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밍엄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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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밍엄 시티 FC'''
'''Birmingham City F.C.'''
'''정식 명칭'''
Birmingham City[1]Football Club[2]
'''별칭'''
'''더 블루스 (The Blues)'''
'''창단'''
1875년
'''소속 리그'''
EFL 챔피언십 (EFL Championship)
'''연고지'''
웨스트 미들랜즈 웨스트 미들랜즈버밍엄 (Birmingham)
'''홈 구장'''
세인트 앤드루스 (St Andrew's)
(30,009명 수용)
'''라이벌'''
'''아스톤 빌라 FC''' - '''세컨드 시티 더비'''
'''구단주'''
트릴리언 트로피 아시아 (Trillion Trophy Asia)[3]
'''감독'''
아이토르 카랑카 (Aitor Karanka)
'''주장'''
마이클 모리슨 (Michael Morrison)
'''영구결번'''
22
'''공식 홈페이지'''

'''우승 기록 '''
'''EFL 챔피언십 (2부)'''
(4회)

1892-93, 1920-21, 1947-48, 1954-55
'''EFL 리그 1 (3부)'''
(1회)

1994-95
'''풋볼 리그 사우스[A]'''
(1회)

1945-46
'''EFL 컵'''
(2회)

1962-63, 2010-11
'''풋볼 리그 트로피'''
(2회)

1990-91, 1994-95
'''클럽 기록 '''
'''최고 이적료 영입'''
에밀 헤스키 (Emile Heskey)
(2004년, From 리버풀 FC, 800만 £)
'''최고 이적료 방출'''
주드 벨링엄 (Jude Bellingham)
(2020년, To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500만 £)
'''최다 출장'''
길 메릭 (Gil Merrick) - 551경기 (1946-1959)
'''최다 득점'''
조 브래드포드 (Joe Bradford) - 267골 (1920-1935)
1. 소개
2. 역사
2.1. 창단~2002년
2.2. 2002년~2008년
2.3. 2008-09 시즌
2.4. 2009-10 시즌
2.5. 2010-11 시즌
2.6. 2011-12 시즌
2.7. 2012-13 시즌
2.8. 2013-14 시즌
2.9. 2014-15 시즌
2.10. 2015-16 시즌
2.11. 2016-17 시즌
2.12. 2017-18 시즌
2.13. 2018-19 시즌
2.14. 2019-20 시즌
3. 1군 스쿼드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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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버밍엄 시티로 알려져 있다. 줄여서 BCFC라고 한다. 첼시 FC처럼 여자 축구팀을 보유하고 있다. 이름은 버밍엄 시티 레이디스(Birmingham City Ladies).
아스톤 빌라 FC세컨드 시티 더비로 알려진 라이벌 경기가 유명하다. 아스톤 빌라가 프리미어리그 붙박이 였던 반면 버밍엄이 승격과 강등을 왔다 갔다해서 보기가 쉽지는 않다.
2009년에 홍콩 출신 사업가인 카슨 양이 인수했다.[4] 하지만 그는 2011년 6월 30일 돈세탁 혐의로 체포됐다. #
이 팀이 배출한 축구 선수로 크리스탈 팰리스에버튼 FC 등에서 뛰며 EPL에 족적을 남긴 앤디 존슨이 있다. 현역으로는 스토크 시티에서 활약하고 있는 잭 버틀란드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에서 활약하고 있는 벤 포스터 역시 버밍엄 시티 출신들이다.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소속인 크레이그 가드너가 버밍엄 시티의 서포터인데, 2017년 1월 이적시장에 버밍엄으로 임대가 되면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서 선수로 뛰게 되었다.[5]

