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 마드리드 CF/역사

 



1. 개요
2. 초창기
2.1.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
3. 저승사자 군단[1]
4. Yé-yé 마드리드(Yé-yé Madrid) 시대
5. 독수리 오 형제(La Quinta del Buitre) 시대
6. 로렌소 산스 임기 - 다시 유럽 정상에 올라서다
7. 갈락티코스(Galácticos) 1기
7.1. 무너진 갈락티코스 1기
7.2. 문제점
8. 라몬 칼데론의 임기 - 네덜란드 커넥션
8.1. 2006/07 시즌
8.2. 2007/08 시즌
8.3. 2008/09 시즌
9. 갈락티코스(Galácticos) 2기 시작 - 호날두의 팀 출항
9.1. 2009/10 시즌
10. 주제 무리뉴(José Mourinho) - 라 데시마를 향한 길로 이룩한 시기
10.1. 2010/11 시즌
10.2. 2011/12 시즌
10.3. 2012/13 시즌
11. 카를로 안첼로티(Carlo Ancelotti) - 갈락티코스 2기가 주축이 되어 만든 라 데시마
11.1. 2013/14 시즌
11.2. 2014/15 시즌
12. 라파엘 베니테스(Rafael Benítez)
12.1. 2015/16 시즌
13.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 - 호날두의 팀, 절정에 오르다
13.1. 2015/16 시즌
13.2. 2016/17 시즌
13.3. 2017/18 시즌
13.4. 챔피언스리그 3연패, 그 이후
14. 훌렌 로페테기(Julen Lopetegui Argote)
14.1. 2018/19 시즌
15. 산티아고 솔라리(Santiago Solari)
15.1. 2018/19 시즌
16.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 2기
16.1. 2018/19 시즌
16.2. 2019/20 시즌
16.3. 2020/21 시즌


1. 개요


원년인 1902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다.
레알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황금기는 보통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저승사자 군단 시대), 1960년대 중후반(Yé-yé 마드리드 시대), 1980년대 후반(독수리 오 형제 시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라울&갈락티코스 시대)으로 구분된다. 특히 Yé-yé 마드리드 시대의 도래 이후에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의 자국 출신 선수가 대표 팀의 아이콘으로 군림하는 전통이 확립됐다.[2]

2. 초창기


1895년에 마드리드에 처음 설립된 축구 클럽인 Football Sky는 1900년 New Foot-Ball de Madrid와 Club Espanol de Madrid로 분리된다. 이 중 Club Espanol de Madrid는 1902년에 Sociedad Madrid FC로 개편되는데 이게 현 레알 마드리드의 시작이다.[3] 개칭 후 초대 회장인 후안 파드로스 루비오와 2대 회장인 카를로스 파드로스 루비오 시기 동안 코파 델 레이에서 4연패를 달성한다.[4] 여러 구장을 전전하다가 1912년에는 캄포 데 오도넬(Campo de O'Donnell)로 구장을 옮겼다.
1920년부터 지금의 레알 마드리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엠블럼에 왕실의 상징인 왕관을 달았다. 이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로부터 '레알'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은 것이다. 현재 클럽 명 앞에 '레알'이 붙은 클럽들은 모두 알폰소 13세 시기 때 칭호를 하사받은 것이다. 스페인 제2공화국시기와 내전 당시에는 격하되어서 'Madrid C.F.'라는, '레알'을 뺀 명칭과 왕관을 뺀 엠블럼을 사용하였다.
초창기부터 마드리드 지역 대회를 발 아래에 두었다.[5]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서 서술한 코파 델 레이 4연패 등으로 스페인 전역에 이름을 날리면서, 바스크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던 아틀레틱 클럽, 그리고 카탈루냐 지역의 FC 바르셀로나와 함께 스페인 최강자 중 하나로 꼽혔다.[6]
1929년에 라 리가가 개막한 가운데 코파델레이 우승 경력이 있던 6팀[7]에 포함되어 첫 시즌부터 라 리가에 참가했다. 라리가 원년 시즌인 1929년 최종전 직전까지 선두였지만 최종전에서 빌바오에 져 초대 우승팀 자리를 '숙명의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에게 넘겨주었다. 그 다음 시즌인 1929-30 시즌에 5위에 그치자 바르셀로나와 빌바오를 견제하기 위해 1930년대 세계 최고급의 골키퍼였던 리카르도 사모라RCD 에스파뇰로부터 영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31 시즌에는 리가 최소실점을 기록하고도 실점보다 적은 득점력 부족으로 지난해보다 1계단 더 낮은 6위에 그쳤다.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의 성립으로 팀명에서 '레알'이라는 칭호가 빠져 '마드리드 CF'가 되었다. 1931-32 시즌, 하신토 킨코세스, 마누엘 올리바레스, 시리아코 에라스티(이상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루이스 레게이로(레알 우니온), 일라리오(데포르티보 라 코루냐)를 대거 영입하여 전력을 대폭 강화시켰는데 결국 폭풍투자의 효과를 보며 10승8무 무패로 첫 번째 라 리가 우승에 성공했다.[8] 그 다음시즌인 1932-33 시즌에도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이 시즌에 마누엘 올리바레스는 14경기 16골로 레알 마드리드의 첫 번째 피치치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세 시즌 연속 준우승에 그쳤으나 1934년과 1936년 코파 델 레이에서 각각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던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모든 스포츠가 중단되었다. 전쟁 후 마드리드는 다시 레알이라는 칭호를 달 수 있었다. 하지만 내전 종식 이후 레알은 코파델레이에서 1946년과 1947년 연속 우승을 따내기는 했지만 리그에서는 2-5위권에서만 맴돌 뿐 한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1942-43 시즌과 1947-48 시즌에는 10위[9]와 11위[10]로 간신히 강등을 피하기도 했다.[11]
이러한 상황에서 1943년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회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 이듬해인 1944년부터 새로운 스타디움인 '차마르틴 경기장'과 시우다드 데포르티바 훈련장을 건립해 스페인 내전으로 피해를 입었던 기반 시설을 복구했다. 이렇게 베르나베우 회장은 왕조를 건설하기 전 기나긴 기초 공사를 다져가고 있었다.

2.1.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




3. 저승사자 군단[12]


1953년에 레알 마드리드는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금빛 화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와 계약하며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다. 이후 세계적인 스타들을 영입하며 다국적 군단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저승사자 군단 시절 레알 마드리드를 거쳐간 선수들은 이 외에도. '폭주하는 소령' 페렌체 푸스카쉬(Ferenc Puskás), '칸타브리아의 광풍' 프란시스코 헨토(Francisco Gento),[13] 엑토르 리알(Héctor Rial), '나폴레옹' 레몽 코파(Raymond Kopa), '벽' 호세 산타마리아(José Santamaría),[14] 미겔 무뇨스(Miguel Muñoz), '마법사' 아만시오 아마로(Amancio Amaro) 등이 있다.
1953/54 라 리가 '''우승'''[15]
1954/55 라 리가 '''우승'''
1955/56 라 리가 3위, 유러피언 컵 초대 '''우승'''[16]
1956/57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우승'''[17]
1957/58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우승'''[18], 코파 델 레이 준우승
1958/59 라 리가 준우승, 유러피언 컵 '''우승'''[19], 코파 델 레이 준우승
1959/60 라 리가 준우승, 유러피언 컵 '''우승'''[20], 코파 델 레이 준우승
1960/61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16강'''[21], 코파 델 레이 준우승, 인터컨티넨탈 컵 '''우승'''
1961/62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준우승'''[22], 코파 델 레이 '''우승'''
1962/63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예비라운드[23]
1963/64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준우승'''[24]
이 시기에 레알 마드리드는 11시즌 동안 리가 8회 우승(평균 승점 83), 유러피언 컵 5회 우승/2회 준우승, 기타 컵 1회 우승[25]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업적을 이룩하고 '''저승사자 군단'''이라 일컬어지며 전 유럽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강력한 헤게모니를 구축한다. 유럽 최초 트레블이 이 시기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을 듯 하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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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화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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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프란시스코 헨토
저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 대항할 수 있는 왕조를 구축한 클럽을 꼽으라면 전 유럽 축구사를 통틀어 봐도 몇 없는데, 미친 오프사이드 트랩과 정신 나간 포지션 교체, 경기 전체를 쥐고 상대를 가둬서 패는 것으로 유명했던 요한 크루이프의 팀인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중반까지의 '''<토탈 풋볼> 아약스 왕조''',[27] 라이벌이었던 아약스의 가패 축구를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며 왕좌를 이은 프란츠 베켄바워의 70년대 초중반의 '''<데어 카이저의 팀> FC 바이에른 왕조''',[28] 이안 러시, 수네스, 앨런 핸슨, 캘러헌, 필 닐, 케니 달글리시 등등... 제라드도 고개 내밀기 힘든 리버풀 레전드들이 구축했던 70년대 중반~80년대 중후반까지의 '''<붉은 제국> 리버풀 왕조''',[29] 이전 시대의 아약스를 연상케 하는 엽기적인 오프사이드 트랩 시도와 숨 막히는 프레싱으로 이름을 날렸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후반까지의 '''<사키 혁명> 밀란 왕조''',[30] 역대 최강을 넘보는 메시와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로 자리매김한 사비, 그리고 크루이프의 철학이 레이카르트와 과르디올라를 거쳐 정착된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도 초반까지 이르는 '''<포제션 풋볼> 바르셀로나 왕조''' 정도만이 이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4. Yé-yé 마드리드(Yé-yé Madrid) 시대


1964/65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8강[31]
1965/66 라 리가 준우승, 유러피언 컵 '''우승'''[32]
1966/67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8강[33], 인터콘티넨탈컵 준우승[34]
1967/68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준결승[35]
1968/69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16강[36]
1969/70 라 리가 5위[37], 코파 델 레이 '''우승''', 유러피언 컵 16강[38]
1970/71 라 리가 4위, UEFA 컵 위너스 컵 준우승[39]
1971/72 라 리가 '''우승''', UEFA 컵 32강[40]
1972/73 라 리가 4위, 유러피언 컵 준결승[41]
1973/74 라 리가 8위, 코파 델 레이 '''우승''', UEFA컵 1라운드[42]
1974/75 라 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우승''', UEFA 컵 위너스 컵 8강[43]
1975/76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준결승[44]
1976/77[45] 라 리가 9위, 유러피언 컵 16강[46]
1977/78 라 리가 '''우승'''
1978/79 라 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준우승, 유러피언 컵 16강[47]
1979/80 라 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우승'''[48], 유러피언 컵 준결승[49]
저승사자 군단의 강세는 저게 끝이 아니고, 70년대 초반까지도 라 리가 우승은 기본에,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도 여전히 정상을 다투는 팀이었다. Yé-yé 마드리드는 '제2의 디 스테파노, 제3의 디 스테파노를 스페인 자국 출신 선수로 키워 내자'라는 정책의 일환으로서 탄생한 1960년대 레알 마드리드를 일컫는 애칭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디 스테파노 시대가 저문 이후 스페인 각지에서 젊은 인재를 불러 모아 자국 출신 선수들로 팀을 구성했고, 이러한 세대 교체는 대표 팀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써 이뤄졌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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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é-yé 마드리드의 유러피언 컵 우승
Yé-yé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결과물은 바로 스페인의 유로 1964 우승이다. 당시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던 "마법사" 아만시오 아마로는 디 스테파노의 뒤를 잇는 레알 마드리드의 아이콘으로 군림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들은 아만시오 아마로를 비롯하여 벨라스케스, 피리, 소코, 마누엘 산치스 등이 있으며 이들은 1965/66 유러피언 컵, 즉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FK 파르티잔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다만 이 이후로 30여년간 레알 마드리드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하지 못하는 저주에 걸리게 된다.
그 유명한 크루이프의 바로셀로나 시절(1973~1978)이 이 시기에 포함된다. 화려한 명성과 달리 의외로 크루이프는 바로셀로나에서 지낸 5년 동안 단 한 번 1973/74시즌 라 리가 우승을 하였고, 1974/75시즌 유러피언 컵 4강에 올라 리즈 유나이티드와 붙었으나 1차전 2:1 패배, 2차전 1:1 무승부를 하며 총합 스코어 3:2로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 Yé-yé 마드리드가 이 시절 우승을 못한 것은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팀 자체 문제 때문이지 바르셀로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5. 독수리 오 형제(La Quinta del Buitre) 시대


1980/81 라 리가 준우승[51], 유로피언 컵 준우승[52]
1981/82 라 리가 3위, 코파 델 레이 '''우승''', UEFA 컵 8강[53]
1982/83 라 리가 준우승[54], 코파 델레이 준우승, UEFA 컵 위너스 컵 준우승[55], 리그컵 준우승
1983/84 라 리가 준우승, UEFA 컵 1라운드[56]
1984/85 라 리가 5위, UEFA 컵 '''우승'''[57], 리그 컵 '''우승'''
1985/86 라 리가 '''우승''', UEFA 컵 '''우승'''[58]
1986/87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준결승[59]
1987/88 라 리가 '''우승''', 유러피언 컵 준결승[60]
1988/89 라 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우승''', 유러피언 컵 준결승[61]
1989/90 라 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준우승, 유러피언 컵 16강[62]
1990/91 라 리가 3위, 유러피언 컵 8강[63]
1991/92 라 리가 준우승, 코파 델 레이 준우승, UEFA 컵 준결승[64]
1992/93 라 리가 준우승, 코파 델 레이 '''우승'''[65], UEFA 컵 8강[66]
1993/94 라 리가 4위, UEFA 컵 위너스 컵 8강[67]
1980년대에는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에 강한 영향을 받아 스페인 각지에서 선수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닌, 유스 클럽으로부터 팀의 주축 선수들을 키워낸다는 의식이 확립됐다. 그 결과물로서 탄생한 것이 바로 1980년대 후반을 강타한 '''독수리 오 형제(La Quinta del Buitre, 라 퀸타 델 부이트레)''''로 불리우는 레알 마드리드이다. 다섯 마리의 독수리, 혹은 소수 정예 군단을 의미하는 이 애칭은 유스 클럽에서 올라와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매김한 "독수리"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마놀로 산치스,[68] 미첼[69], 마르틴 바스케스, 미겔 파르데사로 이어지는 5인방을 지칭한다. 그 외에도 프란시스코 부요, 울리 슈틸리케, 첸도, 우고 산체스, 호르헤 발다노,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보유한 마드리드는 1980년대 UEFA 컵 두 번, 라 리가 5번 연속 우승, 코파 델 레이 한 번,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세 번 우승을 일궈내며 세계 최고 클럽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특히 이 시기는 프랑코 독재가 끝난 시점에 이룩한 부흥기이기 때문에 과거 독재 정권의 비호 속에 전성기를 구축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주된 근거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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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오 형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울리 슈틸리케가 뒷줄 제일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전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비센테 델 보스케도 아랫줄 가운데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스페인 대표팀을 이끌었고,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도 역임한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도 있다. 그 외 선수들도 하나같이 위대한 레전드들이다.
다만 이같이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마드리드에 단 하나의 흠이 있다면 바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없었다는 점. 분명히 유럽 최고의 강호 중 하나였으며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강팀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유독 챔스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저 당시 챔스 무대에서는 '''킹 케니''' 달글리시를 위시한 붉은 제국 리버풀이 아직까지 그 위세와 명맥을 유지하던 시점이었으며 실제로 15년 만에 유러피언 컵 결승에 올랐던 1980/81시즌 결승전에서 리버풀에 1:0으로 지며 준우승했다. 그리고 헤이젤 참사 이후 영국 축구가 한동안의 침체기를 거치는 동안 AC 밀란이 유럽을 호령하던 시기였다.[70] 1990년 들어서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드림팀 대약진이 시작되면서 독수리 오 형제는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고 라 리가에서 한동안 바르셀로나에게 왕좌를 내줘야만 했다. 이에 따라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 조급증에 걸린 나머지 감독 경질 횟수도 더욱 늘어만 갔다.

