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4세

 



'''William IV'''
'''이름'''
윌리엄 헨리
(William Henry)
'''출생'''
1765년 8월 21일
런던 버킹엄 하우스
'''사망'''
1837년 6월 20일 (71세)
버크셔 윈저 성
'''재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하노버 왕국의 왕
1830년 6월 26일 ~ 1837년 6월 20일
'''장례식'''
1837년 7월 8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배우자'''
작센마이닝겐아델라이드
(1818년 결혼)
'''자녀'''
조지
헨리
소피아
메리
프레더릭
엘리자베스
아돌푸스
오거스타
아우구스투스
아멜리아[1]
'''아버지'''
조지 3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
'''형제자매'''
조지 4세
프레더릭
샬럿
에드워드
아우구스타
엘리자베스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아돌푸스
메리
소피아
옥타비우스
알프레드
아멜리아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왕위 계승 전
2.2. 즉위 후
3. 여담

[clearfix]

1. 개요


William Henry. 영국-하노버 동군연합의 마지막 왕.
1765년 8월 21일 조지 3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30년 6월 26일 즉위해[2] 1837년 6월 20일 사망했다. (만 71세 10개월, 재위 6년 359일)
영국 해군(Royal Navy)에서 복무한 탓에 항해왕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13세에 입대했으니 소년병이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 장교가 아닌 수병으로 복무했으니 더더욱 소년'''병'''인 셈. 스페인과의 전쟁에도 참가해 군기를 빼앗아 아버지 조지 3세에게 바쳤는데 어째 후대의 윤색 느낌이 난다. 훗날 제독 지위를 받긴 했지만 명예직이었다.