2. 역사



2.1. 창단~2002년


타 클럽과 비교했을 때 매우 독특한 점이 있다. 타 클럽들이 노동자들끼리 모여 시작한 것이 대부분인데 반해, 이 버밍엄 시티는 크리켓팀들이 모여 시작했다는 거다. 축구 팀을 만들게 된 계기도 더욱 더 독특한데, 바로 크리켓 시즌이 끝나면 할 게 없어서(...)라고 한다. 1877년에 먼츠 스트리트(Muntz Street)를 첫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창단 당시 클럽명은 스몰 히스(Small Heath).
산업 혁명으로 인해 버밍엄이 대도시로 성장하면서 연고지가 같은 아스톤 빌라와의 더비 경기의 영향력도 커졌다. 1885년에는 돈을 퍼부으며 많은 선수들과 계약을 한다.[6]
1892년 2부리그로 풋볼리그에서 첫 참가를 하였고, 1894년에 처음으로 1부리그에 올라오게 되었다. 1부와 2부를 오가다가[7] 1905년 '스몰 히스'에서 '버밍엄 FC'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고, 1906년에는 구단이 점점 성장하면서 먼츠 스트리트가 구단의 명성과는 부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새로운 구장을 원했는데, 이 때 눈에 들어온 곳이 현재 홈구장으로 쓰이고 있는 세인트 앤드루스이다. 이 곳에서 첫 경기를 치렀을 때 32,000명 정도 온 것으로 보아 당시의 명성이 꽤나 높았나 보다.
1908년 이후 2부리그에서 머물다 1920-21 시즌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13년 만에 1부리그로 복귀, 1939년까지 중하위권을 기록하며 18년 연속 잔류에 성공했다. 구단 최고 기록인 445경기에서 267골을 득점한 조 브래드포드가 활동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 1931년 처음으로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2부리그의 웨스트 브롬위치에 2:1로 패하며 준우승했다. 1939년 강등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 1943년 클럽명이 지금의 '버밍엄 시티 FC'로 다시 한 번 변경되었다.
종전 후 1947-48 시즌 디비전 2 우승으로 디비전 1 승격과 1949-50 시즌 디비전 2 강등, 그리고 1954-55 시즌 디비전 2 우승으로 1부 승격을 이룬 뒤 1955-56 시즌 6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버밍엄 시티의 최고 순위이다. 해당 시즌 사상 두 번째로 FA컵 결승에 올랐지만 맨체스터 시티에 3대1로 패하며 이번에도 준우승했다. 그리고 1956-57 시즌 인터-시티 페어스컵(현 UEFA 유로파리그)에 출전하며 처음으로 유럽대항전에 출전한 첫 잉글랜드 팀이 되었다.그리고 1960년과 1961년에는 연속으로 인터-시티 페어스컵 결승에 올랐으나 둘 다 준우승했다. 잉글랜드 구단 첫 유럽대항전 결승에 오른 1960년 대회는 FC 바르셀로나에게 1무 1패, 1961년 대회도 AS 로마에게 1무 1패로 우승을 놓쳤다. 하지만 1963년에는 리그컵 결승에서 세컨시티더비 라이벌 아스톤 빌라를 3대1로 꺾으며 구단 첫 메이저 트로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팀 이사진이 투자에 소홀하고 자체 선수 육성에도 힘을 기울이지 않아 첫 우승의 영광의 기운은 오래가지 못했고 1964-65 시즌 10년 만에 디비전 2로 강등되었다.
1965년 웨스트 미들랜즈 라이벌 중 하나인 울버햄튼의 전성기를 이끌고 은퇴했던 스탠 컬리스[8]를 은퇴를 번복하게 하고 영입했으나 그가 맡은 5년 동안 승격에 실패했다. 1972년이 되어서야 7년 만에 디비전 1에 복귀했다. 1972년부터 79년까지 1부리그에서 보냈는데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974년 승격의 1등공신이자 승격 후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던 밥 래치포드를 선수 두 명[9]과 현금을 얹어 에버튼으로, 1976년에는 피터 위드와 케니 번스를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시켰다.[10] 잉글랜드의 유일한 월드컵 우승 감독인 알프 램지가 1976년에 보드진에 합류한 뒤 1977년 9월 임시 감독직을 맡기도 했지만 이듬해 3월 주포였던 트레버 프랜시스의 끊임없는 이적 요구로 불거진 보드진과의 불화로 이듬해 3월 사임했다. 