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신비신학

 


라틴어 : Theologia Mystica, Theologia Ascetica
영어 : Mystical Theology, Ascetical Theology
한자 : 神秘神學, 修德神學
한국어 : 신비신학, 수덕신학

1. 개요


신학의 분야. 성덕을 닦는 것에 대한 신학이다.
현대에서는 깊이 있게 들어가면 신학적 미학, 영성신학, 수덕신학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서 종말이 오기 전에도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구원을 받았기에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수덕신비신학은 이 주장에 근거하여 발전한 신학으로, 처음에는 사막교부들의 1인 수도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안토니오 아빠스가 수도운동의 대표자라고 여겨진다. 그 이후로 조직적인 수도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안토니오가 그랬듯 처음에는 산에서 모임을 가졌다가 점차 내륙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되면서 수많은 교부들과 교모들이 나타났으며 그들의 가르침들과 사상들이 수도원 사이에 대물림이 된다.
조직적인 공동체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사상가들도 나타났는데 그레고리오 팔라마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등이 선구자라고 불리운다. 이들의 사상이 궁금하다면 <사막교부들의 금언집>과 <아토스 산의 성인들> 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본래 수덕신비신학은 동방정교회에서부터 발전한 것으로 넓게는 사막교부들과 성 오리게네스, 닛사의 그레고리오의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좁게는 아토스산의 수도원 운동에서 출발한다.

가톨릭에 수덕신비신학이 전해진 것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제자 성 요한 카시아누스가 <영성신학 강요>를 저술하고 그의 제자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에게 전수하여 베네딕토가 이후 베네딕토회를 설립한 것으로 시작한다.
수덕신비신학에 관심이 있다면 동방정교회의 영성신학을 알아야 하므로 관련 책들[1]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2. 사상적 발전


* 이 항목은 서강대학교 교수 김산춘의 <감각과 초월>, 논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 사상-에펙타시스와 에클레시아-" 을 토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신학자로 오리게네스와 닛사의 성 그레고리우스가 있다.
오리게네스는 에페소서 4장 17-24절[2]을 토대로 사막교부들에 의해 처음 논의되어 전해져오던 "영적 감각"론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새 피조물이라 부름받은 새 육신을 입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보고(시각), 듣고(청각), 냄새를 맡고(후각), 맛을 보며(미각), 피부로 느끼는( 촉각) 오감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려고 노력하며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존재, 즉 신화(新化)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특히 구약의 「아가」해석을 통해 영혼과 초월적인 신성과의 만남을 신랑을 그리워하며 찾아가는 신부의 모습, 사랑의 화살로 중상을 입은 신부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다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탈자적 사랑의 지향을 의미하는 ‘에펙타시스’의 개념인데, 이는 신 인식이 정적인 그리스적 본질인식이 아니라, 역동적인 히브리 그리스도교적 청종(聽從) 즉 타자 관계적 인식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에펙타시스는 신비가들의 하느님과의 순간적 합일일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으로서 끊임없는 전진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하느님은 무한하시므로 전진 또한 무한한 것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에펙타시스의 모범은 다름 아닌 모세의 생애였다. 마지막으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에펙타시스라고 하는 초월에로 열린 역동성은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다(多)이면서도 전체로서는 일(一)인 영적인 공동체의 형태로 이 유한한 세계에 구체화하며 생기한다. 즉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사상에서, 초월ㆍ개인ㆍ자기의 에펙타시스는 그 날줄이, 내재ㆍ보편ㆍ타자의 에클레시아는 그 씨줄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연상시킨다. 산의 정상에 그대로 머물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세상으로 내려가길 권하는 것이다. 이 ‘세계와 타자에로의 귀환’이야말로 구체적 역사적 인간 안에서의 ‘존재의 현성(現成)’인바, 이로써 인간의 참다운 자기 성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의 주장들은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우스만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이전의 사막교부들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특히 사막교부들은 육체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는 삶을 당장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성 안토니오의 생애>만 읽더라도 당시 사막교부들이 악과 정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도운동의 정신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서 거대한 신학으로 형성되었고 비잔틴 신학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는 이것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서방 가톨릭에서 영성신학으로 불릴 만한 것은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치오의 수도원이 그나마 켈트 신앙과 결합된 영성신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라틴지역은 동방교회에서 수입된 영성신학이 주이며, 성 베네딕토 또한 동방교회의 영성을 연구한 교부 존 카시안의 제자였기에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3. 신비신학 (Theologia Mystica)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의 영혼과 하느님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숨은 교류 현상을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부문.
이 개념은 중세 가톨릭에 자리잡은 것으로, 4세기에 마르첼루스 안치라누스에 의해서 사용되어, 5~6세기의 위 디오니시오 문서에서는 이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가리켰다.
후에 실천적 신비신학과 사변적 신비신학으로 나뉘어 지고, 15세기의 제르송의 저작에서는 이 구별이 확실히 나타났다.
실천적 신비신학의 근거는 신약성경예수의 삶의 방식에 이미 나타나며, 바오로의 서간 중에 전개되고 있다. 3번 항목 참고.
중세를 통해서 실천적 신비신학이 항상 교의신학에 생명을 주었던 것은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자의 깊은 기도와 신비체험이 수반된 사실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중세 말기에는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에서 신비가가 배출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신비신학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예수회 개혁의 시대를 통해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여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의신학과 실천적 신비신학은 분리되는데 후자의 근대의 본격적인 창설자로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십자가의 요한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신비신학은 의화된 영혼 중에서의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과 현현의 최고도의 단계를 취급하는 분야로 생각되며, 관상기도, 성령의 끊임없는 은총, 그에 따른 초자연적인 신비적 현상 등이 연구된다. 그러나 신비적 상태와 그 작용에 관해서는 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완벽히 신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는데, 대개는 수덕의 3단계인 정화·조명·일치를 거쳐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른다고 본다.
20세기의 사제이자 신학자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은 그의 책 '''<주님의 영광>''' 에서 신비신학의 궁극적인 토대가 되는 역사적 접근로로서 12가지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리옹의 이레네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테스, 켄터베리의 안셀모, 보나벤투라, 단테, 십자가의 요한, 블레즈 파스칼, 하만, 솔로비에프, 홉킨스, 페귀이다.

