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균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참여정부'''
4대
권오규

'''5대
변양균'''

6대
성경륭
[image]
'''이름'''
변양균(卞良均)
'''출생'''
1949년 11월 15일(음력 1949년 9월 25일)
'''출생지'''
경상남도 통영시
'''본관'''
초계 변씨
'''가족'''
아내 박미애, 슬하 2남
'''학력'''
부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제학 / 학사)
예일대학교 (경제학 / 석사)
서강대학교 (경제학 / 박사)
'''경력'''
제6대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종교'''
불교개신교(예장합신)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기업인. 노무현 정부 때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을 지냈다.
현재는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회장을 맡고 있다.

2. 생애


1949년 11월 15일(음력 1949년 9월 25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69년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인 1973년에 제1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 2000년 기획예산처 재정기획국 국장, 2002년 기획예산처 기획관리실장 등 경제부처의 주요 요직을 거치며 경제분야 전문 관료로 일했다. 공무원 시절 워낙 청렴하고 일솜씨가 뛰어나서 공무원사회에서 '교과서'와 같은 인물로 칭송되었다.[1]
2001년 새천년민주당 경선 당시 민주당 수석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워낙 힘이 있는 자리여서 대선후보들이 경쟁하듯 그에게 밥을 샀는데, 대선후보 이인제, 김근태, 김중권이 밥을 샀을 때는 후보들 연설하고, 참석자들 알아서 밥 먹고 형식적으로 박수치는 자리여서 실망을 했다고 한다. 반면에 노무현 후보가 밥을 샀을 때는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의 희망'이라며 휘파람 소리, 박수 소리가 대단해서 그때부터 노무현의 편이 되기 시작했다. 당시 경제 전문가로서 ‘국가 재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물음의 답을 주었기 때문.
그 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2003년 기획예산처 차관을 거쳐서 2005년 기획예산처 장관, 2006년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참모로서 노무현 정부의 경제사회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노무현에 의해 '보기 드물게 진보의 철학을 지닌, 유능한 경제관료'로 평가되었다. 노무현정부 후반부의 청와대는 ‘문재인 비서실장(정무) - 변양균 정책실장(정책)’ 투 톱 체제였다고 할 정도.
그러다가 2007년 신정아 큐레이터와의 섹스 스캔들 및 부정부패 비리로 구속 수감되었다. 2009년 1월 대법원에 의해 직권남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그리고 사회봉사 160시간에 처해졌다. 개인 사찰인 흥덕사[2]에 특별교부세가 배정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가 인정되었기 때문. 나머지 혐의[3]에 대해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참고로, 신정아 사건으로 인하여 대중들에게는 '''신정아의 남자'''라느니 '''똥아저씨'''[4]라느니 하면서 안 좋은 별명들로 불렸다.
그 후 국내 중견 기업인 (주)옵티스 회장을 역임하면서 쏠리드 - 옵티스 컨소시엄을 결성해 국내 3대 휴대폰 기업인 팬텍의 인수를 추진하였다. 현재는 경제정책 평론가이자 정보통신기술 벤처기업을 발굴·투자하는 중견 창업투자사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다만, 일종의 얼굴마담이라는 설도 있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 문재인 1기 경제팀에 발탁된 주요 관료들이 ‘변양균 라인’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청와대 정책실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과 호흡이 잘 맞았는데, 그 인연 덕분인지 문재인 1기 경제팀에 그와 가까운 인사들(김동연 경제부총리, 홍남기 국무조정실장, 이정도 청와대총무비서관 등)이 요직에 대거 등용되었던 것. 물론 본인이 직접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이로써 문재인 정부에서도 막강한 위상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
2017년 6월 19일 문재인 정부 출범에 맞춰 우리나라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정책제언을 담은 책 ‘경제철학의 전환’을 출간했다. 갈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수십 년간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골간을 이뤘던 ‘케인즈주의(금융ㆍ재정확대를 통한 수요창출)’에서 벗어나 이제는 ‘슘페터주의(공급 혁신)’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게 책의 요지.# 그를 위한 실천방법으로서 네 가지 자유(노동, 토지, 투자, 왕래)를 제시하였다. 가히 전방위적인 혁명적 규제완화론.# 물론 단지 규제완화만은 아니고 국민기본수요의 충족 등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 또는 패키지딜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자본의 폭주에 대항해 민주적 견제·감시력, 이에 기반을 둔 집단적 교섭력을 세운다는 사고는 찾아볼 수 없다. 혁명적 규제완화와 맞교환할 패키지딜이 어떻게 현실화되고 구성될 수 있을지에 대한 사고도 취약하다.

3. 여담


  • 신정아 스캔들로 훅 가지만 않았어도 참여정부 말기의 정책 붕괴를 막고, 이후 민주당 진영에서 엄청난 역할을 맡았을 거라는 말이 많다. 워낙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 그런데 신정아와의 스캔들 자체가 워낙 임팩트가 큰 것이었으니...
  • 그림에 조예가 매우 깊다. 고2 시절까지 미대를 가려고 입시 준비를 하기도 했으나,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뜻을 접어야 했다. 그래도 대학 시절에 이젤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릴 정도로 미술 사랑이 유별났다. 2005년에 기획예산처 장관 땐 첫 기자간담회를 서양미술 400년사가 전시된 예술의 전당에서 하기도 했다.
  • 신정아와의 스캔들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가정 파탄을 걱정했으나, 상처를 딛고 지금도 아내와 원만한 가정 생활 중이다. 참고로, 원래는 청와대 불자회장까지 역임한 적이 있을 정도로 불자#s-1였으나, 신정아 사건이 지나고 한참 후인 2011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한편 신정아는 이후에도 반성은 커녕 에세이집 인 4001#s-3을 통해 변 전 실장과의 사랑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밝혀 변 전 실장과 가족에 적지 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1] 노무현이 해양수산부 장관시절에 변양균이 예산실에서 일하는 거 보고 반해서 취임하자마자 납치해 왔다는 말도 있다.[2] 동국대에서 신정아 씨를 비호하던 동국대 이사장 영배 승려가 주지로 있던 사찰.# [3] 신정아가 근무하던 성곡미술관에 재정 지원을 하도록 요구한 혐의, 그리고 김석원의 사면 복권 대가로 3억 원을 받았다느니, 주거용 호텔 비용이 뇌물이라느니 하는 혐의들.[4] 성이 변()씨인데, 卞의 음이 배설물을 뜻하는 便과 같아서 생긴 것으로 보이며, 신정아가 붙인 별명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