미시마 유키오와 칼 마르크스에 심취했다. 정작 졸업은 도쿄대학 경제학부에서 했다. 중간에 전과한 모양이다. 졸업 후 신일본제철(新日本製鐵)에 들어갔다가 1973년에 대장성에 들어간다. 세무 관련 업무를 맡다가 1980년에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 1923년 ~ 1995년)[4] 신임 대장대신(大藏大臣; 기재부 장관)의 비서관이 되었다. 비서관으로 지내면서 증권업계가 원하던 중기국채펀드 등을 도입했고 은행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83년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2구에 출마, 이시하라 신타로와 대결했다.[5] 당시에 아라이의 포스터에 북한 사람이란 표식을 누군가 붙여놓은 '검은 씰 사건(黒シール事件)'이 일어났다. 이시하라는 자기 비서가 알아서 한 거라고 꼬리 자르기를 시전했고 아라이는 낙선했다.[6] 아라이는 이때 좀 더 자신이 확실한 일본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신우익 운동을 펼치던 우익운동가인 노무라 슈스케(野村秋介, 1935-1993)와 친해졌고, 노무라가 이시하라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항의하기도 했다.
여하튼 1986년에 도쿄 4구에 다시 출마하여 처음으로 입성한 후 4선을 역임했다.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7] 는 아라이의 지역구 주민이었는데 정작 홋카이도 제4구로 나가 당선됐다. 1992년에 자민당 부대표인 가네마루 신이 5억 엔 상당의 불법자금을 받은 도쿄 사가와 규빈 사건(東京佐川急便事件)이 일어나자 가네마루를 맹렬히 비판하고 정치개혁 등을 주장해 젊은 논객으로 인기를 얻는다. 특히 아라이는 일본의 중대선거구제 대신에 소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했는데 소선거구제에 반대하던 이시하라 신타로나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수구파라고 공격했다. 이듬해 1993년에 자민당이 쪼개질 때 탈당하여 자유당을 결성한다. 1994년엔 신진당에 들어갔지만 오자와 이치로의 독단적인 당 운영에 반대하여 탈당하고 1996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자민당 후보에게 승리했다. 그 후 자민당에 복당했다.
그러던 중 증권 스캔들이 일어나는데 1980년대에 그와 연이 있던 증권사인 닛코 증권(日興証券; 현 SMBC 닛코 증권)의 편의를 봐주고 차명계좌 등을 운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98년 2월 19일에 중의원에서 체포동의안이 통과될 때 "마지막 말은 들어 주십시오. 저는 결백합니다."라고 말했고, 다음 날 도쿄도 미나토구의 호텔에서 목 맨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호실 바닥에는 위스키 병이 가득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아내와 가메이 시즈카에게 보내는 유서가 있었다고 한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간혹 음모론이 나오기도 한다.[8] 아라이가 자살했을 때 노부모가 생존해있던 상태였는데 "도대체 왜 우리 애만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건가."라고 발언했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다.
아라이 쇼케이의 비서였던 오구마 신지(小熊慎司; 1968 ~ )는 2012년에 다함께당 소속으로 일본 참의원이 되었다가 개혁결집회를 거쳐 현재 입헌민주당 소속 중의원이다. 지역구는 후쿠시마현 제4구.
개인사로 볼 때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6세까지 조선적이었단 불리한 조건임에도 '''자민당 중의원'''으로 4선을 지냈다. 당시 그와 대립하던 인물들은 오자와 이치로, 이시하라 신타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일본 정계의 거물들이다. 일제강점기 때 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소수의 조선인이 있긴 하지만 전후에 중의원을 지낸 한국계 일본인은 그가 유일하다.[9]
아라이 쇼케이는 최소 겉으로는 자신이 한국인이거나 한국계란 자각은 그리 없던 것으로 보이고, 정책적, 정치적인 측면으로 볼 때 전형적인 우익 일본인이었다. 도쿄 지검이 수사에 들어가자 자신의 출신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는 설도 있다.
