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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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독재 이전 생애
3. 통치시기의 기행들
4. 자뻑 경전
5. 그 외의 기행 이력
6. 사망과 사후
7. 번외: 긍정적 평가


1. 개요


투르크멘어: Saparmyrat Ataýewiç Nyýazow (사파르므라트 아타예비치 느야도프)[1]
러시아어: Сапармурат Атаевич Ниязов(사파르무라트 아타예비치 니야조프)
사파르무라트 아타예비치 니야조프(1940년 2월 19일 ~ 2006년 12월 21일)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이자 종신 독재자이며 자칭 국부이다. 그는 1990년 11월 2일부터 2006년 12월 21일 사망할 때까지 약 15년간 투르크메니스탄을 통치했다. 집권기에 그는 '투르크멘인의 수령'이라는 뜻의 '튀르크멘바시으(Türkmenbaşy)'라고 스스로를 자칭하며 우상화를 일삼았다. 원래 자신을 '튀르크멘인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멘(Atatürkmen)'으로 칭했는데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터키 정부가 항의해서 바꿨다는 일화가 있다. 이슬람 카리모프 등과 더불어 중앙아시아의 막장 독재자로 유명하지만 사람을 적극적으로 죽이거나 한 건 아니고[2] 워낙 웃음거리가 될 만한 기행을 수도 없이 해서 언론에 오르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독재 이전 생애


니야조프는 1940년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시가바트 외곽 그프자크(Gypjak)시에서 태어났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아타므라트(Atamyrat)는 독소전쟁 때 징집되어 1942년 캅카스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어머니 구르반솔탄(Gurbansoltan)과 두 형제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은 1948년 아시가바트 대지진 당시 사망했다. 고아가 된 그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소련고아원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959년 학교를 마쳤고, 1962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가입해 정치에 입문했다. 1967년에는 전자 공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이후 빠른 승진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하여 1985년 만 45세의 나이에 투르크멘 SSR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5년간 서기장으로 재직하였고, 1990년에는 투르크멘 SSR의 초대 직선제 대선에서 압승, 소련 해체 이후 무난하게 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4차원적인 행동을 해보일 사람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밑바닥에서 정말 열심히 노력하여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 니야조프에게 충언을 해 줄 부하들과 주변인들이 사라지면서[3]그는 점차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고, 그 이후부터 후술할 우스꽝스러운 기행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처음 독립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취임식을 가졌을 때, 쿠란을 대고 선서했는데 이를 두고 투르크메니스탄 사람들은 니야조프가 독실한 무슬림이라서 이슬람주의식 통치방식을 도입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

3. 통치시기의 기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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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 유명한 황금 동상. 대통령궁의 한복판에서 를 바라보며 돈다. 니야조프 재임 시기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의 공식 입장은 동상이 태양을 향해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니야조프를 존경하는 태양이 동상 주위를 돈다는 것이었다. # 실제 높이 # 다른 사진[* 그리고 이는 게임 트로피코 시리즈에서 쓸데없이 훌륭하게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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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개가 아니다! # # # 실제 높이 2
우선 니야조프는 자신을 드높이기 위해 금 동상을 비롯한 여러 동상들을 세웠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독재자들과 같다고 볼 수 있겟지만 이 나라 입장에선 상당한 막장짓인데, 이슬람 국가에서 동상은 금기이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를 극혐하는 나라에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데에서 그의 비범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립 이후에 서기장 시절의 자신을 기리기 위해 투르크메니스탄 서쪽의 항구도시[4] 크라스노보츠크(Красноводск)를 튀르크멘바시으로 개칭하는가 하면 고등교육 과정을 2년으로 단축시켜 버리고 학교를 반으로 줄였으며 1993년 이후 외국에서 학위를 취득한 의사, 교사를 해고했다.[5] 이에 전문인력이 부족해져서 군인의사 일을 할 지경이었지만 그는 이를 의료비를 절감한 혁신적 정책이라 자화자찬했다.