6. 로렌소 산스 임기 - 다시 유럽 정상에 올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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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회장이던 로렌소 산스[71]와 트로피들의 모습
1994/95 라 리가 '''우승''', UEFA 컵 16강[72]
1995/96 라 리가 6위[73],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74]
1996/97 라 리가 '''우승'''
1997/98 라 리가 4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75]
1998/99 라 리가 준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76],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1999/00 라 리가 5위[77],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78]
한동안의 침체기를 겪은 뒤 마드리드는 1994/95 시즌 바르셀로나에게 라 리가 우승을 탈환하는 것으로부터 반격의 준비를 시작한다. 비록 이듬해 다시 바르셀로나에게 연이어 라 리가 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을 헌납했지만, 1996/97 시즌 다시 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전력을 정비한 레알 마드리드는 1997/98 시즌 유프 하인케스 감독 체제 하에서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페르난도 레돈도[79] 등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65/66시즌이후 32년 만에 챔스 우승을 달성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성과는 바로 부트라게뇨 이후 마드리드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게 된 '엘 니뇨' 라울 곤살레스(Raúl González)라는 존재를 발굴해 낸 것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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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8 시즌 UCL 결승전 선발 라인업
다만 라리가 왕좌는 여전히 바르셀로나의 차지였고, 기존 선수들과 새로 유입된 선수들 간의 불화 등의 요인이 겹쳐지며 라커룸 안팎으로 혼란의 정국이 거듭된다. 챔스 우승을 이끌어내는 데 공헌한 하인케스 감독도 시즌이 끝나고 해임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1998/99 시즌에는 거스 히딩크가 감독이 되었으나 성적 부진으로 1년도 못채우고 경질되기도 했다. 이어지는 1999/2000 시즌 중반에는 팀 순위가 10권 밑으로 내려가고 존 토샥 감독이 중간에 경질되는 등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이처럼 어수선한 와중에서 과거 레알 마드리드 선수로도 활약한 바 있었던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리가 우승은 꿈도 못 꿀 정도로 처참한 성적을 거두는 가운데 챔스 8강에서 하필 전년도에 트레블을 이룩한 팀, 데이비드 베컴, 로이 킨,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등 베스트 멤버가 건재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만나게 되었다.
마드리드는 당장 챔스 진출권 수성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맨 유는 리그 선두에 트레블 시즌의 주축들이 건재해서 대부분의 유럽 축구 전문가들과 팬들은 맨 유의 우세를 점치는 상황.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홈 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1차전, 마드리드와 맨 유는 0-0 무승부를 거뒀고 퍼거슨 감독은 자신들의 홈, 올드 트래포드에서 갖는 2차전을 앞두고 '레알 마드리드는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다'라고 발언. 이에 대해 라울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해 주겠다'라고 화답하면서 두 팀의 신경전은 극도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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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챔피언스 리그' 라울 곤살레스
운명의 8강 2차전. 두 팀의 치열한 공방 끝에 라울은 2차전 원정에서 홀로 2골을 넣으며 본인의 말을 증명했다. 라울의 2골과 맨유 주장 로이 킨의 자책 골이 겹쳐 OT 원정에서 3-2 승리를 거두어 준결승에 진출. 특히 세 번째 골에서 레돈도의 패스는 유명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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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라울은 챔피언스 리그 내내 최고의 활약을 보이면서 발렌시아와의 결승전에서까지 연달아 골을 작렬,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스티브 맥마나만의 골까지 나오며 3-0 승리를 따내 1999/00 시즌을 챔스 우승으로 드라마틱하게 마무리한다. 비록 리가 최종 순위는 5위에 그쳐 챔스 진출권에 들지 못했지만 우승 팀 자격으로 차기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라울의 활약을 바탕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익히 알려진 갈락티코스 체제를 추진할 수 있는 기폭제를 얻게 되었다.
당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에 이르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유럽 축구는 이른바 '''3M'''의 시대였는데(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이에른 뮌헨),[80] 이 세 클럽이 서로 물고 물리는 각축전을 벌이며 유럽 축구의 패왕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던 시기였다. 셋 모두 서로가 상대가 아니고서는 여간해선 지지 않았고 유럽 무대에서 꾸준하게 강한 모습을 보이며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였던 시기로 기억된다.
시즌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이에른 뮌헨'''
1997/98
우승
8강
8강
1998/99
8강
우승
준우승('''맨유'''에게 패배)
1999/00
우승
8강('''마드리드'''에게 패배)
4강('''마드리드'''에게 패배)
2000/01
4강('''바이에른'''에게 패배)
8강('''바이에른'''에게 패배)
우승
2001/02
우승
4강
8강('''마드리드'''에게 패배)
결과
우승
3
1
1
준우승
-
-
1
4강
1
1
1
8강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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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3M의 시대 속에서도 가장 돋보인 클럽은 레알 마드리드였고 당시 레알 마드리드를 진두지휘하며 위기 때마다 구해냈던 존재가 바로 라울 곤살레스였다.
저 시기 동안 라울은 2차례의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기록을 세우며 챔스의 사나이로 등극했고, 당시 라울의 존재는 마드리드 로컬 보이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연고지역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라커룸 안팎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했으며 전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그 어떤 선수로도 대체할 수 없을 만큼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특히 이 시기 라울은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와 함께 환상적인 궁합을 보이며 소위 '영혼의 투 톱'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모리엔테스와는 스페인 대표 팀에서도 한솥밥을 먹으며 이 시기 스페인 대표 팀을 상징하는 공격수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유스 선수 시절부터 이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날 때까지 쭉 함께 했던 죽마고우인 구티도 이 힘든 시기를 같이 버텼던 든든한 동료 중 하나이다. 이처럼 라울이라는, 아만시오 이래 내려온 스페니시 프랜차이즈 스타 계보가 다시금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과거 독수리 오 형제나 Yé-yé 마드리드 시대와 같은 스페니시 혹은 마드리드 유스 출신 선수들을 주로 기용하는 정책이 시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망과는 다르게 페레스 회장의 주도 아래 '축구는 곧 레알 마드리드로 통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계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영입, 과거 30여 년 전 유럽을 손아귀에 넣고 호령하며 공포의 헤게모니를 구축했던 그 시절을 다시금 반복하기 위하여 한동안 마드리드가 취해 왔던 방식과는 정반대의 정책이 시작된다. '''Los Galácticos(은하계 군단)''', 즉 갈라티코스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7. 갈락티코스(Galácticos) 1기


  • 2000/01 라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64강,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81], UEFA 슈퍼컵 준우승, 인터콘티넨탈컵 준우승
  • 2001/02 라리가 3위, 코파 델 레이 준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8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 2002/03 라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8강,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83], UEFA 슈퍼컵 우승,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 2003/04 라리가 4위, 코파 델 레이 준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84],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 2004/05 라리가 2위, 코파 델 레이 16강,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85]
  • 2005/06 라리가 2위, 코파 델 레이 4강,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86]
국내 팬들에게(혹은 대중적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이름이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라면 2000년도 초반 페레스 회장이 이끌었던 정책인 바로 이 갈락티코스 정책이다. 이 정책의 요점을 말하자면 '세계 유수의 공격수들을 모아 드림 팀을 만들겠다!'라는 것인데 실제로 거의 모든 선수들이 각 나라 역대 최고의 선수들이라고 봐도 무방할 선수들을 끌어 모아서 선수진을 구성했다.
초대형 영입의 시작이었던 루이스 피구(당시 역대 최고 이적료를 기록했다)는 레알 마드리드의 원수와도 같은 FC 바르셀로나의 중심 선수였기에 당시의 파장은 엄청났다.[87] 그 이후 유벤투스로부터 지네딘 지단을 사 오면서[88] 2001/2002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게 되는데 이때가 갈락티코스의 성적이 절정인 시기였다. 다만 당대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들로 불리던 지단과 피구의 공존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2001/02 시즌 초반 델 보스케 감독은 두 명의 플레이 메이커를 사용하는 데 골머리를 앓았고 시즌 중반 피구가 부상을 당하자 이전부터 수비력 측면에서 문제를 드러내던 지단 밑에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면서 경기력이 안정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시즌 마드리드는 리가에서 3위를 차지하는 데 그친다. 지단과 피구의 공존이 비로소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것은 2002/2003 시즌에 들어서면서부터인데, 이 시즌에 마드리드는 라 리가 타이틀은 되찾지만, 수비가 노쇠해서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전성기에 들어선 네드베드가 이끄는 유벤투스에 석패하며 4강에서 탈락했다. 당시 지단, 피구, 라울이 2선에서 보여주던 플레이는 정말로 아름다웠지만 결과가 아쉬웠다. 반면 리그 내용은 혼란이 많았던 편이었는데, 챔스에 전력을 너무 짜내서 그런지 주전들이 줄부상을 거듭하는 바람에 한때 2위로 주저앉았으나, 막판 페이스로 역전 우승을 이뤄내 레알 소시에다드의 우승 시도를 겨우 저지해냈다. 이 시즌에서 팀은 득점 86점으로 1위였으나, 전술한 수비진 노쇠로 실점은 리그 4위인 42점이었다. 챔스에서는 득점 33 / 실점 22를 각각 기록했다.
그 와중에도 2002 한일 월드컵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브라질의 호나우두를 영입하였다. 호나우두-라울 투 톱에 지단-피구 공격형 미드필더진이라는 유례 없던 최강의 공격진이 편성됨으로써 이때만 하더라도 네임 밸류와 공격력 모두에서 만점 활약을 펼쳤다(단 수비가 안습이라 앞서 공격진의 위력에 걸맞는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 서술하겠다). 다만 이 시기의 호나우두는 장기 부상 이전의 그는 아니었다. 성향상 포스트 플레이가 불가능했기에 공격 방식에 한계가 있었고, 마드리드 이적 후 초기엔 그나마 괜찮았던 활동량도 체중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시망하면서 파트너였던 라울만 죽어났다. 뒤이어 2003년에 잉글랜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상징과도 같은 데이비드 베컴을 영입하는데...

7.1. 무너진 갈락티코스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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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컴, 피구, 호나우두, 지단, 라울
전 시즌 때 악조건 속에서도 팀을 우승시킨 델 보스케 감독과 이에로 주장을 내치면서까지 강행한 베컴의 영입은 두 가지 문제점을 낳았다. 첫째는 베컴의 포지션이 피구와 겹쳤다는 것. 두 선수 모두 당대 최고의 오른쪽 날개로 평가받았기에 둘 중 하나는 포지션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막대한 돈을 들여 사온 선수를 벤치에 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수비력이 그나마 나은 베컴을 중앙 미드필더로 두고 두 선수의 공존을 꾀한 포메이션인데, 이는 당연히 실패한다. 영입 과정에서 베컴과 피구의 포지션 충돌을 막기 위해 전 맨유 수석코치 카를로스 케이로스를 감독으로 모셔와 지략을 빌리고자 했고, 수비형 미드필더 플라비우 콘세이상을 독일 분데스리가팀 도르트문트로 임대해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문제는 팀 내에서 위화감이 생긴 것. 호나우두까지만 하더라도 그러려니 했는데, 베컴이 들어오면서 팀 내에서 '갈락티코스가 아닌' 선수들 사이에서 위화감이 생겼다. 대표적인 예가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클로드 마켈렐레였는데, 페레스 회장은 팀의 화려함과 마케팅을 기준으로 그를 "4m짜리 패스밖에 못하는 애"라고 저평가했다. 이로 인해 전 주장 이에로가 페레스의 방침을 비판했고, 결국 마켈렐레는 당시 갑부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맞아 신흥 강호로 부상하던 첼시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마켈렐레의 이적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당시 갈락티코들에 준하는 주급을 재계약 협상 시에 요구했고 당시 주급 체계상 마드리드는 도저히 마켈렐레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만약 이때 마켈렐레의 요구를 수용했다면 오늘날의 레알 마드리드의 주급 체계와 프랜차이즈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외에 호나우두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든가 하는 자잘한 문제들도 있었다. 호나우두는 다른 재능에 비해 머리를 극도로 못 쓰는 공격수였는데, 크로스 능력이 역대 최고 수준인 베컴을 데려왔으니 당연히 비효율이 발생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강력한 공격진을 뒷받침하던 마켈렐레가 이적한 뒤 마드리드는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이후로 마드리드는 마켈렐레의 후계자를 찾는 데 전념하게 된다. 거론된 후계자만 해도 상당한 숫자인데, 파블로 가르시아, 에스테반 캄비아소, 토마스 그라베센, 에메르손, 마하마두 디아라, 라사나 디아라 등이 있다. 하지만 누구도 마켈렐레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후 2006/07 시즌 리가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단 하나의 우승 트로피도 가져오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그 동안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무너진 팀을 재건하며 2번째 UCL 우승을 하였고, 앞으로 다가올 영광의 순간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이런 성적상의 실패와는 별개로 베컴의 영입으로 갈락티코스의 마케팅은 완성되어, 선수에게 투자한 것보다 훨씬 많은 금전적 이익을 보게 된다.
단, 당시 마드리드의 부진을 마켈렐레의 이적 탓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어폐가 있을 수도 있다. 마켈렐레 이적 후인 03/04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강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리그 1위를 달리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으나, 로테이션 부족으로 주전 멤버들의 혹사가 시작됐고 후반기에 그 영향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켈렐레의 이적으로 바로 팀 경기력에 문제가 생겼던 건 아니다. 분명 스타 선수들의 영입으로 불균형적인 스쿼드가 된 것은 사실이나 수비수나 수비형 미드필더도 꾸준히 영입하면서 그 간격을 메꾸려고 했다. 다만 그 영입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팀의 붕괴를 막을 수 없었을 뿐이다. 이 내용은 레알 마드리드 CF/오해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렇게 망한 갈락티코스였지만 선수의 기본적인 능력치 탓인지 FIFA 시리즈 게임에서 03/04 레알 마드리드는 무시무시한 강팀이다.