新井将敬 (1948년 1월 12일 ~ 1998년 2월 19일)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중의원 4선을 지냈다. 재일 한국인 출신. 증권 스캔들로 중의원에서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자 도쿄 미나토구의 호텔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2. 생애
1948년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경재(朴景在)이다. 아라이(新井)란 성은 통명으로 박(朴)씨들이 박혁거세가 우물 속의 알에서 나왔다는 고사에서 따서 많이들 썼다고 한다. 조선학교 대신에 일본의 중학교, 오사카부립 키타노 고등학교[2] 를 졸업했다. 1966년에 조선적에서 일본인으로 귀화하였다. 본래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재수하여 도쿄대학 이과1류[3] 에 입학했다. 젊은 시절엔 미시마 유키오와 칼 마르크스에 심취했다. 정작 졸업은 도쿄대학 경제학부에서 했다. 중간에 전과한 모양이다. 졸업 후 신일본제철(新日本製鐵)에 들어갔다가 1973년에 대장성에 들어간다. 세무 관련 업무를 맡다가 1980년에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 1923년 ~ 1995년)[4] 신임 대장대신(大藏大臣; 기재부 장관)의 비서관이 되었다. 비서관으로 지내면서 증권업계가 원하던 중기국채펀드 등을 도입했고 은행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83년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2구에 출마, 이시하라 신타로와 대결했다.[5] 당시에 아라이의 포스터에 북한 사람이란 표식을 누군가 붙여놓은 '검은 씰 사건(黒シール事件)'이 일어났다. 이시하라는 자기 비서가 알아서 한 거라고 꼬리 자르기를 시전했고 아라이는 낙선했다.[6] 아라이는 이때 좀 더 자신이 확실한 일본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신우익 운동을 펼치던 우익운동가인 노무라 슈스케(野村秋介, 1935-1993)와 친해졌고, 노무라가 이시하라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항의하기도 했다.
여하튼 1986년에 도쿄 4구에 다시 출마하여 처음으로 입성한 후 4선을 역임했다.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7] 는 아라이의 지역구 주민이었는데 정작 홋카이도 제4구로 나가 당선됐다. 1992년에 자민당 부대표인 가네마루 신이 5억 엔 상당의 불법자금을 받은 도쿄 사가와 규빈 사건(東京佐川急便事件)이 일어나자 가네마루를 맹렬히 비판하고 정치개혁 등을 주장해 젊은 논객으로 인기를 얻는다. 특히 아라이는 일본의 중대선거구제 대신에 소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했는데 소선거구제에 반대하던 이시하라 신타로나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수구파라고 공격했다. 이듬해 1993년에 자민당이 쪼개질 때 탈당하여 자유당을 결성한다. 1994년엔 신진당에 들어갔지만 오자와 이치로의 독단적인 당 운영에 반대하여 탈당하고 1996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자민당 후보에게 승리했다. 그 후 자민당에 복당했다.
그러던 중 증권 스캔들이 일어나는데 1980년대에 그와 연이 있던 증권사인 닛코 증권(日興証券; 현 SMBC 닛코 증권)의 편의를 봐주고 차명계좌 등을 운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98년 2월 19일에 중의원에서 체포동의안이 통과될 때 "마지막 말은 들어 주십시오. 저는 결백합니다."라고 말했고, 다음 날 도쿄도 미나토구의 호텔에서 목 맨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호실 바닥에는 위스키 병이 가득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아내와 가메이 시즈카에게 보내는 유서가 있었다고 한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간혹 음모론이 나오기도 한다.[8] 아라이가 자살했을 때 노부모가 생존해있던 상태였는데 "도대체 왜 우리 애만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건가."라고 발언했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다.
아라이 쇼케이의 비서였던 오구마 신지(小熊慎司; 1968 ~ )는 2012년에 다함께당 소속으로 일본 참의원이 되었다가 개혁결집회를 거쳐 현재 입헌민주당 소속 중의원이다. 지역구는 후쿠시마현 제4구.
3. 평가
개인사로 볼 때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6세까지 조선적이었단 불리한 조건임에도 '''자민당 중의원'''으로 4선을 지냈다. 당시 그와 대립하던 인물들은 오자와 이치로, 이시하라 신타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일본 정계의 거물들이다. 일제강점기 때 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소수의 조선인이 있긴 하지만 전후에 중의원을 지낸 한국계 일본인은 그가 유일하다.[9]
아라이 쇼케이는 최소 겉으로는 자신이 한국인이거나 한국계란 자각은 그리 없던 것으로 보이고, 정책적, 정치적인 측면으로 볼 때 전형적인 우익 일본인이었다. 도쿄 지검이 수사에 들어가자 자신의 출신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는 설도 있다.
4. 소속 정당
[1] 아라이의 자살로 인한 보궐선거 당선[2] 하시모토 도루, 마쓰시마 미도리, 노노무라 류타로가 이곳 출신.[3] 공학부와 물리학 등[4] 나카소네 야스히로파로 부총리 등을 지냈다. 정치인 와타나베 요시미의 아버지이다.[5] 같은 자민당이었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던건 당시 일본 중의원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도쿄 2선거구에서 5명 선출했는데 당시 자민당에서 3명의 후보자를 냈다.[6] 참고로 당시 도쿄 3구의 선거결과는 자민당이 1명 당선되었고 야당후보가 4명 당선되었다.[7] 아직 자민당 소속이었을 때다.[8] 사건 관련자들 중에 자살자가 많긴 했다.[9] 중의원의 경우는 일본 패전 이전에는 한국계는 박춘금이 유일했다. 현재 한국계 의원은 하쿠 신쿤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