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백

 




<colbgcolor=#66ccff><colcolor=#fff> '''이름'''
성시백(成始柏[1], Sung Sibaek)
'''국적'''
대한민국[image]
'''출생'''
1987년 2월 18일(37세), 서울특별시
'''학력'''
반포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스포츠심리학/학사)
'''종목'''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주종목'''
500m, 1500m[2]
'''신체'''
178cm, 65kg[3]
'''가족'''
부모님, 누나
'''국가대표'''
2004-05, 2006-07~2010-11('''6시즌''')[4]
'''은퇴'''
2012년
'''SNS'''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2.2. 2004-05 시즌
2.3. 2005-06 시즌
2.4. 2006-07 시즌
2.5. 2007-08 시즌
2.6. 2008-09 시즌
2.7. 2009-10 시즌
2.8. 2010-11 시즌
3. 은퇴 및 그 이후
4. 수상 기록
5. 불운: 고질적 발목 부상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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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前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대한민국 쇼트트랙 역사상 '''500m 최강자'''이자 '''올라운드 스케이터'''로 평가받는 선수며 고질적인 발목 부상으로 커리어가 빈약하지만 실력만큼은 세계 최정상급으로 인정받았던 선수다. 제대로 말하자면 발목부상이 꼭 세계선수권 때 악화되거나 재발한다는 것이다.
반면 월드컵에서의 성적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07-08시즌때 세계 3위를 기록했고 08-09시즌에는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 서술할 것처럼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인한 부진이나 불참은 2009, 2010 때 해당되고 2007년에는 세계선수권에 출전하기는 했으나 선발된 선수들 가운데서 순위가 낮아 계주멤버로만 출전했다. 한마디로 커리어로만 평가를 해서는 안되는 선수. 물론 월드컵 성적은 서술한 바와 같이 좋은 편이다. 성시백의 진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벤쿠버 올림픽만 찾아보지 말고 07-08~09-10 시즌 월드컵 활약상들을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요약하자면 흔히 말하는 대한민국 쇼트트랙 에이스 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정도의 최상급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불운과 부상에 시달려 끝내 자신의 실력에 걸맞는 업적을 쌓지는 못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선수임에도 특이하게 '''500m가 주종목'''이며 그동안 단거리에 취약했던 한국 쇼트트랙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500미터에선 체구가 크고 좋은 순발력과 빠른 스피드를 가진 선수가 유리한데, 성시백이 178cm의 장신이고 순발력도 작은 체구를 가진 선수들만큼 좋은 편이다. 스타트 반응 속도는 세계 어느 단거리 스프린터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며, 트랙 한바퀴를 도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고 한다.[5][6] 성시백이 컨디션이 정상인 날 500미터 경기에서는 앞에서 전력질주하는 세계정상급 500미터 스페셜리스트가 걸리적 거릴정도니 절대속도에 관해서는 쇼트트랙 역대최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더군다나 다리가 긴 편으로 남들보다 쉽게 가속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7] 경기를 읽는 눈과 순간판단력도 탁월하여 쇼트트랙 종목중 가장 여유가 없는 500m에서도 인코스 추월을 자유자재로 시도할 수 있었다.[8] 단거리 종목에서 강하면서도 원래는 다른 한국 선수들처럼 1000미터와 1500미터에 집중하던 선수였기에[9] 모든종목에서 다 강한, 한국에서 보기드문 '''올라운더 스케이터'''였다.[10]
대한민국 쇼트트랙 지도자들은 그를 완벽한 체구조건과[11] 정상급 실력을 모두 갖춘 선수라고 평가 하기도 했다. 물론 큰 체구 때문에 다른 대부분의 한국선수들처럼 좁은 공간을 활용하는건 힘들었다. 또 다른 단점을 꼽자면 후에 자세히 서술되겠지만 만성 발목부상 때문에 컨디션 난조와 슬럼프가 자주왔다. 하필이면 이런게 꼭 세계선수권에 터져서 우승할 기회를 놓친게 한두번이 아니다. 벤쿠버 올림픽에서 마저도 큰대회 징크스가 따랐다.
은퇴 후 밝힌 내용이지만 본인은 경기 직전 너무 긴장을 많이해서 항상 심리적으로 초조한 상태였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도 경기를 앞두고는 비슷한 상태인 건 마찬가지지만, 본인은 멘탈적으로 너무 흔들리는게 자주 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나중에 쇼트트랙 선수들의 멘탈적인 부분을 보완해주기 위하여 심리학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초등학교 시절 몸이 허약했던 성시백은 부모님의 권유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때까지 학업과 운동을 병행했고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전문적인 운동선수의 길을 선택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당시 또래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호석[12]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고, 2003 주니어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여 종합 3위를 했으며[13]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2.2. 2004-05 시즌