4. 수덕신학 (Theologia Ascetica)


수덕의 이론과 그 실천방안 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
영성신학이라고도 한다. 17∼18세기에 신학의 각 분과가 독립될 때 분류되었다. 이 학문의 주 목표는 완덕, 즉 자유의지에 의한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하는 수단으로서의 개개인의 구체적·능동적인 행위를 분석하는 데 있다.
실천적이기는 하나 원리적인 고찰에만 그치는 윤리신학과, 구체적이기는 하나 하느님의 작용에 완전히 수동적으로 응하는 신비적 일치를 도모하는 신비신학과의 중간에 위치한다.
윤리신학은 하느님의 법을 연구하고 행위의 선악 가치를 판단하는 신학이며, 신비신학은 위에 나와있듯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려는 신학이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자기 극복의 훈련부터 시작하여, 기도, 성사생활 등으로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여 자기 구원으로 전진하는 중간 단계가 수덕학이며, 성인학, 영성학, 완덕학이라고도 한다.
수덕신학은 그리스도교적 수덕의 실행을 최초의 단계에서 능동적인 관상생활의 문턱까지 논리적으로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래서 수덕신학은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덕을 쌓아 거룩한 경지에 도달하는 수덕을 연구하는 영성신학의 학문 분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수덕신학은 다른 신학과 마찬가지로 성서와 성전(Sancta Traditio)을 학문 원칙으로 한다.
에스파냐 출신의 D.알바레스와 A.로드리게스가 대표적인 수덕신학자이다.

5. 성서적 근거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복음서 1장 14절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 제 1장 1-3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둘째 서간 제 1장 3-4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코린토 1서 13장 12절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코린토 2서 3장 18절

[1] 사실 필로칼리아만 읽어도 충분하긴 하다[2]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감각이 없어진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탐욕스럽게 해 댑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