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자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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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Borgia(이탈리아어), Borja(에스파냐어, 카탈루냐어)
가언
Aut Caesar, aut nihil (카이사르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1. 역사
2. 인물들
3. 관련 매체


1. 역사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 출신의 귀족 가문. 보르자(혹은 스페인어 발음으로 보르하)라는 외진 도시에서 시작되었으며 보르자라는 성 또한 보르자에서 비롯되었고, 보르자 가문의 상징인 붉은 황소 또한 원래 도시 보르자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혈통이 12세기 아라곤 왕국의 왕 페드로 아타레스의 혈통이라고 주장했으나 이 주장은 스페인 왕가와 파벌로 겨룰만큼 성장한 15세기에서야 제기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일반적인 스페인인들과 다르게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능력을 일찍부터 알아봤는지 유대인 박해금지 등의 정책들을 폈는데, 그래서인지 종종 마라노(스페인 개종 유대인)라는 근거없는 의심을 많이 받아 왔다. 현대에 와서는 만약 보르자 가문이 당시 스페인의 패권을 쥐었다면, 현대 스페인의 위상이 더 컸을거라는 시각도 있다.
보르자 가문은 전통적으로 무인으로써 명성이 높았는데 그 시작은 13세기 전반에 보르자 출신의 기사 8명이 무어인들로부터 발렌시아를 탈환하려는 아라곤의 국왕 차이메 1세의 원정에 동참, 두각을 나타내어 '정복의 기사들'이란 명칭을 얻었다. 그중 한명인 에스테반 보르자는 발렌시아의 하티바와 간디아를 비롯한 몇몇 지방 도시들을 하사받았고 이곳에 정착하여 보르자 가문이 시작된다.
15세기 초 까지 지방 귀족으로 지내다가 1444년 알폰소 보르자가 쿠아트로 인코로나티의 추기경이 됨에 따라 그 세력이 이탈리아로마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1455년에 알폰소는 교황 갈리스토 3세가 되었는데, 그는 같은 스페인 출신 친척, 동포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어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이때 그의 두 조카인 페드로 루이스 보르자와 후일 교황이 된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 형제가 등용됨에 전유럽에 악명높은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반도에 진출해 기반을 다지고 있었지만 스페인 출신이라 멸시와 보이지 않는 핸디캡을 받았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그로 인한 스트레스 였는지 아니면 그것을 타개해 나가기 위한 방책이였는지 기사도예수를 숭상하던 명예로운 가문이 암살, 간통, 성직매매, 근친, 뇌물, 절도 등을 일삼으며 이탈리아 마피아선구자라는 이름으로 얼룩지고 만다. 그러나 당시 르네상스 시기의 분위기상 성직자들의 간통이나 뇌물, 성직매매 같은 불법적 행위는 빈번하게 발생되는 일이었고 보르자 가문만의 악행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보르자 가문만의 차별화되는 면에 있었다면, 지나치게 잔인했다는 점일 것이다. 고대의 숨겨진 지식까지 연구해 사람을 효과적으로 독살하는 방법들을 찾아 내어 실행에 옮기는 등의 모습들은 다른 가문들과는 차별화되는 면이 있었다.
갈리스토 3세선종 이후 세력이 잠시 주춤했지만 로드리고 보르자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되면서 이탈리아에서의 명맥은 계속 이어진다.[1] 교황을 2명이나 배출하면서 이탈리아의 대표적 명문가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스페인 본토에서는 파벌을 주도하여 왕가와 세력을 양분할 수 있을 정도여서 왕가로부터 견제받았다. 이 시기 로드리고의 사생아 아들이였던 체사레 보르자의 야심은 추기경이 된 이후 교황직을 독점하고, 5개의 나라로 나누어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여 가톨릭 로마제국을 재건하여 전유럽을 발아래 두는 것이었다.[2]
그렇지만 당시의 가톨릭 성직자들의 지나친 부패와 타락상이 전유럽으로부터 지탄받던 시기에 체사레 본인부터가 교황의 사생아였고, 앞서 서술했던 활동상들이 귀족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지만 교황직책은 성직이기 때문에 도덕성 문제가 컸다.[3] 게다가 체사레의 이탈리아 반도 정복 과정에서도 스페인 왕가로부터의 계속된 견제, 이탈리아 토착귀족들과의 과도한 경쟁 등으로 힘든 싸움을 하게 된다. 이 시기 보르자 가문과 그 반대파가 신성한 교황직을 두고 이전투구하는 모습들로 말미암아 대중들의 비판을 받게 되고, 보르자 가문은 결과적으로 이후의 종교개혁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만든 가문중 하나가 된다.
결국 알렉산데르 6세의 선종과 같은 시기에 체사레도 질병에 걸리고, 체사레의 판단착오[4]와 이어지는 몰락[5] 으로 보르자 가문은 교황직 세습에 실패하는 동시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세력이 꺾여 국제적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고 말았다. 또한 스페인 왕국안에서 유일하게 왕가와 겨뤄 왕위까지 주장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던 스페인 제일가는 파벌이였었지만, 스페인 왕가의 합스부르크와의 통혼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출신 카를 5세가 즉위함으로써 그러한 가능성마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전히 스페인을 대표하는 대귀족이면서 대항해시대의 주역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주교와 식민지 총독 등 걸출한 인물들을 꾸준히 배출했고 남미와의 무역업, 대농장경영 등으로 이후에도 많은 재산을 축적하며 꾸준히 활동하였으며, 또한 예수회안에서도 상당히 영향력이 컸다. 에콰도르에서는 20세기 후반까지도 대통령을 배출하는 등 역사에 계속 이름을 올려오고 있다.
알렉산데르 6세 시기의 영향으로 권모술수의 가문이라는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각인되어 있다. 이 시기의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를 만나고 감명받아 서술한 책이 군주론이다.

2. 인물들


고향인 스페인 내에서도 유명한 인물로는 예수회 제2의 설립자라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데 보르하(또는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축일 10월 10일)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탐욕스러운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서자이자 체사레 보르자의 동복형제로 추정되는 간디아 공작 후안 보르자의 후손이다.[6]

3. 관련 매체



[1] 알렉산데르 6세사생아 중 둘째인 체사레 보르자는 알렉산데르 6세가 담당하던 부유한 교구를 물려받아 추기경이 되고 셋째인 후안은 교황군 기수(사령관)이 되는 등 갈리토스 3세의 친족 우대정책은 알렉산데르 6세 때도 여전했다.[2] 이후 체사레의 동생 후안의 사망 역시 체사레의 음모로 보는 시각이 대세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계기로 체사레는 추기경직을 버리고 후안의 자리를 이어받으며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3] 아마 통일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계속된 도전자들로 인해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을 것이다.[4] 율리오 2세에게 교황직을 넘겨준다. 알렉산데르 6세와 율리오 2세 사이에 비오 3세가 있긴 하지만 고령에 병이 깊어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고, 이후 콘클라베에서 체사레는 보르자 가문의 영향력 하에 있던 스페인 출신 주교들의 표를 움직여 율리오 2세를 도왔다.[5] 아내의 나라인 나바라 왕국에서 친 스페인 세력들과 전투를 하다가 전사한다.[6] 보르자 가문의 흥망을 다룬 유럽 드라마 '보르지아'(쇼타임에서 제작한 더 보르지아와는 다른 작품)에서도 알렉산드르 6세가 임종 직전의 꿈에서 자신의 미래 증손자인 프란치스코가 저승에서 마중을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우리 가문에서 성인이 나온다고?"라며 실감을 못하면서도 감격하는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