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헨토
1. 개요
스페인 국적의 前 축구 선수, 감독. 현재 레알 마드리드 CF의 명예 회장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의 일원으로 라리가 12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6회 우승'''을 이끈 주역 중 한명이었으며 19-20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 컵 시절 포함.)와 19-20 라리가까지를 기준으로 역대 챔피언스 리그 단독 최다 우승자(6회)[1] & 역대 라리가 단독 최다 우승자(12회)[2] 다.
2. 축구 경력
2.1. 클럽 경력
1952-53 시즌에 레알 라싱 소속으로 데뷔한 뒤, 한창 전력 쇄신에 열을 올리던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눈에 띄어 곧바로 다음 시즌에 이적해 11번을 배번받게 된다. 그리고 압도적인 속도를 바탕으로 한 드리블과[3] 전문 윙어 치고는 높은 득점력을 앞세워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다. 헨토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등과 막강한 공격진을 이루었고, 레알 마드리드는 1955-56 시즌 레몽 코파가 이끄는 스타드 드 랭스를 4:3으로 격파하며 유러피언 컵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헨토는 1956-57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줄리뉴 보텔류가 이끄는 ACF 피오렌티나를 상대한다. 헨토는 디 스테파노와 함께 골을 넣으며 2:0으로 피오렌티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 후 페렌츠 푸스카스, 호세 산타마리아까지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957-58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레알 마드리드는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했는데,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와 에르네스토 그릴로에게 실점을 허용하는 등 고전했으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엑토르 리알의 동점골로 연장전에 돌입하였고, 헨토는 마침내 결승골을 넣어 유러피언 컵 3연패를 달성한다.
그 후 1959-60 시즌까지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 레알 마드리드는 '''저승사자 군단'''이라고 불렸다. 특히 1959-60 시즌 결승전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7:3으로 격파하는 등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0-61 시즌에는 숙명의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에 유러피언 컵에서 덜미를 잡혔고, 1961-62 시즌에는 에우제비우의 SL 벤피카에 패하며 유럽의 제왕 자리에서 내려온다.
이후 기존 스타들이 하나둘씩 떠나며 저승사자 군단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헨토는 꾸준히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팀은 대대적인 개혁을 거쳐 이제 Ye-yé 마드리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헨토만은 베테랑으로서 끈질기게 자리를 지켰고, 1963-64 시즌에는 폰테베드라전(3-1 승리)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2000호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4-65 시즌에는 라리가 5연패를 달성했으나,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는 인테르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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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66 시즌에 헨토는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다. 푸스카스가 5골을 폭발시키며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대파시켰고, 폴 반 힘스트가 이끄는 RSC 안데를레흐트를 상대로 헨토는 아만시오 아마로와 함께 양 측면을 붕괴시키며 격파했고, 4강전에서 인테르도 격파하며, 작년 결승전 패배에 대한 복수를 했다. FK 파르티잔와의 결승전에서는 벨리보르 바소비치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아만시오와 세레나의 골로 2:1 역전승을 거두어 헨토는 레알 마드리드의 6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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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헨토는 1971년까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6회, 라리가 우승 12회,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씩 우승하며 레알 마드리드에 수많은 트로피를 안겨주었고, 이후 1970-71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헨토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1962년 칠레 월드컵 당시 스페인의 스쿼드는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맞이하던 호세 산타마리아, 페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헨토 본인에다가 FC 바르셀로나에서 월드 클래스의 활약을 보여준 루이스 수아레스가 있었다. 그러나 디 스테파노는 지역 예선에서 부상당해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체코슬로바키아, 브라질, 멕시코와 한 조가 되었는데 멕시코에 1골로 겨우 이기고 나머지 두 팀에 패배하며 조 꼴지로 광탈했다. 이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에 출전하지 못했는데, 하필 이 대회에서 스페인은 우승을 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역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2.3. 은퇴 이후
은퇴한 뒤에는 여러 팀의 감독과 레알 마드리드 홍보 대사 등을 역임했다. 2016년 10월 23일(현지 기준)에는 소시오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레알 마드리드 명예 회장으로 추대됐다. 참고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도 2000년에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에 의해 명예 회장으로 추대된 다음 만장일치로 승인을 받은 바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현재 스페인 윙어하면 다비드 실바, 페드로 로드리게스 등 유기적인 스위칭과 창의적인 패스로 바탕으로 상대 중앙 수비를 박살내는 스타일의 윙어가 생각나겠지만 헨토는 전형적인 클래식 윙어이다. 빠른 발과 화려한 드리블링으로 상대의 측면을 돌파하며 동료에 머리에 볼을 배달하는 게 그의 스타일.
트레이드마크는 빠른 주력이었다. 지금 레알 하면 생각나는 치달왕은 가레스 베일이겠지만 헨토가 진짜 치달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00m를 10초 안에 주파하는 괴물 같은 스피드를 보유했던 그는 당시에는 특히 더 눈에 띄었다.
