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영어: Korean Air Lines Flight 007, KAL007, KE007 shootdown
일본어: 大韓航空機撃墜事件 (だいかんこうくうきげきついじけん)
러시아어: Катастрофа Boeing 747 над Сахалином
(Рейс 007 Korean Air Lines)
'''항공사고 요약도'''
'''발생일'''
1983년 9월 1일
'''유형'''
조종사 과실
민항기 격추
'''발생 위치'''
소련 사할린, 모네론섬 부근[1]
'''기종'''
Boeing 747-230B[2]
'''운영사'''
대한항공
'''기체 등록번호'''
HL7442[3]
'''출발지'''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경유지'''
앵커리지 국제공항
'''도착지'''
김포 국제공항
<color=#373a3c> '''탑승인원'''
승객: 246명
승무원: 23명
<color=#373a3c> '''사망자'''
승객과 승무원 '''269명 전원 사망'''
[image]
1982년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고기[4]
1. 개요
2. 영공 침범 원인
3. 영향
3.1.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진 사례
4. 관련 자료
5. 의문점 및 음모론
6. 기타
7. 관련 문서
7.1. 유사 사건[5]
7.2. 그 외
7.3. 외부 링크


1. 개요




당시 대한뉴스에서 특보로 내보인 뉴스.
참사 이틀 후인 1983년 9월 3일자 뉴스이다.
사고기의 CVR(Cockpit Voice Recorder). HF라서 잡음이 많다.[6][7]
1983년 9월 1일,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알래스카 앵커리지 국제공항을 거쳐 김포국제공항으로 비행하던[8] 대한항공 007편(기종 747-230B, 기체 등록번호 HL7442)이 사할린 근처 모네론 섬 부근 상공에서 소련 방공군Su-15TM 요격기에 격추당해 추락한 사건이다.
[image]
당시 소련 측에서 회수한 유류품들
대한항공 007편에는 총 246명의 승객과 23명의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이 중에는 '''미국 하원 의원인 로렌스 맥도널드가 탑승하고 있었다.'''[9]
비무장 민항기가 전투기에 요격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자 전세계가 경악했으며[10], 이 사건으로 미국과 소련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역시 소련 정부에 항의하였다. 다만 외교 채널이 없어서[11] 직접 항의하지 못하고 미국을 통해 항의했으며, 사건 다음날 9월 2일 전두환 대통령은 칼기 피격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소련은 사과하고 모든 책임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매일경제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이 계속되고, 미국이 증거를 제시하자 소련은 사건 발생 5일 만에 KAL기 격추를 인정했다. 소련은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을 침범한 KAL기가 떠나지 않아 적기로 오인했다고 주장했다.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시킨 Su-15의 조종사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오시포비치(Геннадий Николаевич Осипович: 1944년 9월 25일 ~ 2015년 9월 23일#) 방공군 대령은 007기가 민항기인 줄 몰랐으며, 창문 사이로 어떠한 인적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기체에 대한항공 마크가 없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1996년에 민항기임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미국 측은 KE007편이 소련에 의해 격추되었다는 것을 소련군 교신을 감청하여 알고 있었음에도 처음에 침묵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감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함이었는데, 결국 소련이 계속 격추 사실을 부인하자 감청된 녹음을 공개하였다. 소련 측은 이를 통해 자국의 군사 통신망이 미국에 의해 감청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사건이 일단락된 후 군 교신용 주파수를 모조리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미국은 감청을 통한 소련군의 정보수집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홋카이도에 있는 일본 항공자위대 왓카나이 감청기지에서 역시도 소련 전투기와 지상 관제사 간의 대화를 듣고 있었으며, 후에 일본 측이 자료를 자세히 제시해 준 덕분에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 후 대한항공은 사고기의 편명인 007편을 영구결번했다. 대한항공의 뉴욕행 노선에서 007편이라는 편명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후속편명은 KE025/026편을 거쳐 1990년대 후반부터는 KE081/082로 변경되었다. 한편 뉴욕노선의 또 다른 편명도 이 사건 때문에 007대신 KE027/028을 사용했다가 KE081/082편으로 변경된 시기에 바뀐 편명이 KE085/086이다.
007편을 격추한 전투기 조종사인 오시포비치와의 인터뷰 내용 중에 '민항기인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는데 아무 죄책감도 없었나?'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런데 오시포비치는 당시 007편 꼬리날개에서 민항기 항법 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찰기인 줄 알고 과감하게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에선 일반 여객기에 여러가지 장비들을 달아 군용 정찰기로 써먹기도 하고, 또 정찰기들을 민항기로 위장시키는 페이크를 자꾸 쳐온 터라 격추 당시에는 민항기인 걸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나마나 또 민항기로 위장한 미군 정찰기겠지'라는 생각에 과감하게 발사 버튼을 눌렀다고 한다. 때마침 소련 정보부로부터 '해당 지역에 미군 정찰기들이 자꾸 싸돌아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했으니 그 지역 방공부대들은 제대로 정신줄 잡고, 걸리는 놈들은 전부 격추시켜버려.'라고 지시를 받은 터라 확신을 가지고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한다. 후에 사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본인이 격추시킨 비행기가 알고 보니 민항기로 위장한 군용기가 아니라 진짜 민항기였음이 밝혀지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007편 격추과정에는 불운한 우연도 겹쳤다. 오시포비치의 전투기가 00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던데다가 오시포비치의 전투기에 때마침 예광탄이 없던 관계로 007편에서는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KAL007: Korean Air 007 climb and maintain FL350 leaving FL330 at this time.
