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프랑코 졸라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첼시 FC 수석코치를 맡았다.
첼시 FC의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는 첼시의 레전드이며, 이탈리아의 레전드이다.
2. 클럽 경력
2.1. 초기
그는 뉴오레세에 데뷔한 뒤 토레스로 이적하여 팀의 2부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2.2. 나폴리
나폴리 시절 졸라의 프리킥은 디에고 마라도나한테 직접 배웠다고 하며, 이후 꾸준한 노력과 근성으로 세계 최고의 프리키커로 평가받게 된다. 시니샤 미하일로비치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 졸라는 세리에 A 최다 프리킥 골 기록 보유자였다.
졸라는 5시즌 연속으로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했고, 특히 94년과 95년에는 19골을 넣는 결정력이 뛰어난 선수 였으며, 이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2.3. 파르마
파르마 시절의 졸라는 2경기당 1골씩 넣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팀의 UEFA 슈퍼컵 우승과 UEFA컵 우승에 공헌하였다.
2.4. 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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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지안프랑코 졸라는 서른 살이라는 축구선수치고 적지않은 나이에 45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프리미어리그의 첼시 FC로 이적했다. 유로 1996에서의 부진 이후 심리적으로 동요하며 리그에서도 고전하고 있던 그에게 루드 굴리트 첼시 선수 겸 감독이 러브콜을 보낸 것. 당시 이탈리아 국가대표는 타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극도로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부진하던 중 잉글랜드행을 택한 그의 선택은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알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30대, 그의 인생 2막이 잉글랜드에서 펼쳐지기 시작한다. 팬들을 열광시키는 활약으로 1997년 기자단선정 EPL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는데, 이는 시즌 도중 합류한 선수로는 최초였다. 당시 정상급 리그라고는 할 수 없었던 EPL에 데니스 베르캄프, 주니뉴 파울리스타 등과 더불어 한 차원 높은 기술을 전파해 리그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평을 들었다.
7시즌 동안 뛰면서 FA컵와 UEFA 컵 위너스 컵, UEFA 슈퍼컵 등의 타이틀을 따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의 활약으로 첼시는 유럽에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강호로 자리매김했고[3] , 그의 시기에 다져진 강호의 기틀은 이후 (자본의 수혜에 힘입은 바가 있지만) 첼시를 세계 유수의 빅클럽으로 끌어올리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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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시즌 30대 중반이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계설을 불식시키면서 14골을 기록하였고, 팀의 챔피언스 리그 복귀에 큰 몫을 했다. 잘 알려져 있듯 이 시즌에 첼시가 4위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구단 인수도 없었을 것이고 첼시의 운명은 지금과 크게 뒤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현재까지도 첼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큰 이견 없이 꼽히고 있으면서 동시에 2005년 선정된 첼시 100주년 베스트 일레븐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의외라면 의외인 사실로 그의 입지와 리더십에도 불구하고 주장으로 출장한 경기는 많지 않은데, 그의 시기에는 부동의 주장 데니스 와이즈가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졸라는 부주장을 맡았다. 와이즈의 이적 이후로는 마르셀 드사이가 주장을 맡았고 졸라는 부주장직에 만족했다. 그리고 2003년 첼시와 고별을 하였다. 첼시는 졸라의 이적 이후 그의 등번호 25번을 누구에게도 배정하지 않으면서 사실상의 영구결번 취급을 하고 있다.
2017-18시즌 에당 아자르가 졸라가 첼시에서 세웠던 기록인 229경기 출전 80골 31어시에, 17R 기준으로 231경기 80골 29어시를 기록하며 공격포인트 2개만 더 기록하면 졸라를 넘어설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4] 아자르가 첼시에 오고나서 2번의 리그 우승, 2번의 우승경쟁 중인 상황이란 점을 봤을 때, 중위권팀이었던 당시 첼시 팬들에게 졸라가 얼마만큼의 임팩트를 주었을지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2.5. 칼리아리
현역 막바지, 그는 가족의 미래를 생각해서 첼시를 떠나 당시 세리에 B에 있던 고향팀이자 자신이 응원하던 팀인 칼리아리 칼치오에 이적하게 된다. 첼시는 그 이후 러시아의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구단주가 되었고, 워낙 인기가 높던 졸라를 잡아달라는 팬들의 성원에 따라 로만 구단주는 거액의 수표를 칼리아리로 보내지만 졸라는 거액을 거절하고 칼리아리 칼치오에서 잔류 의지를 표명했다.