2. 생애



2.1. 왕위 계승 전


유럽의 복잡한 정치판에서 확실하게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왕가간의 혼인이었다. 그래서 제정된 법률이 '1772년 왕실혼례법(Royal Marriage Act of 1772)'. 요지는 왕의 허락이나 추밀원의 동의 없는 결혼은 무효이며, 혹 그 결혼에서 아이가 태어나도 그 아이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다는 것이다.[3] 이 결정에 반발해 윌리엄 4세를 비롯한 조지 3세의 몇몇 아들들은 허락받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겠다고 동거에 들어간다.
이 법이 제정될 때엔 조지 3세의 후계가 확실하게 정해져있었던 터라 자식이 많았던 왕실에서는 아들들이 그냥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두었다. 윌리엄 4세, 당시 클래런스 공작 윌리엄이 동거한 사람은 연극배우 '도로시 블랜드(Dorothea Bland)', 혹은 '조던 부인(Mrs. Jordan)(1761-1816)'이었다.[4] 20년간 동거하면서 자녀를 10명 두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위로 젊은 형들이 둘이나 있어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래서 위엄 있는 왕족 행세보다는 졸부 귀족급 정도의 그냥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이야 타고나길 금수저이니 씀씀이가 좋고, 덩달아 이 조던 부인의 씀씀이가 너무나도 헤펐는지 거기에 질린 윌리엄은 1811년 이별을 고한다.[5]
거기까지라면 윌리엄 왕자나 그 서자들이나 그냥 영국의 한 귀족 가문으로 그냥 평범하게 남았을 텐데, 갑자기 영국 왕위 승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첫째 형 조지 4세의 결혼은 고명딸 '샬럿 어거스타 공주(Princess Charlotte Augusta of Wales 1796-1817)'가 태어나고 아그작이 나서 그 이후로는 대놓고 정부를 들여놓고 살았다. 그의 후계자였던 샬럿 공주는 당시 살아있었던 할아버지 조지 3세, 아버지 조지 4세를 이어 계승 순위 2위로 영국 국왕 승계 법률상 훗날 여왕의 즉위가 확실했었다.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18세기, 샬럿 공주는 건강히 잘 자랐고 또 영특해서 영국 왕실과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816년 샬럿은 훗날 벨기에의 왕위에 오르는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는데,[6] 결혼 첫 해에 임신을 했다가 유산하고 그 다음 해에 재차 임신해서[7] 이번에는 만삭은 채웠지만 난산 끝에 사내아이는 사산, 하루를 못 넘기고 임신중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8]
유력 후계자가 사망하고 앞서 설명했듯 조지 4세의 정식 결혼이 파탄났던 관계로 더 이상의 후계자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똥은 나머지 조지 3세의 왕위 계승권에 가깝고 아직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아들들에게 튀었다. 말 그대로 1817년판 정자왕 선발대회.
  • 조지 3세 (1738~1820)
총 1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 왕자는 모두 7명이다.
  • 웨일스 공 조지 왕세자 (조지 4세) (1762~1830)
왕위 확정상속인. 고명딸이자 후계자인 샬럿 공주는 1817년에 사망. 정부인과의 불화로 다시 후계자 생산은 기대 불가능. 결국 적자손 없이 서거했다.
  • 요크와 올버니 공작 프레더릭 왕자 (1763-1827)
샬럿 공주 사망 후 계승 서열 2위. 형의 즉위 후 계승 순위 1위. 팔촌이었던 부인[9][10]과 불화로 별거. 형의 재위 당시 계승 순위 1위였으나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은데다 재혼도 하지 않았고 적자손 없이 형보다 먼저 사망. 딱히 정부를 두었다는 기록도 없음.
  • 클래런스와 세인트앤드루스 공작 윌리엄 왕자 (윌리엄 4세) (1765~1837)
샬럿 공주 사망 후 계승 서열 3위. 큰형이 즉위하며 계승 서열 2위가 되었으며 바로 위 형이 적자 없이 사망하면서 계승 서열 1위가 되었고 큰형이 사망하자 왕위를 승계했다.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1767~1820)
샬럿 공주 사망 후 계승 서열 4위. 독일 출신 빅토리아 공녀(1786-1861)와 1818년에 결혼. 빅토리아 공녀는 두 번째 결혼이었고, 에드워드 왕자는 이미 50살이 넘었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정략결혼이었는데 딸 하나를 낳은 후 1년도 안 되어 왕자 본인이 폐렴으로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외동딸이 영국 왕실의 왕통을 잇게 되고, 그녀를 통하여 여러 유럽 열강의 왕실에 혈통이 전해지게 되니 최후의 승리자는 바로 이분.
  • 컴벌랜드와 테비엇데일 공작 어니스트 왕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1771~1851)
샬럿 공주 사망 후 계승 서열 5위. 독일 출신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레데리케 공녀(1778~1841)와 1813년에 결혼하여 딸 프레데리카와 아들 조지를 낳았다. 프레데리케 공녀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 형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왕위를 노려볼 만했으나, 바로 위의 형이 죽기 전에 늦둥이 딸을 보는 바람에 밀려났다. 대신 셋째 형의 뒤를 이어 하노버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형제들 중 가장 늦게 사망했고, 사후 왕위는 아들 조지/게오르크가 계승했다.
  • 서식스 공작 오거스터스 프레더릭 왕자 (1773~1843)
  •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퍼스 왕자 (1774~1850)
1816년부터 1837년까지 하노버 왕국의 부왕으로서 아버지와 두 형을 대신하여 하노버를 통치했다. 샬럿 공주가 사망한 후 육촌인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와 1818년에 결혼해 1남 2녀를 보았으나 왕통은 넷째 형의 딸에게 넘어가고, 하노버 왕국은 다섯째 형그의 아들에게 넘어갔다. 안습.
조던 부인과 이별 후 혼자 지내다[11] 점점 부담이 되어가는 위자료에, 그렇다고 국회에서 받는 품위유지비만으로는 더 이상 씀씀이 감당이 불가능했던지 국회에서 빚을 퉁치는 조건으로 추밀원이 추천한 아델라이드 왕비(Queen consort Adelaide of Saxe-Meiningen 1792~1849)[12]와 1818년 결혼한다. 27살이나 차이가 나는 26살 신부에게 미안했는지 53세의 새신랑은 이후 외도를 하지도 않았고 씀씀이도 줄여 이후 만년적자를 면하게 된다.
아델라이드 왕비는 검소한 생활로 국민들에게 사랑받았지만 자식복이 없어 다섯 아이를 모두 잃었다. 첫째 샬럿 공주는 1819년 3월 27일에 태어났지만 몇 시간 후에 죽었고, 둘째는 1819년 9월 5일 사산하였다. 셋째는 엘리자베스 조지아나 아델라이드 공주로 1820년 12월 10일에 태어나 2개월 22일만에 죽었다. 넷째와 다섯째는 쌍둥이 아들이었는데 1822년 4월 8일에 출생 당시 모두 사산하였다. 그래도 윌리엄 4세가 즉위하고 아이를 가질 연령이 지나도 임신 소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내외로 보기에 행복한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13]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아버지로서는 상당히 살가웠는지, 아버지 조지 3세가 붕어하고 형이 조지 4세로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이 확실해지자 조던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들을 위해 새로 귀족 가문을 하나 만들어주었다. 그게 '피츠클래런스(FitzClarence) 백작 가문'이다.[14] 아이가 없었던 아델라이드 왕비 또한 어머니가 없던 윌리엄 4세의 어린 서자들을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결혼하기 전까지 확실하게 즐겼고, 군인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도 복무했고, 결혼 후에는 부인에게 충실했으며 결혼 전 동거녀와의 사생아들도 확실하게 챙긴 걸 보면, 15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 과연 백미라고 해도 되겠다. 그게 아니었다면 영국 총리를 지내는 데이비드 캐머런이 윌리엄 4세의 후손을 자처할까?