고등학교 2학년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때 연세대학교 입학 예정자의 신분으로 2005 인스부르크 동계 유니버시아드[14]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1000m와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다.

2.3. 2005-06 시즌


안현수, 이호석과 함께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활약할 멤버로 여겨졌으나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졌다.

2.4. 2006-07 시즌


2007 창춘 동계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으나 동계 아시안 게임 대표선발전에서도 6위에 머물면서 또 실패하였다.[15], 이때는 정말 쇼트트랙을 그만두려 수없이 고민했다 한다. 새로 출발하자는 마음을 먹고 동계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했으며 여기서 그의 포텐이 터지기 시작했다. 2007 토리노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전 종목 석권'''[16]을 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유니버시아드가 사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전관왕을 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시즌 막바지에는 대표팀에 있던 이호석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그가 차순위 자격으로 2007 세계선수권 계주 멤버로 참가했고,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금메달을 따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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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오른쪽 인물

2.5. 2007-08 시즌


국가대표팀 승선에 정식으로 성공해내면서 월드컵에서도 뚜렷한 두각을 나타냈고 캐나다선수들이 판치던 단거리(500m) 종목에서 새로운 최강자로 떠올랐다. 이 시즌 이호석, 안현수에 이어 월드컵 랭킹 3위를 차지했다.

2.6. 2008-09 시즌


월드컵 종합우승을 하며 정점에 올랐다. 안현수송경택의 대표팀 탈락 이후 최강자로 여겨지던 이호석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두고 다툴 것이라 예상되었다. 2009 세계선수권에서 슬럼프를 겪은 것을 빼고는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에서 1위를 해내면서 계속해서 상승세를 이어갔다.

2.7. 2009-10 시즌



2.7.1. 월드컵 시리즈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 때문에 월드컵에서 지난 시즌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개인전에서 금메달 2개나 따냈다.3차 월드컵에서 부상이 악화되어 4차에서는 폼이 떨어진 모습을보였다 폼이 떨어졌는데도 500m 준결승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500미터 결승에서 발목에 무리를 느껴 제대로 레이스를 펼치지 못했고, 후에 계주 결승전에는 이호석곽윤기가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2번주자(이정수) 대신 4번 주자로 나섰다. 원래대로라면 이호석이 없을 시엔 그가 2번 주자를 맡아야 했지만 컨디션 문제인지 4번 주자로 출전했다. 그러다가 11바퀴 남기고 1번 주자를 밀어주다 넘어졌고 발목에 더 큰 무리가 생겨서인지 아니면 더 큰 부상을 예방하려는 차원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후에 레이스에서 빠졌다. 결국 그가 빠지면서 1위로 잘달리고 있던 한국이 캐나다와 미국에게 차례로 추월을 당하면서 3위를 차지했다.