7.2. 문제점


이 정책이 결과적으로 성적 면에서 실패한 것은 팀의 균형을 짜는 데 있어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정책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격진은 지단 같은 슈퍼 스타를 영입해서 채우고, 수비진은 파본 같은 카스티야 출신으로 메꾸겠다!'라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지다네스 & 파보네스라고 불렀는데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공격에 비해 수비 포지션은 자체 스펙보다 경험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크기 때문이다.[89] 기본적으로 수비수들이 공격수들에 비해 다소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더 오래 뛰는 것이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레알 마드리드의 경우는 갈락티코스를 진행하면서 팀에 오랫동안 충성했던 베테랑 선수들(대표적으로 이에로를 들 수 있다)을 방출하고 그 자리를 공격수로 채우다 보니 팀의 균형은 점차 무너져만 갔다. 물론 포지션 중복으로 인한 비효율성 또한 큰 문제로 불거졌다.
결국 수비진을 카스티야 출신으로 메꾸기는 벅찼는지 로마에서 이름을 날리던 센터백인 월터 사무엘을 들여 왔으나 안습한 활약으로 인테르로 헐값에 방출된다.[90] 그리고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뛰어난 유망주로 평가받던 조너선 우드게이트도 영입했는데 이 선수가 워낙 유리몸이라 2년 동안 9경기라는 병맛 같은 기록을 보여 주었고 데뷔 경기에서 자책 골을 넣는 등 전설과도 같은 활약으로 미들즈브러로 방출된다.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 팬들 사이에서 우드게이트라는 이름을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박찬호급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이 시기 마드리드와 뉴캐슬의 거래 관계가 재미있는데, 서로에게 맞사기를 먹였다. 뉴캐슬에선 우드게이트라는 대박 사기를 쳤던 반면 마드리드 역시 마이클 오언이라는 만만찮은 사기를 먹였다. 이후 수비수 최초로 발롱 도르를 수상한 파비오 칸나바로와 맨 유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던 가브리엘 에인세를 영입하며 수비를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녹록치 않았고, 이후 세르히오 라모스, 마르셀루 등이 성장하고 나서야 수비에서도 숨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이케르 카시야스를 제대로 레벨 업 시켜 2004/05 시즌엔.
▲ 2004/05 시즌 라 리가 상위권 3 팀의 슛 허용 숫자 비교
1위 바르셀로나: 총 331회 슛 허용, 173회 유효 슛 허용, 실점 29
2위 레알 마드리드: 총 583회 슛 허용, 348회 유효 슛 허용, 실점 31
3위 비야레알: 총 421회 슛 허용, 229회 유효 슛 허용, 실점 37
▲ 2004/05 시즌 사모라 상 순위(출전 횟수-실점으로 집계)
1위 빅토르 발데스(바르셀로나): 35경기 출전, 25실점, -10.
2위 이케르 카시야스(레알 마드리드): 37경기 출전, 30실점, -7.
3위 레오 프랑코(아틀레티코): 37경기 출전, 32실점, -5.
이런 경악스러운 슛 허용 대비 실점률을 보여줬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슛 허용 수는 세군다 리가로 강등된 누만시아(19위)와 알바세테(20위)의 기록을 넘어서는 놀라운 수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정책으로 인해 제일 큰 피해를 본 케이스는 마드리드의 유스들이라고 단언할 만큼, 우수한 꿈나무들이 다른 팀으로 옮겨 가거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게 되는 현상이 심했다. 사무엘 에투의 경우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친정 팀을 상대로 수많은 골들을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에게 제대로 직격탄을 때렸다. 감독들 역시 페레스의 우승 조급증과 과도한 현장간섭 때문에 1년도 못 가서 목이 잘리는 사태를 맞았는데, 2003년 델 보스케 경질 후 목이 잘린 감독들만 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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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하비 가르시아, 알바로 아르벨로아, 로베르토 솔다도, 알바로 네그레도, 후안프란. 국가대표 소집 중에 찍은 사진이다.
사무엘 에투(前 바르셀로나)뿐 아니라 하비 가르시아(맨체스터 시티), 로베르토 솔다도(발렌시아), 보르하 발레로(피오렌티나), 디에고 로페스,[91] 알바로 네그레도(이하 세비야), 후안 프란(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후안 마타(첼시) 등 라리가나 유럽 주요 리그에서 카스티야 출신으로서 타 팀 주전 자리를 꿰차고 국가 대표까지 뽑히는 선수들이 꽤 많다. 그리하여 마드리드는 유스 선수들을 방출할 시 일정 금액에 선수를 재영입할 수 있는 바이-백 조항을 자주 걸어 둔다. 또한 카스티야 출신 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여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골을 넣는, 이른바 '부메랑'이 가끔씩 날아 오기도 한다. [93]
한편 앞서 언급한 바이-백 조항으로 2008/09 시즌에 헤타페에서 재영입된 카스티야 출신 데 라 레드는 유로 2008 당시 국가 대표에도 소집되는 등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선수로 평가되었으나 정확한 진단이 나오지 못한 심장병에 의해 24세의 젊은 나이로 은퇴를 하게 되었다. 측면 수비수 아르벨로아는 리버풀이 마드리드에 '''역수출'''했다(바이-백 조항을 쓴 것이 아닌). 하지만 역시 계속 잔류시켰다면 괜한 돈 안 써도 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에는 뭐라 답할 수 없다. 이에 마드리드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페르난도 가고의 입단식에서 ''''우리는 암탉이 있으나 다른 곳에서 계란을 산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8. 라몬 칼데론의 임기 - 네덜란드 커넥션


  • 2006/07 라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16강,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94]
  • 2007/08 라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16강,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95],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준우승
  • 2008/09 라리가 2위, 코파 델 레이 32강,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96],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이 시즌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UEFA 챔피언스 결승전에 올라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붙어 2:0으로 승리하고 3번째 유럽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스페인 클럽 최초로 트레블, 무려 전관왕을 달성하며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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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의 갈락티코스 정책을 이끌었던 페레스 회장이 성적 부진 등의 책임을 지고 2006/07 여름 비시즌 기간 회장 선거를 거쳐 그 뒤를 칼데론 회장이 이어받게 되었다. 칼데론은 이전의 갈락티코스가 아닌 다소간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파비오 카펠로 감독을 다시금 불러들였고 카펠로 감독 체제 하에 마드리드는 2002/03 시즌 이후 네 시즌 만에 라 리가 우승 트로피를 탈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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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 시즌 우승 후 카펠로 감독[97]을 이어 2007/08 시즌 베른트 슈스터 감독이 들어온 이후 잠깐 동안의 네덜란드 커넥션 시기가 있었다. 이는 공격수 뤼트 판 니스텔로이, 클라스 얀 훈텔라르, 윙 포워드 아르연 로번, 공격형 미드필더 베슬리 스네이더르라파엘 반 더 바르트(VDV), 수비수 로이스톤 드렌테까지 네덜란드 국가 대표 선수만 6명이 뛰던 시절이었다. 이들 중 몇 명의 활약은 썩 괜찮아서 2번의 라 리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고 우승을 하지 못했던 시즌에도 바르셀로나와의 화끈한 리가 1위 탈환 경쟁에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훈텔라르의 적응 실패 및 주전 경쟁 탈락, 반 니의 부상[98], '''로번의 부상''', VDV의 적응 실패, 스네이더르의 부상, 드렌테의 기량 미숙으로 결과적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로번은 FC 바이에른으로, 스네이더르는 인테르로[99], 훈텔라르는 밀란으로 그리고 판 니스텔로이도 함부르크 SV로 이적하게 되었다.
VDV의 경우 히카르두 카카에게 밀려 벤치를 지키게 되자 끝까지 나가고 싶어했으나, 이적 협상을 번번이 실패하였고 암에 걸린 부인이 스페인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두고 이적할 수는 없어 남아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네덜란드 커넥션을 주도했던 칼데론 회장이 구단 총회에서 투표 조작 파문을 일으키며 임기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자진 사퇴 형식으로 2009년 1월에 사임했으며, 팬들은 페레스 시절의 화려했던 추억을 그리워했다. 이에 따라 그 자리를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다시 차지하게 되면서 과거 칼데론의 유산을 지우겠다는 미명 하에 네덜란드 커넥션은 급격히 와해되었다.
결국 2010/11 시즌이 시작하기 바로 전 VDV도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 로이스톤 드렌테도 당시 승격 팀인 에르쿨레스로 임대보내면서 네덜란드 커넥션은 완전히 끝났다.

8.1. 2006/07 시즌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성적 부진을 책임지고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선거를 통해 라몬 칼데론이 새로운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부임했다. 칼데론은 이전의 갈락티코스가 아닌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이전에 레알 마드리드를 맡은 경험이 있는 파비오 카펠로 감독을 불러들였고, 카펠로는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팀을 빠르게 재정비했고 인터뷰에서 공격적인 것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며 기존의 레알 마드리드 스타일을 버릴 것임을 공언했다.
여름 이적시장 때 활발한 영입을 통해 스쿼드를 보강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이탈리아의 우승을 이끈 파비오 칸나바로라는 센터백 자원을 영입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던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영입했다. 이 외에도 수비형 미드필더 마하마두 디아라에메르송을 각각 리옹과 유벤투스로부터 영입했다. 그리고 아스날에서 향수병으로 고생하던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를 한 시즌간 임대로 영입했다. 반면에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탈한 선수로는 은퇴를 선언한 지네딘 지단, 알바로 아르벨로아, 줄리우 밥티스타, 조나단 우드게이트 등이 있다.
리그 개막전부터 0:0으로 비기고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1차전부터 2:0으로 깨지면서 출발이 좋지 않았지만, 리그 2~4R 경기와 챔스 조별리그 2차전에서 승리를 따내며 4연승을 달렸다. 이후 리그 5~6R 경기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비기고 헤타페에 1:0으로 패배하면서 다시 상승세에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챔스 조별리그 3차전에서 승리를 기점으로 7R 엘클라시코 2:0 승리, 8R 짐나스틱전 3:1 역전승으로 다시 3연승을 달렸다. 이후 11월까지 리그에서는 셀타비고전 패배를 제외하면 모두 승리를 따내며 2위로 올라섰고, 코파 델 레이에서는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12월에는 다시 페이스가 꺾이게 되는데, 리그 4경기에서 2승 2패로 부진하며 다시 순위가 3위로 떨어지고 말았으며, 챔스에서는 조별리그 마지막 2경기에서 모두 비기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하게 된다. 여기에 경기 외적으로도 전반기 레알 마드리드의 분위기는 개판이었는데, 카펠로 감독이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호나우두데이비드 베컴 같은 톱스타들을 배제하면서 마찰을 빚게 되었고, 카펠로의 애제자였던 안토니오 카사노가 카펠로를 디스하다가 기자들에게 녹화되는 바람에 방송에 타는 등 말이 아니었다. 여기에 베컴은 시즌이 끝나는대로 LA 갤럭시로 이적료 없이 이적할 것임이 확정된 상황.
그렇게 전반기를 아쉽게 마무리한 상황에서 겨울 이적시장때 호나우두를 AC밀란에 매각한 반면, 아르헨티나 출신의 페르난도 가고곤살로 이과인을 영입하고 브라질 출신의 마르셀루 비에이라를 영입하는 등 잉여자원을 처분하고 미래를 위한 자원들을 영입하게 된다.
그러나 1월의 레알 마드리드는 12월에 못지 않게 좋지 않은 행보를 보였다. 2007년 첫 경기였던 리그 17R 데포르티보 원정에서 2:0으로 거하게 깨지더니, 코파 델 레이에서는 16강에서 레알 베티스에 원정 다득점 원칙에 밀려 탈락하고 만 것이다. 여기에 1월 마지막 경기이던 20R 비야레알 전과 2월 첫 경기이던 21R 레반테 전에서 모두 패배하며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러다 챔스 16강 1차전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홈에서 3:2 승리를 따내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한 것도 잠시 리그에서 23R 베티스전부터 26R 바르셀로나전까지 4경기 모두 비기며 리그 순위는 4위까지 하락했고, 챔스 16강 2차전에서는 역대 최단시간 골을 내주는 등의 굴욕을 당하며 2:1로 패배해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인해 탈락하고만다.
그렇게 3월 초까지 리그 4위, 챔스 16강 탈락, 코파 델 레이 16강 탈락이라는 암담한 상황에서 반전이 시작된다. 카펠로가 베컴을 다시 중용하고, 판니스텔로이가 라울 곤살레스와의 호흡이 계속해서 발전하며 셋의 캐리가 시작된 것이다. 27R 짐나스틱전 2:0 승리, 28R 셀타비고전 2:1 승리, 29R 오사수나전 1:0 승리로 3연승을 달리며 다시 순위를 3위로 끌어올렸다. 비록 30R 라싱 산탄데르전에서 2:1로 패배했지만, 31R 발렌시아전 2:1 승리, 32R 빌바오 원정 4:1 승리, 33R 세비야전 3:2 승리를 따내며 만만치 않은 3연전을 모두 승리해 리그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34R 에스파뇰전에서는 3:1로 뒤지고 있었으나, 후반전에 라울과 레예스의 골로 금방 따라잡았고, 89분에 이과인의 극장골이 나오며 4:3 대역전승을 따내게된다. 그리고 같은 날에 바르셀로나가 무승부를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가 리그 선두로 올라서게 된다. 35R 레크로티보전에서 3:2 승, 36R 데포르티보전에서 3:1 승리를 따내며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우승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러던 37R 사라고사 원정에서는 졸전 끝에 판니스텔로이의 멀티골에 힘입어 겨우 무승부를 따냈는데, 같은 날 바르셀로나도 무승부를 기록하며 순위에 변동이 없었다. 대망의 리그 마지막 경기인 마요르카 전에서는 선제골을 내주고 후반 20분 넘어서도 뒤지고 있었으나, 레예스의 멀티골과 디아라의 득점으로 3:1 역전승을 따내며 4년만에 라리가 왕좌를 되찾게 된다. 2위 바르셀로나와의 승점은 같으나, 상대전적에서 레알이 1승 1무로 우위에 점했기에 우승을 거머쥐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레알 마드리드가 3월 중순부터 급격하게 살아날 수 있었던 데에는 판니스텔로이와 라울 투톱과 이를 보조한 베컴의 활약이 매우 컸다. 판니스텔로이는 리그 31R부터 최종전까지 8경기에서 무려 10골을 때려박았으며, 최종전까지 승점이 동일했던 FC 바르셀로나와의 승부에 결정타를 꽂은 것이 바로 판니스텔로이였다. 특히 엘 클라시코에서 1차전 1골, 2차전 2골을 꽂아넣으며 팀에게 우승컵을 견인했다. 베컴은 카펠로와 불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 좋은 크로스로 판니스텔로이의 골을 계속해서 도우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라울은 득점 면에서는 이전 두 시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100], 경기력 측면에서는 확실히 이전과 달랐으며, 판니스텔로이와 라울 투톱은 처음 손발을 맞추는 선수들답지 않게 뛰어난 호흡을 보였다. 이 외에도 디아라와 에메르송이 첫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전으로 자리잡아 중원을 구축했으며, 최후방은 이케르 카시야스가 잘 지켜주었다. 또한 레예스나 이과인 등의 공격 자원도 후반기 막바지에 중요한 상황에서 득점을 기록해주며 리가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한편,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어수선한 팀 내 분위기와 레알 마드리드와 어울리지 않는 전술 스타일로 인해 10년 전처럼 우승시키고도 해고되었다.[101]

8.2. 2007/08 시즌


직전 시즌에 헤타페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베른트 슈스터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8.3. 2008/09 시즌


2연속 리그 우승을 따낸 상황에서 직전 시즌에 감독을 맡았던 베른트 슈스터를 연임했다. 프리시즌에는 맨유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영입이 거의 확실시될 것처럼 보였으며, 다비드 비야다니 아우베스 영입 가능성 소식까지 전해지며 팀의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그리고 레알 유스 출신인 루벤 데 라 레드하비 가르시아도 임대에서 복귀해 다시 합류하며 스쿼드의 뎁스도 두꺼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빅네임 영입은 지지부진했고, 호날두 이적설로 인해 호비뉴의 첼시 이적설이 나게 된다. 게다가 베슬리 스네이더르가 프리시즌 경기 도중에 아부 디아비의 깊은 태클을 맞고 왼쪽 무릎인대 부상으로 장기간 아웃되는 것이 확정되면서, 함부르크의 라파엘 판데르파르트를 급하게 영입한다. 그리고 호날두는 끝내 맨유와 재계약을 체결하면서, 영입 시도는 다음 기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개막을 앞두고 진행된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발렌시아를 꺾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된다.

문제는 여전히 재계약을 하고 있지 않던 호비뉴였다. 첼시와의 이적설에 대해 레알 마드리드는 호비뉴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발표했고, 그렇게 이적시장 막판에 이적료 32m 파운드로 첼시로의 이적이 유력했다. 그러나 최종 발표 전에 첼시 공식 스토어에 호비뉴의 유니폼 판매가 시작된 것에 분노한 칼데론 회장이 급하게 호비뉴 이적을 무효시키고 만다. 그렇게 호비뉴와 동행하는 듯 했으나, 뜬금없이 9월 1일에 웬 중동 석유 부자가 인수한 맨체스터 시티가 호비뉴를 40m 파운드에 영입하게 된다.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는 스네이더르와 호비뉴의 공백 속에서 시즌을 맞게 되었다.
​라리가 개막전에서 2:1 충격패를 당하며 이적시장에서의 뭐같은 행보가 팀 성적에 그대로 영향을 받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이후로 8R까지는 무패를 달리며 6승1무1패로 3위를 유지했다. 뤼트 판니스텔로이, 곤살로 이과인, 라울 곤살레스 등의 공격진이 팀을 이끌었고, 신예 루벤 데 라 레드가 중원에서 마하마두 디아라와 함께 맹활약을 펼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10월 중순에 마하마두 디아라가 오른쪽 무릎 부상 발생했고, 10월 말에는 루벤 데 라 레드가 경기 중에 저혈압으로 쓰러진 후 시즌 아웃이 확정되더니, 11월 중순에는 판니스텔로이가 오른쪽 무릎 반월판 부상으로 인해 수술 후 시즌 아웃되는 악재가 연이어 발생하며 급격하게 팀의 분위기가 저하되고 만다. 또한 여러 포지션의 여러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리며 제대로 팀 운영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국왕컵 32강에서 탈락하고, 리그 11R부터 15R까지 5경기에서 4패를 기록하며 완전히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는 리가 순위는 5~6위를 오가게 되는 상황까지 와버렸고, 이에 다급해진 수뇌부는 감독을 후안데 라모스로 교체한다. 그 와중에 유소년 디렉터였던 미첼[102] 물러나는 동시에 언론을 통해 칼데론 회장이 팀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고 있으며 유스팀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며 폭로하면서 팀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아약스의 클라스얀 훈텔라르와 포츠머스의 라사나 디아라를 영입했고, 또한 QPR로 임대되었던 다니 파레호를 급하게 임대 복귀시켰다. 그런데 웨스트햄에서 주전급 윙어로 활약함에도 득점 하나 없던 줄리앙 포베르를 임대로 영입하는 어이없는 행보를 보이고만다.

