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궈안

 




[image]
'''베이징 중허 궈안'''
'''Beijing Sinobo Guoan'''
'''정식명칭'''
北京中赫国安足球俱乐部
'''구단 형태'''
기업구단
'''리그'''
중국 슈퍼 리그
'''창단'''
1992년
'''연고지'''
베이징시 차오양구
'''홈 경기장'''
베이징 노동자 경기장 (66,161명)
'''모기업'''
중허 그룹 (부동산, 64%) / CITIC 그룹 (금융, 36%)[1]
'''구단주'''
리지엔이
'''감독'''
슬라벤 빌리치
'''주장'''
위다바오
'''별명'''
御林军 (어림군, 친위대)
'''라이벌'''
상하이 선화, 톈진 터다
'''홈페이지'''

'''우승 기록 '''
'''중국 슈퍼 리그 (1부)'''
(6회)
1957, 1958, 1973, 1982, 1984, 2009
'''FA컵'''
(5회)
1985, 1996, 1997, 2003, 2018
'''중국 슈퍼컵 '''
(2회)
1997, 2003
1. 개요
2. 역사
2.1. 슈퍼리그 출범 전
2.2. 슈퍼 리그 출범 후
3. 라이벌팀
4.1. 2019년 이전
4.2. 2019년
4.3. 2020년
5. 기타
6. 선수단
7. 주요 선수


1. 개요


베이징 궈안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축구 1부리그인 중국 슈퍼리그 팀이다.
1992년에 창단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의 금융기업인 CITIC과 베이징시 스포츠 위원회가 팀을 만들었다. 1995년에 갑리그에서 준우승과 1996년 ~ 1997년, 2003년에 중국 FA컵을 우승했고, 리그 우승 팀과 중화인민공화국 FA컵 우승 팀이 겨루는 슈퍼컵에서 2번 우승했다. 2003년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자동차와 네이밍 스폰서 계약을 맺으면서 팀 이름이 잠시 베이징 현대로 바뀌었었다. 이 계약이 2006년에 끝나면서 팀 이름도 원래 이름으로 돌아왔다. 2009년 중국 슈퍼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 역사



2.1. 슈퍼리그 출범 전


1951년에 창단해 1956년 리그에 참가해 6위를 기록했다. 이후 1957, 1958년에 2연속 우승을 해 잠시 전성기를 맞았으나 1960년 14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1961년 리그 4위를 기록해 부활하는가 했지만 1962년 12위로 곤두박질쳐 3년간 들쑥날쑥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리나 1963년 다시 우승을 차지했고 1964년 6위를 기록했고 1965년 3위를 기록했다.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팀이 풍비박산이 나고 중국축구 전체가 암흑기를 맞이했다. 그러다 중국 공산당이 1973년 리그 재개를 허용했고 이에 베이징 궈안은 다시 리그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그해 우승을 차지한다. 1974년에는 3위를 기록했고 1977년 2위 1978년 3위를 기록하면서 나름대로 강팀이였으나 1979년 10워 1980년 9위로 또다시 성적이 곤두박칠한다.
1981년 3위를 기록했고 1982년 9년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83년 도에는 북부리그 2위를 차지했고 1984년 4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85~1988년까지는 1986년 3위를 기록한거 외에는 중하위로 쳐졌고 1988년 급기야 강등을 당했다.
1989년 2부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승격에는 실패했고 1990년 2부리그 우승을 해 1부리그로 승격된다. 1991년 3위 1992년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93년 지아A리그가 출범하게 되고 이해 베이징 궈안은 3위를 기록한다. 이후 1994년 8위를 기록하면서 주춤했으나 1995년 준우승을 기록한다. 1996년 리그를 4위로 마쳤으나 FA컵 우승을 하게되고 1997년도에도 리그 3위, FA컵을 우승하면서 2연속 FA컵 우승을 기록한다. 하지만 베이징은 1997시즌이 끝나자 리그우승이 없다는 이유로 감독을 경질하게 된다.
1998년 슈퍼컵 우승을 기록하게 되고 리그3위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1999년 6위로 마치자 또다시 감독을 경질했다. 이후 2000년 6위 2001년 8위를 기록하면서 그저 그런 중위권팀으로 자리잡아 가게 된다.
2002년 리그3위로 마쳤고 2003년 리그 9위를 기록했으나 3번째 FA컵 우승을 이루어 낸다. 그러나 이때는 감독이 3명이나 바뀌는등 매우 혼란스러운 시즌이였다.

