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안/대한민국 선수 시절
1. 개요
여기서는 빅토르 안이 한국 국적이었을 때, 보인 행적을 서술한다.
2. 주니어 시절
대부분의 재능 있는 선수들이 중학생 때 두각을 나타낸다지만 안현수는 초등학생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 이후 중학생, 고등학생 때는 각각 동계체전 3연패, 전국 고등부 1위를 하며 천재 스케이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먼치킨적 재능은 이미 어릴 적부터 드러났던 셈이다.
만 16살에는 2002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1000m, 1500m에서 우승 하며 종합 우승을 달성했다.
3.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특별 차출 논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7위로 떨어졌기 때문에 본래대로라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전명규 감독에 의해 특례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되어 미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원래 국가대표팀 멤버 중에서 이재경이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자 대체 선수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전명규 등 윗선의 권한 남용을 통해 안현수가 뽑힌 것이다.[1] 그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었던 민룡과 이승재는 세계무대 한 번 나가본 적 없는 안현수에게 밀려 1000m 출전권을 빼앗겼으며, 설상가상으로 민룡은 큰 부상을 입어 선수 생활이 끝장나게 되었다. 자세한 상황은 민룡 문서 참조. 당시 빙상연맹에서는 개인전 출전선수로 이승재를 추천했고, 이승재는 주니어 레벨을 평정하고 올라왔고 시니어에서도 세계랭킹 2위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선수였으나 안현수를 감싸고 도는 전명규 때문에 물을 먹었다.
민룡, 이승재 뿐만 아니라 엄연히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선발되어 국가대표팀 예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던 서호진, 안중현, 백국군 역시 안현수에 대한 특혜가 아니었더라면 대체선발 후보에 올랐어야 마땅했음을 생각하면 이들도 피해자에 속한다.[2] 안현수의 아버지는 그때 당시의 전명규에 대해 "너무나 감사한다" 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해놓고 나서 자기는 파벌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이 파벌이 본격적으로 발생한 계기다.''' 당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었던 민룡과 이승재가 세계무대 한 번 나가본 적 없었던 안현수에 밀려나자 전명규의 독재 체재에서 피해를 받던 선수들과 코치들이 반발하여 뭉치게 된 것이다.
당시 안현수는 주니어 대회에서는 활약했지만 대표팀에 들어온 지는 불과 한 달 정도라 앞서 말했듯 시니어 대회에는 경력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전명규 감독에 의해 특례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되어 미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 동계올림픽이 안현수의 첫 시니어 무대였다. 이후에도 이때의 안현수의 기량을 갖고 있는 국내의 어린 선수가 없다고 평가될 정도로 당시 기량 자체는 좋았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주니어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국내의 다른 선수들과 비교할 때 올림픽에 나갈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다.
1000m에선 결승 진출까지 하여 쇼트트랙을 보는 모든 이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당시 체구가 굉장히 왜소했기 때문에(164cm) 가벼운 체중과 기술을 이용한 스케이팅으로 꽤나 선전했다. 결승에선 아폴로 안톤 오노와 리자준과 같은 강호를 상대로 레이스를 펼쳤다. 전략은 선두를 지키다가 앞으로 나오는 선수를 견제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힘, 체력, 체구가 모두 딸렸기 때문에 힘든 작전이기도 했다.
경기 막판 오노와 리자준에게 추월당하고 3위로 뒤에서 바짝 따라붙었다가 앞에서 몸싸움으로 깽판을 치는 이 둘을 피해 인코스로 추월하려다 리자준이 안현수의 스케이트를 건드리는 바람에 안현수가 중심을 잃고 오노와 충돌했으며 그 뒤 4위로 들어왔다.
이 싸움 덕분에 꼴찌로 레이스하다 들어온 호주의 쇼트트랙 선수 스티븐 브래드버리가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받았다. 은메달은 오노,[3] 동메달은 마티유 투르코트가 목에 걸었다.