2007-08 3차 월드컵 500m 결승

2009-10 월드컵 500m 준준결승

2009-10 월드컵 500m 결승

2.7.2.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2.7.2.1. 1500m

이정수, 이호석와 나란히 결승진출에 성공했고 밴쿠버 쇼트트랙 남자 대표팀은 역대전력상 가장 강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셋이서 메달 사냥을 할거라 점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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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잘 가고 있었다. 성시백이 오노와 선두를 다투는 틈을 타 이정수가 자리를 잘 잡고있었고, 나중에는 이호석이 오노를 추월해 이정수가 1위로 달리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괜찮았으나, 이호석의 무리한 추월 시도로 같이 넘어지면서 4, 5위권이었던 오노와 셀스키가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가져갔다.
그는 마지막 코너에서 크게돌면서 인사이드로 이정수를 앞지르려 할 때 빈틈이 생겼다고 생각한 이호석이 그사이로 추월을 시도했던 것이다. 사실 이호석이 올림픽 전에 이런 움직임으로(일명 '칼치기') 짜릿한 역전 우승을 거둔 적이 꽤 많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엄청난 판단미스다. 더군다나 성시백의 덩치를 생각한다면 이호석을 피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노와의 경합이 어쩌면 성시백이 나중에 벌어진 사고를 떠나서 1500미터 메달을 날리게 된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인데, 일단 몸싸움을 하게되면 속도가 확 줄게 되어 뒤따라오는 선수들을 견제하는데 상당히 불리해진다. 성시백이었으니깐 뛰어난 가속능력을 이용해 이정수를 곧바로 따라간 게 가능했던 것. 결국 본인은 다섯번째로 들어왔고 이호석은 실격되었다.
그 바람에 이정수가 금메달을 땄음에도 이호석의 무리한 플레이에 대해서 비난하는 모습이 컸다. 다행히 그의 어머니가 이호석 선수에게 위로를 해줬고 본인도 사과를 받아주면서 별다른 일없이 넘어갔다. 다만 경기 이후에는 충격이 컸는지 이호석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2.7.2.2. 1000m

1000미터에서도 한국 세 선수가 다시 만날 거라는 예상이 나왔다. 준결승에서 아폴로 안톤 오노샤를 아믈랭과 맞붙게 됐을 때 너무 일찍 선두로 치고 나온 탓인지 오히려 마지막 두바퀴를 남기고 오노와 헤믈린에게 차례대로 추월당했다. 마지막 라인을 앞두고 스케이트날을 앞으로 내밀었으나 0.006초 차로 해믈린에게 결승 티켓을 내줬다. 1500미터 결승전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1000미터에서 만큼은 좋은 성적을 내야한다는 부담감으로 일찍 치고나와 선두를 지키는 작전을 펼친 걸로 보인다. 그 뒤 파이널 B에서 실격 판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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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 종목 중 가장 활약이 적었던 종목이 바로 1000미터이긴 하지만 1500미터에서 순탄히 메달을 따냈다면 그 이후에도 상승세를 타 본종목에서도 결승진출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2.7.2.3. 500m



500m 결승
2009-10 시즌 기준 랭킹 3위였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해외에서도 랭킹 1위였던 샤를 아믈랭보다 성시백의 우승을 더 예상했다. 사실 아믈랭의 전략은 자신의 스타트와 스피드를 앞세워 처음부터 선두를 지키면서 1위로 경기를 끝내는 것뿐이지만, 성시백은 스타트가 아믈랭보다 약간 뒤쳐질지라도 500미터에서 하기힘든 추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94년에 금메달을 딴 채지훈에 이어서 2번째로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고 이 종목 세계 신기록이 2009년에 그가 세운 기록이었다. 이 때 같이 겨루는 아폴로 안톤 오노프랑수아루이 트랑블레도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딴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17]
스타트를 좋게 시작, 2위 자리를 잡으며 1위로 나선 해믈린을 추격했으며 세바퀴째 됐을 때 인사이드로 선두를 추월한 다음 1위 자리를 굳히던 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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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빙질이 안 좋은 곳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트랑블레와 같이 넘어지면서 결국 해믈린이 1위로 들어왔고, 그 사이 오노가 2등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펜스로 밀러 난 트렘블리와 달리 앞쪽으로 넘어져서 세번째로 결승선에 들어왔으며 그 와중에 펜스에 걸려 헬멧 커버까지 벗겨졌다. 나중에 심판진이 오노가 트렘블리를 밀었다고 판단, 오노에게 실격 처리를 주면서 은메달을 받았고, 트랑블레가 동메달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다잡은 금메달을 따지 못한 건... 본인도 아쉬웠는지 결승선에 들어온 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이런 가슴 아픈 불운에도 불구하고 벤쿠버 올림픽 500미터 결승전은 성시백의 명경기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아믈랭이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마지막 두바퀴까지 추월을 하지 않고 여유를 보일 정도였고 인코스 추월마저 완벽했다.
여담으로 이 때 넘어졌던 장면에 야구 그라운드 베이스를 합성해 도루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시켜 놓은 사진을 2014년 5월 6일에 국제빙상경기연맹이 ISU 쇼트트랙 공식 페이스북에 뜬금없이 새로운 밈을 만들답시고 올렸다.
해당 게시물은 다수의 한국인 페이스북 유저와 성시백의 팬들 혹은 다른 쇼트트랙 팬들의 항의에 의해 결국 6일 오후 5시쯤 삭제되었다.[18]
게시글을 삭제하기 전 ISU 쇼트트랙 공식 페이스북은 "누군가를 기분 상하게 하기 위해 올린 사진이 아니다. 그저 재미를 주기 위한 것 뿐"이라는 답변을 남겼었다. [19]

