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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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원''' (徐孝源, 1959년 11월 29일 ~ 1992년 12월 14일)
1. 개요
2. 대표작
3. 작가 연보[1]


1. 개요


대한민국 1세대 무협지 작가.
성균관대 산업심리학과에 재학중이던 1980년에 판정을 받아서 수술을 받았고,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는다.[2] 이후 암 치료비를 벌기 위해 당시 고소득직종[3]이었던 무협을 집필하기 시작, 1992년에 '''폐기종으로 사망할 때까지''' 12년 동안에 '''128편, 1000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다만 집필 과정을 일일이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기네스북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런 다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우선 서효원 특유의 문장이 한몫한다. 건조체의 궁극에 도달한 듯한, 작중 묘사와 수식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사건 위주로 서술한다. 때문에 한번이라도 서효원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이거 서효원이 썼구나'하고 쉽게 알아본다.
황금의자.
무게가 천 근은 되어 보이는 황금의자 위에는 눈빛이 아주 차가운 중년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구파일방소림사를 제외한 아홉 문파가 제왕성에 칼부리를 돌렸다고?"
그는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 그들 사이에는 핏빛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다.
융단의 길이는 백여 장.
제왕전.
거대한 대전은 무림계가 두려워하는 신위를 지니고 있는 장소였다. 구파일방 장문인 중 여기 와서 경배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은 자 있겠는가?
이곳은 무림인들에게는 꿈의 장소였다. 아주 오랫동안. 그런데 이곳이 지금 바닥에서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위 예문은 '제왕성'의 첫머리다.
두번째는 플롯이다.
서효원은 많은 작품을 썼지만,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즉 '''동일한 플롯'''을 조금씩 다르게 변주해 반복적으로 들려줬다[4]. 바로 '''부활'''이다. 일단 부활하려면 당연히 전에 죽었어야 하니까(...) 서효원 작품에서 주인공은 고생 정도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거지반 죽었다 가까스로 살아난다.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아이덴티티 상실'''이라는 변형도 즐겨 썼다. 서효원의 작품에 있어서 부활에 대한 집착은 본인이 시한부 생명 선고를 받고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으며 이런 처절한 이야기 전개는, 특유의 건조한 문장과 결합해 하드보일드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하지만, 이러한 작풍을 뒤집어 말하자면, '또 그 얘기 또 그 문장'이란 소리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타입이다. 참고로 생전에는 흔히 말하는 4대 작가[5] 가운데 흥행 파워는 한수 떨어질지 몰라도, 골수팬을 보유하고 있어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한편, 서효원 다작에 관해서는 전설적인 일화가 많이 전한다.
  • 살아 생전에 오직 두 손가락으로만 타자를 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독수리 타법의 달인(...)
  • 시기가 시기인지라 타자기로 글을 썼는데 어찌나 빨리 타자를 치는지 한번은 타자기 판매원이 신상품이라면서 정말 빨리 쳐도 된다면서 가져왔는데 전력을 다한 타법에 견디지 못하고 부품이 팅~하고 튕겨져나와서 고물이 되었다고도 한다.
  •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원고를 썼기 때문에, 한꺼번에 몇 작품을 쓰는 일도 있었다고.
  • 이 시기 무명 작가 작품을 유명 작가의 이름을 달고 내는 일이 많았는데, 서효원은 워낙 빨리 그리고 많이 쓰니까 '사기치지 마라. 이거 한 사람이 쓴 거 아니지?'하고 태클이 들어와서 멀쩡한 자기 작품을 다른 사람 이름으로 내야했다. 즉 필명을 하나 또 만들었다.
  • 가장 압권인 일화는 서효원을 포함한 몇몇 무협작가들이 모여서 포커를 치던 중, 판돈이 떨어지자 서효원이 담배 한 보루와 원고지 뭉치를 들고 골방에 들어가 몇 시간 후 나와서[6] 반권 분량의 원고를 내놓으며 "이걸 판돈으로 계속 하자"(...)고 한 것.[7] 술집에서 술 마시다가 술값이 없자 이렇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착오로 신작의 원고가 반권 가량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동안 반권 분량을 써서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서효원이 그 자리에서 반권을 썼다는 얘기에서 반권은 요즘 책 기준으로 환산하면 1/4권 가량에 불과하다. 서효원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무협지 1질은 오늘날 서점용 판형으로 환산하면 3권이 조금 못되는 분량이었다.(세로쓰기 5권이 1질이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며 6권, 7권으로 늘어났지만 언제나 판형 자체는 작았다. 더구나 당시 무협은 제아무리 인기 작가라해도 원고 매수가 정해져 있었다. 90년대 후반 무협 재간 붐이 일었을 때 서점용 판형으로 다시 나온 과거 무협지들의 대부분이 3권 완결인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무조건 정해진 분량 안에 기승전결 구조를 짜맞춰서 완결짓는 기교는 필수였다는 얘기. 이런 환경에서 서효원은 무협 작가 가운데 손꼽히는 워커홀릭[8]에 다작에 속필인 작가였으니 저런 전설같은 일화를 남길 수 있었던 것.
  • 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들 중에는 책방에만 가면 있는 서효원의 책 때문에 '서효원도 공장 돌렸나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혼자서 공장과 맞짱뜬 거다.
  • 동시대 작가들의 공통적인 한계이기도 하지만 초창기 세계관은 전형적인 정사(正邪) 이분법과 중화주의가 결합한 진영대결 양상을 보였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주인공 개인의 성찰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런 경향은 희미해진다.