2.2. 즉위 후


형이던 조지 4세가 별다른 후사 없이 1830년에 사망하자 영국 왕 중에는 최고령 64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자신의 나이도, 왕비의 나이도 더 이상 아이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후사를 걱정하던 윌리엄 4세는 이후 왕위를 물려받을 조카 빅토리아 공주에게 관심을 쏟고자 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은 사람이 제수이자 빅토리아 공주의 모친인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공녀와 그녀의 내연남 존 콘로이(1786-1854). 이 둘은 작당을 하고 이후 여왕 즉위가 확실한 빅토리아 공주를 자기네들 입맛에 맞게 조종하려 했다. 그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상당히 어려서부터 조숙해지고 성격 또한 욱하는 쇠고집이 된 건 덤. 가정교사를 소개해 줘도 필요 없다며 물리치고, 파티에 초청을 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윌리엄 4세를 멀리했다. 숙부로서의 애정 뿐만 아니라 후계자 수업을 하려면 당연히 윌리엄 4세와 빅토리아가 직접 만나야 할 일이 많은데 이런 식으로 멀리하는 건 너무나도 의도가 노골적인 간섭이었다. 여기에다 아델레이드 왕비도 조카를 딸처럼 매우 예뻐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남을 거절당하자 매우 섭섭해했고, 이 꼴을 본 윌리엄 4세는 당연히 반감이 더 강해졌다.
윌리엄 4세와 켄트 공작부인의 관계가 파국에 이른 것은 1836년 윌리엄 4세의 생일 저녁 만찬에서였다. 윌리엄 4세는 빅토리아 모녀와 귀빈들이 모여 있는 저녁 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하느님께서 짐을 최소한 9개월은 더 살게 해줄 거라 믿소... 내 그렇게 되면 지금 내 옆자리의, 저 악마 같은 조언자에게 둘러싸여 상황도 제대로 제어 못해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이나 하는 내 무능한 제수씨가 내 조카의 왕위를 가지고 노는 일 없이, 잠정 왕위 계승자인 저기 앉아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오!''''

