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image]
선암사의 입구 격인 승선교(보물 400호)와 강선루. 뒷간과 더불어 절을 대표하는 구조물이다.
한자 : 仙巖寺 / 로마자 : Seonamsa
홈페이지
[clearfix]
1. 개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曹溪山) 동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현재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진입로는 경사도 완만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아름다운 운치있는 길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길을 더 좋아하는 방문객들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산속의 절들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선암사의 진입로는 다른 절에 비하면 적당한 편이다.
소설가 조정래의 아버지가 이 곳의 스님이었다.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에서 촬영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강수연이 출연한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와 전무송,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만다라의 촬영지가 선암사이다. 또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경순공주가 삭발하고 출가하는 장면도 선암사에서 촬영했다. 이 때 출연한 엑스트라들은 실제 선암사 승려들이며, 경순공주를 연기한 김나우는 이 연기를 위해 실제로 삭발했다. 김나우는 진짜 불교 신자이기도 했으며, 촬영 때 부모님도 찾아와 참관했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2. 역사
백제 성왕 5년(527)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처음 사찰을 창건하였고, 산 이름은 청량산(淸凉山), 사찰 이름은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신라 말 이창주인 도선국사가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지금까지 쓰이는 이름 선암사로 지었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으며, 지금도 이들 중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한다.
고려 중기 삼창주인 대각국사 의천이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대각국사는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였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당시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 소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김극기(1171-1197)는 시에서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이라고 묘사했다.
조선 전기 선암사가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중종 35년(1540)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만 남았을 뿐이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1597년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탁,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전한다. 현종 1년(1660) 경준(敬浚), 경잠(敬岑), 문정(文正) 등 세 승려가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크게 중창했지만 전쟁 이전의 사세를 복구하기에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한 이는 호암약휴(護巖若休) 스님이었다. 호암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워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 이후 법당 8채, 전사(殿舍) 12차, 중료(中寮) 16채, 산암 13채를 갖추고 선적암(善積菴), 도선암(道詵菴) 등을 부속암자로 두었다. 그러나 영조 35년(1759) 봄에 선암사는 또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상월새봉(霜月璽封) 스님과 서악(西岳) 스님이 이듬해(1760) 재건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 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상월새봉 스님은 중창불사뿐만 아니라 1734~35년에 두 차례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한다. 그리고 상월스님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년(1789)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 스님이 대각암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이 태어났다. 이후 왕위에 오른 순조 임금은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이라고 쓴 편액[2] 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하였다.
순조 22년(1798)에는 승중문음(僧中文音)으로 유명한 해붕전령(海鵬展翎)이 칠전(七殿)을 중창하였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붕(海鵬), 눌암(訥庵), 익종(益宗) 스님 등이 6번째 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 구조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景雲元奇)-금봉기림(錦峯基林) 등 4대 명강백을 배출하였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본발사법으로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 여수, 광주 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건물 100여 동이 있었으나 여순사건 당시 40여 동이 불에 타서 사라졌다. 그나마 65동이 남아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꽤 많이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만 남았다. 선암사 일원은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고, 2018년 6월 30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 특징
- 전국의 절들 중 가장 특이할 것으로 보이는 해우소(뒷간)가 있다. 간판을 우횡서(오른쪽에서 왼쪽을 읽어가는 방식)로 써서 'ㅅ간뒤'로 쓰여져 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이용을 꺼렸는지 근처에 현대식 화장실을 새로 만들었다.
- 화재로 절을 날려먹은 적이 많이 생겨서 그런지 이곳저곳에 자그마한 연못들이 많다.
- 경내 여기저기에 꽃나무가 꽤나 많이 보인다.
4. 교통
자가용의 경우 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순천시 시내버스의 경우 순천역 및 순천종합버스터미널을 경유하는 순천 버스 1에 탑승하여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5. 사건사고
5.1. 소유권 분쟁
태고종 본산이지만 조계종에서 재산의 소유권을 가졌다. 심지어 관리 권한은 순천시청에 있는 등 관리주체가 꼬여 하단의 불상 실종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순천시청이 권리를 반납하면서 태고종과 조계종의 법정다툼이 벌어졌는데, 태고종 선암사가 조계종 선암사에 재산권을 반환하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참고로 조계종 선암사는 명목상으로는 20교구 본사라고 했지만 재산관리 목적으로 존재하는 유령사찰로, 이름만 있을 뿐 소속 승려나 신도는 없다.
결국 1심에서 "태고종은 대처승을 대표하는 종단이고, 선암사는 예전부터 대처승들이 관리해 왔으니 태고종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하는 판결이 나왔다. 조계종은 판사가 불교에 대해 이해를 못한다며 반발하여 항소하였다. 2심에서는 "40년간 태고종이 관리하고, 이후 조계종에 반납한다."라고 화해 권고를 했으나, 양쪽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였으므로 거절하였다.