2. 대표작


대표작은 말하는 사람마다 중구난방인데, 아무리 못쓴 작품도 중간은 가는 고른 퀄리티를 보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독자의 입맛에 달렸다고 보는 편이 옳다. 대체로 범작은 있어도 졸작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냥 아무 작품이나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다른 작품도 계속 읽으면 된다. 반면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도저히 못 읽겠다 싶으면 깨끗이 포기하자. 다만 초기작과 후기작은 작풍이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도무지 웃지 않던 주인공이 '훗!'하고 웃게 되었다든지(...).
참고로 실명 시리즈와 천년 시리즈는 제목만 비슷할 뿐 세계관이 이어지는 작품은 아니다. 즉, 실명대협과 실명마제는 서로 상관없는 작품이다.

개중 이름난 작품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 대자객교(大刺客橋) (1983)
무분별한 Ctrl+V 신공 덕분에 서효원 최고의 작품처럼 알려졌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천왕 정도 된다. 골수팬조차 최고로 꼽는 작품이 제각기 다르다. 1993년 서울창작에서 출판 10주년 기념으로 '''서점용'''으로 대자객교를 재간했는데, 당시 창작무협 붐과 맞물려 히트를 치며 재판까지 찍었다. 이후 서효원=대자객교로 인식이 박혔다.
  • 대설(大雪=인문제십좌) (1985)
대자객교와 완전히 동일한 플롯이다. 다만 같은 이야기를 대자객교는 오밀조밀하게 다뤘고, 대설은 판을 크게 벌렸다. 서울창작 재간본의 경우 대자객교는 3권, 대설은 5권. 때문에 대자객교보다 대설을 꼽는 팬도 많다. 그리고 무협 팬들 사이에서 좀 다른 의미로 유명한데, 바로 창세기전2가 이 작품의 스토리를 '''표절'''했기 때문.
  • 실명 시리즈
실명대협(失名大俠), 실명마제(失名魔帝), 실명천하(失名天下)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목에서 공통으로 쓴 실명(이름을 잃다)이란 단어가 뜻하는 것처럼,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주인공을 다루고 있다. 실명대협은 2009년 청어람에서 '한국무협 대표10선' 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종이책으로 재출간했는데 10선이라면서 재출간한 책이 이거하고 금강의 풍운고월조천하밖에 없다. 실명대협은 황성만화화했다. 하지만 황성 문서에 적혀 있듯이 서효원 이름은 빼고 글, 그림 둘 다 황성이라 되어 있다.
  • 천년 시리즈
천년세가, 천년야망, 천년마제로 구성되어 있다. 천년이란 제목답게 주로 천년 전 고수로부터 현재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싸움을 다루고 있다. 서울창작에서 천년 시리즈를 재간할 때는 이미 재간붐(...)이 일어서 흐지부지 묻혔다. 그러나 처음 발표했을 때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 대곤륜(大崑崙) (1987)
80년대 후반 한국무협이 고사할 위기에 처하자, 세로판 대신 가로판 양장 무협을 출시하는 등 내부적으로 자정 노력이 일었다. 이 시기 작품 가운데 하나.
그밖에도 인기를 끈 작품이 많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유고집으로 '나는 죽어서도 새가 되지 못한다'가 있다. 그가 지은 시와 산문, 그리고 그를 추모하는 글을 실었다. 서울창작에서 90년대 말 상당수 작품을 재판했으나, 최근 들어 영상노트에서 재판한 작품은 대자객교와 대곤륜 밖에 없다. 그리고 청어람에서 재판한 작품은 실명대협 뿐. 2020년 기준 대자객교, 대곤륜은 절판되었다.
그리고 2011년에 와서 전자책으로 '''수많은 양의''' 저서를 다시 재판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서효원만 쳐도 쫙 나온다.
무협 연구가로 활동 중인 그의 형 서희원은 서효원의 지인들과 뜻을 모아 출판사 서울창작을 설립하고 서효원의 작품들을 재간했으며 현재는 네이버 캐스트에서 무협에 대한 글을 연재 하고 있다.