2.7.2.4. 5000m 계주

불과 30분 전에 펼쳐졌던 500미터 결승전에서 넘어졌던 탓인지 계주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마지막엔 다른나라 주자들과 뒤엉키면서 곽윤기를 오른손목스냅으로 터치해 하마터면 계주에서 메달을 따지 못할 뻔했다. 이호석도 500미터 준결승에서 넘어졌던 탓인지 원래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다행히 곽윤기가 마지막에 아폴로 안톤 오노를 추격하는 원맨쇼 활약으로 은메달을 건지면서 이 대회에서 은메달 두 개를 걸게 됐다.
국민들에게도, 그의 팬들에게도, 그리고 본인 자신에게는 더욱더 성이 차는 결과는 결코 아니었고 큰 아쉬움이 남았다. 밴쿠버 올림픽 직후에는 2014 소치 동계올림픽도 있으니 긍정적인 마인드로 4년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2.7.3. 2010 세계선수권


1500미터에서 곽윤기에게 1위를 내줬고, 주종목인 500m 준결승에서 샤를 아믈랭과 같이 넘어졌으며, 1000m 준결승 도중엔 얼음에 스케이트 날이 걸려 넘어졌다. 1000m에서 넘어졌을 땐 큰 부상은 아니지만 발목을 다쳤는지 통증을 느껴서 3000m 슈퍼 파이널과 5000m 계주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2.8. 2010-11 시즌


타임 레이스로 변경된 규정에서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으나 슬럼프에 시달렸다. 월드컵 시리즈에서도 부진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보였다. 한 예로 500m에서는 우승하긴 했지만 성시백 답지않게 뒷 선수에게 몇번이나 추월 위기를 맞았다.

2.8.1.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


동계 아시안게임 개인전 멤버를 뽑는 500m 타임레이스에서 넘어져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실전인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조차 1000m에서 중국선수의 반칙으로 넘어져 동메달을 땄다.[20] 아시안 게임 이후 월드컵[21]에서 발목부상이 악화되어 조기 귀국하고 2011-12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은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3. 은퇴 및 그 이후


2012년 4월 1일 전 국가대표 선수였던 이승재와 같이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식이 만우절에 잡혀있어 팬들이 믿지 않았을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25살이라는 나이가 쇼트트랙 선수 기준으로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직도 충분히 활약을 펼칠 수 있는 나이기에 더욱더 아쉬움이 따른다.[22]
물론 학업에 열중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질적인 발목부상이었다.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성시백은 만성 발목 부상을 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넘어질때가 잦은편이었는데, 그럴때마다 이미 성할 날 이없는 발목에 무리가 갔다고 한다. 밴쿠버 올림픽 바로 전에도 2009-10 시즌 4차 월드컵에서 발목에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23], 올림픽에서는 500미터에서 넘어지며 더욱 악화가 됐었다고 한다.[24] 본인도 2011-12시즌 공백기간 동안 재활과 컨디션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결국 은퇴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성시백의 은퇴가 아쉬운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매우 보기 드문 단거리 능력을 가졌고 쇼트트랙에서 500m는 선수 생명이 긴 편으로 발목부상만 없었으면 20대 후반까지도 정상의 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5] 성시백의 은퇴 후 한국 남자 쇼트트랙은 단거리에서 메달 획득을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2013년 박세영이 단거리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세계 정상권 실력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성시백이 자기 입으로도 현 시점에서 자신의 '(500미터) 후계자는 없다' 라고 인터뷰에서 얘기했다. 하지만 2018년 드디어 성시백을 이을 적임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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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식에서 이승재와 함께 선수로서 마지막 레이스를 하는 모습
2011-12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이승재[26]와 같이 은퇴식을 가졌으며,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고 2013년 2월 스포츠 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은퇴 후에도 쇼트트랙에 애착이 아직 많이 남았는지 종종 국내에서 열리는 쇼트트랙 경기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2014년 초 미국 플로리다 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났다.
2012년 10월 인터뷰[27]