현재에도 사찰의 직접적인 운영은 태고종이, 문화재구역 입장료 징수는 태고종과 조계종이 공동으로 하는 이원적인 상황이 지속 중이다.[3][4]
5.2. 관음상 사건
선암사에는 조선시대에 제작한 관음보살상이 있는데, 관리주체가 꼬인 탓에 문화재 등록도 되지 않은 채였다. 그러다가 보살상이 1995년에 모조품으로 뒤바뀌는 사건이 벌어졌다. 시간이 흘러 보살상이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당시 주지에게 알리자, 그는 도난을 염려해서 모조상을 만들어두고 진품은 비밀리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심지어 모조상 제작비용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서울의 신자가 자금을 대줬다는 말을 하거나, 거액의 헌금을 받을 수 있는 개금작업[5] 을 신도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하는 등 수상한 정황들이 계속 나왔다. 결국 주지는 이 일로 물러나고 말았다.
결국 1997년 원본 보살상이 돌아왔지만 1992년 제작한 선암사 도록에 수록된 사진과 다르다는 의견이 계속 나왔다. 이런 의혹 때문에 2004년 해당 목상의 시료를 채취해 탄소연대측정법으로 나무의 연대를 측정해보니 16세기 전후라고 나왔다. 이 때문에 보살상이 진품이라고 결론 나오는 듯하였지만 반대론자들은 그 시기의 나무를 구해다가 조각하면 되는 일이라며 반발하였다.
결국 공개적으로 복장유물을 확인해 보자고 말이 나왔고, 사람들을 불러서 복장유물[6] 을 꺼냈는데... 연대를 알 수 없는 불경과 '''플라스틱 손거울'''이 나왔다... 당연히 난리가 났고, 물러났던 주지가 다시 불려왔는데, 개금작업을 할 때 복장을 열어봤고, 자기가 추가로 거울을 넣어 놨다고 주장했다.
2013년 11월 방송된 그것이 알고싶다 918회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여기에출연한, 수십 년 전에 해당 불상을 개금해봤던 개금장이 해당 불상이 자기가 기억하는 선암사 관음불상이 맞다고 증언했다. 워낙 완벽한 불상이라 일반적으로 안 보이는 부분들의 특징을 기억하고 있는데, 해당 불상은 자기가 개금했던 것이 맞다고 증언하였다. 불상에 옻칠이 아니라 '카슈'[7] 가 사용된 부분에 대해서는 가격 차이가 워낙 많이 나다보니 개금할 때 카슈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8]
다른 문화재 전문가들도 가짜라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눈에 안 보이는 부분, 예를 들어 복장을 파내는 부분은 손으로 깎으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기계를 사용하는데, 이 불상은 안 보이는 부분까지 전부 손으로 깎았고 기계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깎인 흔적들이 전부 오래되어서 근래에 만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전 사진과 부처님이 어디가 몇 cm 정도 위치가 다르고 이런 건 그냥 사진상의 문제라고. 한 불상조각가는 목조상 특성상 정교한 복제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재시도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석조상과는 달리 나무의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줄어들거나 뒤틀리는 것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불과 팔 위치 몇 cm 차이까지 따라하는 정교한 복제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단언했다. 심지어 몇백 년 전 나무를 재시도를 수차례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용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이 정도로 정성을 들여 복제품을 만들려면 소비되는 시간과 비용이 어마어마하므로 결국 진품이 맞다는 결론.
물론 복장유물에 대해선 개금장이나 문화재 전문가 등이 개금을 하면서 복장을 열어보는 일은 없다고 하고 있고, 불상의 품질대비 복장의 내용이 너무 부실하여 복장유물 도난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6. 기타
- 절 앞쪽에 있는 석재 무지개다리인 승선교가 매우 유명한데, 많이들 보이는 사진인 다리 사이의 전각 사진을 찍으려면 앞쪽에 있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 계곡으로 내려가야 한다. 2014학년도 수능 국어 에서 승선교에 대해 다룬 지문이 있다.
- 송광사와는 조계산 등산로로 이어져 있다.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사람과 신들에게 모두 큰 복이 되는 곳이라는 뜻이다.[3] 조계종 선암사는 명목상으로만 남아 입장료 징수 및 순천지역 사찰의 행정을 관리하는 교구본사로 순천 지역 행사시 대표단을 파견하는 정도로만 활동한다.[4] 이러한 사정으로 태고종에서 관리하는 사찰이지만 매표소에 조계종 신도증을 제시하면 입장료가 면제된다.(...)[5] 목불상에 옻칠과 도금을 새로 하는 것을 말한다.[6]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안에 넣는 물건으로, 보통 사리나 불경 등을 넣지만 그 밖에 가치 있는 보물이 들어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안동 광흥사에 있던 불상에선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왔다.[7] 캐슈넛을 수확하는 캐슈나무로 만든 옻칠의 대용품.[8] 카슈는 1킬로에 만 원 정도, 옻칠은 1킬로에 100만원 정도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