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1. 개요
前 소련 방공군 장교이며, 최종 계급은 중령. 1983년 당시 우발적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려 '''인류가 단숨에 석기시대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최악의 사태를 막아냈다'''.
2. '''전 인류를 구해낸 위대한 판단'''
1939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인 예브그라프는 그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바 있다. 그는 키예프의 소련 공군의 기술학교를 졸업한 후 1972년에 소련 공군 장교로 임관한다.
1983년, 당시 세계는 당장 핵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비판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9월 1일에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이 자신의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미 공군의 전략 정찰기로 의심하여 벌어진 사고였다. 또한 NATO는 1983년 11월 2일부터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을 골자로 하는 '에이블 아처 83(Able Archer 83)'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는데 대규모 군사 훈련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 대규모 핵공격을 기습적으로 가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소련 정부는 생각했고, 소련은 그럴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며 맞대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듬해 2월에 사망한 소련의 최고 지도자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당시부터 지병으로 오늘내일하고 있었기에 언제라도 지휘 체계에 공백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라 소련 지도부의 신경은 더 날카로웠다.
그리고 1983년 9월 26일 0시, 소련의 세르푸호프-15 위성 관제센터[1] 에서 느닷없는 비상경보가 울렸다. US-K 오코 대탄도탄 조기경보 인공위성으로부터 "미국이 ICBM 1발을 소련으로 발사했다"는 경보가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발사한 ICBM의 숫자는 5발로 늘어났고, 관제센터는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소련의 모든 핵미사일 사일로와 이동식 발사대에 경보가 걸렸고, 당시 관제센터의 당직사령이었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권한을 졸지에 떠안게 되었다. 당시 크렘린과의 통신라인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지구 최후의 날 기계가 아직 그에게 발사 권한까지는 주지 않았지만, 그가 스스로 판단한 끝에 발사 명령을 내리거나 서기장에게 지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그가 적국의 핵미사일 발사 여부를 감시하는 최신식 탐지용 인공위성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해 보면, 반격에 관한 상세한 고찰을 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겨우 몇 분밖에 주어지지 않는 핵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상부는 전적으로 그의 판단을 믿었을 가능성이 컸다. 한마디로 전 인류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경보는 울리고 있었고, 그의 눈앞에서는 핵전쟁 개시 버튼이 깜박거렸다. 그러나 그는 '만약 미국이 정말로 핵전쟁을 시작한다면 모든 ICBM을 함께 발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컴퓨터가 잡아낸 것은 5개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것은 분명 컴퓨터의 오류이거나 탐지용 인공위성의 판단오류일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핵전쟁 취소코드를 입력한 다음,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몇 시간 동안 긴장감에 감싸인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핵미사일 발사 경보는 '''인공위성이 햇빛을 ICBM의 발사 섬광으로 잘못 인식해서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컴퓨터의 오류인 듯하다."'''
사실 그가 내린 판단은 정말로 도박성이 짙은 것이었다. 일단 미사일 하나가 탐지된 상황에서, 소련 관제센터는 미사일 하나가 날아온다고 해서 핵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경보가 오류인지 정말인지 알아보기 위해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일이 다섯으로 늘어났고, 지상에 설치된 레이더는 지평선 너머까지 탐지할 수 없으니 미사일이 더 탐지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거기에 몇 개의 미사일만 감지되었다고 하더라도, 미사일 몇 발을 발사하면 나타나는 EMP 효과가 소련 측의 통신망 및 레이더망을 마비시키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소위 '블랙아웃' 작전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페트로프는 핵미사일 탐지 시스템이 불안정하다는 문제가 이미 몇 차례 제기된 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만약 핵미사일이 실제로 발사돼서 중앙과의 교신이 두절된다고 해도 알아서 전쟁을 수행하는 기계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컴퓨터의 오류로 보고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발적인 핵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으니 영웅으로 칭송받아 마땅했을 것 같지만, 오히려 페트로프는 사건 직후에 한직으로 내쫓겼다. 핵무기 시스템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곧 국가 존망과 직관된 문제였기 때문에, 관련사건과 인물을 1급 기밀로 지정하고 숨기기 위함이었다. 즉, 전 인류를 위해 자신의 지위를 바치게 된 셈이다.
3. 그 후
제대 후 모스크바 근방에서 군인 연금을 받으며 조용히 살고 있던 그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사건으로부터 15년이나 지난 후인 1998년이었다.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1급 기밀로 취급받던 사건이 1998년에 기밀해제되어 공개적으로 드러나면서 전 세계는 그를 칭송하고 감사했으며, 세계 시민상과 유엔의 표창장, 2012년에는 드레스덴 상[2] 이 수여되었다.
2004년에 모스크바 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1983년에 자신이 한 일이 영웅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나의 일이었고,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는 심경을 담담하게 밝혔다. 세계를 구한 업적을 세우고도 그것을 자랑하기는커녕 오히려 겸손함을 보인 그야말로 참된 영웅의 자세.
2017년 5월 19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을 영웅시하지 않았던 생전의 행적처럼 조용히 가족들 곁에서 세상을 떠난 탓에 4개월 뒤에야 그의 죽음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경향신문의 기사
4. 기타
-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2015 EBS 국제다큐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작품명은 세상을 구한 남자(The Man who Saved the World)로, 분류상 다큐멘터리지만 83년 통제실의 상황을 재연하여 이야기의 한 축으로 구성, 당시의 상황을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었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43회에서 '최후의 말'이라는 코너에서 다뤘다. 프리한 19 196회 '다시 있어선 안 될 이땅의 전쟁 19'에서도 1위로 다뤄졌다.
- 외국에서는 페트로프 대신 다른 장교가 그 날의 당직사령으로 근무한 탓에 1983년 9월 26일에 전면 핵전쟁이 일어난다는 설정의 대체역사물 프로젝트가 위키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일 베티사드의 멤버도 다수 참여했는데, 한반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직접 가서 보고 싶다면 다음 링크를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