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조명관계는 외교사를 일국사적 시각에서 볼 수 없는 상식에 더하여 상하 위계 관계가 뚜렷한 조공책봉관계를 전제로 하는 관계이다. 홍무제가 집권했던 31년은 공민왕 17년에서 조선 태조 7년까지를 포괄하므로, 조명관계는 이성계의 즉위부터 논하기 어렵다. 또한 한국 중세사 연구에 있어서도 최근 소장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를 지나치게 발전론적으로 해석한 과거 한국사학계의 성과를 비판하며, 조선 왕조의 개창보다 몽골 제국에게 복속된 것이 변혁이라고 평가한다. 이에 따라 명과 조선 사이의 관계의 의례 형성과 유지 또한 과거 원 간섭기에서 기원한 측면이 있다고 분석된다. 조명관계에서 조공책봉이 양국의 상하 위계 관계를 뚜렷하게 하는 매개로 작용하는 점도 역시 원 간섭기에서 기원한다고 봐야 한다.
2. 혼돈의 여말선초
1368년 12월 홍무제는 명의 개국과 몽골의 축출 사실을 고려와 안남에 각각 서한식 문서인 새서(璽書)와 조서의 형태로 통보하여 통교를 시도했다. 그러나 사실상 고려를 제외하고 외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던 몽골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권력 구조에 대한 트라우마 및 외국이라는 존재를 처음부터 전제한 명에 대한 메리트를 얻은 공민왕은 곧바로 원의 연호를 정지한 뒤 원대의 전례대로 안남과 함께 곧바로 봉표칭신의 예를 갖춘 표문을 올려 칭신하였으며, 1369년 6월에는 명에 하성절사와 하황태자천추절사, 하정사를 파견하면서 조하의주(朝賀儀註)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이듬해 5월 말 홍무제의 책봉을 받아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하였다.[1]황제가 상보사승(尙寶司丞) 설사(偰斯)를 파견하여 왕명을 내리니, 왕이 백관을 인솔하고 교외에서 영접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그대 고려국왕 왕전(王顓)은 대대로 조선(朝鮮)을 지켜왔으며, 선왕을 이은 좋은 후계자로서 정성을 다해 화하(華夏)를 따름으로써 동쪽 지역의 이름난 울타리가 되었다. 사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일찍이 사신을 보내 알리자 즉시 표문(表文)과 공물을 바쳐 충성스러움을 두루 알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평소 문풍(文風)을 익혀 신하로서의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온 결과일 것이다. 참으로 마땅히 가상하다고 할 만 하므로 이로써 포상해야 할 것이기에, 지금 사신을 파견하면서 도장[印]을 가지고 가게 하여 그대를 고려왕(高麗王)으로 그대로 책봉한다. 모든 의식(儀式)과 제도, 의복과 일용품은 본래의 풍속을 따르는 것을 허락한다."
《고려사》 권42 세가42 공민왕 19년 5월.
1372년 명의 카라코룸 함락 좌절과 몽골 군벌 나하추의 명의 요동 전초 기지 우가장 피습 이후 명은 고려와 북원의 내통을 의심하여 고려를 힐난하였고, 1374년 이후에는 탐라산 말과 화약 재료, 3년 1공을 요구하는 등 고려를 철저히 길들이고자 했다.[2] 이해 9월 고려 내의 정치 세력간 투쟁으로 공민왕이 시해당했고, 이인임은 주원장이 공민왕의 변고에 책임을 물을 것을 우려하여 명 사신 채빈 등이 돌아갈 때, 은밀히 김의(金義)를 시켜 채빈을 죽이고 임밀을 납치하여 북원으로 도망치게 함으로써 입을 막고 명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했다. #
공민왕의 친명반원 노선을 유지하는 것이 북원과 화친해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의견에 공감한 이인임은 다음 달인 12월 북원에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어 시왕의 죄(弑王之罪)를 용서받았으나 한편으로는 명에 시호와 승습(承襲)을 요청하려 했던 것과 달리 원에는 이것들을 요청하지 않음으로써 명과의 관계 개선을 연주했다. 이듬해 1월에는 정도전과 박상충의 주장에 따라 재차 명에 공민왕의 죽음을 고하고 시호와 승습을 요청하는 사신을, 두달 뒤에는 말을 공납하는 등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하나 홍무제의 무시로 관계가 사실상 단절되어버렸다.[3]
고려는 신흥유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원에 사신을 보내다가 일시적으로 북원의 책봉을 받고 연호를 채택하기도 했지만, 결국 명과의 책봉-조공 관계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책봉 문제에 집착하면서 홍무제의 일방적인 공물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1385년 4월 명이 조빙을 허락하고, 9월에 고려의 요청대로 공민왕의 사호와 우왕의 책봉이 이루어졌다.[4]
1388년 명이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알리자, 고려에서는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을 수 없다는 의견이 주축을 이루며, 사신을 보내어 외교적 타협을 시도하나, 이전부터 비밀리에 요동을 칠 의향을 내비친 최영은 사신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이성계의 강력한 사병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성계에게 명군과의 전쟁은 승산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쳤다.[5] 이성계 일파는 그들의 권력 기반의 핵심을 차지하는 명분을 몽골복속기 황제권을 일정부분 계승한 명 황제권에서 찾았으며, 창왕의 승습을 청하면서, 이색, 이방원, 강회백 등을 보내어 명의 감국과 창왕의 친조를 요청 등 급진적인 방식을 통해 답신을 거부하는 홍무제로부터 창왕의 승계를 조속히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홍무제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성계 일파는 결국 우, 창왕이 신씨라는 설을 창출하여 선위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러자 1389년 9월 명은 예부자문이 조선에 발송했는데, 홍무제는 여기서 공민왕을 시작으로 역신들이 왕을 교체하는 고려의 상황을 힐책했다.[6]
이성계 일파는 홍무제가 과거의 이인임, 조민수, 이성계 등 고려국왕위를 지속적으로 교체하는 역신들을 겨냥할 때, 우, 창왕의 신씨설을 거론한 것을 활용하여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면서 신씨의 폐가입진이 천자의 명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후에는 이 예부자문을 인용하여 이인임, 조민수, 이색, 왕안덕 등이 천자가 지칭한 대역의 주체이며, 이성계가 천자가 지칭한 충에 따라 왕씨를 지켰다는 '반정(反正)'의 정당성을 창출했다.[7]
이성계는 무력을 통해 대비의 권위를 활용하여, 권지국사에 등극하고 국새의 수수를 통해 공양왕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즉위한 이성계는 즉위 다음날인 1392년 7월 18일 조반을 명에 보내어 문하시중의 명의로 자신이 요동을 범하는 우왕을 의로써 돌이키고 권지군국사로 추대될 것을 원함을 알렸으며, 한달 뒤에는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명의로 표전을 자신의 지위를 재가해줄 것을 청했다. 홍무제는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지위를 인정하고 새로운 국호를 보고하라고 명하면서도, 고려가 “산으로 막히고 바다로 멀리 떨어져 궁벽진 곳의 동이”이기 때문에 ‘성교’는 스스로 할 것을 이야기하며[聲敎自由] 이성계를 국왕으로 책봉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하여 자신의 성교의 권위 훼손을 미연에 방지하고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고려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8]공민왕이 죽으매 그 아들이 있다고 칭하고 이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나, 나중에 와서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고, 또 왕요(王瑤, 공양왕)를 왕손(王孫)의 정파(正派)라 하여 세우기를 청하였다가 지금 또 제거해 버렸소. 두세 번 사람을 시켜 왔으나 대개는 자기 스스로 왕이 되기를 요구한 것이므로 나는 묻지 않았소. 자기 스스로 왕이 되어 스스로 할 것이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서로 통하여 왕래하게 하오.