도쿄관제소: Tokyo Control Roger.
007편: FL330에서 FL350으로 상승한뒤 유지하겠습니다. 대한항공 007편.
도쿄관제소: 도쿄컨트롤, 알겠습니다.
위 무전을 007편과 도쿄관제소가 나눴을 때 오시포비치의 전투기는 007편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런데 이 때 도쿄와 무전을 마친 007편이 '''고도를 3만 5천 피트로 올리기 시작했다.'''[12] 이 때 속도가 조금 떨어졌기 때문에 오시포비치의 전투기는 007편을 지나쳐 날아갔다. 이렇게 경고사격 이후에 고도를 올린 것은 경고사격을 알아차리고 반응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Su-15TM의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는 007편이 자신을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적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고도를 높이며 속도를 줄이는 것이 공격적 행동이 되는 이유는, 첫번째로 대다수의 전투기의 무장은 전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뒤에 있는 비행기가 항상 유리하다. 속도를 빠르게 줄이면 바로 날아가던 순위가 뒤바뀌어서 앞에 있던 비행기가 뒤로 오는 식으로 바뀌게 되고 공군 조종사 입장에서는 따인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두번째로 전투기가 그렇게 느려진 속도에 맞춰서 같은 거리를 두고 추적하려고 하면 전투기는 민항기에 비해 익면이 크지가 않고 날개도 기동성을 위해 동체에 비해 극단적으로 내려와 있어서 느리게 날기가 힘들다. 작은 날개로 양력을 생성하니 느리게 날수록 민항기보다 훨씬 추락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즉 전투기의 추락을 의도한 지능적 행동일 뿐만 아니라 전투기의 비행특성까지 인지한 군의 전문가가 조종하고 있는 비행기이지 민항기일 리가 없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다만 그런 우연이 없었다고 해도 007편이 오시포비치의 전투기를 무시('''실제로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지만''')하고 도주를 계속하는 이상 격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 방공망의 대응이 그다지 신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시포비치의 전투기가 007편과 조우한 것은 이미 007편이 소련군 기지 주변을 지나서 공해로 빠져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격추시키지 않으면 눈 뜨고 그대로 놓치는 수밖에 없는데다가 시간적 여유도 없던 것이다. 당시 미국 정찰기(707 계열)들이 영공을 침범했다 말았다 하면서 약올리는 바람[13]에 소련 방공군이 독이 오를대로 올라 잔뜩 벼르고 있던 것도 한 몫 했다.
5년 전 일어난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과 너무 유사해서 음모론이 힘을 얻었고 지금도 외국어 위키백과에서는 902편 격추 사건 때문에 대한항공이 미국의 비밀 작전에 동원되었고 소련은 낚인 것 아니냐는 음모론성 서술이 있다.
007편의 속도가 줄어들며 오버슛을 하게되자 명백하게 자신을 따돌리려고 한다고 생각한 오시포비치는 다시 007편의 주위를 빙 돌아 007편의 8km 뒤편으로 날아가 R-60 두발을 발사했다. 이중 한발은 명중하지 못하고 다른곳으로 날아갔고 다른 한발이 기체 후방부 에서 근접폭발했다. 007편은 R-60에 피격된 이후 동체가 손상되어 급격한 감압이 일어낫고, 최소 1개 이상의 유압장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14] 이후 007편은 10여분간 날다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ICAO최종조사 보고서에서는 승객들이 추락 직전까지 살아있었을 거라 추정했다. 오시포 비치는 모네론 섬 근처에서 007편이 나선선회를 하며 추락하는 것을 보고 기지로 복귀했다.
한편 007편과 무전이 되지 않자 015편과 도쿄관제소는 다급하게 007편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심지어 도쿄 관제소는 사할린에 있는 소련의 민간 항공관제소에도 연락을 했지만 007편이 마지막으로 보고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후 소련이 격추사실을 시인하고 부랴부랴 미 해군해안경비대, 해상자위대 그리고 민간 트롤어선까지 동원해 공해상에서 구조와 수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또한 소련은 구조대가 소련 영해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기에 유력 추락 지점인 모네론 섬 근해는 수색하지도 못했다. 이후 훗카이도 근해에서 일부 유류품과 13명분의 시신일부분을 찾았다. 한편 007편이 추락한 직후 소련은 모네론 섬 근해를 수색했다. 원래는 RC-135의 잔해와 블랙박스, 컴퓨터 등을 인양하러 간 것이지만, 자신들이 격추한 것이 민간인들이 탑승한 민간 항공사보잉 747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안 뒤 경악했다. 이때 007편의 잔해와 블랙박스 그리고 유류품이 수거되었다. 1983년 9월 26일, 소련은 유류품 213점을 전달했다. 블랙박스와 잔해들은 냉전이 끝날 때까지 극비리에 관리되었고 냉전 종식 당시까지 소련은 007편의 블랙박스의 존재를 부인했다.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나 1988 서울 올림픽에 소련이 참가를 결정하고 소련의 올림픽 참여로 한소관계가 크게 개선되자 노태우 정부는 한소 수교를 추진하며 더 이상 007편 격추 사건을 문제삼지 않기로 결정하였다.[15] 그래도 1990년 한소 수교 당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비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하였고, 1991년 한 차례의 추가 수색을 해 007편의 잔해와 유류품 일부분을 수색했다. 소련 해체 이후 1992년에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고 국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접 블랙박스와 유류품을 반환하였다.