후임은 짐 스미스 감독. 1978-79 시즌 결국 21위로 강등되었는데 강등이 유력해지자 트레버 프랜시스[11]를 잉글랜드 챔피언 노팅엄 포레스트로 영국 최초 100만 파운드에 이적시켰다.[12]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 멤버 알베르토 타란티니를 영입했지만 대실패작이 되었다. 맨유의 브라이언 그린호프를 때려눕히고, 관중과 주먹을 주고받은 것 외에는 딱히 한 일이 없었다. 포포투에서 선정한 월드컵 활약 이후 이적했다가 망한 1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구단 역사상 최악의 영입. ##
강등 이후 1년 만에 리빌딩에 성공하며 1979-80시즌 디비전 2에서 지난시즌 강등 동기였던 첼시 FC에 골득실에서 앞선 3위를 기록하며 1년 만에 디비전 1에 복귀했다. 1980-81 시즌 13위로 중위권을 마크한 뒤 1981-82 시즌 성적부진으로 짐 스미스 감독이 경질되자 놀랍게도 지난시즌 아스톤 빌라를 잉글랜드 챔피언으로 이끌고 비록 리그는 중위권이지만 유러피언컵에선 8강까지 이끌고 있었던 론 손더스 감독이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빌라 감독을 내려놓고[13] 스미스의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손더스는 빌라를 우승으로 이끈 것과는 반대로 버밍엄에서는 득점력 부족을 겪으며 부임 2년 만에 버밍엄은 4년 만에 2부리그로 다시 떨어지고 말았다. 1984-85 시즌 1년 만에 디비전 2 준우승으로 재승격하나 1985-86 시즌 또다시 1년 만에 재강등을 당하고 말았고 손더스는 FA컵에서 논리그 팀에게 패한 뒤 사임했다. 1986년 이후 버밍엄 시티는 16년이나 1부리그를 밟지 못하는 안습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디비전 2에서도 하위권에서 보내다 1988-89 시즌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디비전 3, 3부리그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시기에 버밍엄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고 3년 만에 2부리그 디비전 1[14]으로 올라온 1992-93 시즌 한때 법정관리 상태에 놓이기도 했지만 언론인이던 데이비드 설리번이 구단주로 부임한 뒤 재정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 시즌 간신히 강등권에서 탈출했으나 다음 시즌에는 막판의 대분전에도 불구하고 지역 라이벌 웨스트브롬에 골득실에서 밀려 22위로 2년 만에 3부리그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1994-95 시즌 디비전 2 우승을 차지하며 1년 만에 2부리그로 재승격을 이루어냈고 풋볼 리그 트로피에서도 칼라일을 꺾고 우승하며 하부리그 더블을 이루었다. 재승격 1년 뒤 설리번 구단주는 구단의 레전드 공격수이자 셰필드 웬즈데이를 프리미어리그 중상위권으로 이끌었던 트레버 프랜시스를 감독직으로 앉혀 17년 만에 팀으로 복귀시켰다.
17년 만에 복귀한 프랜시스는 맨유를 우승으로 이끈 캡틴이었던 스티브 브루스를 영입했다. 프랜시스 체제에서 버밍엄은 차츰 성적을 끌어올려 프리미어리그 승격 플레이오프 단골이 되었다. 1997년 데이비드 골드가 설리번과 공동 구단주가 되었고, 2000-01 시즌에는 2부리그 팀으로 리그컵 결승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미니트레블을 기록했던 리버풀 FC에 아쉽게도 승부차기 끝에 준우승을 기록했다. 번번히 플레이오프 결승도 아닌 준결승에서 물을 먹자 프랜시스에 대한 설리번의 신임은 약해졌고 결국 2001-02 시즌 초반 중위권에 머물자 프랜시스는 경질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크리스탈 팰리스를 이끌고 있던 스티브 브루스가 감독으로 취임하여 팀을 리빌딩해, 플레이오프로 이끌며 준결승에서 밀월을 1,2차전 합계 2-1로 꺾은뒤 결승에서 노리치 시티를 승부차기로 꺾고 16년 만에 1부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그러면서 2002-03 시즌 프리미어리그 개편 후 첫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2.2. 2002년~2008년