새 왕조의 위정자들은 홍무제가 이성계에 대한 신뢰를 유보하고 있다는 점을 잘 파악하게 되었지만 왕조의 개창을 인정받았다는 것에 힘입어, 홍무제에게 이미 공민왕 때부터 수차례 언급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이라는 두 후보를 고하고 조선이 오직 기자의 후계자는 의미를 부각하였다. 이들은 홍무제와 이성계를 주 무왕과 기자의 관계로 연상케하여 사대적 자세를 극대화시켰으며, 홍무제는 새 왕조가 원한 대로 조선이라는 칭호로 최종 결정하였다.[9]
요동 일대의 여진인들에 대해 고려 동북면인이던 탈환불화는 명에 복속되기 전에 본래 자신이 관할하던 인구들이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명의 영향권 안으로 소환하려고 하고, 이성계는 자신의 카리스마가 작용하여 여전히 원 거주지에 남아있었던 여진 인구들을 조선의 관할이라 인식하여 머물러두고자 했다. 홍무제는 조선이 변장을 보내어 여진인 500여 인을 초유해서 몰래 압록강을 건너갔으며, 앞으로 요동을 범하고자 한다는 보고를 올라오자, 1393년 5월 신속히 황영기(黃永奇) 등 보내어 이른바 '생흔'과 '모만'의 문제를 일으켰다고 크게 힐책했다. 홍무제는 더나아가 사신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요동을 통과하는 것을 금했으며, 사신으로 가 있던 이염(李恬) 등은 박대는 물론 구타까지 당했다.
요동 일대의 가장 큰 이해당사자였던 이성계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포기하고 관련 인구를 추쇄하는 등 사대를 고수했으나, 돌아온 것은 3년에 한 번만 조회하라는 홍무제의 명령이었다. 홍무제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조선이 지속적으로 요동 변방의 흔단을 일으키고자 한다는 의심을 드러내며 조선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으며, 이성계의 친아들이 친조할 것을 명령했다. 조선 측은 황영기에게 이성계가 신하의 위치에 있음을 호소했으며 이방원이 이끄는 사행단은 비로소 요동을 통과하여 명을 방문할 수 있었다.[10]
과거 남경이었던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한양 종묘래 참배하여 정통성을 과시하던 이성계는 요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등 명에 대해 아부하면서 분위기를 환기시킨 끝에 1395년 11월, 홍무제에게 고명과 인신을 청하여 자신의 가장 큰 컴플렉스인 책봉을 해줄 것을 바라나, 요동의 재구획 문제와 조선 왕조와의 관계 설정을 용의주도하게 움직이던 홍무제는 사죄사가 모반의 글을 작성했다며 표문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할 것과 조선 정벌의 뜻을 내비쳐 이른바 표전 문제를 일으켰다. 이후에도 홍무제는 정도전의 죄를 더욱 무겁게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두번째 표전 문제를 일으켰으며, 조선에 대한 압박 수위를 계속 높여갔다.[11]
1396년 6월 홍무제는 정도전 등을 보낼 것을 강경하게 요구하는 한편, 조선 왕실과 사돈을 맺겠다는 황제의 의향을 전달했다. 홍무제는 혼사를 논의하여 요동, 표전 문제에 있어 조선의 양보를 받아내고자 한 것이다. 홍무제의 제의는 요동, 표전, 책봉 문제를 일거에 불식할 수 있었으며 이는 이성계에도 크나큰 메리트였다. 조선 측은 황제가 사돈을 맺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종묘에 고하고 주혼사를 보내는 등 진정성을 보였으나 조선 내부의 권력 구도에 있어서 핵심 인물인 정도전은 끝내 보낼 수 없었다.[12]중국 사신 상보사 승(尙寶司丞) 우우(牛牛)와 환자 왕예(王禮)·송패라(宋孛羅)·양 첩목아(楊帖木兒) 등이 왔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반송정(蟠松亭)까지 나가서 맞았다. 사신들이 경복궁 근정전에 이르러 선유(宣諭)한 성지(聖旨)를 전했는데, 말하기를, "너희가 보내 온 화자(火者)가 여기 궁궐 안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친가(親家)처럼 여기고 있으니, 우리한테서 가는 환관도 왕의 대궐 안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이나 보게 하여라. 그래야 후에 혼사를 맺기가 좋을 것이다."
1397년 4월 홍무제가 인친의 논의를 파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고, 이성계는 서둘러 심효생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책봉하여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한편 정도전은 이를 기회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으며, 6월에는 요동 정벌을 청하기에 이른다. 그는 12월 하순에 동북면 도선무찰리사로 임명되어 동북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1398년 윤5월 이후에는 군사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8월 말경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성계는 실각하고 정도전을 비롯한 핵심 인물들은 제거되었다. 한편 윤5월 10일 명에서는 홍무제가 붕어했으며, 8월부터 정난의 변이라는 내전이 발생했다. 이방원은 명의 내전에서 입지를 다지고 1403년 4월, 건문제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영락제로부터 이성계가 받아내지 못한 책봉을 받아 왕권을 공고히 했다.[13]
3. 안정화
요동 정벌을 추진한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는 모두 실각 및 제거됐으나 요동 일대에 대한 조선의 관심이 영원한 종언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태종은 자신의 재위 2년에 대규모의 민호를 이끌고 온 동녕위 천호 림팔라실리(林八剌失里)를 신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영락제가 명에서 도망한 군사들을 추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바로 림팔라실리를 요동으로 압송했으며, 13,000여 명의 만산군(漫散軍)도 대부분 명으로 송환하는 등 비교적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직접적인 마찰을 피해갔다. 공민왕 이래 첨예한 문제였던 공마 문제 명의 정세를 활용하여 탄력적으로 대응했다.[14]
과거 홍무제는 삼만위와 철령위 설치를 통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명의 변경으로 삼고자 했으나, 식량 수송, 군사주둔 곤란 등으로 요동도사에 그 한계가 머물렀다. 영락제는 흑룡강 하구에 군사를 파견하여 임시초무기구인 노아간도사를 설치하고 여진 세력들을 초무하는 수준을 넘어, 비록 부족 이름에 위소라는 명목을 더한 것에 불과하나 여진 제부를 위소 설치를 통해 종속시키고자 하였다. 명이 여진 세력에 대한 종속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북방에 대한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조선과의 마찰을 초래했다.
