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 디박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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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현 세르비아)에서 태어난 전직 농구선수. 2010년에 FIBA 명예의 전당을 수상했고, 2019년에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당당히 올랐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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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6순위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지명을 받았으며 미국 대학교에서 한 번도 뛴 적이 없는 유럽 출신 선수로서는 드라젠 페트로비치에 이어 2명째가 되었다. 당시에는 전혀 영어로 말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림 압둘 자바와 매직 존슨의 지도를 받으며 향상된 플레이와 몇가지 새로운 비결 방법을 배우면서 아메리칸 스타일 농구에 적응하게 되었고, 영어에 서툴렀던 그가 곧바로 팀에 융화된 재능을 발휘한 덕분에 NBA All-Rookie First Team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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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즌 동안 뛴 레이커스를 떠난 후, 1996-97시즌부터 코비 브라이언트와 트레이드 형식으로 샬럿 호네츠로 이적하며 두 시즌을 보냈다. 1998년에는 NBA의 파업으로 잠시 세르비아에 귀국해 츠르베나 즈베즈다(레드스타스)에서 2경기에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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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99시즌에는 FA 계약으로 새크라멘토 킹스로 이적해 같은 세르비아 출신의 페쟈 스토야코비치와 터키 출신의 히도 터코글루, 또 디박과 같은 해에 이적한 크리스 웨버와 2001-02시즌에 킹스로 이적한 마이크 비비까지 합류하며 침체되었던 팀의 인기가 다시 급상승해졌다. 그러나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친정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이끌었으나 결승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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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시즌을 앞두고 디박은 킹스와의 계약 연장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복귀했는데 샤킬 오닐이 마이애미 히트로, 데릭 피셔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게리 페이튼이 보스턴 셀틱스로, 칼 말론이 은퇴함에 따라 대부분 선수의 공백을 메우는데 필요하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즌 중반에 심한 등 부상으로 고작 15경기 밖에 뛰지 못했고 결국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3.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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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 레이커스에서 1년동안 스카우트를 맡았다가 스페인과 세르비아에서 각각 사장, 고문,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2015년 3월부터 새크라멘토 킹스에 입사했다. 그러나 팀이 14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면서 단장직을 사임했다. #
4. 플레이 스타일
현역 시절 하킴 올라주원, 샤킬 오닐, 데이비드 로빈슨, 패트릭 유잉 등 '''4대 센터'''를 비롯해 알론조 모닝, 디켐베 무톰보, 브래드 도허티 같은 특급 센터들이 득실득실해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았지만, 센터로써 충분한 경쟁력을 보였던 선수이다.
신장 216cm와 몸무게 120kg의 체격을 살린 힘, 거기에다 능숙한 포스트 플레이와 함께 팀 동료에게 공을 패스하는 센스도 뛰어났던 선수. 보드 장악력 또한 준수해서 90년대 센터들의 전성기에 세 차례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하기도 했었다.
아비다스 사보니스와 함께 동유럽을 대표하는 센터였으며 유러피언 빅맨 답게 부드러운 움직임과 뛰어난 패싱 센스가 돋보였다. 밀레니엄 킹스 시절에는 NBA 매니아의 일부 유저들이 그를 두고 '''포인트 센터'''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로 시야가 좋고 센터답지 않은 패스를 보여줬다. 또한 드리블 실력 역시 센터치고 매우 뛰어났는데, 1991년 파이널에서 자신감이 과했는지 볼운반을 하다 하필 마이클 조던에게 걸려 볼 뺏기고 덩크까지 당하는 굴욕을 맛봤다.[1] 또한 위에 언급한 포스트업, 패스, 드리블 외에도 골밑 수비, 리바운드, 외곽수비 등 농구에 필요한 기술들이 전체적으로 탄탄했다. 농구를 알고 하는 기술자형 선수.
이 선수의 불운을 보여주는 이력이 바로 '''만 33세이던 01시즌에 첫 올스타가 됐다는 점'''이다. 비인기팀 소속인데다 전성기가 지난 시점임에도 올스타에 뽑힐 정도로 기량이 출중했지만, 정작 전성기 때는 위의 괴물들 때문에 좌절되었다. 사실 당시엔 레전드 센터인 패트릭 유잉이 '''mvp투표에서 5위에 들고도 서드팀에도 꼽히지 못한''' 시즌이 있을 정도로 센터포지션의 스타 뎁스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만약 디박이 센터 뎁스가 좀 더 떨어지는 시대에 활약했다면 수상기록이나 올스타 선정 횟수가 큰 폭으로 올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그냥저냥 올스타 한번 뽑히고 말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는 소리.
특이할 점은 덩치가 대단히 크고 힘이 센 선수임에도 헐리웃 액션의 최고봉이라는 점이다. 보통 이런 헐리웃 액션을 자주하는 선수들은 언더사이즈인데 디박은 오닐이나 사보니스 정도를 제외하면 피지컬적으로 크게 밀리는 선수가 없었음에도 헐리웃을 매우 즐겼다. 이 때문에 오닐은 디박의 플레이스타일을 매우 싫어했고, 킹스와의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욕을 했다가 벌금을 물었다.
