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공산당대회
Съезд КПСС
Congress of the CPSU
소련 공산당대회
[image]
공산당대회가 개회되던 크렘린 국가궁전(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 내부. 1961년의 22차 당대회부터 이 곳에서 개회되었다. 이 건물은 매우 현대적인 건축 양식으로 크렘린의 다른 고전적 궁전들과는 이질감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1][2]
간단하게는 소련 공산당의 전당대회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최고기관이자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의 진정한 '''권력의 핵심'''이다. 소련 최고회의나 최고법원, 장관회의와는 달리 헌법기관은 아니지만 '''소련 공산당 규약'''에서 공산당의 최고 기관임을 명시하고 있으며, 실제로 '''당의 노선(국가운영방침)을 정하고''', '''중앙위원회 의원을 선출'''한다는 점 때문에 헌법상의 국가권력의 최고기관 소련 최고회의, 공산당 규약상 당권의 최고기관 소련 공산당대회는 '''소련의 2부'''에 해당한다. 실제로도 공산당대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인물이 최고회의 의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련은 1989년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가 창설되기 이전까지 '''당권이 바로 국권이자 정권'''이었고, 공산당원이 아니라면 국가권력에 다가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헌법에 명기된 헌법기관보다는 당내 권력이 더 중요한 것이 당연하며 공산당대회의 지도자는 초기에는 행정수반인 수상 레닌이 명목상으로[3] , 후에 가서는 '''서기장'''이 맡게 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공산당 내의 권력체계 때문인데, 소련은 크고 아름다운 나라라서 공산당원도 많아서 그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통제할 지도부가 필요했다. 그래서 '''공산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선출''' → '''당중앙에서 정치국원 선출''' → '''정치국원 중에서 서기국 구성 및 서기장 선출'''의 트리를 타서 최종적으로 한 정점으로 몰리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스탈린 시대 이후의 일로, 레닌 시절에는 서기장이 당수가 아니었다. 이는 현재 한국 정당에서의 직책도 마찬가지인데, 당수는 '''총재'''(總裁)이고 서기장(Генеральный секретарь)[4] 은 단어 그대로 '''사무총장'''에 해당한다. 그러나 의원의 공천을 관리하는 등 사무업무를 전담하는 사무총장직은 한국의 정당 내에서도 매우 주요직책으로 꼽히는 자리인데, 스탈린이 혼란기에 이 자리에서 권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탈린 시대 이후에는 '''서기장이 곧 당수'''이다. 엄밀히 따지면 서기장이라는 직책은 한국 기준으로 당 총재 + 원내대표 + 대표최고위원 + 사무총장 + 공천관리위원장 정도 되는 위치. 브레즈네프 이후에는 '''국회의장이 추가'''된다. [5]
현대중국의 경우, 소련과 이런 시스템이 마찬가지라서 최고회의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全国人民代表大会)의 국가주석'보다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실제적 권력이다. 이는 '''조선로동당이 곧 국가'''인 북한도 마찬가지이다.[6] 보통 소련의 경우에는 1977년 헌법개정 이후에는 국가원수직(최고회의 의장), 당수직(서기장)을 겸임하였다. 사실 소련 최고회의 의원들도 다 공산당원이었므로 이 쪽이 정통성 면으로 보나 권력서열로 보나 오히려 무난하다.
실제로도 소련이 건재할 당시 구미에서는 최고회의의 결과보단 오히려 소련 공산당대회의 결과에 더 집중했다.
정식명칭은 소련 공산당대회(Съезд КПСС)이지만, 이 명칭은 1952년 '소련 공산당(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으로 당명이 바뀐 이후의 명칭이다. 소련 공산당은 시기별로 많은 당명 개칭을 겪었고, 그에 따라서 당대회의 명칭도 계속 변화했으나 그 형식은 전부 동일하다. 당대회는 1898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열린 1차 당대회부터 1990년 6월 2일 부터 13일까지 열린 28회 당대회까지 총 28회 개회되었다. 초기 러시아 제국 시절에 공산당 활동은 불법이었고,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망명중이었기 때문에 브뤼셀, 런던, 스톡홀름 같은 서유럽 도시를 오가며 개회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한 이후에는 러시아로 돌아와 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혁명이 완수된 1918년부터 최후까지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개회되었다.