'I trust to God that my life may be spared for nine months longer ... I should then have the satisfaction of leaving the exercise of the Royal authority to the personal authority of that young lady, heiress presumptive to the Crown, and not in the hands of a person now near me, who is surrounded by evil advisers and is herself incompetent to act with propriety in the situation in which she would be placed.'


아주 쉽게 표현하면, '난 내 조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 테니 네놈들은 섭정 따위는 꿈도 꾸지 마라!'라고 대놓고 일갈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빅토리아 공주는 충격에 눈물만 흘렸고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공녀는 표정 관리가 안 돼서 울그락붉그락했다고. 이 장면은 2009년 에밀리 블런트가 여주인공을 한 영화 '영 빅토리아(The Young Victoria)'[15]에 잘 나와있다.
왜 이렇게까지 켄트 공작부인에게 사자후를 날렸냐면, 영국에서는 18세부터 성년으로 봤고 왕위의 경우 18세 이전에 즉위하면 6년간의 섭정을 거치는 법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켄트 공작부인과 그 내연남은 나이가 많은 윌리엄 4세가 혹시 빅토리아 공주가 성년이 되기 전에 붕어하면 그 6년의 기간 동안 섭정이 될 야심을 품었고, 어릴 적부터 빅토리아를 열심히 조이고 갈궈댔다. 그런 막후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윌리엄 4세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자후대로 윌리엄 4세는 약 10개월 후 빅토리아 공주가 18세로 '''성인이 된 지 26일 후에''' 사망하여 켄트 공작부인과 그 내연남은 섭정이 되지 못했다. 빅토리아 여왕 본인도 자신의 어머니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았기에 즉위 후에 적절한 처분을 내렸다. 콘로이는 적당한 연금만 지급하며 강제로 퇴직시켜 버렸고, 켄트 공작부인도 거처를 변두리로 옮기게 해서 궁정 일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관계는 빅토리아 본인이 자식을 낳고 남편인 앨버트 공이 열심히 중재한 뒤에야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한편 이 계승으로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동군연합은 해소된다. 하노버 왕국은 살리카법에 따라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윌리엄 4세가 사망한 후 하노버 왕국의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에게 돌아갔다.

3. 여담


산업혁명 당시에 심각했던 아동노동을 금지시키고 노예제를 폐지하고 선거법을 개정하여 투표권을 넓혀 영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왕이기도 하지만 영국 왕 가운데 마지막으로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총리를 임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아내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형 조지 4세가 아내 캐롤라인 왕비를 대관식에 참석 못 하게 한 것처럼 그도 대관식 관련 기행을 남겼다. '''그냥 하기 싫다'''라고(…) 당황한 대신들이 규모를 축소해 검소하게 치르자고 해서 겨우 응했다고 한다. 가끔 격정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보통 때는 선량한 품성이라 친근한 (나쁘게 말하면 얕보이는) 왕이었다. 64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젊은 시절에 런던을 자주 돌아다닌 기억이 있어 런던 시내를 그냥 돌아다니며 시민들과 인사하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거리낌 없이 마차에 태우곤 해 호위를 맡은 주변 사람들이 골머리를 썩게 했다고. 대관식 외에도 사치스럽고 복잡한 왕실 의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성격과 젊은 시절부터 행한 한량 짓들을 연결해보면, 나이 먹어서 검박하게 지내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그냥 복잡하고 형식적인 걸 싫어한 성격인 모양이다.
선거법 개정 문제 때도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1832년 선거구를 개편하는 선거법 개정을 위해선 상원의 의회해산이 필요했다. 당시 상원은 이 선거법 개정을 반대하는 농촌 기반의 귀족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수상인 찰스 그레이는 윌리엄 4세에게 이를 요청했고 윌리엄 4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의회 해산을 하려면 국왕이 직접 국회의사당으로 와야 했다. 그러나 국왕의 행차를 위해서 거리를 정리하고 방문 의전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절차가 너무 복잡해졌다. 그러자 윌리엄 4세는 '마차 말고 그냥 승마용 말을 타고 가버립시다.'라고 말한 뒤 진짜로 말 타고 갔다. 의회 입구에 도착해서는 직접 걸어서 상원에 들어가서 의회 해산령을 선포하였다. 굳이 현대로 비유하면, 쓸데없이 경호 의전 차리는게 귀찮다며 국왕이 직접 자가용 운전대 잡고 혼자서 국회에 출석한 격이다.
그리고 조지 3세의 아들들을 귀찮게 만들었던 '1772년 왕실혼례법(Royal Marriage Act of 1772)'은 빅토리아 여왕의 자식복, 그리고 여왕 부부의 야심과 국회의 지지로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명을 가져다 준다.
이 왕의 재위기간이었던 1832년에 영국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조선에 상륙해 통상을 요구한 최초의 이양선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순조.
위에서도 나왔지만 영국 역사상 즉위시 최고령(64세)인 국왕이다.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2019년 현재 찰스 왕세자가 76세(1948년생)이므로 찰스가 즉위한다면 이 기록은 깨진다.