게다가 자기 부모 생일을 각자 국경일로 정했다. 자신의 아버지 생일은 아버지의 날, 어머니 생일은 어머니의 날 국경일로 정한다든지. 투르크메니스탄의 기후를 무시한 채 '''1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얼음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했으며 실제로 수도 아시가바트 외곽의 산악 지대에 얼음 궁전을 짓기 위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거기에 멜론을 무지 좋아해서 매년 8월 둘째주 일요일을 '''멜론의 날'''이라고 기념일로 만들었다. 변명이라고 하자면 저 동네에서 생산되는 머스크멜론이 덩치도 크고 씨알도 굵직한데, 안에 과육은 달달한 크림과 같은 짙은 풍미로 꽉 차있어 장난 아니게 맛있으며, 구소련권 전역에서 인기 많은 특산품이긴 하다.
'''2002년 그는 1년을 8달로 한 이상한 역법을 창시했고 자신이 태어난 달(9월)과 자신의 부모 이름을 달 이름으로 쓰는 등 온갖 이상한 기행을 벌였다. '''[6] 같은해 2월 18일 자신의 62번째 생일 기념 행사때 62세에 죽은 무함마드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국민은 62세가 되는 날 정부수당과 함께 3일 간의 휴가를 갖게 될것이라고 선언했다. 인생을 12년 주기로 나눈 '''니야조프 분류법'''에 의하면 노년층은 85세에서 시작하며 73세는 '''지혜의 나이''' 61세는 '''영감의 나이'''이다. 니야조프는 자신이 쓴 시에서 자신을 '''투르크멘의 정신이며 황금시대를 가져온 구세주'''로 자신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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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에 얼굴은 기본이었다.
그가 집권하던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가 첫 소절은 "Türkmenbaşyň guran beýik binasy", 그러니까 "튀르크멘바시가 세운 위대한 건축물"이라는 가사[7]로 시작되어 노래 시작되자마자 독재자 찬양이 나오는 가사였다. 하다 못해 윗동네 김일성, 김정일 장군의 노래나 문화대혁명 시기 동방홍도 시작되자마자 독재자 찬양은 아니거늘... 다행히 2006년 그가 죽은 후 가사가 바뀌었다. 국영 텔레비전에서 시시때때로 이 인간의 얼굴이 엄청나게 자주 비쳐졌던건 기본, 한국인 여행자가 여기 가서 화장실만 가도 화장실에까지 이 인간 사진이 걸려서 경악했다는 증언도 있다.[8] 또한 공인 시인이라 시에 대한 영감이 떠오를 때면 국영 텔레비전에서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매일같이 자신의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기상청일기예보에 실패해 그에게 비를 맞게 했다고 월급이 반토막이 났고 현재 대통령인 베르디무하메도프가 보건장관으로 재직했을 당시 의사간호사들의 월급이 연체 중이라는 이유로 똑같이 몇 개월간 월급을 받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 또한 그의 카레이싱을 위해 도로는 항상 비워져야 했다.
또한 2001년도에 외국인 남성들이 투르크메니스탄 여성과 결혼할때 5만 달러라는 거금을 국가에 내도록 했는데, 이게 주변국 가운데서 일부 부유한 산유국 남성들을 제외한 나머지 외국인 남성들에게 엄청난 거금이었던 것은 물론이고[9] 더군다나 소련 시절에 투르크메니스탄을 떠나 타지로 이동을 가거나 투르크메니스탄에까지 와서 정착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엄청난 문제점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외국인 남성과 연애하는 투르크메니스탄 여성들을 반 강제적으로 불법체류자로 만든 공헌(?)이 있다.