2.2. 슈퍼 리그 출범 후


2004년 중국 슈퍼 리그가 출범되고 이해 베이징 궈안은 슈퍼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기분 좋게 출발했지만 7위로 시즌을 마쳤고 또다시 감독을 경질했다. 2005시즌 6위 2006시즌에는 3위를 기록했으나 또다시 감독을 경질했고 2007년 이장수 감독을 선임하게 된다.
2007년 이장수 감독 지휘아래 리그 준우승을 거두고 2008년에는 3위를 거두며 나름대로 상위권 팀으로 자리매김했으나 2009년 1위를 달리고 잘하고 있는데도 이유없이 갑자기 이장수 감독을 경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퍼리그 첫 우승을 차지했지만 잘하고 있는 이장수 감독을 자른것 때문에 팬들에 분노는 극에 달했다.
어러한 상황속에서 2010시즌을 맞이했지만 새로운 감독은 이장수보다 못한 능력을 보여줘서 중도 결질 당했고 이리저리 헤마다가 겨우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011년도에는 새로운 강호 광저우 헝다에게 우승을 내줬고 2012년도에는 4위~6위를 들쑥날쑥 하다가 겨우 3위를 차지했다. 2013년도에서 3위를 기록했다.
2014년 광저우 헝다와 우승경쟁을 펼쳤으나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018년 리그는 4위로 마쳤으나, 중국 FA컵에서는 산둥 루넝을 꺾고 15년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18, 2019년 포르투갈에서 시즌전에 열리는 아틀란틱 컵에 참가했다.

3. 라이벌팀


베이징상하이는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의 중심적인 도시로서 서로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두 도시는 축구에서도 열띤 경쟁을 벌인다. 경기가 시작하기전 살벌한 분위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 중국 인민해방군이 주둔한적도 있을정도로 과격하고 흉폭할 정도의 응원들이 오가고 폭력이 난무한다.
1994년 베이징 궈안은 갑 A 리그에서 거의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있었지만 상하이 선화에 각각 3:4과 1:5로 패했다.
1997년 베이징 궈안은 상하이 선화에게 복수를 했다. 원정 경기에서 1:5라는 점수로 패배한 이후 베이징 궈안은 상하이 선화를 9:1로 리그 사상 최대 점수 차로 승리한다. 이 기록은 아직도 리그 최대 차 점수 기록으로 남아있다.
2007년 리그에서 베이징 궈안은 상하이 선화를 상대로 9승 8무 11패라는 전적을 갖고 있다. 물론 열세이기는 하지만 원정 경기에서 이기거나 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8년 베이징은 홈에서 상하이에게 0:2로 졌으나 원정에서는 1:1로 비겼다. 2009년에는 베이징이 홈에서 0:0 원정에서 1:1로 승부를 둘다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2010년 베이징이 홈에서 상하이를 4:1로 크게 이겼으나 원정에서는 상하이가 3:2로 이기면서 사이좋게 1승1패를 기록하게 된다. 2011년에는 베이징이 홈에서 3:0으로 상하이를 이겼으나 역시 상하이도 자기 홈에서 1:0으로 복수하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2012년도에도 베이징이 홈에서 상하이를 3:2로 이겼으나 상하이도 홈에서 3:1로 이기면서 베이징과 상하이는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정도로 치열한 승부를 펼치고 있다.
수도팀으로서 남방을 연고지로 하는 광저우 헝다와 라이벌 관계가 있다.