2. 영공 침범 원인


1991년 소련 해체 후 비로소 대한항공 007편의 블랙박스대한민국으로 전달되었다.[16] 이후 블랙박스는 ICAO에 제출됐고 남은 유품은 유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ICAO는 사건이 외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만큼 최대한 공정성과 중립을 지키기 위해 NTSB를 비롯한 미국의 수사당국, 러시아의 AIC 그리고 피해자인 한국의 KAIB까지 배제한 뒤 007편의 블랙박스를 제3국인 프랑스의 항공당국인 BEA에 제출하여 분석했고 그 결과를 기본으로 하여 ICAO직권으로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17] 007편의 블랙박스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현재와 같은 디지털 메모리가 아닌 오디오 테이프로 녹음되었는데, 오디오 테이프에 소련이 테이프를 덧대 놓아 블랙박스를 조작한게 아니냐는 의심을 했지만 추락시 충격으로 인해 파손되어 그냥 복구한 것이었고 조작은 없었다. 최종 보고서는 블랙박스 기록에 의거하여 조종사가 이륙 후부터 격추시까지 나침방위[18] 모드에서 INS 관성항법유도로 변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만, 어째서 조종사들이 나침 방위각 모드를 INS로 변경하지 않았는지는 추정만 내놨을 뿐 알아내지 못하였다.[19] 때문에 본 본 문서뿐만 아니라 ICAO가 내놓은 최종조사 보고서도 조종사들이 항법모드를 나침방위모드에서 INS항법으로 전환하지 않은 이유는 추정으로만 남겨졌다.
NGC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 관련 내용이 다루어진 적이 있는데 해당 방송에서는 소련이 격추라는 극단적인 대응을 한 이유를 당시 미국 정찰기가 근처 공역에서 활동중이었고 이를 오인한 것이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실제로 다큐멘터리에는 미국이 사건후 007편의 비행항로가 담긴 극비 첩보자료를 조사단에 제공했다고 나온다.
007편을 조종했던 천병인(1938년 7월 17일 생) 기장은 엘리트 중에서도 초엘리트 조종사였다. 관련 기사 대한민국 공군 조종 간부후보생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했고, 관련 기사 졸업하자 마자 공군 조종소위 계급으로 곡예 비행단인 블루세이버 팀원이 되었고[20], 관련 기사, 사진 자료 공군 예편 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대통령 전용기 기장까지 했다.[21] 관련 기사
이러한 대한민국 최고의 조종사가 수없이 다닌 항로를 어이없이 이탈하였고 이탈 사실도 몰랐다? 사실 오류 없는 정확한 관성유도항법으로 가면 항로이탈은 있을 수가 없다. 천병인 기장이 왜 관성유도항법으로 가지 않고 칠흑같은 북태평양 밤하늘을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하듯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조종했는지는 부활하지 않는 이상 영구적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조종사들은 이륙 전에 관성유도항법을 위해 좌표를 입력한다. 실수로 잘못 입력하게 되면 회항해야 하는데, 착륙전에 반드시 정해진 구역에서 착륙허용중량에 맞게 많은 양의 연료를 버려야 하며 착륙 후에는 정지된 상태에서 재입력하고 다시 연료를 급유하고 이륙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항공사 입장에서는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드물게 있었다고 한다. 어떤 조종사는 입력을 잘못했는데 회항하지 않고 그냥 수동으로 나침반만 보고 조종한 적도 있다고 하며 이에 따른 규정 위반으로 징계를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첫번째 추측으로는 좌표 입력의 실수가 있었고 원칙대로 회항을 하게 되면 징계가 두렵고, 대통령 전용기장 심사에서 탈락할 수도 있고, 대한민국 최고의 파일럿이 이런 실수를 한 걸 감추고 싶은 심리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관련 내용 또한 수도 없이 다녔던 항로이기 때문에 쿠릴열도, 캄차카 반도, 쉐미아섬과 같은 랜드마크를 이용한 수동비행으로도 충분히 자신있었던 걸로 추측된다.
또 다른 두번째 가설로는 좌표입력 후 녹색불(관성유도항법 준비완료)이 들어오기 전에 움직이거나 스위치를 '비행'으로 돌리면 입력된 좌표는 지워지는데 다시 재입력하면 이륙이 20분 정도 지연되고 도착하면 기장은 지연 사유서를 써야 하는데, 이 또한 상술된 이유로 지연을 피해서 수동비행을 강행했을 수도 있다. 007편이 이륙후 좌표의 잘못된 입력으로 인한 급격한 방향전환 등과 같은 이상징후가 발견되지 않은 걸로 봐서 두번째 가설이 좀 더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15분 뒤 같은 항로를 뒤따르던 천병인 기장의 공군 선배인 015편 박용만 기장은 007편과의 교신에서도 뭔가 감추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고 증언했다. 관련 내용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추측일 뿐이며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관성유도항법으로 가지 않고 나침반만 보고 수동비행한 것은 확실하다'''.
그외에도 박용만 기장은 천병인 기장이 수동비행중 소련 섬(코만도르스키예 제도)을 미국 섬(쉐미아섬 및 부근 섬들)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다고 아래와 같이 증언을 하였다.