명나라는 자국의 지배권이 요동변장 바깥과 두만강 유역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 따라 10처 야인에 대한 조선의 종주권을 인정하였으나, 조선에 은탁해있던 여진 수장 맹가첩목아를 회유하여 조선과의 단절을 꾀하고 상당수의 여진인을 건주위에 소속시켰다. 태종 또한 1410년, 모련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 지역에 대한 조선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다만 정벌의 결과를 명에 알리면서 김문내와 갈다개가 명의 수직한 사실을 몰랐으며, 조선의 정벌은 외적에 대한 변경 장수의 대응이라고 해명했다.[15]
한편 태종은 후계구도의 정립 과정에서 태조 이래 골육상쟁이 지속되는 점을 보완하고자 세자 양녕대군의 조현(朝見)을 통해 명 황제의 보증을 받고자 하였다. 이는 황위를 찬탈하여 즉위하여 속국왕과 그 세자들을 정조(正朝)에 참석시킴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고자 하는 영락제의 정치적 의도와 맞아떨어졌으며, 이에 따라 양녕군이 영락제를 알현하고 그의 우대를 받으면서 조현이 성사되었다. 세자의 위상이 명 황제권에 의해 공인받으면서 대명 관계에서 태종과 양녕군의 입지가 강화됐다. 이 과정에서 양녕군의 외가가 명사에게 비전을 제시받아 양녕군을 명의 공주와 혼인시키고자 했으나 외척과 세자의 지나친 부상을 우려한 태종이 양녕의 외가를 일찍이 처벌했으며, 10여 년 뒤에는 결국 양녕대군까지 폐위하는 사태에 직면한다.[16]
홍무제 이래 조명관계는 명 황제의 의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상황은 선덕제 치세까지 계승됐으나, 태종의 탄력적인 외교 등을 이유로 정치적 마찰은 줄어갔다. 그러나 영락제는 재위 중반기인 1408년, 이성계와 이방원의 사리 400여 개와 전국의 사리 454개를 강제로 수집해갔으며, # 1409년에는 조선에 최초로 처녀를 요구하여 선덕연간까지 5번이나 공녀를 요구했다. 이때문에 조선에서는 몇달에 걸쳐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심지어 조선 국왕이 직접 처녀를 간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처녀 외에도 환관 양성을 위해 12살에서 18살 가량의 화자를 총 15차례에 걸쳐 200여 명을 명에 바쳐야 했다.
영락 중반부터 황제의 독단적 의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던 관계는 점점 조선 견제가 아니라 황제의 개인적 취향을 맞춰주는 풍토로 변해갔다. 때문에 조선은 명에 공녀와 화자 외에도 조선의 해산물, 두부 요리사, 가무를 배운 소녀, 매, 스라소니 등을 꾸준하게 바쳤다. 세종은 북진을 통해 4군6진을 설치하였는데 조선 측은 이때 명과의 외교적 갈등을 크게 우려하였으나, 말년의 선덕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에 두부 요리사를 보내달라고 요구했을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조정과 한양, 평안도 백성들은 이러한 명 황제들의 개인적 취향과 그 요구를 전달해주는 탐욕스러운 환관들 때문에 상당한 곤혹을 치뤄야 했다.[17]주문사(奏聞使) 원민생(元閔生)과 통사(通事) 박숙양(朴淑陽)이 먼저 와서 계하기를, "황제가 원민생에게 이르기를, ‘노왕(老王)은 지성으로 나를 섬기어 건어(乾魚)에 이르기까지 진헌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이제 소왕(小王)은 지성으로 나를 섬기지 아니하여, 전날에 노왕이 부리던 화자(火者)를 달라고 하였는데도 다른 내시를 구해서 보냈다. 짐은 늙었다. 입맛이 없으니 소어(蘇魚)와 붉은 새우젓과 문어 같은 것을 가져다 올리게 하라. 권비(權妃)가 살았을 적에는 진상하는 식품이 모두 마음에 들더니, 죽은 뒤로는 무릇 음식을 올린다든가 술을 양조한다든가 옷을 세탁하는 등의 일이 모두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니, 내관(內官) 해수(海壽)가 황제 옆에 서 있다가 민생에게 이르기를, ‘좋은 처녀 2명을 진헌하라.’ 하니, 황제가 흔연(欣然)하여 크게 웃으면서,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음식 만들고 술 빚는 데 능숙한 시비(侍婢) 5, 6인도 아울러 뽑아 오라.’ 하고, 민생에게 은 1정(丁)과 채단(綵段) 3필을 하사하였습니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날 화자(火者)에 대한 일은 내가 황제가 노할 것을 모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은 처녀를 얻고자 하여 한 말이냐."하고, 즉시 정부와 육조를 불러 함께 의논하고, 중외(中外)에 혼인하고 시집 보내는 것을 금지하고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하고 판돈녕 김구덕과 판한성 오승과 예조 판서 신상으로 제조를 삼았다.
《세종실록》 25권, 영락 22년 7월 8일 신사 1번째 기사
1435년 정통제(천순제)가 즉위했는데, 어린 황제의 무관심으로 조선은 더이상 황제의 입맛을 맞춰주기 위해 곤혹을 치룰 필요가 없어졌다. 때문에 사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의례적인 사신단만 종종 오갔다. 토목의 변에서 오이라트에 사로잡혔다가 1450년에 귀국하고 7년만에 극적으로 복위한 이후에는 조선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천순 연간(1457-1464) 동안에는 한동안 중단되었던 진헌사절들이 한엉과 북경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했다.[18]
4. 종계변무
아직 고려일 때, 반이성계파 윤이와 이초란 인물이 앙심을 품고 명나라에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라 보고해, 이 문제가 무려 '''100년''' 뒤 중종조에 터진 일이다.
당연히 조선에서는 영락제가 하교를 내려 고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1518년(조선 중종 13년, 명 정덕 13년) 명나라에서 주청사[19] 로 갔다왔던 남곤과 이계맹이 "걔들 그거 안 고쳤구요, 이번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이라는 기록서를 편찬한다는데 초본 보니까 거기 태조께서 홍무 8년(1375)에서 홍무 25년(1392) 사이에 고려의 네 왕(4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시해했다고 쓰여 있던데요?" 란 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20] 이에 중종과 대신들은 과거 태조가 올렸던 조본, 태종이 올렸던 조본과 영락제가 윤허했고 이에 사례한 표 등의 자료 등을 모아 다시 한 번 남곤을 주청사로 임명했다.