4. AFC 챔피언스 리그



4.1. 2019년 이전


[image]
2012년 아챔 울산 현대와의 경기 중. 왼쪽은 베이징 궈안의 쉬윈룽, 오른쪽은 이근호.
  • 2010년
2010년 AFC 챔피언스 리그 성남과 1차전 경기에서 상황에서 골키퍼 양즈가 몰리나에게 심한 태클을 해[2] 다이렉트 퇴장당했다. 이때 경기는 전반전까지 1:0으로 앞서다가 3:1으로 역전패했다. 3월 31일 베이징 노동자 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과격하고 소름돋을 응원과 살벌한 분위기때문에 베이징 주재 한국 영사관에서 성남 서포터들의 응원을 자제해 달라고 할정도다.
  • 2012년
2012년 챔피언스리그 32강전에선 울산 현대, FC 도쿄, 브리즈번 로어(호주)와 같은 조를 이뤘는데 울산에게 2:1, 3:2로 2패를 당한 끝에 3무 3패로 일찌감치 탈락했다. 브리즈번 로어가 골득실로 밀려 4위.
  • 2013년
2013년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G조에 속해 포항 스틸러스, 분요드코르,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만나게 되었고 2승 3무1패 조2위로 16강에 진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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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2013년 챔피언스리그 16강전 2차전에서 FC 서울에게 1:3으로 패하면서 8강 진출이 좌절된 직후,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실내 기물을 파손하면서 비매너로 비난을 받고 있다. 베이징, 서울에 패배 후 라커룸에서 난동
  • 2014년
그런데 2014년 챔피언스리그에서 F조에 속해 또 FC 서울과 만났다.그 밖에 산프레체 히로시마,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와 같은 조를 이뤘는데 2경기 연속 1-1(히로시마 원정 및 서울과의 홈경기)로 비기면서 3위로 미끌어졌다. 결국 막판 서울 원정에서 1:2로 패하면서 조 3위로 탈락하며 16강조차 가지 못했다.
이 날 세월호 참사로 인해 한국 전체가 추모 분위기였던 가운데 전광판에 중국어로 응원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베이징 원정팬들은 내내 조용히 경기를 지켜보다가 2:0으로 탈락 위기에 처한 경기 막바지에 응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일은 '매너 없는 베이징 관중들'로 왜곡된 기사를 타고 만다. 상반된 관점의 두 기사를 한 번씩 읽어보자.
응원 자제 요청에도...‘비매너’ 베이징의 응원
베이징 팬들은 정말 '비매너'로 일관했을까
  • 2015년
2015년에는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 수원삼성과 만나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으나, 16강에서 만난 전북에게 1차전 1-1 / 2차전 0-1 도합 1-2의 스코어로 져서 탈락했다.

4.2. 2019년


점유율은 앞섰지만 김민재가 총지휘한 수비라인이 불안을 보이며 전북에 1-3으로 참패했다.
베이징이 홈에서 닥공모드로 우라와에 대해 소위 "가패"를 했는데도 0-0으로 비겼다. 슈팅수 20-0의 일방적인 경기였는데도, 경기가 안풀렸는지 한골도 안들어가고 0-0으로 비겼다.
세드릭 바캄부가 해트트릭을 하며 몰아쳐 원정팀 지옥인 부리람전에서 낙승을 거두었다.
헤나투 아우구스투의 페널티킥과 바둔의 중거리 슛에 힘입어 2-0으로 낙승하며 조 2위로 뛰어올랐다.
김신욱의 헤더에 선제 실점했고, 김민재가 공수 여러방면에서 활약하면서 전북을 공략하려 했지만 결국 뚫지 못하고 패배했다.
이 패배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했다.

4.3. 2020년


  • 조별예선
E조에서 FC 서울,멜버른 빅토리,치앙라이 유나이티드와 한 조를 이뤘는데 5승 1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E조 1위를 기록하며 16강에 진출하였다.
  • 16강
16강에서 F조 2위 FC 도쿄를 만났는데 후반 14분 아란의 선제 결승골과 김민재의 철벽 수비에 힘입어 1:0으로 FC 도쿄를 꺾고 8강에 진출하였다.
  • 8강
8강에서 울산 현대를 만났으나 주니오에게 멀티골을 허용하여 2:0으로 패배, 8강에서 탈락했다.

