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다스 사보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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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아르비다스 로마스 사보니스 (Arvydas Romas Sabonis)
'''국적'''
소비에트 연방 (1964~1991) → 리투아니아 (1991~)
'''생년월일'''
1964년 12월 19일 (59세)
'''신장'''
'''221cm'''
'''체중'''
132kg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86년 드래프트 1라운드 24순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
'''소속팀'''
BC 잘기리스(리투아니아) (1981~1989/2001~2002/2003~2004)
CB 바야돌리드(스페인) (1989~1992)
레알 마드리드 발론세스토 (1992~1995)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95~2001/2002~2003)
'''등번호'''
11번
'''수상내역'''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6)
소련 농구 리그 3회 우승 (1985-87)
코파 델 레이 데 발론세스토 우승 (1993)
유로바스켓 우승/MVP (1985)
리가 ACB MVP 2회 (1994-1995)
유로리그 우승/파이널 포 MVP (1995)
유로리그 정규시즌/톱 16 MVP/올-유로리그 퍼스트 팀 (2004)
리투아니아 농구리그(LKL) 우승 (2004)
FIBA 인터컨티넨털 컵 우승 (1986)
리투아니아 올해의 스포츠맨 4회 (1984-1986, 1996)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 2회 (1985, 1987)
1988 서울 올림픽 농구 금메달/소련 (1988)
'''가족'''
아들 : 도만타스 사보니스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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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다스 사보니스'''
헌액 연도
2011년
1. 개요
2. 선수 시절
3. 은퇴 후
4. 플레이스타일
5. 여담


1. 개요


'''리투아니아의 농구 영웅'''

리투아니아(1991년까지는 소련령 리투아니아 공화국) 출신 NBA 농구 선수.

2. 선수 시절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일생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1997)

2.1. NBA 이전


1964년 12월 19일에 당시 소련령이었던 리투아니아 공화국카우나스에서 출생, 13세부터 농구를 시작하여 15세부터 소련 유소년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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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17세 되던 1981년에 고향팀이자 당시 소련 내 강팀인 'BC 잘기리스'[1]에 입단하여 당시 감독이던 블라다스 가라스타스(Vladas Garastas)[2]의 지도 하에 점차 성장하여 잘기리스에서 뛰던 9년 동안 유럽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족적을 남기게 되었고, 1988 서울 올림픽에도 소련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준결승전에서 데이비드 로빈슨이 이끌던 미국 대표팀[3]을 이기고, 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4]마저 이기면서 금메달을 땄다.
잘기리스에서 뛰고 있던 1985년에 애틀랜타 호크스[5]가 전체 77위로 사보니스를 지명했으나 너무 어려서[6] 무효가 되었고, 이후 1986년에 NBA 드래프트를 통해 1라운드 24위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되었지만, 당시는 냉전 시기라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선수들이 NBA 진출을 할 리 만무한 데다가 사보니스 본인도 아킬레스 건 부상으로 시름시름하면서 결국 포틀랜드 입단은 9년 뒤에나 이루어지게 된다. 다만 지명한 포틀랜드 구단에서 87년 그의 심각했던 발목부상을 치료하기위해 잠시 미국 땅을 밟았는데, 이 때문에 88년 미국농구 대표팀의 감독인 존 톰슨[7]은 포틀랜드 구단을 '매국노'라 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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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동구권이 붕괴되고 고르바초프의 개방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에 사보니스는 NBA가 아닌 유럽 최고의 리그 중 하나인 스페인 리그를 택했고, 그는 CB 바야돌리드에서 3년간 활동하다가 1992년부터 레알 마드리드에서 3년간 활동하며 2번의 리그 우승(1994, 95), 1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1993), 1번의 유로리그 우승 (1995)을 이루었고, 특히 1994/95 시즌에는 평균 22.8 득점, 13.2 리바운드, 2.6 블락, 2.4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2. NBA



2.2.1.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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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저스가 지명권을 행사한 지 9년만에 사보니스는 꿈에도 그리던 NBA 진출을 이뤘다. 그러나 농구인으로서는 고령인 31세에 늦게 들어온데다 유럽 활동 시절 여러 차례 무릎 수술을 받아 운동능력을 상실한 탓에 더이상 1988년과 같은 모습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포틀랜드에서 활동하던 총 7시즌 동안 평균 13.1득점, 7,90 리바운드, 1.14 블락, 2.1 어시스트에 이르는 준수한 성적으로 NBA에 족적을 남겼다.
포틀랜드 입장에서는 굉장히 아쉬운 선수다. 사보니스가 없어도 당시 클라이드 드렉슬러, 테리 포터 중심으로 파이널에 2번이나 등장했었는데, 전성기 사보니스가 이 팀에 있었다면 우승 반지 1개 정도는 결코 꿈이 아니었다.