원래 명의 예부와 대신들은 "뭔 소리임? 니네들 말을 어떻게 믿어?"란 반응을 보였으나 조선에서 태종 문황제[21] 의 성지를 받은 사실까지 찾아서 오자 비로소 정덕제에게 주청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든 정덕제는 "선조의 오명을 씻으려는 조선 국왕의 성효[22] 가 가상하다"는 말과 함께 조훈을 좇아 조선 왕실 종계 문제의 개정을 윤허했다. '''하지만 종계 문제만 윤허 받은거지 4왕 문제는 상큼하게 씹혔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도 대책을 논의하게 되고, 우선 종계 문제를 윤허한 것에 대해 사은사를 보내고 사왕 문제는 시기를 봐서 다시 한 번 주청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23]
사실 남곤 입장에서는 짜증날만한 일인데, 조광조와 남곤 문서에도 있지만, 남곤과 조광조 일파 등이 가장 성격이 갈렸던 부분이 사장(詞章), 그러니까 글 쓰고 시 짓는 일에 대한 시각이다. 조광조는 그딴 것 별로 필요 없다고 했고, 남곤은 사장이 없으면 외교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명에 남곤이 파견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남곤은 당대 최고의 외교 실무 전문가였다. 그런 남곤이 일 처리 완벽하지 못하다고 외교와는 완전히 담을 쌓은 조광조 일파에서 태클이 들어오니 남곤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일로 기묘사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1529년(조선 중종 24년, 명 가정 8년) 대명회전의 재편수가 추진되면서 조선 조정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말로만 고치겠다는 약속을 받은 수준이었고, 재편수를 하면서 오류를 고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에 꾸준히 명에 사람을 보내 종계 개정을 확실히 하고자 했고, 명의 예부에서도 영락제와 정덕제의 성지[24] 를 근거로 사관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답변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수대명회전》[25] 의 편찬이 진행되고 있으면서도 조선 왕실의 종계 문제는 개정된다는 소식이 없어서 조선 조정은 똥줄이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냥 될 때까지 사신을 계속 보내!'는 생각으로 명종조에 이르기까지의 60년 동안 그야말로 틈만 나면 주청사를 보내게 된다.
1551년(조선 명종 6년, 명 가정 30년) 명종 임금이 직접 대신들에게 "얘네들 배째라로 나오니 안되겠다. 다시 한 번 주청해보자"란 전교를 내리면서 시작됐다. 다만 대신들은 아직 교정본이 간행되지 않았는데 괜히 주청사를 보내면 명의 신경을 긁을 수도 있으니 좀 기다려보자는 의견을 냈다. 문제는 이 교정본이 간행되지 않는 이유가 편수는 거의 다 끝냈는데 양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가정제가 아직 읽어보는 중이라 간행하라는 칙령이 안 내려와서'''(…). 게다가 조선에서는 명에 다녀오는 사람들을 통해 동향을 입수하려 했는데 좀처럼 명쾌한 정보가 나오지 않다보니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이로 인해 명종 임금 시절에는 "잘 수정되고 있는 듯하니 주청사는 보내지 않는게 좋겠다", "이미 늦었다. 바로 보내서 확인을 받았어야 됐다"로 조정이 갑론을박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이렇게 자꾸 보내다가는 보복으로 영락대전과 다른 기록에 이 일이 상세하게 실리는 것 아니냐면서 덜덜 떠는 모습까지 보였다. 결국 간보는 식으로 몇 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면서 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보려 했으나 결국 명종 임금도 종계가 개정되었다는 소식만 기다리다 승하했다.
선조 역시 종계변무의 해결에 적극적이었고 마침내 성과를 본 것도 선조 대였다. 명에서 온 사신을 접견할 때 이 문제를 거론했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주청사를 보내 보다 확실한 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1573년(조선 선조 6년, 명 만력 1년)에 이후백과 윤근수를 파견했을 때는 "뭐? 태종 문황제? 가정제 시절에 이미 성조로 추존되신 분인데, 태종?"과 같은 내용의 트집만 잔뜩 잡히고 돌아왔다. 개정 약조는 받아내긴 했지만 사왕 문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예부에서 쓴소리만 잔뜩 듣고 돌아왔으니 주청사들은 이를 보고하며 죽을 죄를 졌다면서 선조에게 사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선조도 "과인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불찰이다"라 한탄하며 쓴맛을 달래야만 했다.
이후 1575년(조선 선조 8년, 명 만력 3년])에 다시 한 번 주청사를 보내 중수대명회전, 속칭 《만력회전(萬曆會典)》에 종계 개정의 일이 수록됐다는 답변을 들었고 선조는 굉장히 기뻐했다. 하지만 문제는 ''''답변'을 들었다는 거지 진짜 해결이 됐는지는 확인이 안 됐다.''' 그 때문에 꾸준히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고 선조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려 하고 있었다.
9년 뒤, 1584년 선조는 주청사를 임명하면서 "이 모든 게 역관들이 밥값을 못한 탓이다. 너네들 이번에 꼭 성사시키고 돌아와야지 만약 실패하거든 돌아올 생각 하지마. 빈손으로 돌아오면 네놈들 목과 몸통을 분리시켜 줄 테다"란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로 인해 신하들이나 역관들 모두 아이고 맙소사 우린 이제 다 죽었어!란 반응을 보였고, 선조는 대제학 황정욱을 종계변무사, 홍성민을 부사로 임명하여 명나라로 떠나보냈다. 이미 여러 차례 명에게 기약없는 약조만 받고 돌아온 전례가 있었기에 대부분 이들이 죽으러 가는 거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역관 홍순언이 중수대명회전 조선 편을 필사해 가져온 내용에 따르니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라는 부분이 빠져있었다. 이 일행이 '''조선 왕실의 숙원이던 종계변무를 성사'''시키고 돌아온 것이다! 선조는 마침내 몇백년 묵은 골칫거리가 해결됐다는 것에 크게 기뻐하며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귀국한 19명의 사신들을 공신록에 올려 치하했고,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봉하여 큰 상을 내렸다.