초기에 레닌 시절 당대회가 거의 매년 소집되었는데 그만큼 '''정세가 불안정했다는''' 반증이다. 또한 1907년 5차 당대회부터 1917년 6차 당대회까지는 10년이라는 텀이 있는데, 이 때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분열, 제1차 세계대전, 국제공산당 (인터내셔널), 유럽의 공산주의자 탄압 등으로 소집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며 레닌 자신도 이 당시에는 '''망명 다니느라고''' 바빴다. 그러나 2월 혁명 이후에는 매년 정상적으로 개회되었다.
당대회는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면서 개회 빈도는 점차 줄어들다가, 스탈린이 절대권력을 차지한 이후에는 '''아예 열리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이유도 있으나 본질적인 이유는 1937년 '''대숙청을 감행한 후에는 공산당대회 없이도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가 없었다. 이 영향으로 1939년 18차 당대회 이후부터 '''17년 동안''' 당대회가 열리지 않다가 1952년이 되어서야 19차 당대회가 개회되었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기 초반에도 혼란 속에 약간 비규칙적으로 개회되던 당대회는 1961년 이후 소련의 정세가 안정권에 든 이후에는 1991년이 아니라 1990년에 개회된 마지막 28차 당대회만 빼고 정상적으로 5년에 한번 개회되었다. 당 중앙위원회 의원의 임기도 5년이다.
소련 공산당대회는 소련 최고회의의 상무회(Президиум)와 마찬가지로, 평시 상무를 전담할 실제적 권력을 지닌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КПСС)' 위원을 선출하며, 이 중앙위원회에서 대부분의 당조직이 관리된다. 실제로 권력은 바로 이 '''당 중앙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으며, 보통 국어로는 '''당중앙'''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서기장 문서 참조.
Congress of the CPSU
소련 공산당대회
[image]
공산당대회가 개회되던 크렘린 국가궁전(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 내부. 1961년의 22차 당대회부터 이 곳에서 개회되었다. 이 건물은 매우 현대적인 건축 양식으로 크렘린의 다른 고전적 궁전들과는 이질감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1][2]
1. 개요
간단하게는 소련 공산당의 전당대회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최고기관이자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의 진정한 '''권력의 핵심'''이다. 소련 최고회의나 최고법원, 장관회의와는 달리 헌법기관은 아니지만 '''소련 공산당 규약'''에서 공산당의 최고 기관임을 명시하고 있으며, 실제로 '''당의 노선(국가운영방침)을 정하고''', '''중앙위원회 의원을 선출'''한다는 점 때문에 헌법상의 국가권력의 최고기관 소련 최고회의, 공산당 규약상 당권의 최고기관 소련 공산당대회는 '''소련의 2부'''에 해당한다. 실제로도 공산당대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인물이 최고회의 의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련은 1989년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가 창설되기 이전까지 '''당권이 바로 국권이자 정권'''이었고, 공산당원이 아니라면 국가권력에 다가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헌법에 명기된 헌법기관보다는 당내 권력이 더 중요한 것이 당연하며 공산당대회의 지도자는 초기에는 행정수반인 수상 레닌이 명목상으로[3] , 후에 가서는 '''서기장'''이 맡게 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공산당 내의 권력체계 때문인데, 소련은 크고 아름다운 나라라서 공산당원도 많아서 그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통제할 지도부가 필요했다. 그래서 '''공산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선출''' → '''당중앙에서 정치국원 선출''' → '''정치국원 중에서 서기국 구성 및 서기장 선출'''의 트리를 타서 최종적으로 한 정점으로 몰리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스탈린 시대 이후의 일로, 레닌 시절에는 서기장이 당수가 아니었다. 이는 현재 한국 정당에서의 직책도 마찬가지인데, 당수는 '''총재'''(總裁)이고 서기장(Генеральный секретарь)[4] 은 단어 그대로 '''사무총장'''에 해당한다. 그러나 의원의 공천을 관리하는 등 사무업무를 전담하는 사무총장직은 한국의 정당 내에서도 매우 주요직책으로 꼽히는 자리인데, 스탈린이 혼란기에 이 자리에서 권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탈린 시대 이후에는 '''서기장이 곧 당수'''이다. 엄밀히 따지면 서기장이라는 직책은 한국 기준으로 당 총재 + 원내대표 + 대표최고위원 + 사무총장 + 공천관리위원장 정도 되는 위치. 브레즈네프 이후에는 '''국회의장이 추가'''된다. [5]
현대중국의 경우, 소련과 이런 시스템이 마찬가지라서 최고회의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全国人民代表大会)의 국가주석'보다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실제적 권력이다. 이는 '''조선로동당이 곧 국가'''인 북한도 마찬가지이다.[6] 보통 소련의 경우에는 1977년 헌법개정 이후에는 국가원수직(최고회의 의장), 당수직(서기장)을 겸임하였다. 사실 소련 최고회의 의원들도 다 공산당원이었므로 이 쪽이 정통성 면으로 보나 권력서열로 보나 오히려 무난하다.