이후 5000m 계주에서는 민룡이 부상을 당해 실려가자 재경기를 예상한 전명규가 민룡 대신 투입을 시키려 했으나 재경기가 이루어지지 않아 계주에 출전하진 않았고 민룡의 부상으로 대신 나간 1500m에서는 실격당했다. 이 1500m 역시 민룡이 부상당한 뒤 남은 자리를 이승재나 다른 예비 선수들이 아닌 안현수가 차지했고 올림픽 한 달 뒤에 열린 세계선수권 개인전 자리 역시 안현수가 차지했다.
4. 2003년~2007년
2002 세계선수권을 끝마치고 김동성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안현수가 자연스럽게 에이스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안현수 커리어에서 황금기라 할 수 있는 기간으로 이 기간 동안 쇼트트랙 주요 이벤트라 할 수 있는 500m, 1000m, 1500m 개인 3종목에서 무려 금메달 9개를 휩쓸었다. 전체 18번의 레이스에서 포디움에 진입하지 못했던 적은 단 3번 뿐이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던 적은 딱 한 번뿐이다. 2004-05 시즌 월드컵 3, 4차를 대표팀 전체가 불참해서 오노에게 월드컵 종합 우승을 내주었지만 하지만 세계선수권에서는 최고 답게 그를 이기고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4.1. 세계선수권
이때부터 2007년까지 세계선수권 5연패를 하는데 이는 5년 연속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자였다는 뜻이다. 말이 쉽지 5년이면 보통 국가대표 선수들의 세대 교체가 이뤄질 정도의 시간이고 특히 한국처럼 쇼트트랙 인재들이 수두룩한 곳에선 더더욱이다.[4]
2003 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2007 세계선수권까지 남자 선수로 사상 최초로 5년 동안 종합 우승을 했다. 초반에는 미국의 아폴로 안톤 오노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가 그야말로 미친 성장을 거듭하면서 둘의 실력차는 굉장히 벌어지게 됐고 이것은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제대로 증명됐다.
4.2.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 게임
2003년에는 자신의 첫 세계선수권 우승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처음 출전한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에 성공하면서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이미 아시아에서는 중국 선수나 다른 한국 선수들도 상대할 선수가 없다는걸 제대로 증명했다.
4.3.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그의 두 번째 올림픽이였으며 당시 만 20세였던 그는 더 이상 지난 올림픽의 자그마했던 유망주가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아폴로 안톤 오노와의 올림픽에서의 재대결이라고 설레발을 쳤으나 토리노 올림픽 2년 전부터 안현수가 세계선수권을 휩쓸고 있던 와중이었고 2005-06 시즌 월드컵에서도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노와의 차이가 훨씬 더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결국 이 동계올림픽은 그가 쇼트트랙의 황제로 거듭나게 되는 완벽한 무대였다.
저 안현수인데요, 금메달 가지러 가야 돼서 좀 지나갈게요.
- 1500m
이후 파벌 문제와 여러 사건들이 조명받으며 이 인터뷰가 오히려 본인에게 마이너스가 됐고 잘못 알려져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당시 이호석이 '양보할게'라고 하는 짤방이 나돈 것도 한 몫 했다.) 까이는 요인이 됐다. 이호석은 밴쿠버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도 "토리노 때도 이번에도 이정수에게도 양보한 적 없다"라고 했다.
- 1000m
다만 오노는 바로 아오안, 사실상 이호석과의 재대결이었다. 이호석도 2바퀴를 아웃사이드 패스로 돌면서 맨 뒤에서 2위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멋진 레이스를 펼쳤으나 결국은 4바퀴 째부터 선두를 유지한 그의 승리였으며 올림픽 신기록까지 세웠다.
여기서는 1500m 결승전과 달리 이호석이 양보하지 않았으며 날을 들이밀면서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쉬워하는 이호석과 오노의 표정이 압권이다. "얘네들을 어떻게 이겨?"