4. 자뻑 경전



그걸로도 부족해서 튀르크멘의 아버지임을 자칭하면서 '''루흐나마'''[10]라고 하는 경전까지 썼다. 사실 원래는 이렇게 경전으로 쓰일 예정은 아니었고 투르크메니스탄 SSR차원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과 역사, 풍습에 대해 소개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평가하는 일종의 지침서 정도로 편찬될 예정이었지만 니야조프가 자화자찬격인 내용을 넣을 것을 지시하면서 사이비 경전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서 책 내용을 보면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과 도덕상에 대해 논하거나 이슬람교적인 내용이 들어있는 정상적인 내용과 니야조프를 자화자찬하는 이상한 내용이 섞여있다. 니야조프는 이렇게 편찬된 책을 보고 만족했는지 모든 국민들에게 이를 읽고 암송해야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무슬림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만큼 이맘들이 루흐나마를 왜 쿠란과 동급에 놓아야 하냐면서 반발했지만 이에 대해 해당 이맘들이 근무하는 모스크를 철거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그래서 뭇 모스크에서 별 수 없이 루흐나마를 걸어놓아야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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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황금 동상은 물론이고 루흐나마를 묘사한 조각상까지 세워놨다. 사진은 수도 아시가바트에 있는 루흐나마 기념비.
또한 루흐나마를 정식 교육과정에 포함시키고, 모스크에도 배치하며, 운전면허 시험에서도 암송하게 했다. 이에 따라 시험시간은 '''16시간'''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2006년 그는 터키력 신년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누구나 루흐나마를 한 번만 읽으면 지혜로워지며 아침, 점심, 저녁 이 책을 하루 세 번만 읽으면 자연스레 천국에 갈 것이다. 이는 내가 하나님께 여쭤본 일이다" 라는 희대의 망언을 했다. 이 희대의 망발은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더 황당스러운 건 이 책을 세계 40여 나라에 수출까지 했다(정확히는 무상 수출.)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2007년 번역되어 나왔는데''' 3권짜리 두툼한 책자로 권당 4만원에 가까운 값이었다. '''이 책은 시각 장애인을 위해 음성판, 점자판도 출판되었다. 2001년에 1권이 출간되었고 2004년에 2권이 출간되었다. 2006년에는 100만 부를 돌파하였다.''' 그리고 이걸 꾸란, 성경과 더불어 3대 성서라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건 출판사측에서도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니라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로부터 한국어판 출판 의뢰를 받아 찍어낸 것 뿐이다. 그러니까 출판사로써는 그냥 한국어 번역료와 기타 출판에 필요한 제반비용을 받아 책을 인쇄해준 것 뿐이다. 의외로 꽤 많은 대학교의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학교 도서관에서 한번 찾아보자.
이런 막장 노릇에 다른 이슬람 나라들이 당연히 반발했다. 이웃 나라들도 죄다 독재자 투성이지만, 그래도 그들조차도 이렇게 지가 경전을 쓰네 뭐네 이럴 정돈 아니라서 그들도 엄청 비웃었다고 한다.[12] 하여튼 니야조프는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이것만 읽고 외우고 공부해라"라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도 세뇌시키듯 강요했다. 이거 잘 외우고 잘 이해하면 장학생으로 우선 선발권을 가졌으니 뭐 할 말 다했다. 게다가 이거 읽으면 천국에 간다고 사이비 종교 교주 노릇까지 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눈치챘겠지만 딱 ''' 현대판 궁예'''라 봐도 무방하다(...)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씹어먹고 멋대로 경전을 집필하지를 않나, 전 인민을 상대로 무엇인가를 암송하도록 강요하지를 않나, 스스로를 우상화하지를 않나...

'''현재까지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제작된 영화는 무조건 초반부에 니야조프의 황금동상과 함께 루흐나마의 구절이 나온다.