2002-03 시즌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자마자 로비 새비지와 알리우 시세, 케니 커닝엄, 클린튼 모리슨을 영입했다. 개막 후 2연패를 기록했지만 3라운드에서 에버튼에 1대1로 비긴 후 4라운드 리즈에 2대1 승리를 거두며 프리미어리그 첫 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개편 후 프리미어리그에서 처음 열린 아스톤 빌라와의 세컨드 시티 더비에서는 3대0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빌라의 수비수 올로프 멜베리가 골키퍼의 헛발질로 인해 쓰로인으로 자책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영상[15] 전반기에는 그럭저럭 잔류할 만한 성적을 기록했고 프리미어리그 잔류를 위해 스티븐 클레멘스, 매튜 업슨, 제이미 클래펌을 영입했고 구단 역사상 2번째 월드컵 우승멤버인 크리스토프 뒤가리를 보르도에서 임대영입했다. 부침을 겪으며 16위까지 내려왔지만 리버풀을 상대로 2:1 승리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9경기 7승을 거두며 잔류를 일찌감치 확정지었고 13위로 마감했다. 빌라 원정에서는 2:0 완승[16]을 거두며 최대 라이벌을 상대로 더블에 성공했다. 뒤가리는 4월에 4연승을 거두는 과정에서 4경기 5골을 기록하며 프리미어리그 잔류의 1등 공신이 되었다. 임대의 전설. 9경기 7승을 거뒀는데도 승점 42점으로 강등된 웨스트햄과 승점 6점 차이 밖엔 안 난 것을 고려했을 때 뒤가리의 활약상이 없었다면 잔류를 장담하지 못했다.[17][18]
2003년 오프시즌에서 더 나은 성적을 위해 데이비드 던을 블랙번으로부터 사고, 뒤가리와 2년 계약을 맺었다. 2003-04 프리미어리그 정규시즌에서 돌풍을 일으켰는데, 각각 풀럼과 첼시에서 임대된 마이크 테일러 골키퍼와 17골로 득점 순위 5위에 오른 핀란드산 골게터 미카엘 포셀이 맹활약했다. 개막 후 6경기에서 4승2무를 거두며 4위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이후 DTD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며 내려갔다가 다시 정신차리며 3월 무렵엔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이 주어지는 4위에 승점 1점 모자란 5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11경기에서 단 1승에 그치며 12승14무12패, 승점 50점으로 10위로 마쳤다. 전반기에 강등권 근처에서 고전했던 빌라는 6위로 뛰어오른 것을 보면 씁쓸한 마무리.
2004-05 시즌을 앞두고 에밀 헤스키와 대런 앤더튼, 드와이크 요크, 예스페르 그론카에르, 마리오 멜키오트 등등 빅네임들을 영입하며 의욕적으로 보냈다. 초반 11경기 1승으로 부침은 있었지만 12월에 기록한 4연승 덕분에 이렇다할 위기 없이 잔류하기에 적당한 순위인 12위로 마감했다. 헤스키는 10골로 제몫을 했지만 지난해의 에이스였던 포셀이 재임대되어 부상으로 4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론카에르는 감독과의 불화로 겨울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그래도 빌라를 상대로는 두 시즌 전과 마찬가지로 2경기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2005-06 시즌에는 극심한 골가뭄을 겪으며 4시즌 만에 18위로 강등되었다. 최다 득점자가 5골에 그친 이리 야로식일 정도로 공격력이 부실했다. 팀 득점도 28골로 선덜랜드에 이어 최소득점 2위. 헤스키도 4골 밖에 넣지 못했고 임대 신분을 벗은 포셀과 판디아니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FA컵에서는 8강 리버풀과의 홈경기에서 7:0으로 굴욕적인 대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칼링컵에서는 박지성에게 잉글랜드 무대 첫 골을 허용해주며 맨유에 탈락했다.
2006-07 시즌에는 챔피언십에서 아스날에서 임대온 3인방[19]이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선덜랜드에 이어 준우승으로 1시즌 만에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 2007-08 시즌 중반인 11월 브루스는 구단의 인수를 둘러싸고 다소 어수선한 상황에서 공석이 된 위건 애슬레틱 감독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감독을 레인저스 FC의 명장이자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유로 2008 본선 코앞까지 이끌던 알렉스 맥리시가 감독이 되었다. 맥리쉬는 데뷔전 토트넘 원정에서 세바스티안 라르손의 맹활약으로 3:2 역전승을 거두며 좋은 출발을 보였다. 빅4(맨유, 첼시, 아스날, 리버풀)을 상대로 4무4패[20]에 모두 1점차 패배로 좋은 모습을 보였고 칼링컵을 우승한 토트넘을 후반기에는 4:1 대승을 거두며 더블을 기록했으나 후반기 위건, 선덜랜드, 볼튼, 레딩, 풀럼 등등 반드시 잡아야 할 하위권 팀들과의 맞대결에서 모두 패배하였고 더비와의 경기에서도 무승부에 그쳤다. 특히 37라운드 19위였던 풀럼과의 단두대매치에서 2:0으로 패배한 것이 결정적인 치명타가 되었고 최종전에서 블랙번을 홈에서 4:1로 대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날 풀럼과 레딩의 승리로 결국 한 시즌만에 19위로 강등되었다.