- 500m
에릭 베다드보다 0.004초 먼저 들어왔다.
어쨌든 간에 본인 입장에선 크게 아쉬울 것 없는 종목이었다. 이미 대회 2관왕으로 자신이 최고라는 걸 입증했을 뿐더러 500m가 주 종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메달까지 따냈으니.[7]
이 경기에서 논란이 있었던 건 금메달을 따낸 오노가 부정 출발을 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출발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상체가 움직였지만 심판진은 그냥 넘어갔다. 500m 같이 단거리 종목에서는 부정 출발이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기에 500m에서 항상 강세를 보인 캐나다에서 강하게 항의했다. 사실 두 캐나다 선수도 부정 출발을 한 번 하긴 했지만 오노는 3번이나 부정 출발을 했다.[8]
그가 상대적으로 스타트가 약하기도 했지만 맨 꼴찌로 출발해 두 명이나 추월해낸 걸 봐서 한 두 번째 자리나 세 번째 자리로 출발했다면 전관왕도 가능했을 거란 의견이 다수다.[9]
- 5000m 계주
결승전에서는 초반부터 안현수와 이호석의 스퍼트로 빠른 스피드로 치고 나갔던 캐나다를 따라갈 수 있었으며 일찌감치 뒤쳐진 미국은 홈 그라운드 버프를 받은 이탈리아와 3위를 다투고 있었고 사실상 지난 두 번의 올림픽의 계주 종목 챔피언 캐나다와 한국의 1위 싸움이었다. 선두로 치고 나가 캐나다와 격차가 벌어진 상황이 나와 더 쉽게 풀릴 수 있던 경기였으나 서호진의 실력이 다른 세 선수에 비해 너무 낮았기 때문에 캐나다에게 계속해서 따라 잡히다 선두까지 내주는 상황이 벌어졌다.
막판에 이호석이 분전해 송석우에게 터치, 송석우가 다시 선두로 나왔으나 캐나다가 인코스로 파고들어 다시 선두를 내줬다. 3바퀴를 남겨두고 캐나다 선수인 에릭 베다르가 송석우를 푸싱하는 바람에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아서 송석우가 안현수에게 패스할 수 있었다. 만약에 넘어지기라도 했다면 캐나다는 실격당하는 건 물론이고 미국이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땄을 수도 있었다. 이 때 캐나다 선수와 거리가 꽤나 나있는 상황이었는데 역시 먼치킨은 다른 지라 스퍼트를 올려 캐나다 선수를 아웃코스로 가볍게 제치고 대역전극을 일구어냈다. 또한 올림픽 신기록을 여기서도 세운 건 덤이다.
그의 대활약 덕분에 12년 만에 남자 계주 금메달을 땄으며 동료 3명에게 금메달을 선사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선수권을 3연패하고 있던 것도 모자라서 '''올림픽 3관왕'''까지 했으며 거기다 올림픽 한 대회에서 무려 4개의 메달(금 3, 동 1) 을 목에 건 유일한 한국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올림픽 이후 펼쳐진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대회에서는 파벌 싸움이 더욱 더 심해지면서 심지어 한 번은 본인 홀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야 했을 정도였다.
4.4. 2007 창춘 동계 아시안 게임
2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받았다. 500m에서는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심판진의 편파판정으로 실격당했다. 또한 저 은메달은 중국 선수들이 거친 몸싸움을 겸비한 팀플레이에 방해 받았음에도 따낸 거다. 물론 한국도 팀플레이를 하긴 했지만 홈 그라운드가 중국이었기 때문에 몸싸움을 중국 선수들처럼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4.5. 이후
이에 서술한 대로 안현수는 2006년, 2007년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하며 5연패를 달성했고 2007년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를 따내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달성했다. 파벌도 조금씩 풀리며 남자 대표팀 내에서도 선수들끼리 조금씩 화목한 분위기가 나오기 시작했었다.
