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톨트 필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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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old Pilecki 1901.5.13- 1948.5.25
폴란드의 군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존재를 연합군에 알린 비톨트 보고서의 저자. 그 과정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자진해서 입소하고 탈옥(!!!)'''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러시아의 영토인 올로네츠에서 1901년 출생했다. 폴란드 분할 이후에도 폴란드인들은 쉴 새 없이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며, 러시아 역시 이러한 폴란드인들의 봉기에 무자비하게 대응했는데 그의 가문 역시 1864년 봉기에 참여했다가 올로네츠로 강제 이주당했다. 또한 그의 조부 역시 폴란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시베리아 유배를 끌려갔던 적이 있었으니 비톨트 필레츠키가 열렬한 폴란드 민족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차대전 당시에는 ZHP[1] 라는 독립단체에 참여하여 소련-폴란드 전쟁에도 육군 병으로 종군하였고 이 때 능력을 인정받아 종전 후에는 부사관을 거쳐 장교로 임관하게 된다.
1939년 8월 26일에 육군 기병대위로 소집되었다. 프루시 군[2] 소속의 육군 제19보병사단에 배치된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부대는 패퇴하여 동남쪽으로 후퇴하였고 르부프[3] 에서 제41보병사단에 재편성되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에 의해 동쪽에서 공격한 소련에 의해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해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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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1월 9일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얀 브워다르키에비츠(Jan Włodarkiewicz) 육군소령 등 함께 3명이서 폴란드 비밀군(Tajna Armia Polska)을 조직하였다. 이 지하조직은 19,000여 명 규모의 조직으로 발전하였고, 1940년 민족연맹(Konfederacja Narodu)에 가입하고 1941년, 폴란드 최대 지하조직인 국내군(Armia Krajowa)에 흡수되었다. 1940년 아우슈비츠에 위치한 대규모 수용소의 존재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다. 이 때까지 나치 독일이 대규모 수용소를 운영한다는 사실 자체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이 절멸 캠프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필레츠키 역시 단순한 노동수용소나 굴라그 정도로 인식하고 그 곳에서 저항 조직을 양성하는 한편 첩보활동을 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해서 입소한다.
아우슈비츠에서 필레츠키가 입수한 각종 정보들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국내군을 거쳐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와 영국 정부로까지 흘러들어갔다.[5] 오늘날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학살의 규모를 대강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 때 필레츠키가 보낸 정보가 있기 때문. 하지만 필레츠키의 바람과 달리 망명 정부와 영국은 군대 파견을 통한 아우슈비츠의 즉각적인 해방이 무모하다고 생각하였으며[6] 한편 수용소 내에 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챈 게슈타포가 서서히 추적망을 좁혀옴에 따라 필레츠키는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할 것을 결정하고 1943년 4월 26일 다른 저항조직원 둘과 함께 아우슈비츠를 탈출한다.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이후 필레츠키는 폴란드 저항군 내의 정보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서방과 소련의 관망 속에 바르샤바 봉기는 결국 무위로 돌아갔고 필레츠키는 포로로 잡혀 종전 때까지 포로 수용소에 머무르게 된다.
종전 이후 필레츠키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시에 따라 신분을 위장하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세워진 폴란드 본토에서 첩보 임무를 수행한다. 1946년 무렵이 되면서 그가 신분이 위장한 것이 폴란드 공산당 측에 의해 밝혀지고 망명 정부는 그에게 서방으로 탈출할 것을 지시하지만 필레츠키는 이를 거절하고 결국 1947년에 체포된다. 갖은 고문을 받은 필레츠키에게는 서방측의 스파이 임무를 맡은 혐의와 암살 미수 혐의로 사형이 언도됐고 1948년 5월 25일에 사형당한다. 필레츠키 본인은 이미 재판 이전에 죽음을 예감하여 아내에게 '공산당이 보기에 아우슈비츠는 하찮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날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사형 직전 남긴 유언은 ''' '폴란드 만세[7] ' '''였다고 한다.
사형 직후 필레츠키의 유해는 사형터 인근의 공동묘지 어딘가에 매장되었으며 1990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붕괴되고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그의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또한 그에게 혐의를 날조하여 사형을 언도한 이들 역시 기소되었으며[8] 그의 공적을 기려 정부는 그에게 육군 대령 계급을 추서했다.
그의 이야기가 국방TV에서 방영했던 <제2차 세계대전 숨은 주역들> 1화에서 다뤄졌다.
스웨덴의 밴드 Sabaton이 그의 아우슈비츠 수감자 번호인 4859번(Inmate 4859)을 곡명으로 한 그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었다.
Witold Pilecki 1901.5.13- 1948.5.25
1. 개요
폴란드의 군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존재를 연합군에 알린 비톨트 보고서의 저자. 그 과정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자진해서 입소하고 탈옥(!!!)'''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지금은 러시아의 영토인 올로네츠에서 1901년 출생했다. 폴란드 분할 이후에도 폴란드인들은 쉴 새 없이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며, 러시아 역시 이러한 폴란드인들의 봉기에 무자비하게 대응했는데 그의 가문 역시 1864년 봉기에 참여했다가 올로네츠로 강제 이주당했다. 또한 그의 조부 역시 폴란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시베리아 유배를 끌려갔던 적이 있었으니 비톨트 필레츠키가 열렬한 폴란드 민족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차대전 당시에는 ZHP[1] 라는 독립단체에 참여하여 소련-폴란드 전쟁에도 육군 병으로 종군하였고 이 때 능력을 인정받아 종전 후에는 부사관을 거쳐 장교로 임관하게 된다.