[1] 자식이 이렇게나 많았지만 모두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적자녀들은 이미 일찍 죽었고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도로테아 조던이 낳은 서자녀들이였기 때문이었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 왕실에서 서자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었다.[2] 즉위 당시 64세.[3] 2015년 3월 26일에 와서야 폐지되었다.[4] 실명이 아닌 예명. 블랜드는 동거는 했어도 평생동안 결혼은 하지 않았다.[5]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조던 부인은 연극 무대에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조건으로 딸만의 양육권과 1년에 £4000 파운드(2015/12 기준 한화 약 3~4억)의 위자료를 받았지만 다시 무대에 오르락내리락하다 딸들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결국 쓸쓸하게 영국도 아일랜드도 아닌 타지인 프랑스에서 1816년 사망.[6] 야망이 넘치다 못해 온 몸에 도배를 한 것으로 유명했던 레오폴드 1세 때문에 여론은 이 결혼을 비관적으로 봤지만 남겨진 기록으로 보아 행복했던 결혼으로 보인다.[7] 이 임신은 당시 영국 증시를 들썩이게 할 만큼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8] 이게 평생 한이 됐는지 생전에 레오폴드 1세는 영국 왕실에 집요하게 관여했고, 그 결과가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의 결혼 중매다.[9]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첫 번째 부인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딸로 둘 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조카와 외조카다. 그러나 결혼 후 서로 바람을 피다가 엘리자베트는 궁정 악사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해버려 자기 외삼촌이 빡쳐서 감금한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분이 풀어지면서 처우는 상당히 개선되었다고.[10] 이쪽은 조지 1세의 아들인 조지 2세의 직계증손, 부인인 프레데리케는 조지 1세의 딸 조피 도로테아의 증손녀다[11] 이때도 데리고 다니던 여인들이 있어서 지금도 윌리엄 4세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12]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주도 애들레이드가 이 왕비의 이름에서 따왔다.[13] 다만 여러 번의 유산으로 심기가 불편했던 윌리엄 4세는 사석에서 '망할 것들'이라며 쌍욕을 했다고.[14] 윌리엄 4세의 서자녀들은 모두 피츠클래런스를 성씨로 달았다. '클래런스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윌리엄 4세 즉위 전 작위이던 클래런스 공작(Duke of Clarence)에서 따왔다고 한다. 서장자(庶長子) 조지는 1831년 윌리엄 4세로부터 먼스터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7대 백작 앤서니 피츠클래런스가 사망한 2000년 12월 30일에 후계자 없이 단절되고 만다.[15] 2010년 오스카 의상상 수상.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 바로 전부터 신혼초까지를 다룬 영화. 호화스런 의상과 배경이 아름다운 영화이다. 고증은 상당히 잘 되어있는데 일부 세부묘사와 엔딩이 실제와 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