다만 2006-07 시즌 때는 안현수가 잇따른 잔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성공적이었던 전 시즌만큼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이지 못했고 비록 세계선수권을 우승하고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가져오는데 성공했지만 경기력은 많이 떨어져있었다고 평가받았던 시즌이었다. 같은 시즌 이호석은 한 술 더 떠서 부상으로 시즌 아웃이나 다름없었던 상태였다. 세계 탑이었던 건 변함없었지만 안현수가 20대 중반에 다다르고 있었기에 서서히 기량이 떨어질 거란 예상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2007-08 시즌[12] 최고의 컨디션으로 다시 복귀하며 이호석, 송경택과 함께 무시무시한 기량을 보여주며 월드컵을 휩쓸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남자 쇼트트랙 역사상 월드컵과 세계선수권을 모두 통틀어서 계주 무패[13] 를 달성한 시즌이기도 하다. 당시 경기력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열리게 될 2008 세계선수권에서 홈버프를 받아 6연패를 달성할 거라 보였을 정도로 기량만으로는 토리노 올림픽 시절보다도 물이 올라있었던 상황이었다.[14]
5. 2008년~2009년
5.1. '''부상''', 세계선수권 6연패 도전 좌절, 그리고 서두른 복귀
2008년 1월 태릉 선수촌에서 훈련 중에 넘어져 펜스에 충돌하는 바람에 무릎 부상을 입었다. 더군다나 잔부상 때문에 훨씬 허약해진 상태에서 당한 부상이라 수술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었던 터라 결국 코 앞에 두고 있던 2008 세계선수권을 불참하는 바람에 양양(A)와 세계선수권 6연패 기록과 타이를 이룰 수 있었던 기회가 무산되었다.
결국 국가대표에서 4번째 순서였던 이승훈이 이호석, 송경택과 함께 개인전에 출전했으며 이승훈은 쇼트트랙 선수로는 정상급 선수였다고는 볼 수 없었고 의심의 여지 없이 당시 안현수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이호석도 안현수가 빠지자 가장 큰 벽은 없어졌던 셈이지만 또한 서로 가장 큰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던 최고의 파트너를 잃었던 셈이다.
더군다나 대회가 진행되며 이호석이 월드컵에서 해줬던 만큼 활약을 하지 못했으며 마지막 슈퍼파이널에서 여유를 부리다 오노가 스퍼트하는 걸 놓치는 바람에 오노에게 그것도 한국에서 그의 첫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을 내줬다. 아폴로 안톤 오노가 한국에서 세계선수권을 우승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표팀은 상당히 까였으며 안현수의 빈자리는 더욱 더 크게 느껴졌다.
안현수는 더 복귀가 늦었다면 밴쿠버 올림픽 진출에 힘들어지기 때문에 2008년 9월에 재활 치료가 완전히 끝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이른 복귀를 해야 했으며 오히려 자신의 몸에 더 해를 끼치며 완전한 회복을 늦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그가 당한 부상이 선수생명을 위협할만한 부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재활운동에 더 많은 투자를해서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노렸으면 어땠을까라는 의견들이 많다. 하지만 운동 선수가 2,3년 재활에 몰두하는 것은 선수 본인에게 굉장히 힘든일이며 또 당시 한국은 어느정도 해먹었으면 어린선수들을 위해 떠나라라는 분위기가 강했고 부상당한 선수와 노장 선수들에게 좋은 훈련환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훗날 러시아로 귀화한 이후에 보여준 기량을 생각하면 재활에 더 전념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5.2. 2009-10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2009년 4월에 열린 올림픽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는[15]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정수와 성시백, 곽윤기, 송경택, 이승훈 등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었다. 그의 몸 상태가 100%였다면 걱정할 일이 없었으나 2년 동안 세계 무대에서 스케이트를 타지 못해 감각을 많이 잃은 상태였고 근육량도 현저히 줄은 데다 양쪽 다리 근육량마저 자신의 스케이팅에 맞는 밸런스가 붕괴되어 체력과 스피드가 불완전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호석이 2009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으로 자동선발되어 그는 개인전을 뛰기 위해서는 선발전에서 최소한 2위에는 들어야 했고 올림픽 시즌을 위한 선발이었던 만큼 경쟁이 상당히 치열했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그는 선발전에서 7위에 머물렀지만 대인군자답게 선발된 선수들에게 다가가 모두 축하해 줬으며 인터뷰에서는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겠다며 긍정적인 마인드를 보였다.