그리고 2008년 12월 말에 예산 회계 결산 총회가 있었는데, 라몬 칼데론 회장이 예산 결산 총회 통과를 위해 투표권이 없는 인원들을 참가시켜 부정 투표를 했다는 소식을 아스가 긴급 보도하며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칼데론 회장은 당연히 부인했지만 이사회에 의해 강제로 해임될 위기가 찾아오자 직접 사임한다. 이후 조사를 통해 금전적으로도 범죄를 저질렀음이 밝혀지면서 법적으로 처벌을 받기까지한다. 이후 1월 중순에 '비센테 볼루다'라는 사업가 겸 변호사가 제 17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2009년 들어서 레알 마드리드는 후안데 라모스 체제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챙기며 어느덧 리그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후반기 챔피언스리그 명단 등록을 새로 해야했는데, 당시 UEFA 규정상 다른 팀에서 UEFA 대회에 참가한 선수를 중간에 등록할 수 있는 경우는 팀당 1명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새로 영입한 훈텔라르, 디아라 모두 전 소속팀에서 UEFA 주관 대회에 참가한 이력이 있어서 둘 중 하나만 데리고 챔스를 가야하는 역대급 병크가 터지고 만다. 결국 레알은 디아라를 명단에 포함시키게 된다. 그러나 챔스 16강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홈에서 1:0으로 지더니, 2차전 원정에서는 4:0으로 영혼까지 털리며 5년 연속 16강 탈락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성적을 받게 된다.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는 또다시 3월부터 리그 일정만을 남겨두게 되었고, 12월 16R 발렌시아 전부터 4월 말 33R 세비야전까지 18경기에서 17승 1무로 무패행진을 달리며 리그 역전 우승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34R 경기가 엘 클라시코였고, 이 경기전까지 1위 바르셀로나의 승점은 82점이고 레알 마드리드의 승점은 78점이었기에 사실상 우승 결정전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렇게 홈에서 펼쳐진 엘 클라시코에서 이과인이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비 라인을 바짝 끌어올려서 경기하다가 뒷공간을 탈탈 털리며 2-6으로 대참사를 맞고 만다. 그러면서 승점차는 7점까지 벌어지고 만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남은 리그 4경기에서 모두 패배하며 자멸하고 말았다. 같은 기간에 바르셀로나도 리그에서 2무 2패로 못했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가 마음만 먹으면 역전 우승도 가능했었다.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는 3년만에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게 되었고,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클럽 최초로 트레블, 무려 전관왕을 달성하면서 더욱 비교되었다.

9. 갈락티코스(Galácticos) 2기 시작 - 호날두의 팀 출항



9.1. 2009/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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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갈락티코스를 이끌었던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2009년 6월 1일에 회장으로 재취임한 후 2009/10 시즌 갈락티코스 정책의 부활을 천명했고, 그 첫 타자로 AC 밀란카카를 6450만 유로(약 1130억 원)에 데려왔다. 그리고 나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역대 최고 이적료인 9300만 유로로 데려오기에 이른다. 2000년대 후반 최고 선수 논쟁의 중심에 있는 메시, 호날두, 카카 중 두 명을 보유하게 된 것. 마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최고 선수 논쟁의 중심이었던 피구와 지단, 호나우두를 동시에 보유한 것과 유사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올림피크 리옹으로부터 프랑스의 떠오르는 신성 공격수 카림 벤제마를 3500만 유로에 영입한다. 그러고 나선 또 리버풀 FC의 사비 알론소를 3000만 유로에 영입했다. 이 외에도 라울 알비올, 알바로 아르벨로아, 에스테반 그라네로 등을 영입하며 알차게 선수단을 보강했다.
그렇게 분노의 영입을 시전한 효과를 보는 것인지 리그 첫 5경기 연승을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했으며, 바르셀로나와 치열한 리그 선두 싸움을 했다. 그런데 코파 델 레이 32강 1차전에서 단 한 번도 라 리가를 밟아보지 못했던 3부 리그 팀인 알코르콘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흑역사로 남을 무려 0:4 패배를 당하는 대이변을 허용하며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며 대망신을 당한다. 결국 4골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2차전 홈 경기에서 1:0 승리에 그치며 종합 1:4로 충격의 첫 라운드 광탈을 당하게 된다. 여기에 같은 달에 리그 12라운드 엘클라시코에서 1-0으로 패배하며 리그 선두 자리마저 내주고 만다. 그래도 12월부터는 다시 승리를 많이 따내며 바르셀로나와의 격차가 그리 멀어지지 않았고, 챔피언스리그도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엄청난 선수들의 영입에도 불구하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올랭피크 리옹을 상대로 1, 2차전 합산점수 1:2로 지면서 '''또 16강에서 탈락했다'''.[103] 이로써 6시즌 연속 챔스 16강 탈락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썼다.[104] 그래서 일부 팬들은 갈락티코스를 '''탈락티코'''라고 불렀고, 레알 마드리드는 순식간에 직전 시즌에 이어 무관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전이 펼쳐진 곳은 바로 레알 마드리드의 홈,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였다.[105] 그런데 결승전에 올라온 팀은 하필 4강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올라온 FC 인테르나치오날레FC 바이에른 뮌헨. 네덜란드 커넥션이 실패하여 내보낸 '''베슬리 스네이더르아르연 로번'''이 각 소속팀의 중심이 되어 양 팀을 결승으로 이끌어 왔다.[106] 그렇게 나간 지 1년 만에 다시 마드리드의 홈 구장으로 돌아오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2차 갈락티코스로 되려 바이에른과 인테르만 흥하게 되었다.
그나마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25라운드 세비야 전 3:2 승리를 따내며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리그 선두 자리를 탈환하였고,[107] 3월 마지막 경기였던 29라운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전까지 승점 1점차로 리그 선두 자리를 유지하며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하는 듯 했다. 실제로 레알 마드리드는 코파 델 레이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탈락했지만, 리그에서만큼은 바르셀로나 못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는데, 19라운드 말라가 전 이후 30라운드 라싱 산탄데르 전까지 리그 전승을 따내는 무서운 페이스를 보여줬다. 그러나 31라운드 엘클라시코에서 메시와 페드로의 골로 2-0 완패를 당하며 연승 행진이 끊긴 동시에 리그 선두 자리를 내주고 말게 된다. 이로 인해 레알은 승점 2점차를 뒤지게 됐는데, 바르셀로나가 33라운드 경기에 비기면서 승점이 1점차로 좁혀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승점 동률로 시즌이 끝나더라도 리그에서 바르셀로나 상대로 2경기 모두 졌기 때문에 승자승 원칙에 따라 바르셀로나의 우승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레알 입장에서는 반드시 바르셀로나의 승점을 넘어서야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가 미끄러지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레알 마드리드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말라가 상대로 비기면서 결국 바르셀로나와 승점 3점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당시 새로운 이적생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가장 기대를 모았던 카카는 부상으로 고전했으며 활약상 또한 밀란 시절에 비해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제 2의 호나우두라 불린 카림 벤제마는 리옹 시절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고, 곤살로 이과인과의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며 계륵이 되고 만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좋은 활약상을 보여주었으나, 라이벌이라 불린 리오넬 메시와 비교했을 때는 부족했고, 또한 잔부상으로 인해 총 35경기 출전에 그쳤다.[108] 그래도 사비 알론소라울 알비올, 알바로 아르벨로아는 부상이나 부진없이 준수한 경기력을 보이며 제 몸 값을 해주었다.
갈락티코 2기 첫 시즌의 실패의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지목되고 많은 키배가 이루어지는데, 레알 마드리드 팬들은 마누엘 페예그리니를 까는 입장이 많고, 타팀 팬들은 펠레그리니를 옹호하는 입장이 많다. 하지만 갈락티코의 실패는 1기와 같이, 제대로 감독에게 선수영입 자유도를 부여하지 않았고, 선수기용에 관해선 알아서 하던 델 보스케와 달리[109] 선수기용에 대한 자유도도 부여하지 않았다. 페예그리니가 기용하길 원하던 웨슬리 스네이더아르연 로번을 페레즈는 상품성이 적다고 팔아버렸고, 페예그리니가 원하지 않고, 비싼 선수를 굳이 데려왔다. 거기에 페레즈가 선수 선발에 간섭했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데, 카카와 알비올 등의 폼이 좋지 않았음에도 기용을 강권했다는 말이 굉장히 많다. 펠레그리니는 이후 기자회견에서 갈락티코 2기를 상징하는 말로 회자되는 '''마드리드에서 나는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최고의 기타리스트만 10명이 있다고 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게는 피아니스트나 드러머가 없었다'''는 말을 남긴다. 심지어는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110]
어쨌든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영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즌은 완전 무관으로 끝났다. 이에, 빡친 운영진이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을 한 시즌 만에 내치고, 인테르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주제 무리뉴'''를 데려온다는 소문이 언론 등에서 흘러나왔다.

10. 주제 무리뉴(José Mourinho) - 라 데시마를 향한 길로 이룩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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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마드리드의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감독'''
갈락티코 2기의 시작이었던 09-10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가 무관에 그치자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은 이 시즌에 인테르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주제 무리뉴를 감독으로 선임하고, 다시 여러 선수들을 영입하게 된다. 그리고 2010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메수트 외질, 앙헬 디마리아, 사미 케디라 등을 영입하며 무관을 탈출하기 위해 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무리뉴와 자금의 시너지가 발휘한 것일까? 그동안 16강에서 고배를 마시던 챔피언스리그에서 4강 진출에 성공했고, 코파 델 레이에서 20여년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등 2000년대 중반 이후 가장 성과있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 시즌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더욱 미친 팀이었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결승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하며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저지했으나 UEFA 챔피언스 리그와 라리가에서는 바르셀로나에 막히며 4강 탈락, 승점 4점차 2위라는 매우 아쉬운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게다가 바르셀로나 원정 5:0 완패 경기도 이 시즌에 나온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10-11시즌은 라이벌 바르셀로나에 의해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의 문턱에서 무너졌지만, 20년 넘게 계속 실패하던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저지했으며,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시즌인 데다, 2010년대 중후반 레알 마드리드 왕조의 발판이 된 시즌이었기에 충분히 의미있는 시즌이었다.
2011년 여름 이적시장에는 라파엘 바란, 파비우 코엔트랑, 호세 카예혼 등을 영입한다. 그리고 11-12시즌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지만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라리가에서 32승 4무 2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면서 라리가 역대 최다 승점(100) 달성과 함께 4년만에 왕좌에 오르게 된다. 무리뉴이 레알 마드리드를 맡은 3시즌 중 가장 완벽했던 시즌이었으며, 16-17 시즌과 함께 2010년대 레알 마드리드의 최고의 시즌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2012-13 시즌의 빅네임 영입은 루카 모드리치가 전부였다. 그래도 직전 시즌에 성공적으로 보냈으며 개막 직전 수페르코파에서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했기 때문에 시즌 전망은 밝은 편이었다. 그러나 무리뉴와 선수단의 불화, 선수들 간의 파벌 형성, 주전 자원들의 부상과 부진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기존의 전망대로 시즌을 보내지 못하게 된다. 리그에서는 전반기에 이미 라이벌 바르셀로나와 격차가 크게 벌려지면서 따라잡지 못해 최종적으로 승점 15점차로 2위에 머물렀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독일 원정 울렁증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준결승 도르트문트 전에서 1, 2차전 합산점수 4:3으로 다시 결승의 문턱에서 넘어지고 만다. 라이벌 바르셀로나도 준결승 뮌헨전에서 1, 2차전 합산 점수 7:0으로 박살나며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준결승에서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꺾으면서 결승전 진출에 성공했으나, 베르나베우에서 펼쳐진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호날두의 퇴장 등의 악재가 겹쳐 2-1 패배를 당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렇게 직전 시즌의 기운을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 무관에 머무르고 만다. 또한 레알 마드리드 입장에서는 어느 대회보다도 챔피언스리그의 우승이 우선이었는데 3시즌 연속으로 준결승에서 탈락하게 되자, 16강 마드리드를 끊어낸 무리뉴와 이별하게 된다.[111]
우승 청부사 무리뉴의 부임 기간 동안 리그와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은 들어올렸지만 결국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은 들어올리지 못하며 다소 저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2.5기 출범과 동시에 고스란히 남아있던 2기 멤버들을 주축으로 라 데시마를 달성하면서 결국 실패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는 않게 되었다. 다만 위 선수중 외질과 카카는 라 데시마 직전에 떠났고, 2.5기 멤버인 가레스 베일이 라 데시마에 기여했다.