4. 수상 기록


올림픽
은메달
2010 밴쿠버
5000m 계주
은메달
2010 밴쿠버
500m
세계선수권
금메달
2007 밀라노
5000m 계주
금메달
2008 강릉
5000m 계주
은메달
2010 소피아
1500m
세계 팀선수권
금메달
2009 헤이렌베인
단체전
은메달
2007 부다페스트
단체전
동메달
2008 하얼빈
단체전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11 아스타나·알마티
5000m 계주
동메달
2011 아스타나·알마티
1000m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2005 인스브루크
5000m 계주
금메달
2005 인스브루크
1500m
금메달
2007 토리노
5000m 계주
금메달
2007 토리노
500m
금메달
2007 토리노
1000m
금메달
2007 토리노
1500m
금메달
2007 토리노
3000m
주니어 세계선수권
동메달
2003 바르샤바
종합

5. 불운: 고질적 발목 부상


단 한 가지 단점이자 항상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는 것은 바로 '자주 넘어진다'는 것이다. 불행에 의한 것도 있지만, 이것은 안정감이 부족하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실력에 비해 커리어가 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쇼트트랙 선수 이상적 신장인 168-175cm 이상이라 체구가 커서 잘 넘어진다는 주장도 있지만, 캐나다의 올리비에 쟝이나 미국의 트레비스 제이너처럼 체구가 180cm 이상인 선수들도 있다. 참고로 마크 가뇽도 신장이 184cm로 큰 편이었다. 그가 자주 넘어지는 정확한 이유는 바로 '''고질적인 발목 인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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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만성 족관절 불완정성'이라는 병을 안고 있다. 반복되는 스케이팅 훈련과 충돌 때문에 인대가 늘어나면서 손상을 입었고, 성시백이 운동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제대로 회복이 되질 않았다. 더군다나 스파르타식인 한국 쇼트트랙 훈련 방식도 크게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약해진 인대는 발목뼈와 관절을 잘 잡아주지 못하고 뼈와 뼈 사이의 공간이 벌어졌다. 그렇기에 성시백에겐 안정적인 스케이트가 상당히 힘든 것. 문제는 발목뼈 문제만이 아니고, 통증과 염증을 달고 살기 때문에 근육 운동을 제대로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인대와 발목 근육이 약해지자 발목이 이상 체중을 못 버티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발목 근육은 쇼트트랙 선수에겐 허벅지 근육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유는 바로 다른 선수와의 충돌이나 빙질이 안 좋은 곳으로 스케이트가 빠졌을 때 발목 힘으로 버텨내며 뚫고 나가야하는데, 성시백의 발목 상태로는 이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완벽한 해결책은 늘어난 인대를 잘라 이어 붙이는 수술이라고 하는데, 이건 선수 생명을 끝내라는 얘기와 다름없다.
브뢰스트롬 수술법이라고 하는 수술법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는 인대를 잘라 붙이고 주변 구조물로 덮어주는 수술법이다. 이 수술을 할 경우 이전보다 더 강한 발목을 가질 수도 있지만 유연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수술은 이미 매우 발달해서 이 수술을 한다고 운동을 포기하게 될 가능성은 낮다. 아마 수술을 제때 받지 않아 충돌증후군이 심한 상태이거나, 관절염이 진행됐을 가능성, 또는 브뢰스토롬 수술법이 아닌 힘줄을 이용한 인대 재건법이 추천됐을 가능성 등이 있다. 즉, 인대를 정상으로 되돌리기엔 발목이 지금까지 너무 고생을 했다. 차선책이라면 발목 주변 근육을 강화해 흔들림을 잡는 것이다. 발목 근육이 발목을 눌러 뼈와 뼈 사이의 공간을 메울 수 있다면 그나마 나아질 수 있다. 하지만 언급했다시피 이 족관절 불완정성이라는게 통증이 상당히 심하며 발목 근육을 집중적으로 키우기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고, 한국의 열악한 재활 환경과 비과학적인 훈련 방식은 그가 빨리 은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6. 기타