2.3.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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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2, 2003~2004년까지 고향팀인 잘기리스로 돌아와서 2004년에 조국 리투아니아 리그 우승컵을 남기고 은퇴를 선언, 2005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3.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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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레전드 매치에 출전할 당시 모습. 이 경기에서 파워 넘치는 덩크슛을 보여주기도 했다.
은퇴 후 2005년경부터 친정팀인 잘기리스의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4. 플레이스타일


221cm의 센터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가드와 같은 슛터치, 패싱, 드리블을 보여줬고 심지어 그 긴 NBA의 3점슛 라인에서 3점슛도 넣던, 사실상 오늘날 타운스 같은 센터들의 시초로 봐도 무방하다. 냉전시대 인물이 아니였다면 젊은 나이, 부상없이 건강한 상태로 NBA에 데뷔해 리그 판도가 바뀌었으리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다수 존재한다. 빌 러셀1988 서울 올림픽 당시 그를 '221cm 빌 월튼'으로 칭하기도 했고, 레드 아워백 감독은 NBA를 포함해 세계 최고의 농구선수 3~4인에 들어간다 평했다. 그래서 전성기를 달리던 80년대에는 유럽과 국제무대에서 적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늦은 나이에 NBA에 와서도 젊은시절의 운동능력은 상실했지만 특유의 패싱센스와 슈팅력으로 클라스는 보여주고 떠난듯.

하이라이트 릴을 보면 요즘 기준으로도 혀를 내두를 패스들이 많다. 운동능력을 잃은 후에 NBA 온 모습이란 것을 감안하더라도 큰 체격에 비해 로우 포스트에서의 움직임이 매우 유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4대 센터[8]-디켐베 무톰보-알론조 모닝-팀 던컨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지옥의 인사이드인데도 불구하고.

80년대 건강하던 시절부터 포틀랜드 시절까지의 사보니스 하이라이트. 미국 팀 상대로 무쌍을 찍는 장면이 보인다.

5. 여담


  • 2011년에 심장이 안 좋아져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게 꽤나 심각했던 건지 당시 그의 심장 중 60%만 제 기능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들에게 그가 퇴원하면서 남긴 말은

"(의사는) 담배도 피울 수 없고, 술도 마실 수 없고, 농구도 할 수 없다고 내게 말했다. 좋아하는 것 중 남은 건 오직 '''섹스뿐'''이다."

이었다(...)
[1] 흔히들 잘기리스 카우나스라고 한다. 현재 리투아니아 리그 최다 우승(통산 17회)을 자랑하는 명문팀이기도 하다.[2] 그는 훗날 1992년1996년 올림픽에서 리투아니아 대표팀을 지휘하여 동메달을 각각 2번 차지하게 된다.[3] 이때 미국팀에는 로빈슨 뿐만 아니라 88년 NBA 드래프트 1번픽 대니 매닝, 5번픽 미치 리치먼드, 14번픽 댄 멀리 등등 당시 대학 최고의 선수들이 즐비했다. 참고로 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감독 스티브 커가 이들의 드래프트 동기이다. 한편, 로빈슨은 87년에 이미 1번픽으로 지명되었지만 2년간 해군에서 군복무하는 도중 대표팀에 소집된 상태였다.[4] 드라젠 페트로비치, 토니 쿠코치, 블라디 디박같은 훗날의 NBA 선수들이 다수 포진된 강팀이었다.[5] 그 해에 호크스는 NBA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했다.[6] 당시 규정은 외국인선수의 경우 만 22세여야 지명이 가능했다. 이는 2003년 드래프트를 앞두고 만 18세로 조정이 됐고, 2007년 드래프트부터 NBA가 전체 신인들의 최소 나이 제한을 19세로 조정하게 된다. 여담이만 2003년 나이 조정을 한 이유 중 하나가 이때 최대어 중 하나로 여겨졌던 다르코 밀리시치(2순위) 때문이란 설도 있는데 정작 밀리시치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드래프트 동기들에 비해 우승반지만 가장 빨리 얻고(2004년) 그뒤로 완전히 망했다(...)[7] 조지타운 대학교의 前 감독으로 패트릭 유잉, 디켐베 무톰보, 알론조 모닝, 앨런 아이버슨 등을 지도하였다.[8]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패트릭 유잉에 92년 데뷔한 샤킬 오닐까지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