3. 작가 연보[9]


1959년 11월 29일 강원도 원통에서 출생
1966년 3월 금성국민학교에 입학
1968년 4월 간염이 발병하여 앓아눕다. 이후 타계할 때 까지 병마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다.
1972년 3월 서울대학교 사대부속중학교에 입학.
1975년 3월 동북고등학교에 입학.
1978년 3월 성균관대학교 산업심리학과에 입학.
1980년 3월 위암 판정을 받고 위, 비장, 췌장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았다. 집도의로부터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았다.
1980년 9월 무협 소설 작가로 데뷔, 데뷔때 부터 월평균 1만여매의 원고를 집필하였다.
1982년 2월 성균관대학교 산업심리학과를 졸업하였다.
1987년 집필한 무협소설이 100종을 돌파하였다.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88년 5월 시 운동단체 '바우시낭송단'에 가담하여 1991년까지 단장을 맡았다.
1989년 4월 잠잠하던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 12월 각종 합병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90년 6월 만화 전문 프로덕션 '서울창작 패밀리'를 동료작가인 사마달, 야설록, 설화담, 유남광, 형인 서희원과 함께 설립하다.
1990년 12월결핵 3기를 진단받았다.
1991년 11월 병원에서 가망없다는 통보를 받고 귀가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6개월간은 집필과 외출이 가능했다.
1992년 5월 육체의 쇠잔으로 다시 병상에 눕다.
1992년 12월 14일 새벽 1시 30분. 운명했다.


[1] 유고집 <나는 죽어서도 새가 되지 못한다.>에서 발췌.[2] 본래 태어날 때 부터 병약한 체질이어서 불과 10살 때 간염에 걸려서 혼수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3] 검궁인 인터뷰를 인용하자면, 당시 대기업 초임이 25-30만원이었는데, 첫출판한 무협소설 한질의 원고료가 66만원이었다고 한다.[4] 검궁인은 구무협 작가의 스타일을 비율하면서, 사마달을 구성주의라고 불렀는데, 그보다 더 한 구성주의가 서효원이라고 평했다.[5] 금강, 사마달, 서효원, 야설록[6] 다른 작가들은 그가 포기한 것으로 여기고 계속 포커를 쳤다고 한다.[7] 금강의 말에 의하면 이건 루머라고 하는데 좌백도 그의 책 '부부만담'에서 '포커를 치다 말고 원고를 쓰고와서 다시 포커를 쳐서 과거 전설이 된 작가'를 언급했다. 다만, 이쪽에서는 창작이 빠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집중력이 강하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창작을 해보면 백지에 글 한줄 적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이다. [8] 또 다른 유명한 워커홀릭은 검궁인이 있다. 이쪽도 서효원 못지 않게 빨리 작품을 썼다. 위 각주에서 언급된 인터뷰에서도 나오지만, 한달에 한질을 꾸준히 쓴 사람은 서효원과 검궁인 뿐이었다. 다만 활동기간이 짧기 때문에 검궁인의 경우는 80종 정도로 끝난다. 재미있는 것은 검궁인도 폐결핵에 시달리다가 병 치료 등을 위해서 무협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검궁인은 2010년대까지 쌩쌩하게 살아있다.[9] 유고집 <나는 죽어서도 새가 되지 못한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