  • 훈훈한 외모와 근육질의 몸매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며, 이들에 의해 섹시백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비슷한 시기 나온 휴대폰의 펫네임과 같은 이 별명은 1500m 결승전에서 넘어진 뒤 쓸쓸하게 들어가는 뒷모습에서 유래된 별명이라고 한다. 국내 스포츠 잡지의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기념 표지 모델을 했다. 그의 영문표기는 Sung Si-Bak인데 백의 표기가 Baek에서 e가 빠졌다.
  • 한국 선수들 중엔 드물게 고글을 착용하지 않는 걸로도 유명하다. 국대 초창기에는 몇번 착용했으나 본인이 불편했는지 그 이후로는 착용하고 경기를 한 적이 없다. 또한 아폴로 안톤 오노처럼 종종 장갑을 짝짝이로 착용한다.[28]
  • 얼굴은 유상무서인국을 합쳐놓은 외모라 카더라. 실제로 보면 얼굴이 매우 작고 다리가 긴편이라 키가 원래보다도 더 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단독샷을 찍으면 180은 족히 넘는걸로 오해받는다.
  • 2010년 불거진 쇼트트랙 짬짜미 사태 관련하여 4월 18일에 성시백은 곽윤기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정수의 말에 반박하듯 선발전 당시, 곽윤기가 이정수를 도와주는 듯한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올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곽윤기와 함께 인기를 상당히 잃었다. 다만 4월 20일, 조사위원회가 비디오 분석 결과 '선발전 때 이정수를 곽윤기가 도와줬다'는 곽윤기의 주장이 옳은 거 같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다. 사실 둘이 친분이 있는 선수들임은 확실하다. 성시백이 선수생활을 접은 지금에도 곽윤기와는 연락을 계속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곽윤기가 성시백의 연세대 후배이기도 하고, 국대 초창기엔 단거리에서 콤비로 활약했던 적이 있다.
[1] 창녕 성씨 지사공파 28세손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성함도 "성명제"로 27세손 제(濟) 자 항렬이고 성시백은 28세손 시(始)자 항렬이다.[2] 1000m를 더 잘탈 것 같은데 의외로 1500m를 더 잘탔다. 경기운영능력이 가장 중요한 1000m에서 경기운영이 조금 아쉬웠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올라운더 스케이터인건 맞지만 발목 부상이 심해지면서 세종목을 완벽히 활약할 수 있을 만큼 발목이 버텨주지 못했다.[3] 당연하지만 선수시절이다. 170cm 초반대 선수들도 60kg대 체중이 나가는걸 감안한다면 상당히 마른편이었다.[4] 2006-07 시즌에는 선발에는 실패했으나 시즌 후반 부상 당한 이호석을 대체해서 세계선수권 계주 멤버로 출전했다.[5] 전재목 전 국대코치가 인터뷰 중 한 말이다.[6] 전이경이 해설위원이었을때 성시백에 대해 '(성시백)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다' 고 말하기도 했다. [7] 다른 선수들 세네번 피치 올릴때 성시백은 한두번으로 폭발적으로 가속이 가능하다.[8] 500미터는 쇼트트랙 개인전 세종목 중 가장 추월이 나오기 힘든 종목이다. 이유는 당연히 거리가 짧은 종목이기 때문에 스타트부터 끝까지 선수들이 전력 질주를 하기 때문이다.[9] 사실 성시백은 500미터를 송석우처럼 집중 훈련해온 선수는 아니었다. 그냥 타다보니 좋은성적이 나와서 꾸준히 연습했더니 어느세 세계 정상급 스프린터로 성장해버린 것.