실제로도 소련이 건재할 당시 구미에서는 최고회의의 결과보단 오히려 소련 공산당대회의 결과에 더 집중했다.
정식명칭은 소련 공산당대회(Съезд КПСС)이지만, 이 명칭은 1952년 '소련 공산당(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으로 당명이 바뀐 이후의 명칭이다. 소련 공산당은 시기별로 많은 당명 개칭을 겪었고, 그에 따라서 당대회의 명칭도 계속 변화했으나 그 형식은 전부 동일하다. 당대회는 1898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열린 1차 당대회부터 1990년 6월 2일 부터 13일까지 열린 28회 당대회까지 총 28회 개회되었다. 초기 러시아 제국 시절에 공산당 활동은 불법이었고,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망명중이었기 때문에 브뤼셀, 런던, 스톡홀름 같은 서유럽 도시를 오가며 개회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한 이후에는 러시아로 돌아와 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혁명이 완수된 1918년부터 최후까지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개회되었다.
초기에 레닌 시절 당대회가 거의 매년 소집되었는데 그만큼 '''정세가 불안정했다는''' 반증이다. 또한 1907년 5차 당대회부터 1917년 6차 당대회까지는 10년이라는 텀이 있는데, 이 때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분열, 제1차 세계대전, 국제공산당 (인터내셔널), 유럽의 공산주의자 탄압 등으로 소집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며 레닌 자신도 이 당시에는 '''망명 다니느라고''' 바빴다. 그러나 2월 혁명 이후에는 매년 정상적으로 개회되었다.
당대회는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면서 개회 빈도는 점차 줄어들다가, 스탈린이 절대권력을 차지한 이후에는 '''아예 열리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이유도 있으나 본질적인 이유는 1937년 '''대숙청을 감행한 후에는 공산당대회 없이도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가 없었다. 이 영향으로 1939년 18차 당대회 이후부터 '''17년 동안''' 당대회가 열리지 않다가 1952년이 되어서야 19차 당대회가 개회되었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기 초반에도 혼란 속에 약간 비규칙적으로 개회되던 당대회는 1961년 이후 소련의 정세가 안정권에 든 이후에는 1991년이 아니라 1990년에 개회된 마지막 28차 당대회만 빼고 정상적으로 5년에 한번 개회되었다. 당 중앙위원회 의원의 임기도 5년이다.
2. 구조
소련 공산당대회는 소련 최고회의의 상무회(Президиум)와 마찬가지로, 평시 상무를 전담할 실제적 권력을 지닌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КПСС)' 위원을 선출하며, 이 중앙위원회에서 대부분의 당조직이 관리된다. 실제로 권력은 바로 이 '''당 중앙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으며, 보통 국어로는 '''당중앙'''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2.1.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2.2.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Политбюро)
2.3.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Секретариат)
3. 역대 공산당대회
4. 역대 공산당 서기장
서기장 문서 참조.
5. 관련 문서
[1] 그러나 넓고 잘 지은 것은 사실이라서 지금도 대규모 공연장, 혹 극장이나 러시아 연방의 전당대회 장소로도 계속 사용된다.[2]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광장 근처에 있는 중국인민대회당과 비슷하다.[3] 실제로 규정된 당수직은 없었다.[4] 엄밀히는 '''총서기'''가 맞다. 러시아어에서 서기장이라는 단어는 없다. 서기장 항목 참고.[5] 서기장 항목에서도 설명되어 있으나, 사실 러시아어 'Генеральный секретарь'를 서기장으로 번역하는 것은 국어의 어휘론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오역이라 볼 수 있다. '''사무총장'''이 가장 확실한 번역이지만 이사장, 총재로 번역되어도 틀린 것이 아니다.[6] 현재 중국과 북한은 시스템이 소련과는 약간 틀어져서 실제로는 각각 군사력을 좌지우지하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방위원장이 실질적 최고지도자로 보아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