주장 완장을 차고 등번호 10번을 짊어진 판타지스타 졸라는 2부리그에서 13골이나 넣었고,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키는데 공헌하게된다. 이듬해에도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훌륭한 테크닉을 발휘하는 등 세리에A에서 9골을 넣으며 팀 잔류에 공헌하였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2005년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3. 국가대표
화려했던 클럽 경력에 비해 국대 커리어는 한없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전례없는 판타지스타의 범람기를 맞고 있던 이탈리아의 공격 자원들 틈바구니에서 불운한 아주리 커리어를 보냈다. 동세대 선수로 이탈리아의 전설 로베르토 바조와 로베르토 만치니 등이 있었고, 다음 세대에선 무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로이 마카이만큼이나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선수였다. 졸라는 1994 미국 월드컵에 출장하지만, 어디까지나 로베르토 바조와 주세페 시뇨리 등의 후보 선수였고, 드디어 교체 출장해 그라운드에 뛰다가 불과 10분만에 레드카드를 받는다.[5][6] 그리고 월드컵 출장 기록은 여기서 끝나고 만다(...). 파르마에서의 활약으로 유로 1996에서는 바조를 제치고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지만, 조별리그 독일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등 대회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무득점에 그치며 아주리의 조별리그 탈락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결국 이같은 비운의 기록을 남기며 1997년을 끝으로 국가대표 커리어가 마감되고 말았다.
4. 플레이 스타일
이탈리아에서 말하는 판타지스타 스타일이며 뛰어난 드리블과 테크닉으로 예상치 못한 기막힌 플레이로 수비를 농락하였으며 볼간수능력이 뛰어났다. 양발을 모두 사용했으며 중거리슛, 발리슛 등의 원거리 득점 능력뿐 아니라 넓은 시야와 키핑을 이용해 동료를 살리는 능력까지 뛰어났다.
전성기 시절의 그는 예술적인 프리킥 실력은 물론이며, 영어권에서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부르는 1.5선의 위치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선수였다. 빠르게 파고들어가는 스피드, 드리블, 찔러주는 패스는 졸라의 가장 큰 무기였으며, 마라졸라(Marazola) 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관중을 사로잡는 선수였다.
또한 천재형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선수답지 않게 그는 매우 소박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타의 모범이 되는 롤 모델 프로페셔널이었다. 자기 관리에도 뛰어나 신체적 능력이 감퇴한 30대 후반까지도 정상급의 기량을 유지하였다.
5. 지도자
2006년 이탈리아 U-21 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2년 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감독을 맡기 시작한 졸라는 전반기에 부침을 겪었지만, 유로파 진출권인 7위 풀럼 FC에 승점 2점이 모자른 9위를 차지하여 두 시즌 연속으로 중위권으로 시즌을 마감한다.
그러나 09/10시즌 끊임없는 부상병동과 칼링컵에서 만난 극악의 라이벌 밀월 FC와의 충돌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웨스트햄은 좀처럼 하위권에서 치고 올라가지 못하여 강등권을 전전하게 되었고, 결국 17위로 가까스로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한 뒤 지안프랑코 졸라는 경질된다.
12/13시즌 왓포드 FC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챔피언십 3위로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마지막날에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이겼으면 2위로 승격 직행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골키퍼의 실책으로 승격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되었다. 승격 플레이오프 준결승 1차전 레스터 시티 FC 원정에서 0:1로 패하고 2차전 추가시간 상대팀의 페널티킥 실축후 곧바로 나온 역습에 의해 나온 극적인 결승골로 3:1로 승리하여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크리스탈 팰리스 FC와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연장 접전 끝에 0:1로 패하며 프리미어리그 승격에 실패했다.
고향팀이자 친정팀인 칼리아리 칼치오에 닥공덕후 즈데넥 제만 감독을 대신해 감독에 올랐으나, 처참한 성적으로 잘린다. 그리고 칼리아리는 멸망하고 말았다.