[10] 남자선수로는 임효준황대헌이 나오기 전까지 유일했다고 볼 수 있다. 여자선수로는 박승희최민정 정도가 성시백과 비견될만한 올라운더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국적 시절의 안현수이호석, 곽윤기, 심석희도 500미터를 잘 타는 편이지만 정작 스타트가 반 이상 먹고 가는 종목에서 스타트가 약했기 때문에 올라운더라고는 볼 수 없다.[11] 앞에서 언급했듯이 쇼트트랙 선수치고 체구가 크고 다리가 상당히 긴편이다. 쇼트트랙에선 키가 180cm가 넘어가는 거구가 아닌 이상 다리가 길었을때 보는 혜택이 상당이 크다.[12] 이호석(1986년생)이 한 살 더 많지만 성시백이 빠른 87년생이라 학교는 같이 다녔다.[13] 종합 1위는 이호석, 2위는 김현곤이었다.[14] 이곳에서 안현수와 함께 서호진에게 양보를 요구당하고 거부하자 폭행을 당했던 일이 벌어졌다.[15] 5위 안에 들어야 참가자격이 주어진다. 참고로 4, 5위는 코치진의 다른 결정이 아니면 자동적으로 계주에만 참가가 가능하고, 5위는 대부분 계주 준결승에만 출전했다.[16] 500m, 1000m, 1500m, 3000m, 계주까지 무려 '''5관왕'''이다. 참고로 최은경 선수가 지난 대회에서 전관왕을 했다.[17] 참고로 프랑수아루이 트랑블레가 예선전에서 세운 올림픽 신기록을 같은 동료인 샤를 아믈랭이 준결승에서 갈아치웠고 2009-10 시즌에는 1, 2위를 기록했다.[18] 이에 반해 대부분의 중국 페이스북 유저들로부터는 '재밌는데 뭐가 문제냐는 댓글들이 많았고', 성시백이 넘어진 것 덕분에 금메달을 어부지리로 따낸 캐나다 유저들도 재밌다는 반응이었다.[19] 더군다나 성시백은 그냥 그저 그런 스케이터가 아닌 현역시절 상당한 인정을 받았던 스케이터다. 얼마나 ISU 쇼트트랙 페이스북 관리자가 쇼트트랙에 대해 몰상식한지 잘 알려준 셈이다.[20] 성시백 본인도 굉장히 화가 났었는지 해당 중국 선수를 어깨로 툭치고 지나가기까지 했다.[21] 스피드가 예전보다 많이 떨어졌던 모습을 보였다.[22] 전직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전이경이 직접 성시백의 페이스북 프로필에 너무 이른것이 아니냐는 말과 은퇴를 축하하다는 글을 남겪다.[23] 500미터 결승에서 발목에 무리를 느껴 제대로 레이스를 펼치지 못했고, 후에 계주 결승전에는 이호석곽윤기가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2번주자(이정수) 대신 4번주자로 나섰다.(원래대로라면 이호석이 없을시엔 성시백이 2번주자를 맡아야 했지만 컨디션 문제인지 4번주자로 출전했다.) 그런데 11바퀴 남기고 1번주자를 밀어주다 넘어졌고 발목에 더 큰무리가 생겨서인지 아니면 더 큰 부상을 예방하려는 차원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후에 레이스에서 빠지게된다. 결국 성시백이 빠지면서 1위로 잘 달리고 있던 한국이 캐나다와 미국에게 차례로 추월당하며 3위로 내려 앉게된다.[24] 참고로 바로 같은날 500미터 이후에 있었던 계주 결승 경기를 본다면 성시백의 컨디션이 100%가 아니었다는걸 알 수 있다.[25] 체력적인 부담이 가장 적은 종목이기 때문이다.[26]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로 쇼트트랙 선수 최초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학구파로 유명하다. 2014년 현재 영국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이다.[27] 성시백의 팬이라면 봐두면 좋다.[28] 최근에 국대에서 활약했던 대한민국 선수 중에는 김윤재오세종이 고글을 안 끼는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