5. 임진전쟁
1592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정복'을 내세워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에서는 명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명 조정과 만력제는 6월 초에 조선과 그 조정의 분위기를 정탐하는 한편, 일방적으로 소규모의 명군을 파병하기 시작했다. 7월 중순에, 평양에서 조승훈의 명군 5천이 일본군에 대패하자 조선과 명은 모두 충격에 휩싸였으며, 조선은 요동 장수들을 상대로 보다 적극적인 청병요청을 거듭하나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한달 뒤 만력제는 조선의 청병이 북경에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10만 대군의 파병을 결정하고 송응창을 경략으로 임명했다.[26]중국에서는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하였다. 혹은 압록강을 굳게 지켜 그 변동을 관망하자고 하고, 혹은 이적(夷狄)끼리 서로 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므로 중국이 구원할 필요가 없으니, 마땅히 압록강을 지키고 무력을 드러내서 위엄을 보이고자 하고, 혹은 외번(外藩)이 나라를 잃게 되었으니,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기도 하였다. 석성은 또 화약과 적을 막아낼 병기를 먼저 주자고 했는데, 과도관(科道官) 등이 상본(上本)하여, "병기와 화약을 외국에 주는 것을 금지한 것은 고황제의 법이니, 어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석성이 다투어 말하기를, 고황제가 이른바 외국이란 워낙 멀리 있는 기미(羈縻) 변방으로서, 그 나라의 성패가 중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일은 내복(內服)의 일과 같아서, 만약 왜가 조선에 버젓이 살면서 요동을 범하고 산해관에 이르게 된다면 경사(京師)가 진동할 것이니, 이는 곧 배와 가슴에 있는 근심과 같은데, 어찌 예사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고황제께서 오늘 날에 계신다 하더라도 의심없이 반드시 하사하실겁니다.라고 하였다. 時天朝論議不一。或謂堅守鴨綠江。以觀其變。或謂夷狄相攻。自是常事。中國不必救之。當守鴨綠江。耀武示威。而或謂外藩失國。在我不可不救。石星且請先賜火藥禦敵之具。科道官等上本。以軍器火藥。禁賜外國。高皇帝之法。不可違也。石星爭之曰。所謂外國。羈縻荒遠。其成敗不關於中國者也。朝鮮事同內服。如使倭窟居朝鮮。侵犯遼東。而及山海。則京師震動。此乃腹心之憂。豈可以常例論之。假高皇帝在今日。必賜無疑。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2.
그래서 조선의 청병 의사 없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견한 명은 선조의 지휘권 헌납 발언 이후 대규모 파병부터는 본격적으로 조선 장수나 대신들,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지휘하기 시작한다. 이여송의 경우 조선군에 대한 전권을 사실상 독점했으며, 평양성 전투에서 조선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자신에게 종군한 김경로(金敬老)를 조선 조정의 사형 판결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사형 대신 백의종군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여송의 명군 4만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자 송응창은 전투 대신 일본과의 강화를 시도하며, 행주 대첩에서 승전한 권율에 대해 일본군에 대한 살상을 금지하는 패문과 함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이여송의 의견에 공감하여 한양을 포기하고 남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고자 하는 조선 조정의 청(請)도 거절하고 힐책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송응창의 패문을 권율에게 전달하지 않는 등 불만을 표했으나 어디까지나 내부에서 그친 것이었다.[28]상이 이르기를, "한 나라의 존망이 대인들의 진퇴에 달렸으니, 지휘를 삼가 받겠소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군신(群臣)들이 어떤 사람은 명나라 병사가 전진하여 도원수와 합세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마땅히 저들의 분부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여 의논이 어지러우니, 곽몽징이 아뢰기를, "귀국의 군신(君臣)은 모여서 송사하는 것과 같으니 지극히 무례하오이다."라고 하니, 상이 손을 저어 금지시켰다.
무엇보다 이때 명군 지휘부는 육수군의 지휘권을 배타적으로 장악한 것을 넘어, 명 장수의 명령을 거역한 조선 장수 4명은 물론, 군량과 마초 보급 문제를 구실로 호조 참판 민여경(閔汝慶)을 비롯한 고위 신료들도 곤장을 때려 처벌할 정도로 조선의 주권을 심하게 침해했다. 게다가 명군 지휘부는 선조에게 군량과 마초의 운반을 직접 독려할 것을 촉구하며 한편으로 철군 의향을 흘림으로써, 조선 조정을 동요케 했다. 비변사는 선조에게 직접 남쪽으로 가서 명군의 노여움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는 “나에게만 재촉하지 말고 외부에서 잘 살피라”고 응수하는 등 전전긍긍했다.[28]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협상을 통해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하자 명 조정의 분위기는 조선의 자강 가능성을 점치고 그 군신이 스스로 나라를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명 측은 명과 일본의 강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강화에 대해 불만을 품은 조선의 군신을, 특히 선조를 힐난했다. 6월 만력제는 선조에게피난 조정의 귀환을 촉구하고 병력의 훈련과 군량의 비축을 통해 자강에 힘쓰도록 유시했다. 명군 지휘부의 정점에 있던 석성은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강남 등지의 증세로 대민피해가 야기되자, 자신의 정치 생명까지 걸고 강화를 맺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자 하였다. 송응창은 명군의 군량이 떨어졌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의 접반관인 윤근수의 구타를 기도하는 등 조선을 길들여 강화를 밀어붙이고자 했다.[28]접반사(接伴使) 판중추부사 윤근수가 치계하기를, …… 왜적이 나온 것은 왜적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너희 나라 군신들이 끌어들이는 짓을 했기 때문이지만, 성천자(聖天子)께서 그대로 불문에 부치고 오히려 당신의 나라가 200여 년 동안 사대해 온 성의를 아름답게 여겨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고 많은 자금을 허비하면서 우리의 문무 대신들을 명하여 만리나 되는 먼곳에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성천자이다. 나와 제독(提督)이 황상의 덕의(德意)를 몸받아서 왜적으로 하여금 위엄을 두려워 하고 은덕에 감복하게 하자 멀리 바닷가로 도망갔다. 인하여 왕(王)으로 봉하고 조공(朝貢)을 허락해주기를 청하면서 신하되기를 원했으니, 왜적이 모두 저희 소굴로 돌아갈 것을 시일을 정해놓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 뒤의 일에 대해 너희 나라가 마땅히 근심하고 염려해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 현명한 신하를 친근히 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배척함은 곧 오늘날의 시급한 일이다. 우리가 여기 있을 때에 분별해서 진퇴(進退)시킨다면 어찌 나라가 다스려 지지 않을 염려가 있겠는가. 국왕께서 스스로 거행하지 못한다면 내가 마땅히 처치 하겠다. '''천자의 명명(明命)을 받들었는데 무엇을 하지 못하겠는가. 국왕도 오히려 참주(參奏)할 수 있다. 그 이하의 배신(陪臣)들은 내가 사람을 차견하여 잡아다가 죄가 무거운 자는 참형(斬刑)하고 가벼운 자는 곤타(綑打) 하겠다.''' …… 라고 했습니다.