10.1. 2010/11 시즌


지난 2시즌간의 무관과 04-05시즌부터 이어오던 챔피언스리그 16강 탈락 행진을 깬 의미있는 시즌[112]으로 FIFA 월드컵 기간 중에 벤피카에서 앙헬 디 마리아(아르헨티나)를 영입했고 측면 공격수 페드로 레온(스페인)과 라 리가 최고 유망주로 꼽히는 공격형 미드필더 세르히오 카날레스(스페인)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남아공 월드컵에서 스타로 떠오른 슈투트가르트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사미 케디라(독일)와의 계약을 성사시켰고 리버풀의 스티븐 제라드에게 지속적으로 구애를 했으나 실패. 인테르의 더글라스 마이콘디에고 밀리토 영입을 꾸준히 타진했으나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이에 급한 대로 허술해진 센터 백 자리를 메우기 위해 첼시에서 히카르두 카르발류(포르투갈)를 2년 계약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카카가 월드컵에서 장기 부상을 당하여 이적 시장 종료 전에 독일의 신성 메수트 외질을 데려왔다.
한편 오랫동안 레알 원 팀 맨이었던 라울 곤살레스구티는 각각 샬케 04, 베식타스 JK로 떠나며 오랫동안 헌신해왔던 팀과 작별을 고했다. 라울의 7번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계승했다. 이에로와는 달리 라울과 구티 등은 선수 본인들의 이적 의지가 있었고, 나름 예우를 해서 보냈다. 아무리 레전드고 클럽의 상징이라도 뛰고 싶은 선수를 벤치에 앉히는 것보단 차라리 다른 팀에 보내는 게 나으니까. 더구나 이후 라울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초청하여 기념 경기를 치러 주었고, 구티도 유스 팀 코치로 영입했기 때문에 대우에 대한 비판을 들을 일은 없을 듯하다.
그리고 오렌지 커넥션의 두 축이었던 로이스톤 드렌테라파엘 반 더 바르트 역시 각각 에르쿨레스(임대)와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하며 팀을 떠나며 오렌지 커넥션의 종말을 고했다. 유리몸이었던 크리스토프 메첼더는 자유 계약으로 샬케 04로 팀을 옮겼다.
무리뉴 취임 이후 3개월 동안 라리가와 챔스, 코파 델 레이에 걸쳐 19경기 무패 행진을 기록했다. 개막전 마요르카 원정에서 0-0 무승부에 그치며 체면을 구겼지만, 라리가 12경기에서 33득점 6실점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올렸고, 챔스에서도 AC 밀란, AFC 아약스, AJ 오세르와 같은 조가 되어 4승1무를 거두며 일찌감치 조1위를 확정지었다.
하지만 11월 29일, 불구대천의 라이벌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에서 '''0:5'''로 대참패. 외질, 케디라, 알론소의 중원이 붕괴되면서 그야말로 압살당했다. 부주장 세르히오 라모스는 경기 종료 30초를 남기고 메시에게 백 태클, 푸욜에게 싸대기, 사비에게 밀치기 콤보를 시전하고 퇴장당하는 사건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에 남을 악몽의 날이었다. 이날 패배로 선두였던 레알 마드리드는 바르샤에 승점 2점 차이로 역전당하며 2위로 내려갔다.
그날 이후 마드리드는 큰 슬럼프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나 바로 다음 라운드에서 호날두의 두 골로 발렌시아에게 승리하며 좋은 분위기를 다시 조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라고사와 세비야에 3-1, 1-0 승리를 거두며 다시 3연승 행진을 기록하며 바르샤와 승점 2점 차이로 2010년을 마감했다.
2010년 12월 17일,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대진에서 지난 시즌 레알을 떨어뜨렸던 리옹과 또 만났다.
윈터브레이크 후 라리가에서 헤타페와 비야레알을 잡으며 5연승을 달리던 중, 2011년 1월 16일 벌어진 19라운드 경기에선 20위 꼴찌인 UD 알메리아와 1-1로 비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바르셀로나와 승점 차가 4점으로 벌어지면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설욕전을 벌여 이긴다고 해도 리가 선두를 되찾긴 어렵게 되었다.
1월 26일 맨체스터 시티에서 엠마누엘 아데바요르를 임대 영입했다.
그리고 21라운드. 바르셀로나는 원정 경기에서 에르쿨레스를 3:0으로 격파하고 홈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는 사이, 마드리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17위 오사수나와의 원정 경기에서 충격적이게도 0:1로 패배했다. 후반에 골을 먹자 무리뉴는 아데바요르, 카카, 알론소를 동시에 투입하는 강수를 뒀지만 오사수나의 끈끈한 수비를 뚫어 낼 수 없었던 데다, 2경기 연속 결승골로 '''잠시 각성했었던''' 벤제마는 온갖 쩌리질을 거듭하며 패배의 주역이 되었다. 이 결과로 바르셀로나와의 승점 차는 7점.
2월 3일 코파 델 레이 4강 세비야와의 2번째 경기에서는 벤제마가 실망스러운 활약을 펼치며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진을 무력화시켰음에도 외질과 갓데발의 연속 골로 2:0 승리(합계 3:0)를 거뒀다. 결승 상대는 바르셀로나.
2011년 2월 23일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난 리옹과의 원정 경기에서 1:1로 무승부를 거뒀다. 그리고 호구에서 탈출했다. 2차전에서 3:0으로 승리를 거두고 6년간의 16강 탈락 징크스를 떨쳐 내었다.
25라운드 경기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전에서 0:0으로 비기면서 한때 5점 차로 좁힌 바르셀로나와 승점 차를 다시 7점 차로 만들었다. 그 뒤로 말라가(7-0승[113]), 라싱(1-3승), 에르쿨레스(2-0승), 아틀레티코(1-2승)에 4연승을 기록하며 세비야에 비긴 바르샤에 5점 차로 따라붙던 승점 차였으나 2011년 4월 3일 30라운드 경기 스포르팅 히혼과의 안방 경기에서 0:1로 패해[114] 8점 차로 벌어졌다. 무리뉴의 연승도 날아가면서 리그 우승이 힘겨워졌다.
사실상 리그 우승이 날아가며 팀 분위기가 침체되었다고 생각했는데, 4월 5일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에선 토트넘 핫스퍼를 4:0으로 말 그대로 담궈 버렸다. 피터 크라우치가 경기 초반 연이어 높은 태클을 가하다가 퇴장 당해버린 후 '''30개가 넘는 슈팅'''을 기록하며 사실상의 반 코트 게임을 만들었다. 2차전에서도 무난하게 1:0 승리를 거두며 9년 만에 4강에 진출했다. 이로써 유례가 없던 챔스 2, 리가 1, 코파 1경기의 엘 클라시코 4연전이 성사됐다.
4월 16일 리가 32라운드 4연전 1차전 경기에서는 페페를 수미로 기용한 4-3-3을 들고나왔다. 무리뉴의 전술을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고 바르셀로나는 중원에서 미친 개처럼 날뛰는 페페를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 경기 결과는 1:1 양 팀 에이스인 호날두, 메시가 각각 페널티킥으로 한 골씩 주고받았는데 이 골들은 두 선수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골들이었다.[115]
4월 20일 2차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도 역시 1차전처럼 4-3-3을 들고나와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인 끝에 카시야스의 인생 선방 퍼레이드와 호날두의 헤더로 1:0 승리를 거두며 3년 동안의 무관에서 벗어났다. 코파 델 레이 우승은 '''18년''' 만이다. 그런데 결승전이 끝나고 우승 기념으로 마드리드 시내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던 도중, 부주장인 세르히오 라모스가 버스 위에서 우승 트로피를 치켜들었다가 실수로 떨어뜨렸고, 결국 트로피가 바퀴에 깔려서 '''박살이 났다'''. 일단 우승 컵 복원 작업이 끝날 때까지 복제품을 홈 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전시할 계획이라고.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422n21852?mid=s1004&isq=3499
4월 23일 바르샤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전을 앞두고 메스타야에서 발렌시아 CF를 전반전에만 4골을 퍼부으며 무려 6:3으로 압승을 거두며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4월 28일에 벌어진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1차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안방에서 바르셀로나에게 2:0으로 패했다. 리오넬 메시에게 2골을 얻어 맞으면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을 설욕당했고 더불어 페페, 무리뉴, 라모스가 퇴장당하거나 경고 누적으로 다음 2차전 캄프 누 원정에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116] 9년 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진출은 한층 힘들어졌다.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 캄프 누 원정에서, 바르셀로나 전술의 핵심인 무리뉴와 페페가 없었던 레알 마드리드는 기존의 4-2-3-1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고 전반전부터 신나게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다만 카시야스의 신들린 선방으로 전반을 무실점으로 마쳤다. 후반이 시작되면서 결정적인 장면이 나왔다. 바르셀로나의 골문으로 쇄도하던 호날두를 피케가 반칙으로 쓰려뜨렸고 호날두가 넘어지면서 마스체라노가 같이 엉켜 넘어졌고, 흘러나온 공을 이과인이 잡아 득점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심판은 호날두의 반칙을 선언했다. 그 후 페드로가 선제골을 기록했고 마르셀루의 동점 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지만 합산점수 3:1로 결승 진출 좌절되었다.
35라운드까지 리가에서도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승점 8점으로 뒤쳐지면서 사실상 라리가 우승도 좌절되었다.
결국 36라운드 바르셀로나가 레반테 원정에서 1:1로 비기며 레알 마드리드는 준우승을 확정지었다. 레알은 마지막 4경기에서 세비야(2-6승), 헤타페(4-0승), 비야레알(1-3승), 알메리아(8-1승)에 4연승을 거두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리가에서 40골을 득점하며 텔모 사라와 우고 산체스의 라리가 최다 득점기록(38골)을 갈아치웠다.
결국 라이벌 바르샤가 다시 한번 지구 최강의 팀 포스를 뿜어내며 UEFA 챔피언스 리그와 라리가 우승을 하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리그에서 5:0 참패,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바르샤에게 패배하는 등 막아설 기회가 있었음에도 수준 차를 메우지 못하고 번번이 지며 불만족스러운 시즌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저지시켰고, 3년 연속 무관은 면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도 16강 탈락의 고리를 끊고 4강에 진출했으니 나름 의미가 있는 시즌이기는 했다.

10.2. 2011/12 시즌


자세한 내용은 레알 마드리드 CF/2011-12 시즌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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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베스트 11.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0/11 시즌이 끝나고 레알 마드리드 수뇌부는 변화를 시도했다. 무리뉴 감독과 견제, 균형 관계에 있었던 호르헤 발다노[117] 레알 마드리드 사무총장 겸 스포츠 디렉터를 해임시키고 무리뉴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네딘 지단을 그 자리에 앉히면서 감독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었다.
7월 22일 지네딘 지단이 스포츠 디렉터 자리를 맡고 있는 와중 무리뉴도 감독 겸 스포츠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스카우팅, 유소년 육성, 선수 이적에 대한 권한을 감독에게 대폭 허용한 것은 레알 마드리드 클럽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라파엘 바란의 영입은 지단이 스포츠 디렉터 자리를 맡게 된 후 첫 공식 영입이다.
바란 외에 라 파브리카 출신인 호세 카예혼을 바이-백 조항을 이용하여 영입하였으며 독일에서 주가를 올린 누리 사힌과 소속 팀에서 계약이 만료되어 프리로 풀린 하밋 알틴톱을 영입했다. 그리고 벤피카로부터 파비오 코엔트랑을 3,000만 유로로 영입했다. 계약 기간은 6년.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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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copa de España 2011 Final 1st Round '''
'''2011. 08. 14'''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페인,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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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 2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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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르셀로나'''
''' 13' 메수트 외질
54' 사비 알론소 '''
[image]
''' 36' 다비드 비야
45 +1' 리오넬 메시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라운드'''
[image]
'''Supercopa de España 2011 Final 2nd Round '''
'''2011. 08. 17'''
'''캄 노우 (스페인, 바르셀로나)'''
[image]
'''레알 마드리드'''
''' 2 : 3 '''
[image]
'''FC 바르셀로나'''
''' 20'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82' 카림 벤제마 '''
[image]
''' 15'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45 ' 리오넬 메시
88' 리오넬 메시 '''
엘클라시코로 열린 FC 바르셀로나와의 수페르코파에서 8월 14일 1차전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2:2로 비긴 뒤, 8월 17일 캄프 누에서 2차전 2:2로 팽팽히 맞서고 있던 상황에서 종료 직전 리오넬 메시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수페르코파에서 준우승했다. 엘 클라시코 더비 답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이 펼쳐졌지만 경기 막판 양팀 선수들이 난투극을 펼치며 팬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레알의 마르셀루가 바르사의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거친 태클로 넘어뜨리자 양팀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벤치 앞에서 심한 몸싸움을 펼친 것. 마르셀루는 주심에게 곧바로 레드카드를 받았고 다비드 비야메수트 외질도 함께 퇴장당했다. 레알의 무리뉴 감독도 바르샤의 티토 빌라노바의 눈을 찔러 구설수에 올랐다..
8월 26일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 결과로 또 '''올랭피크 리옹'''을 만났다.마지막 컷을 보자
스페인 선수협 파업 파동으로 개막전이 1주일 연기된 가운데 사라고사 원정 6-0승, 헤타페와의 홈개막전 4-2승으로 가볍게 시즌 스타트를 끊었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디나모 자그레브 전에서는 1:0으로 승리를 따냈지만 호날두가 부상을 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이어 9월 19일 레반테 원정에서 1.5군을 선발로 내세웠지만, 디 마리아의 보복성 태클로 인한 패싸움 상황에서 케디라가 불필요하게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면서[118] 레반테의 끈끈한 수비에 고전하다 결국 콘에게 골을 먹고 0:1로 패배하고 말았다. 곧이어 라싱과의 9월 22일 리가 경기에선 라싱 선수들의 육탄 방어에 밀려 여러모로 앞서고도 0:0으로 비겼다.
10월 16일 프리메라리가 8라운드 레알 베티스에 4-1 완승을 거뒀다. 곤살로 이과인이 라리가 2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4연승을 이끌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앙헬 디 마리아는 나란히 2도움을 올리며 특급 도우미로 활약했고, 최근 부활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이쏜 카카는 결승골을 기록했다.
10월 22일 프리메라리가 9라운드 말라가전에서 이과인의 선제골과 호날두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4-0 완승을 거두면서 리그 6승1무1패(승점 19점)를 기록해 세비야와 비긴 바르셀로나(승점 18점)를 제치고 리그 선두로 뛰어 올랐다.
10월 27일에 펼쳐진 리가 10라운드 비야레알과의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카카의 주도 아래 초반부터 경기를 주도하며 비야레알에 맹공을 퍼부었다. 점유율 60%, 슈팅수 14대3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레알 마드리드는 전반 30분 만에 카림 벤제마와 카카, 앙헬 디 마리아의 연속골이 터지며 일찌감치 승리를 확정지었다. 이날 승리로 마드리드는 전날 선두로 올라섰던 바르셀로나를 끌어내리고 다시 선두 수성에 성공했다.
리그 7연승을 달성했는데, 이 원동력은 화려한 득점력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은 다양한 선수들이 골을 넣고 있다. 지난시즌에 호날두에 의존했다면, 현재까지는 모든 선수들이 공격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리가 10라운드 종료 기준 레알 주요 선수 스탯[119]
호날두- 13경기 선발, 1경기 교체, '''12골''' '''7도움'''
벤제마- 10경기 선발, 2경기 교체, 7골 4도움
이과인- 4경기 선발, 10경기 교체, 9골
디 마리아- 10경기 선발, 3경기 교체, 2골 '''7도움'''
외질- 10경기 선발, 4경기 교체, 1골 4도움
카카- 7경기 선발, 5경기 교체, 4골 3도움
사비 알론소- 14경기 선발, 2골 1도움
라모스- 13경기 선발, 1골 4도움
마르셀루- 12경기 선발, 1경기 교체, 1골 2도움
이후 리그 14라운드까지 1위를 지키면서 15연승을 달렸기에 자신만만한 상황이다. 그리고 12월 10일, 안방에서 열린 프리메라리가 15라운드 엘 클라시코에서 경기 시작 30초 만에 빅토르 발데스의 패스 미스를 벤제마가 골을 넣으면서 앞서갔으나, 30분 리오넬 메시가 마드리드 수비진을 몰고 들어가며 산체스에게 스루 패스를 찔렀고 알렉시스 산체스가 골로 연결하며 동점이 되었다. 이후 흐름은 바르셀로나로 넘어가고, 전반에 과도한 압박으로 방전된 레알 마드리드는 사비의 슛이 마르셀루에게 맞고 들어가는 불운까지 겹친 데 이어 여기에 호날두가 노 마크 헤더 찬스를 놓치자마자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헤더를 성공시키며 승부에 쐐기를 박으면서 3-1로 졌다. 패인은 레알 마드리드 공격진의 무기력함이었다. 팽팽한 경기가 될 것이고 마드리드가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대부분의 예상과는 달리 바르셀로나의 페이스에 마드리드가 완전히 휘말린 경기. 최다 연승[120] 타이 기록 실패 및 패배로 인하여 1위를 넘겨 줬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바르셀로나가 에스파뇰 원정에서 비긴 덕분에 다시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코파 델 레이 8강에서 다시 만난 바르셀로나에게 2:1로 지면서 버렸고 결국 역대 바르셀로나 전 전적이 86승 45무 86패로 같아졌다. 결국 안방에서는 2:2로 비겼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코파 델 레이 2회 연속 우승 도전은 좌절됐다. 역대 바르셀로나전 86승 46무 86패가 되었다.
챔피언스 리그는 6전 전승 19득점 2실점을 거두며 16강에 진출, 2000년대 와서 천적이던 올랭피크 리옹을 상대로 4:0, 2:0 완승을 거두며 이젠 어림도 없는 상대임을 입증했다[121]. 16강 조 추첨에선 러시아의 CSKA 모스크바와 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1차전 원정 경기에서는 호날두가 선제골을 넣으며 후반 추가 시간까지 리드를 하다가 극적인 동점 골 실점으로 무승부를 거뒀지만, 홈 경기에서 4:1 승리를 거두며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상대는 아포엘이다. 다른 팀들에 비해 쉬운 상대라는 평을 받았고 1차전 원정 경기에서 거뜬하게 3:0으로 이겼다. 안방에서도 5:2로 이기면서 2시즌 연속 4강에 진출하며 FC 바이에른 뮌헨과 준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리가 29차전까지 승점 75점으로 바르셀로나에게 6점 앞서 있었다. 26차전까지만 해도 10점 차였으나 2경기 연속으로 비기는 바람에 좁혀졌다. 벌써 라 리가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가 됐다고 팬들은 기뻐하는 상황이었으나 31차전 발렌시아 전 경기도 비기면서 승점 차가 4점으로 좁혀져 기뻐하기엔 이른 상태가 되어 버렸다. 32차전 다음 경기는 연고지 라이벌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원정 경기이며 34차전 엘 클라시코 경기인 바르셀로나 원정이 남아있기에 바르셀로나에게 역전 당할 수도 있기 때문.
다행히 아틀레티코 원정에서 호날두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4:1로 가볍게 뭉개 버렸고 강등권에 있는 스포르팅 히혼도 3:1로 이겨 4점 차를 유지하면서 고비를 일단 넘기긴 했다. 엘 클라시코 다음에 세비야, 그라나다, 마요르카, 아틀레틱 클럽 등 중하위권 팀들 위주로 경기가 남아 있는 상황. 그래도 강등권 탈출이 걸린 그라나다 및 중상위권인 아틀레틱 같은 경우 우습게 볼 일이 아니기에 안심하기에는 이른 상황이었다.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원정 경기에서 1:2로 패배했다.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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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2일 리가 우승을 사실상 판가름하는 엘 클라시코가 열렸다. 무리뉴는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알론소, 케디라를 미드로 세우는 전술을 내놓았고, 과르디올라는 산체스 대신 테요를 선발 출장 시키며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 초반, 레알 마드리드는 계속해서 세트 피스 기회를 얻다가 결국 코너킥을 케디라가 골로 연결 시키며 1:0으로 앞서간다. 그 후 마드리드는 바르사의 공격을 시종일관 효율적으로 차단한다, 마드리드 수비진은 약이라도 빨았는지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경로를 예측하며 환상적인 수비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후반전 과르디올라는 사비를 빼고 산체스를 넣으면서 변화를 꾀한다. 곧바로 이 카드가 먹히면서 산체스가 골을 성공시켜 1:1이 되었다. 하지만 마드리드도 곧바로 역습 상황에서 외질과 호날두의 환상적인 합작으로 골을 성공시켜 다시 2:1로 앞서간다. 그 이후에 바르셀로나는 계속해서 마드리드의 골문을 위협하기 위해 공격 루트를 바꾸어 봤지만 마드리드 선수들은 정말 이 경기만큼은 '레알'이었다. 마드리드 선수들은 바르셀로나의 공격을 모두 완벽하게 막아내면서 결국 2:1로 승리.
이 승리로 마드리드가 얻은 것은 많다.
1. 동률이었던 전적을 다시 우세로 전환.
2. 캄프 누 54경기 연속 무패 저지.
3. 호날두, 시즌 42골로 메시를 제치고 리가 1위, 지난 시즌 기록을 갈아 치움.
4. 승점 7점 차로 우승의 9.9부 능선을 넘다.
물론 모처럼 힘든 경기에서 휴식 없이 선수들이 상당히 많이 뛰었기 때문에 FC 바이에른과의 2차전이 홈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호날두의 멀티골에 힘입어 접전 끝에 연장 승부차기까지 갔지만 승부차기에서 호날두와 카카의 실축에[122] 라모스가 홈런을 작렬하면서 패배. 2년 연속으로 결승의 문턱에서 진출에 실패했다. 여담으로 수 년 동안 카카의 부활을 믿고 지지하던 마지막 팬들마저 이 경기에서 대부분 돌아섰다. 카카의 부진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교체로 투입되어 한 골이면 그대로 결승 진출인 상황, 그것도 연장 승부에서 훌륭한 찬스를 우물쭈물하다 날려 버렸고, 승부차기 키커로 선택되었으나 실축하여 무리뉴의 마지막 믿음마저 저버리고 말았다. 거기다 경기 종료 후 라커룸에서 카시야스와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 올라와 팬들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겼다.[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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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가 파업으로 5월 2일(마드리드 기준)로 20라운드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경기[124]에서 승리하면서 2위 바르사와의 승점차가 7점이 되어[125] 11-12시즌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로써 무리뉴는 포르투갈,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까지 그동안 감독을 맡았던 4개의 리그에서 모두 우승하였으며, '''유럽 3대 빅리그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