2.3. 2008-09 시즌


2008-09 시즌을 앞두고 에버튼과 WBA에서 리 카슬리케빈 필립스를 영입했고 이 둘은 각각 주장과 핵심 공격수 역할을 맡았다. 시즌 초부터 끝까지 무난하게 2위권을 잘 유지하며 울버햄튼에 이어 2위로 프리미어리그로 승격되었다.

2.4. 2009-10 시즌


지난 시즌 임대되었던 리 보이어를 완전 영입했으며 배리 존슨과 크리스티안 베니테스, 로저 존슨, 스콧 댄을 영입했다.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에서 조 하트를 임대영입했다.
2009년 10월 구단주였던 골드 형제가 중국계 미국인 카슨 양에게 구단을 팔았다.[21]
승격 첫 시즌에 스콧 댄-로저 존슨 센터백 듀오의 활약으로 9위로 호성적을 기록했다. 초반 9경기에서 2승1무6패로 저조했지만 그 이후 5연승을 포함하여 12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며 한때 리버풀보다도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알렉스 맥리쉬 감독은 12월의 감독에 선정되기도 했다. 후반기 페이스가 떨어지긴 했지만 중반에 쌓아놓은 승점 덕분에 강등 걱정과는 거리가 먼 중위권에서 시즌을 보냈다. 홈에서는 10월 볼튼전 1:2 패배[22] 이후 15경기 연속 무패로 마감했다. PFA 올해의 팀에 골키퍼 조 하트가 선정되었고 그 활약상을 인정받으며 시즌 후 2010 월드컵 대표로 뽑히게 되었다.

2.5. 2010-11 시즌


칼링컵 결승에서 아스날을 2:1로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48년 만에 우승했으나, 정규 시즌에서 18위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2년 만에 강등당했다.
맨시티로 돌아간 조 하트의 빈 자리는 맨유로부터 벤 포스터를 영입하며 공백을 메웠다. 세르비아 대표 니콜라 지키치를 영입했으며 2010 월드컵에서 칠레 국대로 좋은 활약을 보인 장 보세주르를 데려오기도 했다. 그 외에는 매트 더비셔와 알렉산드르 흘렙을 임대로 데려왔다.

