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이아 왕조
1. 개요
Casa Savoia. 사보이아 공국/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왕국의 왕조. 이름의 유래는 프랑스의 지방 이름 사보이. 중세 이탈리아의 유력 가문이자,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유일한 왕조.
3년동안 스페인 왕국의 왕가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데오 1세 항목 참조.
2. 역사
2.1. 이탈리아 통일 이전
현 프랑스 사보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사보이 왕조는 11세기인 1032년 사보이아 백작으로 서임된 움베르토(Humberto) 1세에 의해 창건되었다. 옆나라 프랑스의 카페 왕조처럼 혈통이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행운이 있었으며, 그 덕에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왕조가 되었다. 창건 이후 프랑스와 북이탈리아에 걸친 독립 군주국으로 번영했으며, 1416년 공작위를 받아 사보이아 공국이 되었다. 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위스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 여러 세력들을 중재하며 실리를 추구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시칠리아 왕국을 양도받아 시칠리아 왕을 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스페인 왕 펠리페 5세가 잃어버린 이탈리아 내 스페인 영토의 탈환과 조카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외치며 시칠리아 섬을 침공해 점령하자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 오스트리아의 도움으로 시칠리아를 탈환했는데 이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면서 사르데냐의 왕이었던 카를 6세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바꾸자고 제안하였고[3] , 그 제안을 받아들여 사르데냐 섬을 얻어 1720년 국호를 사르데냐 왕국(Regno di Sardegna)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사보이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과 명목상의 부르고뉴 왕국의 일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밖에 위치한 프로이센 공국을 획득해 프로이센 왕국으로 개칭한 브란덴부르크와도 비슷하게 사르데냐 왕국을 칭하게 된 것이다.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 제1제정의 나폴레옹에 의해 주요 강역인 피에몬테를 잃었으나, 빈 회의에서 프랑스로부터 피에몬테를 되찾아 1814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Regno di Sardegna-Piemonte)으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1831년에 사보이 본가의 대가 끊기고, 사보이아-카리냐뇨 가문 출신의 카를로 알베르토가 새 국왕이 되었다.
2.2. 리소르지멘토
사보이 왕가는 이후 리소르지멘토의 중심이 되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도움을 받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세습한 봉토 사보이 지방을 프랑스에게 넘겨준다.
시대에 따라 사보이아 가문은 사보이아 공가·시칠리아 왕가·사르데냐 왕가·이탈리아 왕가가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다른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 확장과 황제 겸임을 위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아도와 전투에 패하면서 좌절됐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양 진영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연합국 측에 힘을 실어주는 태도를 취했다.
2.3. 무솔리니 집권기
사보이아 왕조는 무솔리니 정권에서 파시즘 세력의 우군이 되어주었다.
1935년에 일어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에티오피아를 강점하면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 황제를 겸임했다. 그러나 국제연맹을 포함하여 미국·멕시코·중국·소련 등 국제사회 다수가 승인하지 않아 널리 인정받지는 못했고, 영국·프랑스가 1938년에 에티오피아 강점을 승인[4] 하면서 열강으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기미가 보이는 듯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두 나라는 에티오피아 강점 승인을 취소(1940년 6월)한다. 뒤이어 일어난 영국군 주도 연합군의 동아프리카 작전(1941년 1월)으로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상실[5] 하면서 황제위는 속 빈 강정이 되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계속 황제를 자칭했고 이는 이탈리아가 무조건 항복한 2달 뒤인 1943년 11월까지 계속됐다. 종전 후 1947년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과 황제 겸임은 그 합법성이 부정됐으며, 이탈리아 신정부는 에티오피아 강점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추가로 에티오피아 정부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무솔리니보다는 더 관망하는 입장이었지만, 1940년 6월에 독일이 프랑스를 급속도로 밀어붙이자 이탈리아의 대(對)프랑스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의 프랑스 침공에는 이견을 보였지만,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물론이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1939년) 알바니아 병합과 전쟁 초반에 일어난 그리스 침공에는 이견 없이 동조·승인했다.