......중략....

007은 앵커리지 관제센터에 나비(NABIE)를 통과했다는 보고를 하면서 다음 보고점인 니바(NEEVA)의 통과예상 시간을 한국시간 새벽 0시 49분으로 통보했다가 9분 뒤 0시 53분으로 4분 수정, 통보했다. 그러나 007이 나중에 보고한 니바 통과시각은 0시 58분으로 다시 5분이나 늦어졌다. 이 보고를 듣고 놀란 박용만 기장은 부기장을 시켜 늦은 까닭을 물어보게 했던 것이다. "그때 007의 손부기장이 응답을 머뭇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 있다가 바람이 세다는 답이 나왔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손부기장이 천기장에게 뭐라고 대답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던 게 아닌가 추측되거든요." 약 10분뒤 박기장은 천기장을 직접 호출, "왜 늦었느냐"고 물었고, 천기장은 "바람이 많이 분다"고 답했다. "천기장의 대답은 짧고 급하게 끝났습니다. 무엇인가 숨기고 싶고 당황해하는 듯했습니다."

그런 대화가 오가던 바로 그 즈음 소련령 코만돌스키예 섬의 방공 레이다는 처음으로 007을 포착했다. 007의 위치는 R20항로상의 니바가 아니라 니바에서 북쪽으로 약 350km나 떨어진 소련 비행식별구역 안의 베링해 상공이었다. 이탈해도 너무나 벗어난 거리였다. 부산상공을 지나간다면서 실제로는 서울 위를 날고 있는 격이었다. 박용만씨는 말한다. "니바(NEEVA)는 이 항로에서 가장 중요한 체크포인트입니다. 베델(BETHEL)을 지나 캄캄한 망망대해상으로 들어서면 2시간 동안 섬 하나 볼 수 없는 암흑 속을 비행하게 됩니다.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체크할 만한 지표가 없어요. 그러다가 나비(NABIE)를 지나 한 시간쯤 가면 기상 레이다의 왼쪽 끝에 섬 두 개가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제(諸) 섬[22]

인데 보통 두 개만 잡혀요. 그것이 암흑 속의 등대와도 같은 시미어 섬이죠. 시미어 섬에는 DME-VOR 시설이 있는데 이 전파도 포착됩니다. 시미어가 기상레이다에서 9시 방향 135항공마일의 위치에 서게 되면 비행기는 정확히 니바를 통과중이란 얘기가 됩니다. DME-VOR, 그리고 레이다 포착, 이렇게 3중으로 비행기의 좌표를 체크하여 정상비행중임을 확인하면 그때부터는 안도합니다. 그런데 007은 북쪽으로 330km나 벗어나 날고 있었으니 시미어 섬이나 DME-VOR 전파가 잡힐리가 만무하지요. 조종실에선, 이제 레이다에 시미어가 나올 때가 됐는데, DME가 잡힐 때가 됐는데...하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10여분 늦게 007의 레이다에 왼쪽으로 섬 두 개가 나타났습니다. 야, 시미어가 저기 있구나, 이제 살았다,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007의 항적을 보면 정상 비행의 경우 시미어 섬이 레이다에 나타날 때와 엇비슷한 시각에 007의 기상레이다에서도 두 섬이 나타났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두섬은 소련령 코만돌스키예였다. 그 섬의 방향과 거리는 R-20항로상에서 시미어 섬을 포착할 때와 흡사했다. 섬의 모습도 거의 같았다. 다 같이 두 개로 보이고 모양과 크기, 두 섬의 배열도 흡사했다. 레이다만 보면 누구나 코만돌스키예를 시미어로 오인하게 되어 있다는 게 박씨의 주장이다. "그러나 007 조종사들은 곧 다시 불안해졌을 겁니다. 틀림없이 시미어인데 가까이 다가가도 DME-VOR 전파가 안 잡힌단 말입니다. 이상한데, 이상한데, 라고 생각했겠지요. 수신장치가 고장인가, 아니면 시미어의 시설이 고장인가, 그렇게도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DME-VOR이 안 잡혀도 레이다상의 두 섬이 시미어란 믿음은 바꾸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코만돌스키예라고 생각하기는, 또 007이 북쪽으로 300km 이상 빗나가서 날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도저히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믿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즉 합리화 하는 쪽으로 해석해버렸을 겁니다. 저 두 섬은 시미어가 틀림없다. 다만 항법보조시설에 고장이 난 모양이구나..." 007이 그 두 섬을 소련령 코만돌스키예라고 판단했다면 항로를 급히 남쪽으로 꺾었을 것이다. 항적을 보면 007은 코만돌스키예를 레이다로 포착한 무렵부터 완만하게 좌선회를 한다. 그리하여 이 섬이 9시 방향으로 약 135 항공마일의 거리에 놓이도록 항로를 잡는다. 즉, 니바의 위치(실제로는 니바라고 착각한 위치)로 비행기를 갖다 놓은 것이다. 항적을 보면 천기장은 코만돌스키예를 시미어로 확신하고 그것을 기준점으로 하여 북쪽으로 기울어진 007의 항로를 남쪽으로 조정했다고 박용만씨는 풀이했다.