11월 명나라 병부에서는 선조와 조정을 비난하며 세자 광해군을 삼남으로 보내어 군무를 총괄케 하고 조선이 정신을 못차리면 철병 후 압록강 변경(Frontier)만 방어할 것을 상주했고, 만력제는 곧바로 선조가 "원대한 생각 없이 오락에 빠지고 소인에 현혹돼 백성을 돌보지 않아 전쟁을 초래했다"고 비난하며 광해군에게 삼남 군무를 총관케 할 것을 명령했다. 선조는 칙서에 분노하며 선위 카드를 또다시 꺼내들며 신료들이 왕명을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자결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세자마저 명 조정의 종주권에 직접적으로 휘둘리면서, 이미 금년 3월 이여송을 접견하면서 북경에 오배삼구두례를 행하고 장수들에게 질책당하여 40여 인의 무관들을 일일이 문안했던 선조의 왕권은 더더욱 추락했다. 조선에 대한 정치적 압박은 극에 이르렀다.
이듬해 5월, 송응창의 후임으로 임명된 고양겸(顧養謙)은 조선 조정에 조선도 일본의 봉공을 원한다는 요지의 상주를 만력제에게 올릴 것을 강요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7월 "왜이(倭夷)를 봉"해줄 것을 요청하는 상주문을 올렸으며, 1595년 2월 만력제는 이를 근거로 들어 히데요시를 책봉했다.[28] 명의 병부시랑 손광(孫鑛)은 이 무렵, 조선에 순무를 파견하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여 국왕은 그 나라 백성만을 다스리고 조세(租稅) 등 물자는 다 순무가 관장하며 배신(陪臣)은 다 행성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외에도 군량 보급 능력 마저 상실한 조선의 자강은 불가하다면서 직할통치를 주장하는 움직임도 제기되었다.[27]
하지만 히데요시가 만력제의 책봉에 반발하여 전쟁을 선포하면서 강화가 불발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2월 대학사 장위(張位)와 심일관(沈一貫)은 평양-개성에 관부와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한관(漢官)을 파견하고 압록강-한양-조령을 잇는 거점을 형성하여 동래와 쓰시마까지 도모할 것을 청했으며, 이를 접수한 손광은 조선을 힐난하면서 삼경에 순무를 두고 명 법으로 다스리면서 군사력, 농업력, 군자금 조달을 발전시키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선조는 명군이 둔전을 설치하는 것이 부득이한 조치라는 의견을 드러내나, 비변사 신료들은 몽골복속기의 전례를 상기하며 강력하게 반대했고 선조도 받아들여 명에 항의하자 결국 명은 이를 철회했다.
이렇게 조선은 사실상 속령으로 전락하는 길은 피했으나, 1597년 후반부터 1598년 초에 걸쳐 명군 지휘부는 자신들에게 편승하려 드는 조선에 대해 수많은 비난을 퍼붇고 조선의 현실에 대해 푸념했으며, 경리어사(經理御史) 양호는 양곡 운송을 맡은 윤승훈(尹承勳) 등의 사퇴에 격노하며 선조를 압박하여 인사권을 행사하고자 했으며, 자신이 윤승훈 등을 직접 국문하겠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28]
임진전쟁 과정에서 명이 조선 조정의 지휘권에 간섭 및 박탈을 감행하고, 명군이 극심한 민폐를 끼치면서 조선의 대민피해가 막심하고 나라의 근간이 흔들렸다고 불만도 제기되었다. 다만 명은 원군으로서 임진전쟁 기간 동안 조선에 최소 675,000여 석의 군량은 물론, 937,000여 냥의 은자를 지원하기도 하였고, 비록 명군 지휘부는 전쟁 기간 상당수를 협상에 몰두했으나 조선이 1593년 기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명군의 원병 덕택이었다. 또한 원말 이래 종주-속국의 관계를 유교의 예교문화로 설명하고자 하고 조선 왕조의 개창 이래 유교화가 더욱 진전됨에 따라 양자의 관계를 군부신자의 관계로 절대화했던 조선 조정은, 명에게 재조지은을 입었다고 인식했다. 조선 원병과 구휼의 주체인 만력제는 물론, 이여송, 양호 등을 위한 생사당이나 거사비를 세우는 등 그들을 철저하게 찬양했다.
6. 붕괴되는 명의 질서
1599년 3월 무렵 형개는 조선에게 건청궁과 곤녕궁을 중건을 요구하면서, 조선을 섬서 경왕(慶王)과 사천의 토사와 대등시하며, 조선도 외국을 자처할 것이 아니고 공역에 찬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월에는 의태감 고회가 유청(劉淸)을 보내어 인삼을 진헌할 것을 명령했고, 이미 잔류 명군에게 인삼을 무납하여 축이 난 조선 조정은 그 부담을 시전 상인들에게 전가하였으며, 시전 상인들은 철시라는 카드로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고회는 또한 1601년 7월 이후 부하들을 차관으로 파견하여 인삼, 화석 등 각종 방물들을 징색했으며, 더나아가 1602년에는 조선이 폐지하려고 했던 중강개시를 명 황제에 대한 근왕을 위해 존속시킬 것을 요구했다.군문 접반사 노직(盧稷)이 아뢰기를, "대 중군(戴中軍)이 【대연춘(戴延春). 】 오늘 아침에 신을 불러 말하기를 ‘노야(老爺)가 경보(京報)를 보고 이르기를 「섬서(陝西)의 경왕(慶王)은 건청궁(乾淸宮)과 곤령궁(坤寧宮)의 건조를 위하여 공역(工役)을 돕고, 양응룡(楊應龍)은 토관(土官)인데도 코끼리를 바치고 금을 바쳤다고 하니, '''조선도 외국으로 자처할 수는 없고 공역을 돕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하다.''' 」 하였다. 귀국이 전일에는 군량을 이어대느라 여가가 없었으나 이제는 이미 세상이 평온해졌으니 돕지 않을 수 없다.’ 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선조실록 110권, 만력 27년 3월 8일 3번째 기사
하지만 이후 개시를 관할하던 명 관리들은 조선의 지방관들을 부하처럼 무시하였고, 조선 상인들도 명 상인 등에 의해 농락당했다. 명에 대한 조선의 종속성이 심화되면서 명의 광세지폐가 변형된 형태로 조선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고천준 등을 비롯한 명 칙사들은 선조 말년부터 인조대까지 조선에 방문하면서 막대한 은을 징색까지 해가다보니 조선의 은은 고갈되어 갔으며, 은광개발론은 완전히 시들해졌다.[29]
임진왜란 이후 요동 군문과 일본이 강화와 조일관계 회복을 시도하면서, 1604년에 이르면 조선의 대일외교는 선행후보(先行後報) 방식으로 전환되고, 순무와 총병 휘하의 차관들이 들어와 남해안까지 가서 순시하던 것도 보고로 전환되기는 하였으나, 적정(賊情)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조선과 요동아문의 관계가 이어지면서조선에 미치는 명의 실질적인 영향력도 점차 강해졌다. 1612년 절강총병 양종업(楊宗業) 등이 조선과 일본이 결탁한다는 해상의 와언을 보고하면서 명은 요동 차관 황응양을 파견하여 조선의 대일외교에 간섭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왜정탐지에 대한 제반 준비와 황응양에 대한 성대한 환대, 두 차례에 걸친 변무를 통해 대응하여 대일외교서 명의 간섭 종언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이후 조선은 대일외교의 민감 사안까지 보고하면서 대일외교상 명을 배후로서 유지시키고자 했다.[30]
