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덴플라테 공세

 

1. 개요
2. 경과
3. 당시의 상황
4. 영향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전투 중 하나인 아르덴 대공세 말기에 독일 국방군공군 루프트바페가 펼친 공세. 연합군 비행장을 공습해 성공적인 전적을 올렸으나 공군력의 열세를 뒤집진 못했고 이후 루프트바페의 궤멸을 불러왔다. 독일 육군의 숨통을 끊어 버린 것이 독소전쟁소련군바그라티온 작전이라면, 독일 공군의 숨통을 끊은 것은 이 보텐플라테 공세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 경과


1945년 1월 1일 09시 30분, 독일 공군은 오랫동안 연기되어 왔던 연합군 비행장에 대한 대규모 공습 작전, 암호명 "보덴플라테(Bodenplatte, 쟁반)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비밀 병기 중 하나인 Me 262 2a 제트 전폭기를 장비한 제51폭격항공단(KG51:Kampfgeschwader)[1]도 투입되었다. 총 21기의 Me 262 전폭기가 네덜란드에인트호번[2]과 헤이스(Heesch)의 영국군 비행장 공격에 참가했다.
그중 에인트호번 공격은 제3전투비행단(JG3:Jagdgeschwader) 소속 Bf109Fw190의 합동으로 이루어졌다. 에인트호번 공격은 헤이스에 대한 공격보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에인트호번 비행장에 있던 총 3개 비행대의 타이푼(Typhoon)스핏파이어(Spitfire) 50여 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제6전투비행단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헤이스 공격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1대의 Me 262대공포에 격추당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독일 공군은 여기서 1,035대 이상의 항공기를 투입하였고,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연합군 공군 기지를 기습해 지상에서 144대의 미국ㆍ영국 항공기를 격파, 62대에 손상을 입혔으며 70대를 공중전으로 격추시켰다. 그리고 독일 공군은 총 304대를 상실했는데, 이들 중 85대는 아군의 대공포(?!)에 격추된 것이었다. 또한, 214명의 독일 조종사가 전사ㆍ포로가 됐으며, 그 가운데는 3명의 비행단 사령관, 6명의 비행대 지휘관 전원, 11명의 비행중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3. 당시의 상황


당시 독일군은 1944년 12월 중순부터 개시된 벨기에 아르덴 지방을 공격해 서부전선에 큰 돌출부를 뚫고 있었다. 작전 초기에는 북부의 제6기갑군과 남부의 제5기갑군ㆍ7군이 빠르게 전진하기는 했으나, 문제는 항공 전력이었다. 당시 독일 공군은 잔존 항공 전력이 거의 남아 있지 못했다. 이유는 영국 본토 항공전 직후 서부전선의 공군이 대거 동부전선에 배치됐는데, 1943년 이후로 육군이 그렇든 공군도 완전히 박살나 사실상 대규모 항공전을 벌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오히려 전투기는 없는데 공군 사병들이나 놀고 있는 신입 조종사들이 더 많았다.더욱 심각한 것은, 공군 정예 병사들이 44년도쯤엔 거의 바닥을 칠 정도의 숫자만 유지되고 있어 이 시기의 공군조종사는 겨우 항공기를 이착륙 시킬 정도의 능력만 가진 신참 조종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군에 대한 지상지원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듯이 어떤 트집이라도 잡아서 빨리 복귀하려고 난리를 벌였다.
그리고 날씨도 한몫을 해 주셨다. 12월이 겨울인 데다가 벨기에는 유럽에서도 추운 지역에 해당하다 보니 눈이 자주 내려 항공기들이 출격하기 좋은 날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독일 공군이 아르덴 대공세 기간 중에 출격한 횟수 중에서는 공세 첫날에는 겨우 170회 남짓한 주간 출격에, 17일에 운 좋게 600회 주간 출격을 달성하였다. 또한 연합군 공군의 출격 횟수는 독일 공군과 비슷하게 제대로 근접 지상 지원을 할 수 가 없었다. 이들은 겨우 공세 첫 주 동안 450회의 출격만 기록했다. 하지만, 12월 23일에 날씨가 개자마자 연합군 공군은 미친 듯한 출격 횟수를 보여주었는데, 이들의 출격 횟수는 아르덴 전투 내내 약 34,100회를 달성했다. 반면, 독일 공군은 겨우 7,500회 남짓이었다. 그리고 위에 서술했듯이 신참조종사들이 한몫 해주어 날씨가 풀린 12월 23일 이후부터도 항공기의 지상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독일 공군은 기상 탓으로 인해 최전방의 정예 부대에게도 항공기 지원은커녕 보급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러다 보니 독일군의 기계화 부대들은 곳곳에서 정지하고 난리가 아니었다.[3] 그래서 독일군은 유일하게 항공 보급만이 최전방 부대에게 보급해 줄 수 있었는데, 끝내 공군의 보급이 없다 보니 공세 기간 중 북부의 공세를 맡은 파이퍼 전투단[4]은 제대로 보급도 받지 못한 채 포위되어 공격받았고, 그 외의 다른 부대들도 연합군의 물량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했다. 결국, 독일 공군은 아몰랑, 일단 쏘면 뭐라도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1945년 1월 1일에 공습 부대에서도 최정예 KG 51(51폭격항공단)와 JG 3(3전투항공단)을 투입하게 됐다.

4. 영향


발악 중에서도 최후의 발악에 불과한 작전이었다. 영국 공군은 애초에 1941년부터 독일 본토 항공전을 개시해 후방의 공장이고 뭐고 다 박살내고, 미 공군이 일선에서 지상군과 공군을 깨부수고 남은 게 없던 독일 공군은 육군에 병사를 보내는 상황[5]이었는데, 영국 공군 비행장을 공습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국, 아돌프 갈란트의 말마따나 작전 이후 '''독일 공군의 묘비명이 되어 버렸다.''' 없는 항공기들을 모조리 끌어다가 썼는데, 이제 그마저도 거의 다 없어져 버렸으니... [6] 한마디로 신나게 털리는 와중에도 "너희들도 당해 봐라" 혹은 "일단 까라니까 깐다" 같은 심보로 공세했다가 피해만 더 입은 희대의 오판.[7]

[1] 제51폭격항공단: 1944-1945년 당시 Me 262를 운용하던 주요 부대였는데,1944년 말의 Me 262 출격 횟수의 대부분을 기록했다. 51폭격항공단은 1939년에 창설됐고, 1945년 4월 24일에 해체되었다.[2] Eindhoven,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제101공수사단이 투입됐던 그곳.[3] 당시, 벨기에는 러시아처럼 땅이 얼어붙었다가 해동되면 상태가 영 좋지 않게 되어 보급 차량이 이동하기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리곤 했다.[4] Kampfgruppe Peiper. 무장친위대요아힘 파이퍼 대령이 창설한 부대이다.[5] 육군도 병력이 없어 아르덴 공세 직전에 독일 전역에서 어른, 아이를 긁어모았고, 노르웨이의 해군과 곳곳에 남아 있던 공군 잉여 병사들을 끌어와 부대 편성을 마친 상태였는데도 부대 정원이 미달인 부대가 주구장창이었다.[6] 실제로 아르덴 공세 직전에 육군 부대 정원을 채운다고 놀고 있는 공군 병사들을 끌어와 사단 정원을 채우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리히 브란덴베르거(Erich Brandenberger)의 7군 소속의 제5낙하산병사단이었다.[7] 하지만 이런 비슷한 상황은 29년 전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