개막 후 4경기에서 1승3무로 시작했으나 5라운드 승격팀이자 지역라이벌팀인 WBA 원정에서 3:1로 패하며 첫 패배를 기록했다. 그리고 7라운드 개막 후 3무3패로 꼴찌에 있던 에버튼에게 홈에서 0:2로 패하며 지난시즌부터 이어온 18경기 연속 홈 무패도 깨지고 말았다. 그 이후 맨시티와 0-0 무승부, 첼시에 1-0 승리를 기록하는 등 끈적한 모습을 보이지만 중하위권 팀들을 상대로도 좀처럼 승리하지 못하고 무승부만 적립하며 애매한 순위를 기록했다. 그 사이 칼링컵에서는 승승장구했고 하위리그 팀들을 연속으로 상대한 뒤 8강에서 세컨드 시티 더비 라이벌 아스톤 빌라를 2:1로 꺾고 준결승에 올라갔다. 그리고 준결승에서는 웨스트햄을 상대했는데 1차전 원정에서 2:1로 패배한 뒤, 2차전 홈에서 3:1 역전승을 거두고 2000-01 시즌 이후 10년 만에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는 아스날을 상대로 지기치와 임대온 오바페미 마르틴스의 득점으로 2:1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며 48년 만에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칼링컵에서 우승했으니 이제 강등권 탈출에만 전념하면 되었으나 오히려 칼링컵에서 우승한 뒤 급추락하기 시작했다. 2010년 12월 영국 전역에 내린 큰 폭설로 취소된 2경기를 포함하여 컵대회 2개까지 치르니 체력이 남아돌 리가 없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우승 후 첫 경기였던 WBA와의 홈경기에서 1:3으로 패배하며 강등권으로 추락해버렸고 꼴찌였던 위건 원정에서도 1:2 역전패를 당하며 생존왕으로 하여금 생존 희망을 가지게 했다. 8강까지 올라간 FA컵에서도 이청용에게 결승골을 허용하고 3:2로 지며 탈락했다.
최악의 3월을 보내고 나서 4월 들어 볼튼과 선덜랜드를 홈에서 이기고 블랙번에 비기며 왠만하면 강등은 피하는 것이 유력했다. 그러나 거짓말같이 마지막 6경기에서 1무5패를 당했고 위건과 블랙번, 울버햄튼이 막판에 스퍼트를 내는 바람에 결국 강등당하고 말았다. 34라운드 리버풀 원정에서 0:5 대패를 당한 것은 안그래도 득점이 적은 상황에서 골득실에서 불리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으며 37라운드 풀럼과의 홈경기에서도 0:2로 패하며 최종전을 앞두고 승점 39점에 골득실 -20으로 18위 블랙풀에 골득실에서 1점 앞선 17위였다. 19위 위건도 버밍엄과 승점이 같았고 버밍엄은 위건에 골득실에서 겨우 2점 앞섰다. 15위 블랙번과 16위 울버햄튼은 같은 승점 40점이었고 울버햄튼의 골득실은 -19였다. 버밍엄이 최종전에서 토트넘 원정을 가는 가운데 블랙번과 울버햄튼은 시즌 최종전 맞대결이 예정되어 있었고 블랙풀과 위건은 각각 맨유와 스토크 원정을 떠나야 했다.
최종전은 총 4경기 결과에 따라 매 시각마다 순위가 바뀌는 대혈전이 벌어졌다. 블랙번은 울버햄튼 원정에서 3:0으로 먼저 앞서가며 사실상 잔류에 성공했고 울버햄튼이 한 골 따라가며 3:1이 되었다. 블랙풀은 맨유 원정에서 한때 2:1로 앞서갔으나 2:4로 역전당하며 낙오되었고 위건은 후반 막판에 터진 로다예가의 결승골로 사실상 잔류는 유력해진 가운데 버밍엄은 토트넘에게 1:0으로 지며 강등권에 있다가 크레이그 가드너의 동점골로 1:1이 되며 울버햄튼에 골득실 1점이 앞서 잔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울버햄튼의 스티븐 헌트가 종료 5분을 남기고 3:2로 추격하는 골을 득점하며 이대로 끝나면 골득실이 같고 다득점에서 밀려 강등되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결국 토트넘 원정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으나 후반 추가시간에 파블류첸코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18위로 강등되고 말았다. 요요클럽 답게 빠르게 EPL에서 볼 줄 알았으나 아직까지도 EPL을 밟지 못하고 있다.
강등의 책임을 지고 맥리쉬 감독은 사퇴했는데 엉뚱하게도 최대 라이벌인 아스톤 빌라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16위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짤리며 양 팀 모두로부터 공적이 되었다.

2.6. 2011-12 시즌


맥리쉬의 후임으로는 지난 시즌 중반까지 뉴캐슬을 이끌던 크리스 휴튼을 선임했다.
지난시즌 칼링컵 우승으로 유로파 리그에 진출했는데, 48강에서 SC 브라가, 클뤼프 브뤼허(벨기에), NK 마리보르와 같은 조가 되어 3승 1무 2패로 아쉽게 승점 1점차로(둘 다 3승 2무 1패) 브뤼게랑 브라가에게 32강을 넘겨야 했다.
유로파리그와 FA컵 재경기 등을 포함, 모든 대회를 통틀어 공식경기 62경기를 치르는 강행군 때문에 리그에서 고전하며 중위권을 맴돌다가 후반기에 반등하면서 4위로 마쳤다. 그리고 지난시즌 강등 동기였던 5위 블랙풀과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1차전 원정에서 0:1로 패하고, 2차전에서 2:2로 비기며 합계 2:3으로 탈락했다.

2.7. 2012-13 시즌


크리스 휴튼이 공석이 된 프리미어리그 노리치 시티의 감독으로 떠나고 리 클락이 신임 감독이 되었다.
15승16무15패로 6위 레스터와 7점 차, 강등권인 22위 피터버러에 승점 7점차인 12위로 마쳤다. 유로 2012에 선발된 바 있는 잉글랜드의 유망주 골키퍼 잭 버틀랜드는 46경기 전 경기에 출장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2.8. 2013-14 시즌


2013-14 시즌은 시즌 내내 하위권에서 보내다가 41라운드에서 45라운드까지 5연패를 기록하며 최종전을 앞두고 강등권인 22위로 내려갔다. 최종전 볼튼 원더러스 원정에서 2:0으로 지다가 지기치가 78분에 추격골을, 그리고 카디스가 93분에 동점골을 터뜨려 극적으로 2-2로 비기며 골득실차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된 2010-11 시즌과 비슷했지만 결과는 반대가 되었다.