[image]

천기장은 정확하게 니바를 통과하고 있다고 판단한 직후 좌선회를 멈추고 다시 약 246도 방향으로 자신있게 직진한다. 007이 니바를 통과하고 있다고 보고한 시간이 예상 시간보다 9분이나 늦어진 것은 코만돌스키예를 시미어로 오인했다는 또 다른 증거라고 박용만 씨는 말한다. "천기장은 바람 때문에 늦어졌다고 했으나 그때 보고한 바람으로는 그렇게 늦어질 수가 없었어요. 천기장이 니바를 통과하고 있다고 판단한 시각은 실제론 10분이상 늦어진 시각이었을 겁니다. 거리관계로도 그렇고, 선회 때문에, 또는 시미어 섬을 찾는다고 비행 시간이 더 걸린 거지요. 그러나 10분 이상 늦어지면 비행계획 전체를 수정보고해야 하는 등 귀찮아지니까 9분 늦은 것으로 한 게 아닐까요. 어쨌든 코만돌스키예섬 부근에서의 007항로 변경을 보면 그땐 INS를 작동시키지 않았음이 더욱 명백해지고 조종사들이 그때까지 이상상태를 의식하면서 비행하고 있었음도 확실합니다." ......중략.......

007은 코만돌스키예 북쪽을 지나서는 주저없이, 군사시설이 집중된 캄챠카반도 위를 횡단했다. 기상 레이다에 캄챠카의 해안선이 나왔을 터인데 차마 그럴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박용만씨는 "왜 캄챠카로 들어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면서 이런 생각을 피력했다. "코만돌스키예를 시미어로 믿어버린 다음에는 이와 배치된 증거가 나타나도 묵살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또는 구름이 많이 끼였거나 레이다 상태가 좋지 않았을지도..." 소련측 자료에 따르면 그때 캄챠카 상공에는 권운과 안개가 여러겹 덮여 있었다고 한다. 운량은 하늘의 반을 덮을 정도였다. 이 정도에서 레이다에 나타난 육지와 구름을 혼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어느 고참 기장은 무르만스크 사고(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황하면 바다를 하늘로 착각, 소형기일 경우엔 뒤집힌 상태에서 비행하는 수도 있어요. 무르만스크에선 707기가 거의 U턴하여 거꾸로 날았어요. 왼쪽으로 보이던 태양이 오른쪽으로 보이는 데도 항법사는 제대로 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김창규 기장이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해도 항법사는 맞게 간다고 우겼다고 해요. 정상 항로에서 약간 이탈하면 눈에 익은 지표물을 근거로 쉽게 알아챌 수 있는데 터무니 없이 벗어나 전혀 생소한 곳을 날고 있을 때는 어떻게 벗어났는지 상황 파악이 안되고 그러니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공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헤엄치다가 쥐가 난 것처럼 말입니다."

대부분의 항공사고는 그 원인이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컨데 지난 83년 12월 23일에 앵커리지 공항에서 일어났던 대한항공 DC-10기의 활주로 사고가 좋은 예다. 안개 속에서 DC-10 기장은 유도로를 따라 엉뚱한 활주로의 중간에 들어와 이륙을 위해 활주하다가 맞은 편에서 대기중이던 경비행기를 들이받았던 것이다. 320도 방행으로 달려야할 비행기가 240도 방향으로 달렸는데 세 승무원 중 어느 누구도 눈앞의 나침반이 240도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캄챠카 반도에 접어들 무렵 007은 '이륙후 3시간 22분'이란 반환점도 지나버렸다. 이 반환점 이전에 중대한 사고가 생기면 앵커리지로 돌아가고, 반환점을 지나서 중대사태가 발생하면 도쿄로 가게 되어 있다. 007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다. 007의 천기장이 캄챠카 위를 지나는 것을 알았는지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비행기가 육지 위로 날아가면 기상 레이다는 반사파로 부옇게 되어 지형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무르만스크 사고때도 707기는 레이다를 갖고 있었으나 육지 위를 날면서도 바다위로 날아가는 것으로 착각했었다. 정상상태에선 생길 수 없는 일이 공황상태에선 생길 수 있다. 더구나 레이다는 손바닥만한 크기다. 지도를 보듯 할 수는 없다...... 이하생략

소련이 넘겨준 블랙박스에서 007편과 015편과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앞에 일부 실제 음성 동영상 참조) 박용만 기장은 니바(NEEVA, 쉐미아섬 부근) 지점에서의 대화가 마지막이라고 증언했으나 실제로는 노카(NOKKA, 홋카이도 부근) 지점, 즉 격추 직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에서 풍향과 풍속차이가 심한데 동일 항로를 근접비행하면 있을 수 없는 이상징후였지만 니바(NEEVA)지점을 정확히 통과했다는 잘못된 확신이 항로이탈이라는 치명적인 사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KAL015: 007편.

KAL007: 말씀하세요.

KAL015: 뭘해?

KAL007: 뭐라구요?

KAL015: 뭐하냐구.

KAL007: 뭐하긴 뭘, 재미있어요. 우리 김의동 선생(항공기관사)께서 재미있는 이야기하기 때문에...

KAL015: 허허...글쎄...서울에 도착한 후 자네가 전부 연구하는게 낫겠네.