만주에서 누르하치의 세력이 흥기하자, 광해군은 교섭을 통해 난극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정 신료들과 달리 비록 속국관계와 그에 따른 사대관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누르하치와의 직접적인 대화에 중점을 두었다. 1614년, 만력제는 누르하치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요좌(遼左)의 번리인 예허(yehe)를 누르하치로부터 구원할 것을 명하며 예허에 명의 화기수(火器手) 1천여 명을 주둔시켰다. 이러한 만력제의 적극적인 태도에 요동아문의 분수도 백양수(白養粹)는 조선에 징병을 요청했다.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씨에 대한 추숭을 순조롭게 성사시키고자 한 광해군은 징병 가능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줘 의주에 1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1618년에 요동순무 이유한(李維翰)은 누르하치의 요좌 진출에 대항하여 조선에 원병을 지시했으며, 계료총독 왕가수는 수만 명의 병력을 징발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발송했다. 하지만 명에 대한 원병은 후금에 대한 적대로 이어지며 조선 서북 지방에 대한 후금의 침략을 부를 것이고 이는 명이 요동 변경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조선에 파병하면 선조 때처럼 주권이 침해당하고 왕권이 추락하거나 조선이 후금의 침입을 받아도 요동아문이 제대로 돕기 어려워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이때문에 비변사와 광해군은 칙서의 부재와 요동아문의 월권 등을 불편해하면서 조선군의 미약함, 명군의 변경 파견 요청 등을 명분으로 출병을 피하고자 했다. 조선의 바람과 달리 명군과의 군사적 공조가 현실화되자 광해군은 주본을 올린 이상 성지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놓는다. 그러나 경략 양호는 만력제의 칙서에 '고무조선(鼓舞朝鮮)'이라는 문구가 있었음을 내세우고, 재조지은의 논리로 출병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또한 조선 측의 자문에 대해서 관망의 태도가 있음을 힐책하고 예허의 적극적인 징발을 비교하면서 1만 명의 정병을 차출할 것을 명령했다. 조선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성지를 거론한 양호의 논리는 조선의 명분을 전부 무력화시켰다. 이에 광해군은 자신에게 직접적인 성지가 없었다는 논리를 내세우나, 비변사는 경략이 칙서를 받든 이상 군사적 공조는 더이상 요동아문의 월권 행사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광해군은 이에 수긍하면서도 칙서의 부재를 내세웠고, 비변사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으나 그의 의견을 반영했다. 광해군의 의지와 달리 요동아문의 분수도 염명태와 요동총병 이여백의 자문이 잇달아 들어와 공조를 다짐했으며, 또 회답의 재촉과 추가 병력 배치를 요구하는 양호의 자문도 접수되었다. 게다가 병력을 준비해놓고 칙서를 기다리겠다는 성절사 윤휘의 주본이 명 조정에 수신되자 만력제는 병부의 복제에 따라 광해군에게 직접 칙서를 내려 출병하게 하였다. 사르후 전투 패전 이후인 1621년 3월 명이 추가로 파병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광해군은 재차 이를 거절하였으며, 칙서가 없었기에 비변사도 왕명을 따랐다.[31]
한편 누르하치가 1619년 3월 21일, 천명(天命, abkai fulingga) 2년이라는 독자적 연호와 함께 후금국의 한(amaga aisin gurun-i han)과 천명금국한(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을 자칭하며, 자신을 조선국왕(solho han)과 대등하게 설정한 통교 요구 국서, 4월 4일, 칭한(稱汗)은 물론 명을 남조(南朝)라 지칭하는 서신을, 1621년 3월과 6월에는 각각 만주국 한을 자칭하며 광해군을 너(si)라고 지칭하거나, 만포진이 아닌 의주로 발송하는 조서를 보내온 것에 대해 조선 조정은 무례하다고 격노하며 회신은 절대 불가하다고 반발했지만, 광해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받은 것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대화를 강조했다. 그는 즉시 차관을 파견하여 회신을 우호적으로 할 것을 명하는 한편, 회신에 반대하는 비변사 당상들을 세상 물정도 모르는 선비라고 질책했다. 광해군의 독촉에 비변사는 마지못해 그에게 동의했으며, 마침내 누르하치를 '후금국 한 전하(殿下)' 지칭하고 후금과의 신의를 강조하는 답신을 보냈다.
또한 1622년 4월 명이 감군어사 양지원(梁之垣)을 파견하여 청병칙서를 전달했으나 광해군은 관외가 모두 누르하치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선박 지원 외에 군사의 파병은 불가하다고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비변사에서 노골적으로 광해군에게 반발하며 명 측과 합의 사항을 도출했으나 광해군은 인준을 거부하였다. 이에 양지원은 시간을 끄는 조선 조정의 행태를 힐난하며 담당 관리를 군율에 따라 처단하겠다는 언동을 일삼았다. 그해 10월 광해군이 신료들의 반발을 무릎쓰고 후금에게 국서를 회신하고, 11월에 이르면 마침내 모문룡 휘하 명군을 가도로 이주시켜 후금과의 긴장관계를 개선시켰다.[32]
일련의 사건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이 명을 은밀히 기만하던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명을 기피하는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며, 조선의 적극적 공조로 자리잡혀가던 명 질서의 균열 조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양반귀족 지지와 명 황제의 승인을 조선국왕의 정통성을 삼은 조선의 양반귀족층에게 군부(君父, 명)와 이적(夷狄, 후금)의 대치 속에서 신자(臣子, 조선)의 이러한 행태는 종주국 황제에 대한 속국 군주의 항명을 넘어 패륜으로 받아들여졌다. 광해군은 능양군과 서인에 의해 배명(背明) 행위 등을 했다는 이유로 폐위됐으며, 정변으로 성립된 인조 정권은 명 황제의 책봉을 받기 위해 매달리다시피 하는 것은 물론 모문륭 휘하 명군에게 물자를 쏟아 붇는 등 강한 친명반청 노선으로 회귀하였다. 이에 청은 반발하였고 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진다.[33]소성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는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 우리 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1619)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온 중국 사신을 구속 수금하는 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천계 3년 3월 14일 1번째 기사
7. 명청교체기
1637년 1월 28일에,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서 칭신 의사를 밝힌 인조에게 명과의 단교와 함께 명으로부터 받은 고명과 인신의 반납, 명의 연호를 청의 연호로 대체할 것을 명령했으며, 1월 30일 인조는 남염의를 입고 출성하여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를 행하고 잉굴다이로부터 청의 갑옷을 받아 입었다.명국(ming gurun)의 연호를 글에 쓰는 것을 멈추고 명국으로부터 명확히 단교하며 명국의 한(han)가 준 인신 책(doron ts'e)과 고명(誥命, g'aoming) 문서를 바치며 고두하러 오라.