5. 그 외의 기행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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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그는 수술로 인해 금연했는데 이를 계기로 전국에 금연령을 내려버렸다. 이 금연령은 지금도 여전히 실행 중이라 흡연자들은 외출하기 전 집안이나 차 안에서 미리 담배를 피운다고 한다. 투르크메니스탄 여행자의 글을 보면 이 나라에서 담배를 어떻게 태우는지 나와 있다. 그래도 담배의 해악을 생각하면 다른 기행에 비해 낫다. 또 건강이 악화되자 국민들이 내게 기도를 많이 해 힘들다며 기도를 줄이라고 국민들에게 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덤으로 길거리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것도 금지시켰다. 이 역시 여전히 실행중인데, 당연히 이것도 사람들은 몰래몰래 잘 어기고 있다.[13]
2001년엔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단 이유로 발레오페라도 금지, 2003년금니장발, 턱수염을 금지했으며[14] 2005년 , 힙합, 더 나아가 투르크메니스탄 국민의 예술성과 가창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립싱크까지 금지 했다. 대중문화에서 자신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러시아어교육인 경우는 니야조프시절에 폐지되기도 했다가 2008년부터 부활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에선 '''그래도 재미는 있는''' 러시아TV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이걸 막을려고 했지만 얼마 안 가서 사망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또한 지구온난화로 갈 곳을 잃은 동물들을 위해 전 국토의 90% 가까이가 사막인 투르크메니스탄에 동물원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신임 석유.가스장관을 임명하여 향후 6개월 안에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다면 해임시켜버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특이한 공항"'''을 짓겠다고 아슈가바트 국제공항의 '''관제탑을 터미널 뒤에''' 지어 관제사들 시야를 가려놓고 "보기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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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공항 이름도 자기 이름을 붙여 '''사파르무라트 튀르크멘바시 국제공항(Saparmurat Turkmenbashy International Airport)'''[15]으로 바꿨다. 이 모든 돈지랄이 엄청난 광물 및 가스, 석유 등 자원이 가득했기에 가능했다. 물론 니야조프가 죽고 난 뒤에는 관제탑도 원 위치로 되돌려 놓고 공항 청사도 현대화 공사를 했다. 무엇보다 이름도 아슈가밧 국제공항으로 개명하였다.이렇게 각종 기행으로 주변국에서 엄청난 비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그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는데, 구소련 붕괴 이후 다른 나라와 달리 벨라루스와 더불어 경제적으로 막장이 되지 않은 유이한 국가이며, 또 분배를 잘했기 때문이었다.
소련 붕괴의 후유증[16]과 낙후된 제조업으로 인해 실업률도 높았던데다가 물가상승률도 높아서 월급 수준이 당시에는[17] 한국 돈 몇만원 정도로 낮았기에 겉으로 보면 폭동이 일어나도 할말이 없을거 같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니야조프는 괴짜스러운 언행과 행동과는 별개로 이런쪽에는 머리를 잘 써서 '''소련시절의 복지제도를 상당부분 유지시켰고 그 덕택에 사회안정을 유지했다.''' 우선 생필품과 식료품을 매우 싼 값에 풀었기에 소득수준에 비해 엄청나게 풍족한 식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교통비와 공공요금도 매우 싸게 책정되어 직장인 기준으로 미화 1달러만 있으면 1년 내내 버스를 타고 출퇴근할 수 있었으며 휘발유값[18], 전기료, 가스비, 수도요금, 소금값도 2020년까지 면제하겠다고 선언하였고 또한 교육수준이 저하되었어도 어쨌거나 무상교육 제도를 유지해서 교육비 걱정을 할일도 없었다. 집도 공공근로기간을 채우면 무상으로 주었기 때문에 '''체감되는 경제문제가 크게 완화되어''' 동시기 러시아 같은 나라처럼 범죄율이 크게 늘어나거나 타지키스탄같은 나라처럼 전쟁이 벌어진다나 하는 일 없이 일단 안정이 유지되었기에 국민들도 니야조프의 행동이 어처구니없기 그지 없어도 들고 일어날 동기가 적어 니야조프의 기행에 대항하는 시위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특히 투르크메니스탄은 IMF의 구조조정 방안을 거절할 정도로 경제상황은 더욱 호전되었는데,[19] 그 덕택에 아시가바트를 흰색 건물들로 깔끔하게 정비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대규모 건축물과 황금동상을 만들 여유가 있던 것이었기도 했다. 북한김일성, 김정일 동상 등 우상화물의 상당수가 그나마 잘나가던 시절 만들어진 걸 고려하더라도 우상화를 위한 건축물도 돈이 있어야 지을 수 있는 법이다.[20]
실제 니야조프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에 가봤던 사람들에 의하면 투르크메니스탄이 1인당 국민소득으로만 본다면 빈국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기는 커녕 중앙아시아 국가치고는 잘산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옆동네 인간 말종과는 다르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잡아죽인 것도 아니었는데 아무리 기행을 벌였다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만큼은 꺼려했는지 오히려 사형제를 폐지하고 라마단 기간 중에 범죄자들을 만명씩 사면하기를 즐겨했었다. 즉 구소련권 치고는 오히려 투르크메니스탄은 형벌이 꽤나 관대한 국가였다.