2.9. 2014-15 시즌


2012-13 시즌부터 팀을 이끌던 리 클락 감독이 12경기 만에 21위를 기록하며 성적 부진으로 결국 10월 20일 경질되었다. 대행 체제에서 홈에서 본머스에게 0:8로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은 뒤 개리 로웻을 새 감독으로 맞아들였다. 로웻 체제에서 반등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며 강등 위기에서 10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리며 나름 선방한 시즌을 보냈다.

2.10. 2015-16 시즌


2015-16 시즌에는 44라운드 기준 16승 13무 15패를 기록하며 9위를 기록 중이다. 승격 플레이오프권인 6위 셰필드 웬즈데이와는 승점 10점 차이가 나며 승격은 좌절되었다. 그런데 라이벌인 아스톤 빌라가 프리미어 리그 15-16시즌에 제대로 망가지면서 강등되어, 16-17 시즌 풋볼 리그 챔피언십에서 세컨드 시티 더비가 성사된다.

2.11. 2016-17 시즌


2016-17 시즌은 초반 아스톤 빌라가 폭망한 것과 달리 플레이오프권을 노리며 순항중이었다. 그런데 구단주가 2016년 12월 갑자기 잘 하고 있던 개리 로웻 감독을 자르고(당시 버밍엄은 득실차로 플레이오프권에 뒤진 7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로웻 감독은 경질 직전 경기도 승리했다.) 지안프랑코 졸라를 감독직에 앉히면서 팀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잘 나가던 팀은 혼란에 빠졌고 졸라는 부임 후 10경기 동안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며 리그 2승 6무 11패를 기록하며 팀을 강등권 근처까지 떨어뜨렸다. 결국 43라운드 강등 라이벌 버튼 알비온에게 패배하여 팀이 20위로 떨어진 직후 졸라는 자진사퇴하고 말았다. 강등권인 22위와는 불과 3점 차. 후임으로는 백전노장 해리 레드냅 감독이 부임했는데, 레드냅이 런던 이북의 팀을 지도하는 것은 그의 긴 감독 커리어 중 최초이다.
이후 남은 3경기를 2승 1패로 마치고 챔피언십 잔류에 성공했다.

2.12. 2017-18 시즌


그러나, 2017-18 시즌 연패를 당하며 레드냅 감독도 사임했다. 11차전에선 헐 시티 에게 1-6 참패를 당하며 강등권인 22위를 기록 중,
45라운드 현재 20위를 기록중인데 문제는 최종 라운드에서 3위 풀럼을 만나게 됐다는 것. 버밍엄이 이긴다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만약 버밍엄이 지고 반즐리, 버턴, 볼튼이 이길시 버밍엄은 EFL 리그 1으로 강등된다. 또한 이 경기는 카디프와 풀럼의 운명이 걸린 경기이기도 한데, 풀럼이 이긴다면 카디프와 레딩의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하며, 패배할 시 카디프가 2위를 기록하며 프리미어 리그로 자동 승격하고, 풀럼은 3위로 승격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걸린 경기에서 버밍엄은 풀럼을 3:1로 때려잡는 이변을 보여주며 풀럼을 승격 플레이오프로 보내버렸고 최종 순위는 19위로 리그 잔류에 성공했다.

2.13. 2018-19 시즌


주축인 체 아담스, 개리 가드너, 루카스 유트케비츠, 호타의 활약으로 화끈한 공격을 펼쳐 중위권에 머물렀지만 시즌 후반에 5연패를 하여 18위로 떨어졌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유르고르덴 IF 풋볼에서 케빈 음랍티를 영입했으나 4월이나 되어서 골을 넣는 등 미미한 활약상을 펼친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결국 시즌 17위로 마무리하였다.
또한 FA컵, EFL컵 모두 첫 라운드에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2.14. 2019-20 시즌