한편, 무리뉴 감독은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리그 우승 행사에 입장하면서 선수들에 절을 하는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다. 우승에 대한 공을 선수들에게 돌리고 싶었던듯.
5월 12일 라 리가 38라운드 마요르카 전에서 이겨 역대 라 리가 한 시즌 최다 승점, 100점으로 2011/12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거기에 한 시즌 최다 득점(121)은 덤.

10.3. 2012/13 시즌


무관 & 사건이 많았던 무리뉴 감독과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시즌 시작을 알리는 수페르코파에선 캄프 누 원정에서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2:3으로 역전패했지만 발데스의 예능 플레이 덕분에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홈에서 열리는 2차전에 희망을 걸어 볼 만하게 되었다. 결국 홈 2차전에서 이과인과 호날두의 골로 2:1로 승리하면서 원정 다득점 우선 원칙에 따라 수페르코파를 우승하였다..
그런데 리가에선 초반 2경기에서 1무 1패를 기록 중이다. 1차전 발렌시아와의 안방 경기에서 1:1로 비겼고 2차전인 헤타페 원정에선 이과인이 먼저 골을 기록했으나 나중에 2골을 허용하면서 1:2로 역전패 당했다. 아직 초반이라고는 하지만 리가 15위를 기록 중인데 그나마 다음 경기는 강등권으로 유력시되는 그라나다와의 안방 경기이다. 결국 3:0으로 거뜬하게 이기긴 했지만 4라운드 세비야 원정에선 0-1로 패하면서 리가 10위로 주저앉아버렸다.
2012/13 시즌 들어서 호날두의 의미심장한 '슬프다' 발언에다가, 세비야 원정 패배 이후 무리뉴 감독도 '팀이 부진한 건 감독인 내 책임이지만, '''나의 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하는 걸 보면 팀 내부 운영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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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후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1라운드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집념의 역전승을 보여줬다. 맥아리없이 대충 하다가 대충 지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무리뉴도 3번째 골이 터질 때 골 넣은 선수마냥 격한 세레머니를 선보였다.
리가 7라운드 엘 클라시코 원정에선 호날두가 2골을 터뜨리며 2:2로 비겼다. 8라운드까지 순위는 4승 2무 2패로 4위. 이후로 연승을 달리며 3위까지 추격했지만 13차전 레알 베티스 원정에서 0-1로 패하면서 3패를 기록 중이다. 무엇보다 13차전을 1위 바르셀로나가 이기면 10점 차 이상으로 승점 차가 벌어진다. 아직 1/3도 안 된 초반부에 3패는 제법 큰 타격이다.
그리고 16라운드 안방 경기에서 에스파뇰에게 후반 89분에 동점 골을 허용하며 2:2로 비겼는데 바르셀로나와 13점 차로 제법 크게 벌어졌다. 게다가 12월 22일에 벌어진 리가 17라운드 경기에선 말라가에게 3-2로 패하면서 바르셀로나와는 16점 차로 더 크게 벌어졌으며 아틀레티코와는 7점 차. 4위인 말라가에겐 2점 차로 추격당하면서 우승은 커녕 4강 유지에 급급한 처지에 처했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3차전에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원정에서 1:2로 졌다. 덕분에 도르트문트와 1위 쟁탈전을 벌어야 할 듯하다. 4차전 도르트문트와의 홈 경기에서 2:2로 비겼다. 하지만 맨 시티에게 1승 1무, 아약스에게 1승을 거두면서 나머지 6차전 마지막 조 예선 아약스와의 안방 경기와 상관없이 조 2위로 16강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16강에서 추첨으로 맨 유와의 경기가 결정되었다. 리가에서 바르셀로나와의 승점 차이도 많이 벌어졌는데 챔스도 이러니 정말 이번 시즌은 가시밭길이다.
2013년 새해와 같이 시작된 리가 18라운드 경기에선 레알 소시에다드와 각축전 끝에 4-3으로 겨우 이겼다. 리가 10위 정도로 중위권이지만 강등과 승격을 연이어 벌이던 소시에다드에게 안방에서 힘겹게 이겼다고 우려하는 반응이 많았다. 그리고 19라운드, 19위로 강등권인 오사수나 원정에서 0-0으로 비기면서 더더욱 험난한 리가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게다가 바르셀로나가 19차전에서 이기면서승점이 18점으로 크게 벌어졌다. 무리뉴 감독도 리가 우승은 힘들어졌다고 인정하며 챔피언스 리그에 전념하겠다고 인터뷰했을 정도이다.
휴식기를 지나고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페페가 부상으로 팀 전력에서 이탈했고 카시야스마저도 손 골절로 장기 결장이 불가피한 상황. 게다가 라모스는 심판에게 욕설을 해 라 리가 4경기 + 코파 델 레이 1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16강전과 FC 바르셀로나와의 라 리가 엘 클라시코, 코파 델 레이 8강전을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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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후반기 일정을 위해 세비야로부터 골키퍼 디에고 로페스를 영입하였다. 등번호는 25번. 하지만 마드리드에서 카시야스는 단순한 주전 골키퍼 이상의 역할을 해주고 있던 터라, 마드리드가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리그 22라운드 강등권이던 18위 그라나다 원정에서 어이없게도 호날두의 자책 골로 0:1로 패하면서 시즌 5패를 기록했다.
홈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스 16강 1차전에서 1-1로 비겼다. 전반전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내용이긴 했으나 여전히 세트 피스 수비에서 문제를 드러내면서 결국 한 골을 허용했다. 얼마 안 되어 호날두의 동점 골이 터지긴 했으나 후반전에서는 원정 골을 넣은 맨 유의 선 수비 후 역습 전술에 딱히 이렇다 할 찬스를 만들지 못했으며 그나마 만든 찬스들도 다비드 데 헤아의 선방에 번번이 막혔다. 맨유도 반 페르시라이언 긱스의 아쉬운 찬스가 있었지만서도 어쨌든 지는 것보다야 낫지만 홈에서 원정 골을 허용한 채 비겼기 때문에 거의 최악의 결과를 얻은 셈. 가뜩이나 빡센 향후 일정을 보면 이번 1차전에서는 최소 승리를 거둬야 했었는데 더 답답해졌다. 과연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궁금한 상황이었지만 3월 6일에 벌어진 원정 2차전에선 2:1로 이기면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2월 27일. 세간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르셀로나와의 코파 델 레이 준결승 2차전에서 2골을 기록한 호날두의 활약을 앞세워 캄프 누에서 3-1로 깔끔하게 관광 보내 버리고 결승에 진출했다. 바르셀로나는 점유율에선 앞섰지만 수비진을 끌어올려 미드필드에서부터 강력한 압박으로 맞선 마드리드의 방어를 뚫지 못해 패스가 자주 끊겼고 유효 슛에서도 뒤졌다. 메시는 밀란과의 챔스 경기에 이어 이번에도 꽁꽁 묶였으며 페페의 공백은 신예 바란이 훌륭하게 메웠다.
그리고 3월 3일, 호날두와 케디라를 벤치에 앉히고 1.5군으로 나선 엘 클라시코에서 2-1로 다시 한 번 바르셀로나를 격파하며 험난할 거라던 일정을 무서운 상승세로 돌파하고 있다. 바르셀로나는 지난 경기와 마찬가지로 점유율에선 앞섰지만 강력한 전방 압박과 순간적인 역습에 당하며 엘 클라시코 2연패를 기록했다. 이 경기의 백미를 꼽아보자면 벤치에서 나와 직접 작전을 지시하고 수비 라인을 조율한 무리뉴.
3월 6일에 열린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에서 초반 맨유의 촘촘한 중원 압박에 고전하며 라모스의 자책 골로 16강 마드리드 시절로 복귀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니가 아르벨로아에게 플라잉 니킥 + 확인 사살 +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전하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퇴장을 당했고 교체 출전한 모드리치의 슈퍼 골과 호날두의 결승골로 8강행을 결정지었다. 최악의 5연전이라며 험난한 일정을 걱정하는 시선이 많았으나 오히려 팀 조직력을 다잡는 기회로 삼아 3승 2무로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5연전 성적을 정리하자면,
  • 1월 30일 코파 델 레이 4강 1차전 Vs 바르셀로나 1:1 무
  • 2월 14일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 Vs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1 무
  • 2월 27일 코파 델 레이 4강 2차전 Vs 바르셀로나 1:3 승(코파 델 레이 결승 진출)
  • 3월 3일 프리메라 리가 26라운드 Vs 바르셀로나 2:1 승
  • 3월 6일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Vs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2 승(챔피언스 리그 8강 진출)
한 번의 실수가 탈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토너먼트에서 원정 2승을 거뒀다는 것에 의미가 지대하다.
챔스 8강 추첨에서 갈라타사라이로 상대가 결정되었다. 비록 터키 원정이 부담스럽지만 이번 시즌 겪어 왔던 죽음의 대진들과 챔스 8강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는 수월한 대진을 받았다는 평. 주제 무리뉴와 베슬리 스네이더르, 디디에 드록바의 재회, 또한 챔스 득점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부락 일마즈의 득점 경쟁도 관심거리.
홈에서 열린 챔스 8강 1차전에서 갈라타사라이를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었다. 호날두는 이 경기에서도 변함없는 활약으로 갈라타사라이 수비진을 누비며 1골을 넣었고, 금상첨화로 최근 부진을 보였던 카림 벤제마와 챔스에서 골과 인연이 별로 없었던 곤살로 이과인도 골을 추가했다. 수비 역시 별로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였는데, 특히 라파엘 바란은 초반 박스 안쪽 단 한 번의 슈팅을 허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디디에 드록바를 봉쇄하는 활약을 보였다. 사비 알론소와 세르히오 라모스가 경고 누적으로 2차전을 결장하게 되지만 갈라타사라이 역시 수비수 온케우와 주포를 담당하고 있는 부락 일마즈가 2차전에 나올 수 없다. 사실상 4강에 거의 다가간 분위기.
그리고 4월 10일 원정에서 열린 갈라타사라이와의 챔스 8강 2차전에서 2:3으로 패배했으나 종합 스코어 5:3으로 4강에 진출했다. 전반전 이른 시간에 호날두가 선취골을 넣고 5골만 허용하지 않으면 4강에 올라가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그대로 전반전을 마치며 딱히 큰 일 없이 4강에 올라가는 듯했으나, 후반전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면서 50~70분대 사이에 에부에, 스네이더르, 드록바에게 골을 허용하며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다행히도 이후에 더 이상 실점하지 않고 추가 시간에 호날두가 골을 넣으며 경기를 끝마쳤으나, 에시앙이 교체 아웃되고 나서 흔들리던 수비진과 잘 되질 않았던 공격 전개로 인해 힘든 경기를 펼쳤다. 또한 아르벨로아의 쓸데없는 퇴장도 아쉬울 따름.
그런 와중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말라가를 상대로 후반전 추가 시간에 2골을 몰아 넣으며 역전 드라마를 완성하여 레알 마드리드는 울상을 지었다. 말라가가 구단주, 선수 가리지 않고 분노를 감추지 못할 만큼 오심으로 점철된 경기였다는 점도 컸다.[126]
챔피언스 리그 4강 추첨 결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리매치가 성사되었다. 유독 독일 원정에서 매우 저조한 성적을 보여주고 있는 마드리드인데 그나마 1차전 원정이라는 점, 그리고 조별 리그에서 도르트문트에게 1무 1패로 밀리긴 했으나 부상 등으로 사실상 수비진이 초토화되었던 그때완 다르게 이번에는 아르벨로아를 제외한 수비진 정상 가동이 가능하다는 점은 플러스 요소가 될 듯하다. 물론 도르트문트가 절대 만만한 팀은 아니지만 충분히 결승에 갈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어쨌든 도르트문트는 챔스 예선에서 마드리드에게 불의의 일격을 날린 팀이라 경기 결과는 알 수 없다는 팬들도 많았는데...
그리고 벌어진 1차전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1:4 대패를 당하면서 바이에른에게 0:4로 털린 라이벌 바르셀로나와 더불어 분데스리가 팀에게 능욕당하고 말았다. 라이벌 클럽끼리 똑같이 4골을 얻어 맞았다는 것도 주목할 점 중 하나로 2012/13 시즌 챔스에서의 분데스리가의 강세를 증명해 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쳐발렸고 레반도프스키 한 선수에게만 4골을 허용하는 등 바로 전날 라이벌의 대패를 비웃은 꼴이 무색해졌다. 양 팀팬들은 서로 '그렇게 설레발 떨더니 정작 지네도 떨어졌넼ㅋㅋ', '그래도 니네보단 우리가 낫거든?' 하며 우물 안 엘 클라시코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 봐야 양 팀 다 탈탈 털렸단 사실은 변화가 없기에 사실 도긴개긴이다.[127] 그나마 바르셀로나보다 다행스러운 건 원정에서 한 골은 넣었기 때문에 2차전 홈에서 3:0으로 이기면 진출할 수 있...으려나? 팬들은 설레발을 자제하자며 마음을 비우고 지켜 보자는 쪽인 듯하다.
레알 마드리드가 역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으로 1975/76 시즌 유러피언 컵 8강전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1975년 잉글랜드 챔피언 더비 카운티를 상대로 1차전 원정 경기에서 1대 4로 대패했다가 안방 2차전에서 5대 1 영화 같은 대승을 거두고 종합 6대 5로 4강에 올랐던 일이 거론되기도. [128]
5월 1일(한국 시각)에 벌어진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홈 경기에서 총력을 다했지만 수비적으로 나선 도르트문트를 뚫지 못했고, 10분 정도 남겨 둔 후반 83분부터 벤제마와 라모스가 골을 넣었으나 끝내 마지막 1골을 넣지 못하고 그대로 2:0으로 승리, 종합 3:4로 득실에서 밀려 이번에도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외질과 호날두가 제 역할을 못해준 것이 컸고 특히 외질은 골문 앞에서 호날두에게 패스하지 않고 일명 '나라 사랑 슛'을 날렸다.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놓친 실책 때문에 팬들에게 까였다.[129]
그러나 그 코파 델 레이마저 준우승, 그것도 홈인 베르나베우에서 14년 동안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던 상대인 AT 마드리드에게 연장 접전 끝에 1:2로 패배하며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무리뉴 감독이 심판에게 대들다 퇴장당하고, 에이스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마저 비신사적 반칙으로 퇴장 당한 것이 컸다. 결국 마드리드는 이번 시즌을 최악의 시즌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이후 인터뷰에서도 무리뉴 감독은 자신의 커리어 사상 최악의 시즌이라고 말했다. 팀에게나 감독에게나 최악의 시즌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무리뉴 감독은 구단과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하면서 3년간의 무리뉴 체제는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11. 카를로 안첼로티(Carlo Ancelotti) - 갈락티코스 2기가 주축이 되어 만든 라 데시마