당시 이호석, 성시백, 이정수, 곽윤기 4명이 세계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빙상연맹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비록 남자대표팀이 1500m에서 이호석과 성시백 충돌 사건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여자대표팀에 비하면 훨씬 좋은 성적을 거뒀고 외국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가 점점 되어가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안현수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출전했어도 3관왕은 힘들었을 것이라 했다.
이후 그 다음 시즌인 2010-11 시즌에도 선발에 실패했으며 해당 시즌 동안에는 쇼트트랙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당시 원래 대표팀 멤버였던 노진규의 발병으로 인해 결원이 생기자 선발전 차순위자였던 이호석이 그 자리를 채운 것과 비교된다. 이것이 누가 봐도 올바른 상식임에도 당시 안현수의 선발은 이러한 상식에 크게 어긋났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비판과 논란이 있는 것이다.[2] 다만 서호진은 폭행과 뇌물 건 때문에 동정받지 못 하고 있다.[3] 만약 올림픽이 열린 장소가 미국이 아니었다면 리자준과 함께 실격을 당했을 수도 있다.[4] 2002년에 대표팀에 합류해 2008년 초 중부상을 당할 때까지 7시즌 동안 '''대한민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했다.[5] 1500m 초대 챔피언이었던 아폴로 안톤 오노는 준결승에서 중국 선수를 추월하려다가 삐끗하는 바람에 Final B에서 레이스하는 굴욕을 겪었다.[6] 참고로 여기서는 고글 착용을 하지 않았다.[7] 당시 그와 같이 3관왕을 했던 진선유는 500m에선 결승에도 못 갔다.[8] 그 당시 레이스 경기는 부정 출발이 2번까지 허용되었으며 2010년부터는 한 번만 해도 실격된다.[9] 참고로 토리노 올림픽까지 자리배정은 "랜덤"이었으며 준결승 성적을 기준으로 하면 트랑블레에 이어서 2레인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자리 배정도 따랐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10] 송석우는 2004년 세계선수권에서 종합 2위를 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스케이터고 오세종도 각종 대회 개인전에서 수상 경력이 있는 스케이터지만 서호진은 그야말로 덤이고 그것도 모자라 인간 쓰레기. 2005 인스부르크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1위 양보를 해달라는 경기에서 제안을 거절하자 성시백과 같이 폭행했고 이후 뇌물까지 뿌렸다.[11] 이 경기에서 안현수가 훗날 러시아 복귀 후 자주 쓰게 되는 인코스 기술을 썼다.[12] 한국 남자대표팀 최전성기로 꼽히는 시즌인데 우선 멤버들이 안현수, 이호석, 송경택, 성시백, 이승훈, 곽윤기였다. 장거리부터 단거리까지 모두 커버할 수 있는 멤버들로 구성되어있었고 당시 이 선수들 모두 세계 랭킹 10위권 안에 들고 있는 정상급 선수들이었다(1위~5위, 그리고 7위).[13] 모두 금메달을 가져왔다는 얘기.[14] 상대가 되는 선수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황제라는 별명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15] 이호석이 2009 세계선수권을 우승하여 자동 선발이 됐기 때문에 남은 4자리를 놓고 경쟁을 해야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