《내국사원당》 1월 28일.
12월 초엽에 병자호란의 발발소식을 접한 명은 2월 중순 산해관 바깥의 병력 18,000여 명을 청을 견제하고, 3월 초에는 가도의 동강진으로 하여금 조선을 구원케 하였으나, 이는 사실상 뒷북에 불가하였기에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4월 초에는 도리어 조청연합군에게 가도를 함락당했다. 조선에 대한 명의 종주권이 완전히 불식되자 병부상서 양사창(楊嗣昌)은 전년에 북경에 방문하여 체류 중이던 김육 등을 조선까지 호송하여 현지를 정탐하고 "속국의 마음을 붙들"고자 하였다. 가도 함락 직후 장산도(長山島)로 도주한 진홍범(陳洪範)은 동강진의 위상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조선과 양사창의 반대로 흐지부지되었다. 양사창은 조선의 조공이 재개될 때까지 조선과의 접촉을 반대했으며, 이에 따라 진홍범의 구상은 물론, 차하르 및 조선과 연계하자는 의견은 모두 거부되었다.[34]
1638월 8월 전후, 청은 대명전쟁에 조선군을 파병할 것을 강요하였고, 조야에서는 파병 반대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인조의 부담감이 증대되었다. 8월 말 인조는 비변사로 하여금 명과의 연락을 모색하였다. 1639년 청은 재차 병력을 요구하였고, 인조와 비변사는 논의 끝에 4월경 평안도 중군 이순남 등을 밀사로 보내어 파병의 불가피함을 주장한 임경업의 서신을 전달했다. 조선의 밀사가 찾아오자, 병부상서 진신갑(陳新甲)은 조선의 청에 대한 물자 지원을 끊어 명청전쟁의 판도를 바꾸고자 했으나, 3차례 걸친 왕무위(王武緯)의 조선 출사(出使)가 조선 조정의 조명연합 의지 부재와 청의 감시로 무위로 돌아가면서 진신갑은 은 청과의 강화를 추진한 황제의 의향을 누설한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왕무위도 탄핵을 받아 실각했다. 계요총독 범지완(范志完)은 조선이 명을 따르나 청에 위세에 눌려 연락망만 구축하고 주사(舟師)는 치밀하고 장기적인 정책을 수립하여 행할 것을 청하는 소극론을 제시하여 숭정제의 윤허를 받아냈다.[35]
왕무위의 2차 출사부터 낌새를 알아챈 청은 송산전투로 붙잡힌 당시 실무자 홍승주 등의 증언을 받아내어, 조선에 항의하며 최명길, 임경업 등의 고위 신료, 관련 실무자, 잠상, 뱃사람들을 대거 잡아갔으며, 잠상과 뱃사람들을 모두 밀무역의 죄로 처형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은 더이상 밀무역 네트워크를 통한 명과의 접촉을 시도할 수 없었고, 명 또한 1644년 4월 붕괴하기 전까지, 1642년 10월에 이루어진 청의 6차 화북 약탈전과 농민 반란으로 인해 이 네트워크망이 붕괴되면서 더이상 접촉은 불가하였다.[36]
1644년 2월부터 조선은 심양과 북경 등을 통해 남경에서 홍광제가 즉위했다거나 융무제가 운남, 절강, 양광 등지에서 청과 충돌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후 1647년부터 1654년대까지 남중국과 일본 열도 간의 해상 교역 중 조선에 좌초된 한인 및 경계인들을 통해 융무제와 영력제의 반청 전쟁 소식들이 종종 입수되어 양반귀족층을 크게 고무시키며 효종의 북벌론의 정황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러나 1650년대 후반부터 영력제가 이끄는 명의 잔류 세력은 속속 청 측에 의해 소탕당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입수되었고, 청의 감시로 비록 지지부진 했지만 안민을 기본으로 한 군사력 확보의 구체적인 계획까지 거론한 북벌론은 효종이 1659년 5월 4일 죽어버리면서 꺾였다. 여기에 더하여 명의 잔당들의 횡포 또한 한인들의 저술을 통해 수입되면서 명의 부흥에 대한 회의감이 증가했다.[37]진주정사(陳奏正使) 정태화(鄭太和), 부사 허적(許積), 서장관 이동명(李東溟) 등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명나라 영력(永曆) 황제가 청나라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으며, 소운남(小雲南)에 달아나 생활하던 주씨(朱氏) 후손들이 모두 살해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명나라 말기부터 내려오는 소문을 살피건대, 영력은 바로 신종(神宗)의 손자이고 계왕(桂王)의 아들로 이름은 유랑(由榔)이다.037) 처음 형양왕(衡陽王)에 봉해졌는데, 난리를 피하여 오주(梧州)에 옮겨 살았다. 융무(隆武)가 【태조의 후예이다.】 사로잡히자, 광서 총독(廣西摠督) 정괴초(丁魁楚)와 광서 순무(廣西巡撫) 구식사(瞿式耜)가 맞이해 옹립하여 운남(雲南)에서 보위했는데, 그때가 무자년 여름이었다. 경인년 겨울에 청나라 군대가 운남에 들어오자 영력이 몇몇 신하들을 데리고 도망해 숨어 거처를 몰랐는데, 이때 와서 사로잡힌 것이다.
《현종개수실록》8권, 강희 원년 11월 20일 1번째 기사
1662년 4월, 마침내 소운남(따웅우 왕조)에서 영력제가 청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나, 현종은 황족 중 한 명이 잡힌 듯하다고 애써 자위하였고, 영의정 정태화 역시 과장될 수도 있는 소식을 어찌 쉽게 믿을 수 있겠냐고 역설했다. 그러나 청이 영력제의 생포와 교살 소식을 알리는 조서가 보내오자, 정태화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됐으며, 관련 소식을 조선에 전해왔다.[38] 이후 삼번의 난, 대준가르 전쟁, 대만의 동녕 등으로 대륙의 정세가 소란스럽자,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윤휴 일파 등에 의해 북벌론이 재차 부상했으나, 1683년 강희제가 친정에 나서 대만을 정복하고 해금령을 풀자, 이후 조선은 표류 한인을 통한 강남에 대한 정보 수집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남명에 대한 양반귀족층의 기대는 종언을 고했다.[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