5. 기타


  • 베이징 노동자 경기장은 7만 161명 관중을 수용할수 있다. 슈퍼리그 팀들 홈구장으로는 최대급. 특히 아챔이나 상하이 선화전이 열리는 날이면 과격 응원으로 유명하다.
  • 2008-2009년 이장수 감독이 베이징 궈안의 감독으로 있었지만 영문도 모른채 짤렸다. 못해서 잘린 게 아니라 되려 무진장 잘했음에도 잘렸다. 이전 FA컵 우승도 이끌었고, 리그 1위에 올려놔서 우승이 거의 확정될 무렵(9월) 갑자기 잘리는 통에 팬들이 분노했지만 결국 잘렸다. 원인은 바로 베이징 궈안의 구단주의 간섭이었다. 이장수 감독은 특정 선수의 기용을 강요하는 구단주와 마찰을 빚었고, 약팀 창춘 야타이와의 경기에서 0-2으로 완패하자 구단주는 이를 이유로 잘렸다고 한다. 어쨌든 그 해 베이징 궈안은 슈퍼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장수는 우승감독의 칭호를 앞에 두고 사퇴하였다.
  • 2009년 6월, 자국 내에서 열린 중국 슈퍼 리그 제11라운드에서 벌어진 베이징 궈안 VS 톈진 터다 팀과의 시합에서 궈안 소속 선수가 터다 측 골키퍼를 향해 강력한 태클을 날렸다. 이 태클에 당한 이 골키퍼는 무릎 안쪽이 심하게 손상되어 교체되고 말았다.
  • 2010년 2월 포항과 연습경기에서 양팀선수들이 총동원된 난투극이 펼쳐졌다. 경기는 1-0으로 베이징 궈안이 승리했지만 경기 결과 보다는 90분내내 격투기를 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 위와 같이 여러 사건이 있어서 여러 커뮤니티에선 소림축구의 달인이라는 선입견이 크게 박혀 있었지만, 실제로 베이징 궈안이 다른 중국 팀에 비해 거친 축구를 한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아챔에서 만난 한국팀과 여러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그런 인식이 각인된 것 뿐이다. 중국에서 거친 플레이로 악명을 떨치는 팀은 허난 젠예이다.[3]

6. 선수단




7. 주요 선수


  • 헤나투 아우구스투 (2016 - ) 분데스에서 실패하고 브라질에 돌아갔으나, 베이징에 와서도 폼을 유지하여 국대에 계속 소집되고 있다.

중국인 어머니를 둔 키프러스계 영국인. 본명은 니코 예나리스. 잉글랜드 U-19 대표까지 할 정도로 포텐이 있었고, 2010년 아스널에 입단했으나, 성장이 기대에 못미쳐 거의 출장 못했고 이후에는 챔피언쉽의 브렌트퍼드에서 활약했다. 중국국적으로 귀화하여 베이징에 입단했다.
마찬가지로 중국인 어머니를 둔 노르웨이계 중국인. 포지션은 미드필더. 본명은 욘 호우 셰테르(John Hou Sæter)로 노르웨이 U-18 국대까지 소집되던 선수였는데, 중국으로 귀화하여 중국인으로서 등록했다.
중국 차세대 윙어로 상당한 기대를 모았으나, 공격라인을 채우던 외인 선수들에 막혀 출장이 어렵자 2019년초 광저우 헝다로 이적했다.
2015년 항저우 뤼청에서 데뷔했고, 유망주로 평가받아 네덜란드의 피테서를 거쳐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에 입단했으나, 임대를 전전하다가 2019년에 중국에 복귀했다.
[1] CITIC 그룹, 또는 중신증권 그룹은 금융기업으로서 중국정부가 지분을 상당수 소유한 국유 기업이다.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홍콩을 본거지로 하여 설립되었는데, 중국 및 개도국의 여러 개발 사업에 투자했다. 이 기업의 설립자는 룽이런(1916-2005)이라는 사람인데, 장제스와 동향인인 저장성 사람이지만, 중국이 공산화될 때 자본가로는 드물게 대륙에 남았고, 이를 기특하게 생각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보호해서 공산중국에서도 드물게 재벌로 남아 있을 수 있었고, 덩샤오핑 시절에는 부총리까지 올랐다. 중국에서의 별명은 "붉은자본가 (红色资本家)"[2] 자칫 잘못하면 시즌 아웃될 수 있는 상황이였다.[3] 허난 젠예의 서포터 역시 매우 거칠기로 악명높다. 실제로 칼과 손도끼를 사용해 싸우는 장면이 CCTV로 전국에 방송됐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