KAL007: 연구해? 연구할 것도 없어. 저 이제 가을인데 말이야, 하루 쉬어가지고 단풍구경이나 갔으면 좋겠어요.

KAL015: (계획을) 짜요. 짜요.

KAL007: 설악산 단풍구경이나 한번 가요.

KAL015: 우리보다 한 저 3분 앞서 있나?

KAL007: 네? 아...아...노카(NOKKA) 도착 시간이 18시 2...어 25분입니다.

KAL015: 아. 25분. 우린 18시 29분 도착이야. 18시 29분.

KAL007: 1분 늦네요. 1분. 4분 빠르네요. 25분이니까. (도착후 승객들이) 세관을 통과하기가 매우 혼잡해질 거요. 빨리 갈려면 빨리 가버리고 늦게 오려면 아예 늦게 와 버려야지 말이야. 복잡해진다니까요.

KAL015: 이거 갑자기 바람이 배풍이 많이 부는데...그쪽은 얼마나 왔어? 풍속과 방향은 얼마지?

KAL007: 206, 몇 노트인지 물어 볼까?

KAL015: 35노트.

KAL007: 저기 방향이 어떻게 되었지? 저 몇 도 방향에...[23]

KAL015: 040, 040.

KAL007: 30도요? 30노트요?

KAL015: 한 30도에서 40도 방향에 아...아 35노트.

KAL007: 아! 많이 부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정풍, 정풍이 아...215방향에 15노트.

KAL015: 그래. 그런데 여기는 저 비행계획에 나온거 보니까 저어 360 방향에 15노트가 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KAL007: 글쎄. 그렇게 되어 있네.

KAL007: (015편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KAL007: 우리보다 앞서 있나요?

KAL007: (015편이) 빨리 가게 해야겠어. 015편의 노카(NOKKA)지점 통과가 우리와 똑같이 29분이야. 빨리 가게 해야겠어.

KAL007: (015편이) 왜 이리 서두르죠?

KAL007: 배풍이 분다고 하네.

KAL007: 뭐라고요?

KAL007: 배풍이 35노트라고 하네.

KAL007: 어, 어...(이상한데)[24]

KAL015: 007편.

KAL007: 말씀하세요.

KAL015: '''350까지 올라갈 수 있어?'''

KAL007: '''물론이죠'''.

KAL015: 오케이. 우리는 370을 요청할께.

KAL007: 오케이


3. 영향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군사용으로만 사용될 예정이던 GPS를 민간에게도 제공'''할 것을 공표하였다.
대한항공은 보잉사와 공동으로 새로운 기체 도색을 고안하여 현재까지 하늘색 도색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하늘색 도색이지만 조금씩 변경은 있다. 대표적으로 '대한항공'이라는 파란 글씨가 기울임체에서 정체로 바뀌었고 도색 색상도 조금씩 바뀌었다.
이 당시 새로운 도색으로(현 대한항공 도색) 처음 도입된 747기는 대한항공이 1984년에 운용을 시작한 보잉 747-3B5버전인 HL7468이었다. 하지만 이 항공기는 14년 후 대형참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같이 도입한 747-3B5가 2대 더 있는데 당연히 오리엔트 타이 등으로 매각했다. 1997년 사고 당시에도 이미 노후기체였고 항공기관사가 필요했기 때문. 또한 747-4B5가 1989년 도입되었다.
1984년 이 사건으로 인해 시카고 협약이 개정되면서 민간 항공기 격추는 그 이유가 영공침범이나 항로이탈이라도 '''격추 자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격추시킨 당사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레이건에게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다. 레이건이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강조한 바 있는 국가 안보상의 위기가 현실로 입증된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미 국무부의 언론플레이와 진실의 시시비비를 가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소련 전투기 조종사 오시포비치가 환한 달빛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해당 비행기가 민항기임을 분명히 시인할 수 있었다.
    • 거짓. 당시는 음력 7월 24일로 하현이었다.
달빛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시포비치는 007편을 보았기 때문에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과장이었다. 대한항공이 격추당한 시간은 대한항공의 기내식 시간이였다. 즉 불을 다 켰으며,대한항공이 고도를 상승하면서 속도가 느려지자 전투기는 대한항공기 옆으로 왔고 훗날 인터뷰에서 오시포비치는 두줄의 불빛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두 열의 창문을 보았고 보잉기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민간 여객기였다는 것을 알았죠. 그러나 이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민간 여객기를 군사용으로 바꾸기는 쉬운 일이니까요. -뉴욕 타임즈 인터뷰, 1996년 9월 9일-
2. 소련 전투기가 KAL기 격추 전에 전혀 경고를 하지 않고 바로 격추했다.
  • 거짓. 소련 전투기는 몇 차례의 경고사격을 행하고 반응이 없자(혹은 회피행동을 하자) 격추시켰다. 다만 야간에 예광탄도 없는 상태에서 경고사격을 해 봤자 민항기 조종사가 그걸 알아차릴 리는 전혀 없고, 경고사격 후 고도를 올리고 속도를 늦춘 것도 회피행동이 아니라 단순히 우연이 겹쳐 발생한 일이었다. 즉 경고가 전혀 상대방에게 인식되지 않았으므로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은 맞다.
사실대로 논리정연하게 말했다면 후일 고개 숙일 일은 없었겠지만 냉전시대의 복잡한 배경사정이 국무부의 이런 언론플레이를 불러온 것일 것이다.
레이건은 KAL기가 격추당한 몇 시간 뒤 조지 슐츠 국무장관 등 레이건의 각료와 보좌관들은 이 사건을 퍼싱 미사일(MGM-31)의 유럽 배치에 대한 국내외의 반대를 누를 수 있는 정치선전용으로 거론했다.
레이건은 이 사건을 '소련의 대량학살'이라 규정짓고, 그런 야만적 행위는 미국이나 한국에 대한 공격일 뿐더러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전세계에 대한 공격이라고 선언했다.