그러나 아무리 배부르게 먹고살게 해줬다고는 한다만 당연히 독재는 독재인지라, 외화벌이를 위한 목화산업에 총력을 가해 사람들에게 목화산업체에서 일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의외로 사면을 즐겨하고 과도한 처벌을 피하기는 했어도 감시를 아예 안 한것도 아니라서 수도인 아시바가트에서 수만명의 정치경찰이 돌아다녔다고 하며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한다거나 뭔가 수상한(?) 행동을 하면 가볍게는 면허나 등록증이 취소되거나 무료 공공서비스를 중지시키는 수준에서 심하게는 유신시절 한국의 민청학련 사건처럼 장기징역형을 선고한 뒤 슬그머니 감형해서 1년 정도 살게 해서 반정부 운동을 하면 지옥을 맛본다는 걸 가르쳐 주는 등 등 여러가지 불이익을 주었다고 한다.[21] 당연히 정보 차단을 위하여 각종 해외 뉴스와 통신은 죄다 금지했고, 3개의 국영TV채널과 신문사들은 웃기건 말건 그저 니야조프를 찬양하는데 열중이었다. 인터넷 접속이 금지된것도 덤이었다. 그래서 투르크메니스탄에 PC방이 들어서고 인터넷 사용허가가 내려진 것은 니야조프가 죽고 난 뒤의 일이었다.

6. 사망과 사후


하지만 이런 우상화 속에서도 그는 암살을 두려워해 삼엄한 경비 속에서 지냈는데, 사실 국민들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니야조프에게 큰 불만이 없어서 그를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22] 그러나 철저한 경비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심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했고 결국 이로 인해 2006년 사망했는데, 일설에는 당시 2인자였던 베르디무하메도프가 보다 못해 일부러 응급조치를 못 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찌됐든 그가 죽고나서 2인자이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정권을 잡았다. 그도 독재자의 길을 답습하고 있어 비난을 사고 있지만, 그나마 니야조프보단 훨씬 낫다는 평. 니야조프의 온갖 금칠 동상을 부수고 루흐나마도 치우고 검열도 완화시키고 대중문화 금지도 풀어버리면서 니야조프는 대중문화로 비웃음과 풍자로 실컷 매도당하고 있다. 베르디무하메도프가 다시 황금동상을 세운다고 하는 것으로 봐선 추모열기는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지만 그게 베르디무하메도프 본인의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우습게도 살아생전에는 그다지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저런 막장이라도 미국이나 러시아에게 대들지 않으며 중립적으로 외교를 벌인 탓에 미국 언론에선 우고 차베스랑 다르게 살아 생전 그를 그다지 비난하지 않았던 데다 옆나라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롬 카리모프처럼 극단적인 탄압 정책을 하지 않는 등, 적당히 서방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23]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인 탓에 미국 우익언론이 독재자라고 신나게 보도하던 거랑 대조적이다. 물론 지식인들은 비웃으며 풍자했지만. 죽은 다음에서야 더 국제적으로 '이런 사람이더라~' 하는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이 사람은 국제적으로 딱히 도발을 한 건 없고 자국민을 마구 죽이거나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수십만 단위로 수용소에 넣지도 않았고[24], 복지정책도 어느정도 펴기는 했으며 반대파도 죽이거나 잔혹하게 다룬 것이 아니라 가장 큰 불이익이 장기형 선고하고 실제로는 감옥 좀 넣어서 엿먹이는 정도였으므로 인간으로 보면 의외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25] 그래서 지금도 투르크메니스탄 국민들은 니야조프에 대해 딱히 큰 악감정은 없으며[26], 국제적으로도 그저 제 안방 안에서 오로지 권력과 숭배만을 탐한 기인, 괴짜 정도로만 평가하고 있다.