크로스 역시 굉장히 날카롭고 정확하게 들어갔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로 구성된 중앙 공격진의 득점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 디 스테파노가 직접 '''헨토가 없었다면 우리도 이렇게 많은 골을 못 넣었을 것'''이라고 비슷한 어조로 언급한 적이 있다.
4. 평가
클럽에서는 거의 역대 최고라고 봐도 된다. '저승사자 군단'에서 ' Ye-yé 마드리드'로 이어지는 레알의 황금기 2개를 운 좋게 걸쳤다. 시대를 잘 타고나 좋은 동료들과 뛰었으며, 본인도 그 사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쳐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6회, 라리가 우승 12회로 각각 반 세기 내내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전자나 후자나 사실상 경신하기 힘든 대기록이다. 무엇보다 이 기록은 18년 동안의 선수 생활을 통해 쌓은 것인데, 18년은 야구로 쳐도 상당히 긴 편이며 축구 선수들에게는 단순히 현역으로 버티기에도 버거운 시간이다. 그리고 그런 기록에 맞는 선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대표 커리어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헨토는 '예-예 마드리드'의 주역이었음에도, 그들이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에서 자국의 첫 우승을 이끌었을 때 불참하여 우승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5. 커리어
5.1. 대회 기록
- 레알 마드리드 CF(1953-54~1970-71): 23회 우승 [4]
5.2. 개인 수상
- 스페인 1960년대 최고의 선수 5위[5] : 2018
- 레알 마드리드 CF 명예의 전당: 1971
- 레알 마드리드 CF 1960년대 최고의 선수 2위[6] : 2018
-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베스트 11(2): 2015[7] , 2018[8]
- 월드 사커 세계 베스트 11(3): 1960~1962
- 월드 사커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인 100명: 1999
6. 기타
- '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선수들이 그렇듯 '파코'가 애칭이다.
- 레알 마드리드는 헨토를 위한 기념 경기를 무려 3번이나 열어줬는데, 현재까지는 헨토가 유일한 사례이다. 첫 번째 경기는 1965년 9월에 리버 플레이트를 불러들여 열었고, 두 번째 경기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개장 25주년 기념 경기와 겸해서 CF 오스 벨레넨세스를 불러들여 개최했다.[9] 마지막 세 번째 경기는 비교적 최근인 2007년 12월 제29회 트로페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10] 에서 파르티잔을 상대한 경기였다.[11]
- 3형제가 모두 레알 마드리드에서 현역 선수로 활동한 집안 내력을 가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도 3형제가 레알 마드리드에 선수 혹은 비선수로서 관여한 내력이 있다.
- 마르코스 요렌테의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이다.
-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원년 우승 멤버 중 마지막 생존자이다.
- 'La Galerna del Cantábrico(칸타브리아의 광풍)'라는 별명의 유래에 대해선 일화가 하나 존재한다.
>레알 마드리드는 산 마메스 원정에서 아틀레틱 클루브에 5-0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틀레틱의 서포터들은 경기 종료 후 모두 기립박수를 보냈고, 모든 선수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간 이후에도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포르타(Saporta, 당시 레알 마드리드 부회장)는 선수들로 하여금 다시 경기장에 들어가 인사를 하도록 했다. 그러자 관중들은 더 큰 박수와 환호로 답례를 해 왔다. 다시 선수들이 퇴장을 시도했지만 박수 소리는 커져만 갔다.
>그러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헨토, 관중들이 너에게 보내는 박수다. 나가 봐라."라고 말했다. 헨토가 경기장으로 나오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은 스페인의 모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이후 그는 '칸타브리아의 광풍(La Galerna del Cantábrico)'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12]
>
>Luís Miguel Ferreira, 《Biblia Del Real Madrid》
>그러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헨토, 관중들이 너에게 보내는 박수다. 나가 봐라."라고 말했다. 헨토가 경기장으로 나오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은 스페인의 모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이후 그는 '칸타브리아의 광풍(La Galerna del Cantábrico)'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12]
>
>Luís Miguel Ferreira, 《Biblia Del Real Madrid》
- 어린 시절 헨토의 집안은 소를 치는 일을 했고 헨토 역시 아버지를 도와 축구와 함께 소를 키우는 일을 병행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빠른 발은 소를 잡는 일을 하면서 더 단련이 됐다고 한다.
[1] 2등은 5회의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그리고 저승사자 군단 시절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 7명.[2] 2등은 10회의 리오넬 메시와 피리.[3] 100미터를 11초 만에 주파했는데 공을 단 상태에서도 그와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4]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다 우승.[5] 골닷컴 선정[6] 골닷컴 선정[7] 골닷컴 선정[8] 스카이 스포츠 선정[9] 벨레넨세스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개장 첫 경기의 상대 팀이었다.[10]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기리기 위해 매 시즌 전에 구단이 개최하는 친선 대회.[11] 파르티잔은 레알 마드리드와 헨토의 6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 당시 결승전에서 만났던 팀이다.[12] 'Galerna'는 스페인의 북쪽 해안에서 부는 강풍을 뜻하는 단어이고, 칸타브리아는 그 인근에 위치한 주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