미국 언론들은 소련의 행위를 규탄했다. 특히 <올랜도 센티널>은 '소련의 편집광적 행위', <뉴욕 포스트>는 '모스크바의 피 묻은 손'이란 기사 제목을 달았으며, <시카고 트리뷴>에서는 KAL기 격추를 '미리 계획된 살인행위', 뉴욕 타임즈는 '냉혈한적 학살행위'등의 제하를 달아 보도했다. 우주 유영 중인 우주비행사들도 TV를 통해 소련 비난성명에 가담했다. 전미에 반소감정이 확산되었다. 뉴욕의 UN 본부에선 소련기가 불에 타고, 소련제 보드카 불매운동과 판금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소련의 안드로포프를 사살하자는 전자오락까지 등장했다.[25]
KAL기 격추사건은 대소 선전전에서 레이건에게 '열광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KAL기 격추 이전 MX 미사일과 '빅 아이'라고 불린 독가스 무기 생산에 대해서 미 의회는 아주 부정적으로 대했다. 그러나 해당 사건은 미국 의회의 반대를 무력화시킬 뿐더러 핵무기 감축에도 제동이 걸렸다.
레이건은 KAL기 격추사건을 이용해 미 의회로부터 거의 모든 것을 다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미 의회는 MX 미사일 48억 달러, 퍼싱-2 미사일 4억 3천만 달러, 레이저 무기 연구개발 자금 3억 4천만 달러, 화학무기 1억 4460만 달러를 포함한 총 1,875억 달러의 국방예산 자금을 통과시켰다. 또 반군 게릴라 지원에 골몰해 있던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는 KAL기 격추사건을 이용해 2천 4백만 달러의 콘트라 지원금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 레이건은 이 사건을 이용해 미국 해병대 1천 6백여 명의 레바논 파견도 의회로부터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 라디오 프리 유럽, 라디오 리버티 등 대소선전방송을 강화하기 위해 애쓰던 레이건은 1983년 9월 의회 연설에서 "진실만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인류 최대의 희망"임을 강조해 소련인에게 진실을 알릴 명분으로 미국의 대소방송예산을 대폭 늘리도록 요청하여 의회도 순순히 대소 방송의 설비확장을 위해 13억 달러를 확충시켰다.
미국 언론도 KAL기 격추사건이 레이건에게 커다란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역시 KAL기 격추 사건이 레이건 행정부의 니카라과 정책에 대한 반대를 무력화해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에 미국 핵무기 배치를 용이하게 해 주었다고 보도했다. <시카고 트리뷴>도 KAL기 격추 사건이 레이건에게 정치적 보너스이자 정치 선전의 승리라고 평했고, 레이건의 한 보좌관은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소련의 KAL기 격추가 우리를 도와주었다"고 시인했고 <월스트리트 저널>도 KAL기 격추로 정치적 이득을 보았으며 미국의 핵미사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고 평했다.
반면 해당 사건이 일어난 5주만인 1983년 10월 7일 뉴욕 타임즈에서는 1면에 미국 정보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소련이 KAL기 격추 당시 민간 항공기인지 몰랐다고 처음으로 대서특필했으나, 레이건의 정보통제 정책으로 미국의 유력 언론들도 그 이상의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워싱턴 포스트 10월 21일자에선 "KAL기 격추사건에 대해 양심적으로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레이건 행정부 안에는 없다는 말인가?"라고 기사가 실렸을 정도.
한편, 007편의 유족들은 1993년 ICAO의 최종종사보고서가 나온뒤 조종사 과실에대한 책임을 물어 대한항공을 서울지방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냈지만 헤이그 협약에 따라 정해진 손해배상채권 시효 2년이 지나 소송에 패소했다. 또한 007편 사고 직후 아직 조종사 과실여부가 불분명한 시점에서 대한항공과 유족간 인당 10만 달러를 보상하는 대신 이후 발생하는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합의한것이 패소에 큰 영향을 줬다. 한편, 1992년 LA연방법원에 재기한 소송에서는 007편의 사고원인이 승무원의 조종 실수라는 판결을 해 한 유가족이 100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받는 등 11명의 희생자 가족이 모두 2100만달러를 배상받았다.