7. 번외: 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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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업적이라고 부를 만한 행적이 있다면 아할 테케(Akhal-Teke)라는 투르크메니스탄 순종 말 보호에 이바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 말은 중국 측 사서에는 한혈마로 기록되어 있는데, 2차 세계 대전 때 군마로 징집되어 죽어나가는 바람에 멸종할 뻔 했던 걸[27] 과거 소비에트 연방 시절 공산당 간부로서 니야조프가 수가 줄어든 것에 깜짝 놀라 보호에 무척 힘썼기에 멸종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아할 테케 품종 말들도 니야조프의 은혜를 아는 것인지(?) 후계자인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승마중일 때 그를 떨궈서 낙마시켜버렸다. #

[1] 투르크멘어에서 y는 [ɯ\] 발음으로 ý([j\])와 구분되며, z는 [ð\] 발음이다.[2] 물론 투르크메니스탄의 교육과 의료수준을 저하시키는 데 공헌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까여도 할 말이 없기는 하다.[3] 그의 영부인인 무자 니야조바(Muza Nyýazowa)는 이미 1980년대 후반에 모스크바에 정착하며 살았고 남편인 니야조프가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이었을 때에도 투르크메니스탄에 살지 않고 주 모스크바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살고있었다고 한다. 즉,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남편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 죽을 때까지 별거생활을 해왔다는 것이었으며 그래서인지 남편이 한창 괴짜기질을 내보였을 때에도 제어를 할 만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던 셈이었다.[4] 내륙국인데 왜 항구가 있냐면 카스피 해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5] 이 부분은 약간의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이, 구소련권 국가들의 엘리트들은 오늘날까지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고, 러시아어를 사용하여 학문적 종속관계에 놓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투르크멘인들은 가장 강력히 러시아화를 반대한 민족이기도 하다. 또한, 이와 비슷한 정책은 오직 투르크메니스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역시 독립하고 자국어만 사용하게 했다가 전문인력 부족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독립 당시 카자흐인이 전국 인구의 50%도 차지하지 못했던 카자흐스탄은 국가 마비 상태까지 가서 결국 포기했을 뿐이다.[6] 이 역법은 2008년 결국 폐지되었다.[7] 참고로 니야조프가 직접 쓴 가사다.[8]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데 떡 하니 저 인간 사진이 윗 벽에 걸려있으니 이건 대체 감시당하는 기분이라고 언짢았다.[9] 당시에는 러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조차 3,000달러 언저리였고 모스크바 주민들이 받는 봉급 수준은 월 100달러 안팎이 고작이었다.[10] 영혼을 뜻하는 아랍어 루흐(ruh)와 페르시아어로 편지 또는 책이라는 뜻을 가진 나메(nameh)의 합성어이다.[11] 또한 이맘들 입장에서 니야조프를 마냥 우습게 볼 수 없었던 것이 정신머리가 이상하게 돌아다닌 인간이기는 했어도 어쨌든 전통문화 부흥정책의 일환으로 이슬람교를 권장하면서 모스크를 건축시키는데 돈을 대주거나 터키이란 등 주변 이슬람국가로 신학 유학보내주는데에 있어서는 거리낌이 없었던지라 속으로 어이가 없었어도 그냥 굽힐 수밖에 없었다.[12] 그래도 짝은 짝이라고 서로 사돈 맺고 엄청 연결되곤 했다.