2.2. 폴란드 침공
1939년 8월 26일에 육군 기병대위로 소집되었다. 프루시 군[2] 소속의 육군 제19보병사단에 배치된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부대는 패퇴하여 동남쪽으로 후퇴하였고 르부프[3] 에서 제41보병사단에 재편성되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에 의해 동쪽에서 공격한 소련에 의해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해산한다.
2.3. 저항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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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39년 11월 9일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얀 브워다르키에비츠(Jan Włodarkiewicz) 육군소령 등 함께 3명이서 폴란드 비밀군(Tajna Armia Polska)을 조직하였다. 이 지하조직은 19,000여 명 규모의 조직으로 발전하였고, 1940년 민족연맹(Konfederacja Narodu)에 가입하고 1941년, 폴란드 최대 지하조직인 국내군(Armia Krajowa)에 흡수되었다. 1940년 아우슈비츠에 위치한 대규모 수용소의 존재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다. 이 때까지 나치 독일이 대규모 수용소를 운영한다는 사실 자체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이 절멸 캠프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필레츠키 역시 단순한 노동수용소나 굴라그 정도로 인식하고 그 곳에서 저항 조직을 양성하는 한편 첩보활동을 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해서 입소한다.
아우슈비츠에서 필레츠키가 입수한 각종 정보들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국내군을 거쳐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와 영국 정부로까지 흘러들어갔다.[5] 오늘날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학살의 규모를 대강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 때 필레츠키가 보낸 정보가 있기 때문. 하지만 필레츠키의 바람과 달리 망명 정부와 영국은 군대 파견을 통한 아우슈비츠의 즉각적인 해방이 무모하다고 생각하였으며[6] 한편 수용소 내에 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챈 게슈타포가 서서히 추적망을 좁혀옴에 따라 필레츠키는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할 것을 결정하고 1943년 4월 26일 다른 저항조직원 둘과 함께 아우슈비츠를 탈출한다.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이후 필레츠키는 폴란드 저항군 내의 정보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서방과 소련의 관망 속에 바르샤바 봉기는 결국 무위로 돌아갔고 필레츠키는 포로로 잡혀 종전 때까지 포로 수용소에 머무르게 된다.
2.4. 이후
종전 이후 필레츠키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시에 따라 신분을 위장하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세워진 폴란드 본토에서 첩보 임무를 수행한다. 1946년 무렵이 되면서 그가 신분이 위장한 것이 폴란드 공산당 측에 의해 밝혀지고 망명 정부는 그에게 서방으로 탈출할 것을 지시하지만 필레츠키는 이를 거절하고 결국 1947년에 체포된다. 갖은 고문을 받은 필레츠키에게는 서방측의 스파이 임무를 맡은 혐의와 암살 미수 혐의로 사형이 언도됐고 1948년 5월 25일에 사형당한다. 필레츠키 본인은 이미 재판 이전에 죽음을 예감하여 아내에게 '공산당이 보기에 아우슈비츠는 하찮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날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사형 직전 남긴 유언은 ''' '폴란드 만세[7] ' '''였다고 한다.
사형 직후 필레츠키의 유해는 사형터 인근의 공동묘지 어딘가에 매장되었으며 1990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붕괴되고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그의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또한 그에게 혐의를 날조하여 사형을 언도한 이들 역시 기소되었으며[8] 그의 공적을 기려 정부는 그에게 육군 대령 계급을 추서했다.
그의 이야기가 국방TV에서 방영했던 <제2차 세계대전 숨은 주역들> 1화에서 다뤄졌다.
3. 기타
스웨덴의 밴드 Sabaton이 그의 아우슈비츠 수감자 번호인 4859번(Inmate 4859)을 곡명으로 한 그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었다.
[1] Związek Harcerstwa Polskiego. 영어로 번역하면 Polish Scouting Association. 물론 보이스카우트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2] 독일 프로이센 지방을 폴란드어로 가리키는 표현이다.[3] Lwow, 현재 우크라이나의 리비우이다.[4] 머리에 뭐가 달린게 아니라 머리를 받쳐주는 것이다. 절대로 머리에 달린게 아니다.[5] 물론 사람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주로 라디오를 이용해서 정보를 전달했다. [6] 사실 이건 망명 정부와 영국군의 생각이 옳았다. 필레츠키는 공수부대 강습 이후 캠프 내 비밀 저항 조직들의 봉기를 통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폴란드까지 해방시킬 것을 주장했는데 실현 가능성이 좀(...) [7] Wiwat Polska 비밧 폴스카라 읽는다[8] 단 다들 나이가 고령이라서 재판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이전에 이미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