전황이 악화되어 연합군이 본토를 위협하자 왕가는 무솔리니를 버리고 항복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는 이탈리아 항복 협상 중에도 연합국 측에 '''리비아 등 아프리카 식민지 유지'''와 왕가 유지를 항복 조건으로 요구했다. 이미 때늦은 요구였고 연합국 측에 의해 거부됐다. 그는 이탈리아 정부의 무조건 항복 뒤에도 얼마 동안 '''의회가 합법적으로 내게 부여한 칭호'''라는 이유로 에티오피아 황제위와 알바니아 왕위 포기를 거부하는 등 무가치한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2.4. 왕정 폐지
무솔리니 정권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 정권에 협조했으며 물질적 안락을 누리며 생활한 사보이아 왕가 전체에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공화정 여론이 크게 대두되었다. 좌파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 당시부터 존재했던 공화정 수립 여론이 다시 크게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움베르토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하는 강수를 두면서 왕정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1946년 치뤄진 왕정과 공화정 중 선택 여부를 묻는 개헌 국민투표에서 46:54로 패하여 왕정이 폐지되었다. 이로서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었고, 국왕 움베르토 2세와 그의 남자 직계후손들은 2002년까지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왕가 측에서는 개헌 국민투표를 결과가 조작된 부정 선거였다고 주장하지만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정치권에서는 왕가 측의 이의 제기를 무시했고, 이탈리아 대법원도 왕가 측의 이의 제기를 기각했다.
왕정 폐지 당시 왕정 지지 성향이 강한 남부 나폴리 등에서는 공화국을 부정하고 왕정 신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일부 과격 왕당파는 무력으로 공화국을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 움베르토 2세는 국가 분열과 내전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6] 게다가 이탈리아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연합국 측은 왕정 폐지로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왕정 지지자도 대부분 내전을 불사할 정도로 왕정 유지에 사활적이지 않았다. 결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움베르토 2세 등 사보이아 왕가 구성원들은 대거 망명을 떠났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집트로 망명을 떠났고,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로 망명을 떠났다가 카네이션 혁명 후 다시 스위스 제네바로 떠났다.
신생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는 파시즘과 제2차 세계대전 전쟁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모든 사보이아 왕가 남자 구성원의 이탈리아 입국을 금지하는 조항을 공화국 신헌법에 넣었다. 이 금지 조항은 2002년 11월에야 의회 표결을 통해 폐지되었고, 그 대신 사보이아 왕가의 수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왕위 요구를 포기했다.
2.5. 현재
2002년 11월에 의회 표결로 입국 금지가 해제된 후 사보이아 왕가 구성원 대부분은 이탈리아로 귀국하여 이탈리아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7] 현 수장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그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2008년 1월에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하지만 사보이아 왕가가 이탈리아 귀국을 허락받는 등 현 이탈리아 정부와 정치적으로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옛 왕가에 대한 이탈리아 내 여론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심하면 왜 귀국을 받아줬냐며 2002년 당시 왕가의 귀국을 허용한 이탈리아 정부를 비난하는 의견도 있는가 하면 왕가 문장조차 혐오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그 후손에 대한 평가인데[8] 이는 사보이아 왕가의 대(對) 파시즘 협력과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무사안일·무능함에 기인한다. 게다가 그 후손의 비행(非行), 망언, 극우 성향 등등도 여론의 비호감 원인 중 하나이다. 여론은 왕가 후손을 거의 퇴물(退物) 취급한다.