5. 국가 대표
1988 서울 올림픽을 통해 서울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주전 센터였으며 드라젠 페트로비치, 토니 쿠코치가 팀 동료였다. 결승전에 올라온 아비다스 사보니스가 주축이 된 소련 대표팀과의 대결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끝내 팀이 패하여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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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대표팀과의 결승전에서 바스켓 카운트로 추가 자유투를 얻어낸 후의 모습. 이때 나이가 21살이었다.
6. 기타
이름을 발음하는 방법이 블라디 디박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상단 이름 소개에 써있는 것처럼 유고슬라비아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블라데 디바치가 원래는 정확한 발음이다. 하지만 디박이 처음 NBA에 왔을때만 해도 그런 식의 배려는 미국에 전혀없었고 원어 발음으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디박의 활약 이후 동유럽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여기저기서 디박 혹은 디바치라고 부르니까 본인이 오랫동안 익숙해진 디박이 좋다고 생각하여 디박으로 통일 해달라고 하였음으로 사실 지금은 디박이 맞다.
다만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블라디 디박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였음에도 다른 유럽계 선수들의 이름 발음에 대해 영향을 많이 끼쳤다. 디박의 이름에 대한 발음을 계기로 이후 NBA 등장한 토니 쿠코치, 페자 스토야코비치, 덕 노비츠키와 같은 선수들의 이름이 정확하게 발음되는 계기가 되었다.[2] 순간이나마 영어식으로 이름이 읽힌 적은 있어도 이 선수들을 현재 발음할때는 전부 본토의 발음에 가깝게 발음해준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2010년대까지도 축구 선수들의 경우 영어식으로 그냥 싹다 읽어버리기 때문이다.[3]
1990년에 레이커스의 팀 동료였던 A.C. 그린, 마이클 톰슨과 함께 면도기 회사 쉬크의 광고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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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는 NBA 아시아챌린지 2009의 일원으로서 1988 서울 올림픽 이후 두번째로 한국에 방한했다.
친정팀 레이커스로 돌아온 디박이 무려 90000 달러의 자선금을 건 도전 과제에서 아주 긴 하프 샷을 넣어 결국 받게 되었다.
위의 사진에도 볼 수 있듯이 무려 10대 시절부터 덥수룩한 수염을 고수한지라 엄청난 노안이었다. 이 때문에 샬럿으로 트레이드될 때 그가 노장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때 그는 20대 후반으로 전성기였다.
유럽 출신 NBA 선수들 중에 1세대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고 인품도 뛰어난지라 같은 팀의 유럽 출신 선수들에게 좋은 멘토 역할을 했다. 특히 같은 세르비아 출신인 페자 스토야코비치에겐 경기 중 세르비아 말로 크게 응원하는 등 든든한 버팀목이 됐는데 이때문에 디박이 04년에 레이커스로 이적하자 스토야코비치가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4]
그가 한창 NBA에서 뛰고 있었을때는 자신의 조국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기에 마음고생이 심했다.1990년 세계선수권우승당시 크로아티아 국기를 펼치고 난입한 관중을 보자 화를 내며 국기를 뺐으면서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이로 인해 친한 국대선수이며 같이 NBA에서 뛰고 있던 크로아티아 출신의 드라젠 페트로비치와는 절교상태까지 가기도 했다.간신히 마음을 열어놓을즈음 페트로비치가 갑자기 저세상을 떠나면서 결국 그 둘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오랜 후 비운의 천재인 페트로비치와 그가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농구 대표팀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ESPN의 once brother에서 나레이션을 맡으며,그와 페트로비치의 농구인생에 대해 설명했다.여기엔 또한 크로아티아 국기를 뺐던 사건에 대한 자기변호도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자마자 결국 다시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페트로비치와 같은 크로아티아 국대동료였던 스토이코 브란코비치는 디박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1] 이건 디박이 못한 게 아니다. 조던의 가로수비는 185cm에 전광석화같은 스피드, 현란한 드리블을 지닌 아이재아 토마스도 시리즈 내내 1대1로 매치업할 정도로 뛰어나며 그의 압박수비는 초일류가드들도 버거워 할 정도인데 216cm나 되는 디박이 감당하기 힘든건 당연하다.[2] 토니 쿠코치는 데뷔 후 한동안 "쿠콕'으로 부르다가 95~96년 사이에 대부분 해설자들이 "쿠코치"로 발음을 고쳤고, 노비츠키는 98년 드래프티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더크 노위츠키"로 불렀다. "스토야코빅" 역시 마찬가지. 90년대 중반에 나온 NBA Jam같은 경우 확실히 "쿠콕!"으로 녹음되어 있다.[3] 그러나 영미 역사 다큐멘터리, 드라마에서는 2020년인 현재에도 과거의 영미식 발음을 고수하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마크 앤서니. 특히, 미국은 특출나게 외국어와 외국 명칭에 대한 관심부족이 여전한데, 그나마 스포츠에서는 전세계에서 온 운동선수들 덕분에 조금 나은 상황이다.[4] 우연이겠지만 페자는 04시즌에 전성기를 보내고 나이상 전성기를 누려야할 28세이던 05시즌부터 서서히 기량이 하락세를 그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