'''그토록 염원하던 라데시마를 이끈 감독'''

11.1. 2013/14 시즌


3년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달성했으며, '''12년 동안 갈망했던 챔피언스 리그 10번째 우승인 라 데시마를 달성했다.'''


11.2. 2014/15 시즌


전반기 22연승으로 폭주했으나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지며 결국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시즌이 종료된 후 안첼로티는 경질되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감독은 리버풀 FC, 인터 밀란, 첼시 FC, SSC 나폴리 등의 클럽을 맡았던 라파엘 베니테스. 앞서 맡은 팀인 나폴리에서 결과 좋지 않았고 매니징 스타일상 레알이랑 상극일 가능성이 높기에 탐탁치 않아하는 레알 마드리드 팬들이 많다.


12. 라파엘 베니테스(Rafael Benítez)


'''베니테스 본인과 레알 마드리드의 흑역사'''

12.1. 2015/16 시즌


라파엘 베니테즈가 새로 부임하면서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시즌이 시작되고 만족스럽지 않은 경기력을 시즌 내내 보이고, 특히 강팀과의 경기 성적이 좋지 않았기에 당연히 레알 팬들의 불만을 받고 베니테스는 경질되었다.


13.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 - 호날두의 팀, 절정에 오르다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

13.1. 2015/16 시즌


리그 18라운드 발렌시아와의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거두자 수뇌부가 긴급 회의를 소집, 결국 베니테스를 경질하고 비장의 카드라 볼 수 있었던 지네딘 지단 감독 부임을 시즌 중 꺼내들게 된다. 그리고 부임 후 초짜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팀을 잘 이끌어나가면서 사실상 우승 가능성이 아예 없었던 리그도 승점 1점차로 아쉽게 준우승을 거두었으며, 팀을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이끌었다.
결국 지단 감독은 부임 후 145일이 지난 2016년 5월 29일(한국 시간) VS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하면서 라 운데시마(11번째 우승)를 달성했다.



13.2. 2016/17 시즌


지난 시즌 도중에 부임한 지네딘 지단이 레알에서 보내는 첫 풀타임 시즌. 지단 감독은 로테이션 & 플랜 B, 주전 스쿼드를 적절히 활용해가면서 여러 위기를 넘겼다. 결국 국왕컵을 제외한 리그,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려 더블을 달성했으며, 그 외에도 FIFA 클럽 월드컵과 UEFA 슈퍼컵 트로피도 들어 올렸다.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시즌이라 해도 무방한 시즌이었다.


13.3. 2017/18 시즌


저번 시즌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리그와 코파 델 레이 우승이 조기에 무산되었으나, 챔피언스리그에서 힘겨운 대진을 뚫고 개편 후 최초 3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시즌 종료 5일후 지단 감독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감독직 사임을 선언했다.


13.4. 챔피언스리그 3연패, 그 이후


'''포스트 호날두 시대'''
레알 마드리드는 2018년 챔피언스리그 결승 리버풀을 상대로 3-1로 승리하며 라 데시모테르세라를 이뤘고, 리버풀과의 경기 이후 2009년 영입 이후 쭉 팀의 에이스이자 갈락티코 2기 및 2.5기의 상징이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결승전 직후 인터뷰에서 사실상 이적을 공언, 거기에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부임 후 3연패를 이끈 지네딘 지단 감독이 4일만에 사임하며 큰 변화를 예고했다. 이후 월드컵도 치루기 이틀 전에 스페인 국가대표팀 훌렌 로페테기 감독을 선임했다는 걸 공식 발표해 논란이 되었고, 이 일로 인해 여러 전문가들이 스페인 대표팀을 러시아 월드컵 우승 후보로 거론할 정도로 대표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던 로페테기 감독은 스페인 대표팀에서 월드컵도 치루지 못하고 경질되었다. 여러모로 어수선한 이적 시장을 보냈는데, 호날두는 예고대로 유벤투스로 적을 옮겼지만 정작 레알 마드리드는 호날두의 역할을 베일과 벤제마에게 맡긴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딱히 대체 공격수 자원을 영입하지 않고 시즌에 돌입했다. 그 결과 득점력 빈곤을 심각하게 겪으며 2018-19 시즌은 사실상 2010년대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악의 시즌으로 기록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레알 마드리드 CF/2018-19 시즌 참조. 해당 시즌에서 시즌 전 선임된 로페테기 감독은 11월 엘클라시코 참패 이후 경질되었고, 임시 소방수로 데려온 산티아고 솔라리가 유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등 나름대로 수습에는 성공해 팀을 챔피언스리그 티켓 안정권에 올려놓았지만 여전한 팀 내 잡음[130] 및 근본적인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에 실패하며 3월에 사실상 무관을 확정 짓고 경질되었다. 이후 사임 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지네딘 지단을 빠르게 재선임해[131] 리빌딩 및 재기를 노리고 있다.


14. 훌렌 로페테기(Julen Lopetegui Argote)


'''부임한지 고작 4개월만에 경질된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악의 감독 중 하나'''

14.1. 2018/19 시즌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경질되면서까지 레알 감독직을 맡은 로페테기. 하지만 시즌 개막 전, UEFA 슈퍼컵에서 패배하면서 출발이 좋지 않더니 10월부터 최악의 결과를 내면서 리그 10R 엘클라시코 5-1 완패 이후 바로 경질되었다.


15. 산티아고 솔라리(Santiago Solari)


'''전임의 똥을 치우기는 했지만, 끝내 빛을 발하지 못한 감독'''

15.1. 2018/19 시즌


솔라리는 지네딘 지단처럼 레알에서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감독직을 맡았다. 그리고 로페테기가 경질되면서 임시 감독직을 담당했는데, 3연승을 거두면서 2018년 11월 중순에 레알 마드리드의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다. 지단이 15-16 시즌 도중에 부임했음에도 라운데시마를 달성했던 것처럼, 솔라리 감독도 레알에게 트로피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결국 리그 우승은 물 건너갔고 챔스권 사수에 만족하게 되었으며 코파 델 레이 4강 탈락,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탈락, 87년 만에 엘 클라시코 상대전적 열세 등의 행보를 이어가며 2010년대 최악의 시즌이 확정되었다.


16.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 2기



16.1. 2018/19 시즌


3월 11일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이끈 이후 사임했던 지네딘 지단이 2022년 6월까지 계약을 맺는 조건으로 감독직으로 복귀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무관이 확정되었음으로 사실상 남은 시즌 지단이 할 일은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 수성 및 이적 시장 플랜 구상 뿐이다. 현지 언론들은 지단 감독이 이적 시장 지휘 및 선수 기용에서 전권을 부여받았을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으며, 해당 가능성이 사실일 경우 갈락티코 2기 및 2.5기 주역이었던 선수들이 척추 역할을 하면서 갈락티코 3기를 이룰 슈퍼스타 멤버들이 영입될 것이 유력하다.


16.2. 2019/20 시즌


직전 시즌의 실패를 딛고, 3년만에 라리가 우승을 거머쥐며 나름대로 성공적인 성적을 거뒀다.