현 사보이아 왕실의 수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41살이던 1978년 자가용 요트에서 고무보트가 없어지자 화풀이로 옆 보트에서 잠자고 있던 19살인 독일 청년 덕 해머를 총으로 살해했는데도 고작 6개월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약을 투약한다거나 스페인에서 아마데오 공작을 구타한다거나 등의 비행을 저질렀다. 노인이 된 후에도 2006년 마피아 관련 인신매매 주모자 혐의로 긴급체포를 당했다. 또한 "무솔리니 정권의 무엇이 문제였냐?"면서 무솔리니와 파시즘 정권을 두둔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해 정치적으로도 빈축을 샀다. -
현 사보이아 왕실 수장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또한 마약중독자였으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는 정치성 발언[9] 을 해 빈축을 산 적이 있다. -
2007년 두 부자(父子)는 왕가의 재산을 반환하라면서 2억 6000만 유로(한국 원으로 3240억원이 넘는다)을 보상하라는 발언을 하며 이탈리아 여론의 분노를 샀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이탈리아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피노 스고비오는 "이탈리아에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사보이아 왕가 족속들"이라고 비난했고, 당시 총리실 관계자 또한 "(사보이아 왕가가) 제2차 세계대전 전후(前後)로 해서 취한 행동을 근거로 그들에게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경고성 발언을 했다.
이탈리아 극우 파시스트 일부의 옹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극우 파시스트 세력 내에서도 왕가에 대한 입장은 차이가 있어서 극우 세력 상당수는 사보이아 왕가 통치 시절이 아닌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시절을 자신들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왕가의 보신(保身)이 주된 이유이긴 했지만 왕가에서 전쟁 말기에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을 통수쳤기 때문이다.
3. 역대 국왕 및 가문 수장
- 이탈리아 통일 이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1861-1878)
- 움베르토 1세 (1878-1900)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900-1946)
- 움베르토 2세 (1946)
- 가문 수장
- 움베르토 2세 (1946-1983)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983-)
이 사람의 외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딸 둘만 두고 있어서, 남계가 절손될 가능성이 높다. 움베르토 1세 이후 계속 외아들로만 대가 이어진지라, 그 이후의 왕가의 수장은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에게로 가게 된다. 그래서 2020년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가문의 계승법을 바꾼다고 선언했으나, 당연히 아오스타 가문 등에서는 반발 중.
4. 분가
분가 사람들은 1946년 이후에도 국외추방을 당하지 않았다. 단 왕위계승권을 비롯한 모든 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사보이아-제노바 공작가 - 카를로 알베르토의 차남 페르디난도 왕자를 시조로 하여 5대 165년(1831~1996) 동안 지속됨.
- 사보이아-아오스타 공작가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메데오 왕자[10] 를 시조로 하여 1845년 창설. 5대째 지속되고 있다.
[1] 무솔리니의 파시즘 집권기에는 왕가 문장에도 파스케스가 덧붙여지는 흑역사가 있었다.[2] 라틴어 문장의 약자(略字)이긴 한데, 무엇의 약자인지는 여러 설이 있다.[3]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반강제로 바꾸자고 협박한 것이다. 위트레흐트 조약의 결과 오스트리아는 밀라노, 이탈리아 남부와 사르데냐를 얻었는데 멀리 떨어진 사르데냐보다는 가까운 시칠리아가 통치하기에 더 유리했기 때문.[4] 그러나 이탈리아 왕의 황제 겸임은 승인하지 않았다.[5] 사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의 대부분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완벽하지는 못해서, '''1941년까지도''' 몇몇 지역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지지하는 저항세력이 버티고 있었다.[6] 당시 남부가 전반적으로 왕정 지지 여론이 우세했다고 하지만 남부의 공화정 지지 여론 또한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수준으로 낮지 않았으며 남부 지역 일부는 공화정 지지 여론이 더 높았다. 게다가 이탈리아 국민 대다수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이탈리아 재계조차 분열·내전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일부 왕당파가 실제로 국가 분열을 시도했다면 얼마나 물적 뒷받침을 받을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상황이었다. [7] 여성의 경우 이전부터 이탈리아 국내 거주가 가능했다.[8] 사실 '통일군주'라 알려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조차 로마 이남 지역에서는 억압자·착취자라며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판테온에 묻혀야 마땅하다는 발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파시즘 집권과 제2차 세계대전 때 보여준 추태를 고려한다면 빈축을 살만한 발언이었다.[10] 1870~1873년 사이 잠시 스페인 국왕 '아마데오 1세'로 즉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