2015년 첼시 동료였던 단 페트레스쿠 감독의 뒤를 이어 카타르 스타즈 리그의 알 아라비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해당 시즌 알 아라비는 리그 7위에 그쳤고 졸라는 경질되었다.
2016년 12월 잉글랜드 EFL 챔피언십에 있는 버밍엄 시티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버밍엄의 졸라 선임은 순전히 구단주의 선호에 따른 것으로, 전임 개리 로웻 감독이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경질되고 졸라가 부임하자 팀에 혼란이 찾아왔다. 졸라는 팀 장악에 실패했고 버밍엄은 21경기 동안 단 2승만을 거뒀다. 결국 졸라는 시즌 종료를 세 경기 남기고 강등권 언저리의 성적을 남기고 자진 사퇴하였고, 버밍엄은 해리 레드냅 감독이 구원등판해 2승 1패를 거두며 가까스로 잔류했다.
5.1. 다시 첼시 FC
이후 18-19 시즌을 맞이하며 마우리치오 사리 감독이 취임한 첼시 FC에 수석 코치로 영입되며 스탬포드 브리지로 복귀하게 되었다. 선수 시절 그랬던 것처럼 클럽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겠다며 복귀의 변을 밝혔다.
사리 감독 대신 경기 전 컨퍼런스 셔틀...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경우가 잦다. 같은 나폴리 출신인 스트라이커 곤살로 이과인이 영입된 후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EPL에 입성한 이과인 또한 잘 할 수 있을 거라면서 이과인에게 힘을 싣는 인터뷰를 했다.
이후, 사리가 유벤투스로 떠나면서 졸라 역시 첼시를 떠났다. 새 감독으로 유력한 램파드가 경험이 부족한 감독이다 보니 졸라보다 더 능력있는 수석 코치가 필요했다. 구단은 엠버서더를 제안했지만 졸라가 거절했다.
6. 여담
첼시의 수비수 존 테리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등번호 26번을 달고 있는데 이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등번호 25번을 달았던 영웅 졸라를 뛰어넘겠다는 마음가짐에서 26번을 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짐은 현실이된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잔프랑코 촐라'로 표기하는 게 맞다. 이름의 어감 때문에 중계할 때 애먹는 선수로 꼽히곤 했는데, 표기법에 맞게 표기하고 불렀다면 애먹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
벤 스틸러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화려한 경력에 비해 일반인들에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 때문에 드립용으로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실제로 김성주가 옛날에 이 이름 때문에 중계 도중에 사고를 쳤다. 졸라 잡았습니다! 졸라 달려갑니다! 졸라 슛! 아~ 졸라 아깝습니다!
김성주가 마리텔에서 안정환과 함께 구라이 부랄, 이브라히마 섹, 시바사키와 함께 개드립용 소재로 잘 써먹으면서 인지도가 매우 높아졌다. 여담으로 김성주는 졸라에 관한 얘기를 마리텔 이전에도 종종 하곤 했다.
7. 수상
1997년 FWA 올해의 선수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1998-99, 2002-03 첼시 올해의 선수
2005 첼시 역대 BEST 11 선정
7.1. 클럽
- SSC 나폴리
- 세리에 A 우승: 1989-1990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 1990
- 첼시 FC
- FA컵 우승: 1996-97, 1999-2000
- 풋볼 리그 컵 우승: 1997-98
-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2000
-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1997-98
- UEFA 슈퍼컵 우승: 1998
7.2. 국가 대표
- FIFA 월드컵 준우승: 1994
[1] 2003년 수훈,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장교장 Ufficiale 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2] 2004년 명예 수훈[3] 99-0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 FC 바르셀로나와의 홈경기에서 1골 2어시스트로 3-1 완승을 이끈 것은 홀몸으로 첼시의 유럽에서의 경쟁력을 입증한 일대 사건이었다. 2차전 누 캄프 원정에서 연장 끝에 5-1로 져서 4강 진출엔 실패했지만...[4] 마침 포지션도 세부적인 디테일은 다르지만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변경중이다.[5] 사실상 오심[6] 못내 아쉬웠는지 레드카드 판정을 받고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불복하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