16.3. 2020/21 시즌



[1] 이 팀을 갈락티코스의 계보에 포함시켜 원조로 칭하기도 한다.[2] 이러한 아이콘의 계보는 1960년대의 아만시오 아마로, 1970~1980년대의 산티야나, 1980~1990년대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1990~2000년대의 라울 곤살레스로 이어진다. 라울 곤살레스 이후의 2010년대에는 이케르 카시야스세르히오 라모스가 세대를 이었다.[3]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Club Espanol de Madrid의 회장이었던 훌리안 팔라시오스를 초대 회장으로 인정하고 있다.[4] 당시엔 라 리가가 출범하기 전이라 지역 대회만 존재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챔피언들이 진출 자격을 얻고 참가하여 해당 시즌 스페인의 진정한 최고를 가리는 대회가 코파 델 레이였다. 물론 라 리가가 출범하고부터는 위상이 크게 추락했다.[5] 다른 클럽들이 전부 합쳐 10여 회 우승할 동안 혼자 20번 넘게 우승할 정도로 일방적인 독주였다.[6] 이 세 지역을 대표하는 세 클럽의 3강 체제는 라 리가 초창기까지도 이어진다. 아틀레틱은 바스크 순혈주의를 고수하여 강호들에게 완전히 밀려났지만, 여전히 이 세 클럽만이 라 리가 출범 이후 강등 경험이 없으며 또한 코파 델 레이 우승 횟수 탑 3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이들이다.[7] 나머지는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틱 빌바오, 레알 소시에다드, 아레나스, 레알 우니온[8] 2019년 현재까지 라리가의 마지막 무패우승으로 남아있다. 2017-18 시즌 FC 바르셀로나가 달성할 뻔 했지만 37라운드에서 레반테 UD에게 뜬금없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실패했다.[9] 12개 팀[10] 14개 팀[11] 이는 레알이 구단 역사에서 두 자릿수 순위를 기록했던 단 두 번의 시즌이다.[12] 이 팀을 갈락티코스의 계보에 포함시켜 원조로 칭하기도 한다.[13] 역대 최고의 클래식 윙어이자 드리블러로 손꼽히는 선수 중 하나로 당시 백 넘버는 11번. 특히 '레프트 윙어'로 한정하면 축구사 최고의 윙어라는 평이 지배적일 정도로 전설적인 선수. 저승사자들 중 가장 오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던 선수라 우승을 지겹도록 경험했다. 파올로 말디니 정도가 그에 근접했지만 아직까지 클럽 커리어로 헨토를 능가하는 선수는 전무하다.[14] 정말 별명이 그냥 '벽'이었다.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셈.[15] 1932/33 시즌 이후 무려 21년 만에 얻어낸 우승이었다.[16] 결승전에서 스타드 드 랭스를 4:3으로 이겼다.[17] 결승전에서 ACF 피오렌티나를 2:0으로 이겼다.[18]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3:2로 이겼다.[19] 결승전에서 스타드 드 랭스를 2:0로 이겼다.[20] 준결승전에서 라이벌 바르셀로나와 붙었다. 1, 2차전 모두 3:1로 이겨, 총합 6:2로 꺾고 결승전에 가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7:3로 이겼다.[21] 라이벌 바르셀로나와 붙었다. 1차전은 2:2로 비겼으나, 2차전에서 2:1로 져서 총합 4:3으로 탈락했다. 바르셀로나는 결승전에 올라가 SL 벤피카에게 3:2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22] SL 벤피카에게 5:3으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23] 안더레흐트에 져 탈락했다.[24] 결승전에서 인터 밀란에 3:1로 졌다.[25] 1958/59, 1959/60시즌 리가 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을 했다. 1960/61시즌 유로피언 컵 16강에서는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져서 탈락했다. 바르셀로나만 아니었다면 저 시기에 리가 우승만 10번에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였겠으나 라이벌리는 예나 지금이나...[26] 유럽 최초 트레블에 근접했던 시기는 1957/58 시즌과 1961/62 시즌이다. 1957/58시즌엔 리그와 유러피언 컵을 모두 이겨놓고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빌바오에게 져 준우승했다. 1961/62 시즌에는 오랜 코파 델 레이 준우승 징크스를 끊어내고 우승했지만 그 전에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SL 벤피카에 먼저 2골을 넣어놓고도 5:3으로 역전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유럽 최초의 트레블은 1966/67시즌 스코틀랜드의 셀틱 FC가 달성했다. 그리고 라이벌 바르셀로나가 2008/09시즌 트레블, 전(6)관왕을 달성했고, 2014/15시즌도 트레블, 5관왕을 달성하였다. 스페인 클럽 중 트레블을 달성한 팀은 현재까지도 바르셀로나가 유일하다.[27] 미셸과 코바치 감독까지 요한 크루이프 중심의 팀 컬러 하에 전성기를 유지하였으나 코바치 사임 이후 새롭게 감독이 된 게오르게 크노벨 감독이 신임 주장 투표를 거쳐 크루이프의 주장직을 빼앗자 이에 앙심(...)을 품은 크루이프가 빅 엿을 시전하고 바르셀로나로 이적. 그 이후로 급망 테크를 타며 몰락. 이후 미셸과 크루이프의 철학은 바르셀로나에서 이어지게 된다.[28] 당시 바이에른 왕조의 주역들은 70년대의 서독 대표팀(70 월드컵 3위, 72 유로 우승, 74 월드컵 우승, 76 유로 준우승)의 주역이기도 했다. 클럽에서의 활약 못지않게 국가 대표팀에서도 두루 두각을 나타냈던 왕조.[29] 이 기간 동안 리버풀은 유러피언 컵을 무려 9년이나 개근했는데 당시의 유러피언 컵은 현재의 챔피언스 리그와는 다르게 말 그대로 오로지 유럽 각 국가별 자국 리그의 우승팀 혹은 전년도 유러피언 컵 챔피언만이 출전할 수 있는 구조였다. 즉 9연속 유러피언 컵에 출전했다는 것은 저 기간 내내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리그나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했다는 이야기. 다만 헤이젤 참사로 이 전성기는 비극적인 막을 고한다.[30] 아리고 사키 감독 사퇴 이후 카펠로 체제부터는 안정 노선으로 전향했다. 오렌지 삼총사로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사실 레이카르트, 훌리트, 반 바스텐 이 셋 모두가 뭉친 시기는 길지 않다. 셋 중 가장 꾸준했던 레이카르트는 아약스로 넘어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친정 팀에게 비수를 꽂기도 했다.[31] 벤피카에 패하며 탈락.[32] 결승에서 파르티잔을 2:1로 꺾고 우승[33] 인터 밀란에 패하며 탈락.[34] 페냐롤에 0:2 패배.[3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패배.[36] 라피드 비엔나에 패배.[37] 여기서 유러피언컵 15년 연속 진출이 끊어졌다.[38] 스탕다르 리에주에 패배.[39] 결승에서 첼시 FC에 재경기 끝에 준우승했다.[40] PSV 아인트호벤에 패배.[41] AFC 아약스에 패배.[42] 입스위치 타운에 패하며 탈락.[43] 츠르베나 즈베즈다에 패하며 탈락.[44] 바이에른 뮌헨에 패하며 탈락.[45] 1955/56 시즌 유럽대항전 시작 이후 22년 만에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대항전 진출에 실패한 시즌.[46] 클뤼프 브뤼허에 패하며 탈락.[47] 그라스호퍼에 패하며 탈락.[48] 상대팀이 2군 팀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였다.[49] 함부르크 SV에 패하며 탈락.[50] 'Yé-yé'라는 별명은 당시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비틀즈의 히트곡 'She Loves You'의 'Yeah~ Yeah~ Yeah~'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 당시의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팀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셈.[51] 레알 소시에다드와 최종전까지 우승경쟁이 계속되었는데 최종전에서 소시에다드가 스포르팅 히혼 원정에서 패배하고 레알 마드리드는 바야돌리드 원정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우승하는 상황. 레알이 바야돌리드를 이기는 동안 소시에다드는 종료 직전까지 히혼에 2:1로 지고 있었으나 종료 직전에 소시에다드의 동점골이 터지면서 소시에다드는 창단 첫 라리가 우승, 레알은 소시에다드에 승자승에서 뒤져진 2위가 되었다.[52] 결승전 리버풀 FC에 0-1 패배.[53]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 패배. 1차전을 3:1로 이겨놓고 2차전 원정에서 0:5 참패를 당했다.[54] 최종전 전까지 2위 아틀레틱 빌바오에 승점 1점이 앞서있었고 최종전 발렌시아 원정에서 비기기만 해도 승자승에서 앞서 우승할 수 있었으나 최종전에서 0-1로 패배, 같은 시각 빌바오는 라스 팔마스에 4:2 승리를 거두며 최종전 업셋이 이루어졌다. 강등 위기에 있던 발렌시아는 이 승리로 라스 팔마스를 끌어내리고 극적인 잔류에 성공했다.[55] 애버딘 FC에 2:1로 졌다. 이 애버딘을 이끌고 있던 감독은 그 유명한 알렉스 퍼거슨 경.[56] 스파르타 프라하에 패했다.[57] 결승에서 비데오톤 FC을 상대로 1,2차전 합계 3:1로 우승했다.[58] 결승에서 FC 쾰른을 상대로 1,2차전 합계 5:3으로 우승했다. 이 시즌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 올라가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 붙었다. 그러나 승부차기에서 사연뻥을 시전하며 준우승에 그쳤다.[59] 준결승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1,2차전 합계 4:2로 탈락했다.[60] 준결승에서 PSV 아인트호벤을 상대로 1,2차전 합계 1:1로 동률이었으나 원정다득점 우선 원칙으로 탈락했다.[61] AC 밀란에 1,2차전 합계 6:1로 져 탈락했다. 2차전 산 시로에서는 5:0 대패.[62] AC 밀란에 1,2차전 합계 2:1로 밀려 탈락했다.[63]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 1,2차전 합계 3:1로 밀려 탈락했다.[64] 토리노 FC에 1,2차전 합계 2:3으로 밀려 탈락했다. 이 시즌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올라가 UC 삼프도리아와 붙었다. 연장전 전반 12분 로날트 쿠만의 기막힌 프리킥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고 구단 역사상 첫 유로피언 컵 우승을 하였다.[65] 이 우승 이후 18년 동안 코파 델 레이 우승에 실패했다.[66] 파리 생제르맹 FC에 1,2차전 합계 4:5로 밀려 탈락했다. 1차전에서 3:1로 이겼으나 2차전에서 1:4로 대패했다.[67] 파리 생제르맹 FC에 1,2차전 합계 1:2로 밀려 탈락했다. 1차전 홈에서 0:1 패배, 2차전 원정 1:1 무승부. 이 시즌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UEFA 챔피언스 결승전에 올라가 AC 밀란과 붙었으나 4:0 대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이 경기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최다 점수 차 패배로 남아있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드림팀 바르셀로나는 와해되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68] Yé-yé 마드리드의 멤버 마누엘 산치스의 아들이다. '마놀로'는 이름이 아닌 애칭이고 본명은 아버지와 같은 마누엘 산치스이다. 팀에서 담당했던 역할은 스위퍼이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레알 마드리드 유스 클럽에 입단하여 임대 한 번 가지 않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만 뛰다 은퇴했다. 밀란의 말디니 부자와 비슷한 케이스. 우연의 일치인지 양쪽 다 수비수 집안에 시기도 아버지 1960년대, 아들 1980~2000년대로 동일했다.[69] 90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우리나라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했던 그 미첼맞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통산 559경기 출장.[70] 말이 말이 아니라 88/89시즌과 89/90시즌 모두 AC밀란 한 팀한테 관광을 당하며 광탈했고, 그 중에서 레알을 잘 털어먹던 사람은 바로 '''마르코 반 바스텐'''이었다. AC 밀란은 이윽고 93/94시즌 UCL 결승전에서 당시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4:0으로 박살내고 드림팀을 와해시켰다.[71] 95~00 회장. 2020년 3월 21일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72] 오덴세 BK에 1,2차전 2:3으로 뒤져 탈락. 1차전 원정에서 2:1로 승리했으나 2차전 홈에서 종료직전 실점으로 0:2 일격을 당해 탈락.[73] 레알 마드리드가 마지막으로 유럽대항전 진출에 실패한 시즌[74] 유벤투스에 1,2차전 1:2로 뒤져 탈락. 1차전 홈에서 1:0으로 승리했으나 2차전 원정에서 0:2로 패했다.[75] 결승에서 유벤투스를 1:0으로 꺾었다. 그러나 오프사이드 논란이 있다.[76] 디나모 키예프에 1,2차전 합계 1:3으로 밀려 탈락. 1차전 홈에서 1:1로 비긴 후 2차전 원정에서 0:2 패배[77]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4위를 기록했던 레알 사라고사는 UEFA컵으로 밀려났다.[78] 결승에서 발렌시아 CF를 3:0으로 꺾었다.[79] 이 둘은 이후 클럽의 단장을 맡기도 한다.[80] 또 하나의 M자 돌림 클럽인 밀란은 카펠로 사임 이후 한동안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고 안첼로티가 부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유럽 대항전에서 다시금 두각을 나타내게 됨.[81] 바이에른 뮌헨에 1,2차전 합계 1:3으로 밀려 탈락. 1차전 홈에서 0:1로 졌고 2차전도 원정에서 2:1로 졌다.[82] 4강에서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만나 1차전 캄프 누 원정에서 2:0 승리, 2차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홈에서 1:1 무승부를 하며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바이어 04 레버쿠젠을 2:1로 꺾고 우승[83] 유벤투스에 1,2차전 합계 3:4로 밀려 탈락. 1차전 홈에서 2:1로 이겼으나 2차전 원정에서 1:3으로 지며 탈락.[84] AS 모나코에 1,2차전 합계 5:5였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 1차전 홈에서 4:2 승리, 2차전 원정에서 1:3 패배.[85] 유벤투스에 1,2차전 합계 1:2로 탈락. 1차전 홈에서 1:0으로 이겼으나 2차전 원정에서 연장전 끝에 0:2 패배.[86] 아스날 FC에 1,2차전 합계 0:1로 탈락. 1차전 홈에서 0:1로 졌고, 2차전 원정에서 0:0 무승부에 그쳤다. 이 시즌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UEFA 챔피언스 결승전에 올라가 레알 마드리드를 16강에서 탈락시킨 아스날 FC와 붙어 2:1 역전승을 이루어내고, 2번째 유럽 정상에 올랐다.[87] 이 당시 피구를 영입하면서, 피구에게 줄 주급이 모자라다고 쫓아내듯 밀란으로 이적시킨 선수가 '황태자'란 별명으로 불리던 페르난도 레돈도. 그는 1990년대 중후반 레알 마드리드 미드필더진의 핵심으로 1994/1995, 1996/1997 라 리가 우승과 1997/1998, 1999/2000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공헌한 바 있다. 밀란 이적 후에는 끊임없는 부상으로 별 활약 없이 은퇴했는데, 부상 중 지급받았던 주급을 반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88] 이때 피구의 역대 최고 이적료 기록을 깼으며, 이 기록은 마드리드가 제2의 갈락티코스를 천명하며 2009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부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사 오기 전까지 깨지지 않는다.[89] 더군다나 마드리드는 이전부터 수비진이 빈약하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마누엘 산치스페르난도 이에로가 1990년대 레알 마드리드의 센터 백을 맡았지만 백업으로 있던 이반 캄포와 아이토르 카랑카는 안정성이 부족했고, 이후 이반 엘게라가 노쇠해 가는 이에로의 파트너가 된다.[90] 마드리드에서는 매우 안습한 모습을 보이며 피구와 함께 인테르로 갔으나 1년 전에 먼저 넘어간 캄비아소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인테르의 핵심 선수가 된다.[91] 디에고 로페스는 2007년 마드리드를 떠난 후 비야레알, 세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6년 만인 2013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와서 그 동안 부동의 주전이었던 카시야스를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92] 이 시즌 UCL 결승전에 올라간 유벤투스는 MSN을 필두로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던 바르셀로나를 만나 3:1로 깨지며 구단 6번째 준우승을 하였고, 최다 UCL 준우승 팀이 되었다.... 그리고 FC 바르셀로나는 세계 최초이자 스페인 클럽 최초로 2번째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93] 사무엘 에투는 라이벌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주전 스트라이커가 되어 리그 엘클라시코전에서 호나우지뉴와 함께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레알 마드리드를 탈탈 털었고, 급기야 바르셀로나에 2번째 빅 이어를 선사하며 레알 마드리드에 제대로 빅엿을 먹였다. 최근 사례로는 유벤투스로 이적한 알바로 모라타에게 2014/15 UCL 4강 2차전에서 골을 먹혀 결승전 진출에 실패[92]했으며, 유스 출신은 아니지만 챔스 4강에서 뮌헨으로 임대 간 하메스 로드리게스에게고 골을 먹혔다.[94] 바이에른 뮌헨에 1,2차전 합계 4:4로 동률이었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 1차전 홈에서 3:2 승리, 2차전 원정에서 1:2 패배. 2차전에서 로이 마카이에게 최단시간 골을 허용했다.[95] AS 로마에 1,2차전 모두 1:2로 지며 합계 2:4로 탈락했다.[96] 리버풀 FC에 1,2차전 합계 0:5로 탈락. 1차전 홈에서 0:1로 졌고, 2차전 원정에서 0:4 참패를 당하며 탈락했다.[97] 리가 우승에 성공했으나 마드리드 고유의 색을 잃게 했다는 이유로 경질된다[98] 06-07시즌과 07-08시즌은 잘했다. 이후 부상으로 폭망해서 그렇지.[99] 아이러니하게도 2009년 여름 이적 시장 때 이적한 이 두 선수는 해당 시즌 마드리드에서 열린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각 팀의 주전으로서 만나게 된다.[100] 2004-05 시즌부터 득점력이 급격하게 하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101] 이 외에 "당신이 필요없다던 베컴의 활약으로 우승해놓고 그게 어떻게 당신 능력임?"이라는 분위기가 팽대했다.[102]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 측면 미드필더로 맹활약했으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한 바 있다.[103] 이 이후로 올랭피크 리옹은 9년동안 챔피언스 리그 8강 진출을 못하고 있다가, 2020년에 유벤투스 FC를 이기고 10년 만에 8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뤄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호날두가 있는 팀을 두 번 씩이나 16강에서 탈락시켜버린지라 축구팬들 사이에선 호날두의 담당일진이 리옹이라는 우스겟소리도 나오는 중.[104] 이 기록은 7년뒤에 아스날 FC가 7시즌 연속 챔스 16강 탈락으로 갱신하게 된다.[105] 2008/09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함께 라 리가, 코파 델 레이 우승도 성공하면서 트레블을 이룩한 바르셀로나를 두고 인터뷰하던 스페인 국왕이 다음 시즌은 결승전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다는 말로 은근히 바르셀로나를 도발했다. 즉 이번에는 자신이 서포팅하는 레알 마드리드가 안방에서 우승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지만 결과는...[106] 로번은 스네이더르 등이 쓸려 나가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나간 것이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갔으니.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107] 전반기 엘클라시코 직전 이후에 처음으로 리그 선두로 올라선 순간이었다.[108] 시즌 48경기.[109] 갈락티코가 막장티코가 된 것은 델 보스케가 나가고 마케렐레가 나간 시점이다. 델 보스케가 나가면서 무게있는 감독이 없어졌고, 페레즈의 기용 아래에서 갈락티코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110] 이후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 할 수 있는 주제 무리뉴도 더 다듬어진 레알에서 슈퍼코파를 뺄 시 3년간 코파 델 레이 1개, 리그 1개의 트로피를 드는 데에 그친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단순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111] 물론 선수단과의 불화 등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도 있다.[112] 이 시즌부터 레알 마드리드는 17-18시즌까지 단 한 차례도 4강에 오지 못한 시즌이 없다. 18-19시즌에서야 16강 아약스에게 패하며 그 행진을 마감한다.[113] 공교롭게도 상대 감독이 전임 레알 감독이던 마누엘 페예그리니였다.[114] 무리뉴는 2002년 2월 23일 FC 포르투 감독 시절 베이라 마르에 홈에서 진 후 9년 만의 홈경기에서 패배를 기록했다.[115] 호날두에겐 바르셀로나전 첫 골, 메시에겐 무리뉴 상대 첫 골.[116] 경기 후 페페의 다이렉트 퇴장을 두고 오심 논란이 크게 일었다.[117] 선수 시절 마라도나-발다노-부루차가 삼각 편대 중 한 명으로 아르헨티나를 월드컵에서 우승시킨 장본인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리뉴가 첼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사이가 안 좋았다.[118] 디 마리아가 얼굴을 가격당하고 쓰러진 상황에서(다만 접촉은 있었지만 손으로 살짝 닿은 정도라 그렇게 나뒹굴 정도는 아니었다.) 곁에 있는 상대 선수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런데 케디라가 디 마리아가 쓰러지자 진짜 크게 다친 줄 알고 화나서 밀쳤다는 이야기가 있다.[119] 리그, 챔스, 국왕컵 등 모든 대회 포함[120] 바르셀로나가 거둔 16연승[121] 리옹이 자국에서도 부진한 상태이긴 하지만[122] 사실 실축까지는 아니다. 연속으로 막은 노이어 골키퍼가 야신 모드였을 뿐이다.[123] 카시야스는 '괜찮다'는 격려와 응원의 말과 함께 올린 것이었지만 다른 선수도 아니고 탈락의 일등 공신 카카의 너무나 해맑은 표정에 마드리드 팬들은 황당[124] 당시 리가는 36라운드까지 진행된 상태였지만, 이전에 20라운드가 스페인 선수 협회의 파업으로 연기됐던 바 있어 뒤늦게 진행되었다.[125] 레알: 94점, 바르사: 87점[126] 말라가 역시 오프사이드 오심으로 득점한 거라 사실 당당하게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127] 그러나 어떤 레알 마드리드 팬, 바르셀로나 팬들은 이 경기 후 서로서로 사이좋게 탈락 위기에 놓인 아픔을 위로하기도 했다. [128] 문제는 이 일이 20년도 더 된 일이라는 점.[129] 이제 남은 건 코파 델 레이 우승 뿐이다.[130] 베테랑과 신입생의 충돌, 베일의 불성실한 태도, 이스코와 감독의 충돌 등[131] 사실 지단 감독의 차기 행선지로는 유벤투스 FC가 유력했다. 우선 선수 시절 유벤투스에서 에이스로 뛴 경력이 있는데다가 알레그리 감독이 경기력 문제 및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부진으로 자리가 위태로웠고 지단 체제에서 에이스였던 호날두가 이미 유베에서 에이스로 존재하며 19-20 시즌 이적시장에서 지단 체제의 또 다른 에이스였던 마르셀루를 영입하는 것이 유력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