주드 벨링엄이 16세의 나이로 1군에 소집되었고, 버밍엄의 최연소 출전기록을 갈아치웠다. 벨링엄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버밍엄은 리그를 20위로 마치며 가까스로 잔류하였다. 이후의 여름이적시장에서 주드 벨링엄이 26M에 도르트문트로 이적하면서 버밍엄은 재정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수 있었고 , '''벨링엄의 22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

3. 1군 스쿼드




4. 기타


  • 아스날 FC가 버밍엄 시티와 악연이 있다. 2007-08 시즌 2번이나 비겨 아스날의 리그우승 도전의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 것도 모자라 에두아르두 다 실바가 버밍엄 시티와의 경기에서 살인태클로 골절상을 입었기 때문. 경기 종료 직전 이기던 경기를 클리쉬가 페널티킥을 허용하며 비기자 주장이었던 윌리암 갈라스가 광고판을 차기도 하는 등 어수선한 모습이 나왔고, 결국 버밍엄전 이후로 내리막길을 걸은 가운데 코앞에서 리그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버밍엄이 강등 후 다시 올라온 2009-10 시즌 막판에 버밍엄 원정에서 알무니아의 실책성 플레이로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2010-11 시즌 칼링컵 결승에서는 버밍엄이 2:1로 승리하며 6년째 이어지던 아스날의 무관이 길어지게 했다.


[1] /ˈbɜːrmɪŋəm ˈsɪtɪ/[2] 창단 당시(1875)의 명칭은 '''스몰 히스 얼라이언스(Small Heath Alliance).''' 이후 1905년에 '''버밍엄 FC(Birmingham FC)'''로 바뀌고, 1943년에 들어서야 현재 명칭인 '''버밍엄 시티 FC(Birmingham City FC)'''로 바뀐다.[3] 홍콩에 위치한 스포츠 투자 기업[A]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 위치한 1부 리그 팀을 모아 단축 운영한 리그[4] 라이벌 아스톤 빌라는 미국의 스포츠재벌 랜디 러너가 인수했다.[5] 버밍엄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도 있었던 크레이그 가드너는 최대 라이벌인 아스톤 빌라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6] 이 때가 프로 선수로서 첫 계약이라고 한다.[7] 1894-96, 1901-02, 1904~08 1부리그, 1896-1901, 1902-03 2부리그[8] 울버햄튼의 홈구장인 몰리뉴 스타디움 앞에 이 분의 동상이 세워져있다.[9] 그 중 한 명이 에버튼 최고의 레전드인 하워드 켄달이다.[10] 노팅엄으로 간 두 명은 1976-77 시즌 노팅엄의 유일한 리그 우승 멤버가 되었다.[11] 마이클 오언 이전 영국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 보유자이자 버밍엄에서의 9년 간 329경기에서 133골을 득점했다.[12] 프랜시스는 3개월 뒤 말뫼 FF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결승골의 주인공이 되며 노팅엄의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의 1등공신이 되었다.[13] 아스톤 빌라는 토니 바튼 수석코치가 후임 감독으로 팀을 추스르며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우승했다.[14] 지금의 프리미어리그가 창설된 시즌이다.[15] 7분 24초에 쓰로인 자책골 장면이 나온다.[16] 이 경기에서 아스톤 빌라의 디온 더블린로비 새비지를 상대로 박치기를 시전하며 퇴장당했다.[17] 사실 웨스트햄은 마지막 경기였던 버밍엄 시티와의 경기에서 이겼어도 17위 볼튼에 골득실에서 밀려 강등이었다. 승점 44점으로도. 뉴캐슬은 그 승점으로 2017-18 시즌 10위를 기록했다. 그 정도로 02-03 시즌 중하위권은 전쟁터였다.[18] 뒤가리는 이 활약으로 완전이적하지만 다음 시즌에는 저조한 활약을 보이고 은퇴했다.[19] 세바스티안 라르손, 파브리스 무암바, 니클라스 벤트너. [20] 리버풀과 아스날엔 모두 비겼다. 아스날을 상대로 마틴 테일러의 살인태클로 에두아르두가 골절상을 입었는데 이 경기를 기점으로 아스날은 급격한 하락세에 빠지며 코앞에 다가온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21] 이후 형인 데이비드 골드 전 회장은 2010년부터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22] 이 경기는 이청용이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을 넣은 경기이며 데이비드 골드 구단주 체제의 마지막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