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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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방순희(方順熙)
아명
방순이(方順伊)
생몰
1904년 1월 30일 ~ 1979년 5월 4일
출생지
함경남도 원산시 남산동
본관
온양 방씨
사망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독립 운동
2.3. 광복 후 활동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방순희는 1904년 1월 30일 함경남도 원산시 남산동에서 방도경(方道京)과 김복녀(金福女) 사이에 맏딸로 태어났다.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녀의 가족들은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신한촌 아르스카야 18호에 정착했다. 아버지 방도경은 물산객주를 차리고 이주 한인들을 상대로 상품 위탁판매와 여관업 등을 수행하면서 북간도 광성학교와 블라디보스토크 한민여학교에 재정 지원을 했다. 방순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졸업 후에는 한인 기독교회가 운영하는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에 진학했다. 삼일여학교 졸업 후 1918년에 홀로 국내로 돌아와 정신여학교에 입학했다.
방순희는 정신여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서울 중구 회현동에 기거했다. 3.1 운동 당시 2학년이었던 그녀는 만세 시위에 참가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후 정신여학교에서 4년을 보낸 그녀는 1923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의 백산소학교에서 2년간 한인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쳤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당국이 민족교육을 인정하지 않아서 연해주 일대 한인학교들이 점차 폐쇄되자, 그녀는 더이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2.2. 독립 운동


방순희는 1925년 8월 24일 조선에 돌아와 북풍회에 가입했다. 북풍회는 재일 사회주의단체인 북성회의 국내지부로, 1920년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한 분파를 이룬 단체였다. 그녀는 1925년 10월 31일 서울 재동에서 개최된 경성천년회 월례회의에 북풍회 여성단원 신분으로 참석했다. 또한 재러 한인사회의 동포 자격으로서 정동의 러시아 영사관 개관식에 참여했는데, 이때 그녀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백의를 입어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일본 경찰은 그녀를 감시했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의 의용대장 임명장을 전달한 혐의로 체포해 이틀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입국한 목적에 대해 집중 조사했다. 이렇듯 일제의 경계가 갈수록 심해지자, 그녀는 국내에선 더이상 몸붙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만주를 경유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1931년, 방순희는 독립운동가 현익철(玄益哲)과 결혼했다. 이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 의거를 성공시키자, 일본 경찰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 선풍이 몰아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가흥, 난징 등지로 흩어졌다. 방순희 또한 난징으로 피신했고, 1938년 중일전쟁 이후 정부 요인들을 따라 창사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해 5월 6일, 창사 남목청(楠木廳) 6호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날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3당의 통일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李雲漢)이 난입해 권총을 난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유동열, 김구가 중상을 입었고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으며, 방순희의 남편 현익철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방순희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딛고 독립운동에 전념했고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함경남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33인의 대의원 중 유일한 여성의원이었다. 본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1940년도 임시정부 세입․세출안을 통과시키고 3년간 독립운동의 총역량을 집중시킬 조직․군사․외교․선전․재정 등 5개 항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워 독립을 준비했다. 또한 그녀는 주미대표부대표권 문제, 광복군 창설, 대일․대독선전포고 및 조소앙의 건국강령채택문제 등 입법 활동과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활동 등을 꾸준히 전개했다. 그녀는 대 소련대표로 선임되어 충칭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
1941년 독립운동가 김관오와 재혼한 방순희는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의 5개 구 중 제1구에 소속되었다. 1941년 5월 8일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표대회에 개최되었을 때, 그녀는 홍진, 최동오, 이중만, 체형세, 김현구 등과 함께 토교(土橋) 선출대표로 출석했다. 그녀는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합법적으로 한국독립당의 주의(主義)와 정강(政綱) · 정책(政策)을 실현할 의(義)와 권리(權利)가 있도록 규정하여 한국독립당의 이당치국(以黨治國)과 일당단정(一黨專政, 일당제)의 원칙을 실행할 것”과 1940년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의결된 광복군 공약 3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수정해서 정부에 넘겨 빠른 기일 안에 분명하게 법령을 공포할 것을 주장했고, 본회의는 이에 대한 안건을 검토해 새로운 안을 마련하고 이를 결의했다.
1942년 10월 25일, 방순희는 충칭 오사야항(吳師爺巷) 1호 건물에서 열린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했다. 본 회의는 '국가독립, 민족자주, 국권탈취'라는 세가지 임시약헌의 정신에 의거해 개최되었고, 김구 주석은 단체와 당파의 대립이 한국임시의정원으로 완전히 통일되었다는 내용의 연설을 발표했다. 이날 <우리통신>은 방순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사십 여 명 의원 중 여자의원은 오직 방순희 여사 일인 뿐이니 만록총중에 일점 홍이다. 부녀가 아직도 억울한 경경에 있는 조선 사회이므로 방 여사의 책임은 더욱 크다. 고군분투의 고독감도 있을 것이나 일천만 여성의 후영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용기도 날 것이다.

방순희는 1942년 한국독립당의 충칭구 당부 간사에 임명되었고, 한국혁명여생동맹의 집행위원장 겸 서무부 주임을 맡아 통일전선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1943년 2월 23일 각 정파의 여성 50여 명과 함께 충칭 임시정부 집회실에 모여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부주석에 선임되었다.[1]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 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행동강령을 선포했으며,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했다. 이들은 의연금 모금에 협력하고 대일전선에 부상당한 이들과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1943년 3월 1일 신생활운동 복무소 대강당에서 3.1절 기념대회가 거행되었다. 이때 방순희는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서 한국청년회 대표 안원생과 함께 임시정부의 영도하에 더욱 단결하고 적극 공작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고 각 민주 우방의 적극적인 원조를 바라며 그들과 철저히 합작할 것을 맹세했다. 이후 그해 5월 10일 재중자유한인대회가 개최되어 전쟁 후 한국을 일정기간 신탁통치하자는 워싱턴회의의 논의 결과에 단호히 반대하고 완전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각 연맹국 영수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방순희는 여러 인사들과 함께 연설했지만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8월 19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생계부 생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6월 1일, 방순희는 선전부 선전과 과원으로 선임되어 선전부장 안원생을 보좌했다. 그녀는 대적선전위원회(對敵宣傳委員會)에 가담해 일본군으로 참전한 한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방송을 하면서 반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중국에서의 일본군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알렸다. 또한 충칭 토교 깊은 산 계곡에 소재한 일본군포로수용소를 찾아가 포로 중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했으며,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했고 위문금품을 거두어 항일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2.3. 광복 후 활동


1945년 9월, 방순희는 애국부인회 회원들과 함께 중국군으로부터 인계받은 한국 출신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을 돌봐주고 교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남편 김관오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선전연락원으로 임명되어 조국으로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 각지에서 선무공작을 펼쳤다. 이후 1946년 4월 26일 이범석 등과 함께 미군이 제공한 군함 LST 편으로 조국에 돌아온 그녀는 인천항에 들어온 뒤 충무로 2가에 자리한 한미호텔에 여장을 풀고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머물렀다.
그녀는 귀국 후 1948년 4월 14일 한미호텔에서 열린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여해 부인부를 맡아 여성문제를 담당했다. 그러나 1949년 김구안두희에게 암살당하자, 한국독립당은 무력화되었고 이듬해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완전 해산되었다. 그녀는 6.25 전쟁 당시 자식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신했고, 남편 김관오는 육군사단장과 유격사령관을 맡아 조선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 싸웠다. 1965년 남편이 사망한 후 개신교 신앙생활에 열중하며 말년을 보내던 방순희는 1979년 5월 4일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76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방순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그리고 2002년 그녀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주석은 김규식의 아내 김순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