[13] 이것이 기행인 이유는, 해바라기씨는 동구권과 구 소련 지역에서 심심할 때 땅콩처럼 까먹는 국민 간식이기 때문이다. 값도 싸서 길바닥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것은 고프닉의 스테레오타입이기도 하다.[14] 정작 투르크메니스탄의 과거사진이나 과거의 모습을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턱수염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문화이고 아랫나라 이란에서는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턱수염을 기른다. 한반도에서 전통적으로 어른들은 상투를 틀고 아이들은 댕기머리를 하는 것이 전통이었음에도 장발단속이나 학생들 대상으로 두발단속을 하는것과 비슷한 맥락의 일이다.[15] 공항 IATA코드 : ASB, ICAO코드 : UTAA. 투르크메니스탄플래그 캐리어인 투르크메니스탄 항공의 허브 공항이다. 과거 김포국제공항과 직항 노선도 있었다.[16] 사실 당대 주변국들의 경제사정이 하나같이 좋지 못해서 투르크메니스탄에 줘야할 가스대금을 체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17] 요새는 좀 높아져서 한국돈으로 30만원~40만원 정도 한단다. 그 대신 보조금을 삭감해서 식료품이나 생필품 가격이 올랐고, 무상이나 다름없었던 공공요금도 상당부분 인상되었다.[18]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을때에는 한달에 최대 150리터까지 배급받을수 있었다고 하며, 다 써도 휘발유값이 혜자나 다름없는 가격인지라 차를 마음대로 타고 다녀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19] 실제로 투르크메니스탄은 구소련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한 카자흐스탄보다는 못살지만 그럭저럭 나라 꼴이 괜찮은 축에 속한다.[20] 덧붙이자면 벨로루시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도 같은 이유로 계속해서 지지를 받아 장기집권하고 있는 것이다.[21] 그러다보니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외국인한테 니야조프에 대해 가급적이면 좋게 얘기해주는 분위기이기도 한다. 물론 니야조프에 대해 분위기가 풀어진 뒤로는 같이 비웃고 하는 경우도 종종있지만 말이다.[22] 단 2006년도에 연금회수명령을 내리면서 연금을 받은 노인들을 상대로 돈을 내놓으라고 하고, 안 내놓는 사람에게 연금지급 명령을 내리는 등 투르크메니스탄 국민들 입장에서 매우 어처구니 없는 삽질이 이어졌던 상황이었으므로 이게 장기화되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수 있긴 하다.[23] 사실, 미국은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의 논리대로 반미성향을 보이는 독재자들은 탄압하지만 친미성향을 보이는 독재자들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반미감정을 가질 정도로 지나치게 막나가지만 않으면 관대하게 침묵하거나 지원해준 이력이 많다.[24] 1999년에 투르크메니스탄은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했고, 사형제가 폐지되기 전에도 사형 집행은 흉악범을 제외하면 일단 소극적이었다. 일단 마지막 공식 사형 집형 년도는 1997년.[25] 물론 어디까지나 니야조프 본인이 학살을 안했을지언정 교도소에서 다른 이유로 사망한 국민들은 많을 수도 있다. 당장 러시아만 해도 사형 유예이지만 교도소에서 의문사한 죄수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26] 현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저지르는 행각도 우상화를 제외하면 니야조프보다 딱히 낫다고 할 수도 없으므로 더욱 그렇다.[27] 2차대전 당시에 가장 많이 죽은 나라가 소련이다. 6천만 명으로 추정하는 사망자에서 2천만 이상이 소련군 및 민간인이다 보니 전쟁용으로 차출된 개나 말도 같이 엄청나게 죽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