3.1.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진 사례


길창덕 화백의 고집세에서는 이 사건때문에 소련을 이기자는 뜻으로 우량아 선발대회를 하는 에피소드가 삽입되었다.
KBS에서 방영했던 SF 인형극에서는 갑툭튀한 외계인 집단이 지구의 여객기를 격추시키고 항의하는 지구인들에게 그 여객기는 우리를 정찰하려는 지구방위군의 스파이였다고 오리발 내미는 에피소드가 긴급 편성되기도 했다.
아기공룡 둘리에서는 둘리가 우리 여객기를 격추한 소련 조종사를 잡겠다며 온갖 말썽을 부리다 얼떨결에 한강에 잠수정을 타고 침투한 간첩을 잡는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계속된 말썽에 고길동에게 크게 혼난 둘리는 벌을 받고 울면서 "코나 깨져라."라고 말하고, 둘리의 초능력에 의해 소련 파일럿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미끄러져 코가 깨지는 엔딩. TV판 애니메이션에서는 에피소드의 제목을 '둘리의 분노'로 방송했고 1987년에 일어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바꾸면서 소련이 아닌 북한 관련으로 다르게 나온다.
신문수 화백의 신통방통이에서는 외계인들이 지구로 와서 소련군 전함을 날려버리고 바다에 가라앉음에도 무사한(?) 007편 여객기(당시에는 칼(KAL)기라고 불렀는데 이 만화에선 카알 기라고 부른다.)를 구해준다. 그러나 알고보니 방통이의 아시발꿈.
이 사건 이후에 관련 반공동화(...)들이 양산되었는데 대부분은 소련을 비난하는 어린이들의 분노를 담아낸 세미 다큐멘터리 동화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통령 할아버지에게 소련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는 편지와 레이건 할아버지, 낸시 할머니에게 사건 처리를 감사한다는 어린이들의 편지 모음집도 있었다(...). 사건 한달 후 터졌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와 엮여 북한과 소련을 동시에 비난하는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 씌어지기도 했다.
록 뮤지션 게리 무어는 이 사건을 소재로 Murder in the Skies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1984년 발표된 앨범 Victims of the Future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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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미국 NBC에서 TV 영화로 돌아오지 않는 KAL 007(비디오 제목/원제는 Shootdown)이 방영되었다. 이 영화는 1991년에 KBS에서 토요명화로 방영하려다가 방영 금지된 바가 있다.
줄거리는 이 사고로 아들을 잃은 과부 안젤라 랜스베리[26]가 사건 관련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음모를 밝힌다는 내용인데 처음 설정으로는 부기장이 CIA의 에이전트로서 실수를 가장한 소련 영공 침투 시험을 했다는 것인데...당연히 비난을 받았고 약간 바꾸어 한국인 비행사들이 뚜렷한 이유없이 소련으로 넘어가려는 듯한 설정을 보여서 기장의 유족들이 반발했다.
당시 로드쇼 기사에 의하면 방송위에서는 고인(조종사) 명예훼손 및 한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면이 커서 방송불가를 했다고 나왔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당시의 통제된 기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는 상술한 개요 항목의 9번 주석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방영하려던 1991년은 한소관계가 개선되던 시점이었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이 사건을 꺼내는 것은 건설적이지 못하다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의 외압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영화적 완성도는 범작 수준...TV 방영은 당연히 금지되었지만 대우전자를 통해 VHS 비디오로는 출시되었고 케이블에서도 가끔 틀어준다. 다만 사고 재현 부분은 꽤 긴박감이 있어서 한국 TV 뉴스시간에 소개될 정도였다. 극중 미국 뉴스 화면으로 당시 한국에서 소련을 규탄하는 시위 실제 현장을 잠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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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모형 메이커 트럼페터에서 발매한 1/48 스케일의 Su-15TM 키트의 박스 아트가 이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실제 오시포비치의 기체 번호는 17번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동료기였다거나 일부러 번호를 바꿨다는 등의 의견이 난무했다. 사실 해당 킷 모델인 Su-15만 그려도 되는데 저 멀리 민항기로 보이는 기체를 그려넣을 필요가 없지 않냐는 게 가장 큰 의문이다.
영국 BBC의 TV 시리즈 셜록의 시즌2 에피소드1 벨그레이비아 스캔들에서 추락 예정이던 민항기는 007편이었다. 대한항공 사건서 미국이 소련군 교신의 감청을 통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감청 사실을 숨기기위해 처음에는 이 사실을 숨겼다는 음모론 또한 드라마와의 유사점. 다만, 셜록은 대한항공 사건이 아닌 코번트리 음모론을 언급한다.
1993년 발매된 '삶 사람 사랑'[27] 1집 수록곡 중 '할머니와 비행기'라는 곡이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곡이다. 노래의 내용은 미국에 계신 할머니가 손자의 선물로 줄 야구장갑과 모자를 사서 한국으로 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시신을 못찾아 결국 할머니의 옷을 묻고 묘를 꾸몄고, '(내가 기다리던) 야구장갑과 모자는 이제는 잠기어 저 바다속 어디에 있겠지 할머니가 사주신 나의 것 보고싶어'라고 생각하며 할머니와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하는 내용. 가사가 가사다 보니 노래 자체도 암울하고 어둡다.
김진명의 소설에서도 잠깐잠깐 언급되었었다. 처녀작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도 사건 조사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던 권순범 기자가 문득 자기가 타고 있는 비행기의 운행 항로가 그 옛날 대한항공 007기가 그대로 운항하다 피격된 항로임을 자각하면서 '''혹시 여기에 무슨 국제적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상상하는 대목이 나온 이후, 차기작인 《한반도》(훗날 《1026》으로 개작)에서는 좀 더 음모론적으로 강화되어서 주인공이 근무했던 에이펙스 로펌의 대표 케렌스키가 정보원을 통해 수집한 CIA의 기밀문서 중 하나로 이 사건 관련 문서가 소개되기까지 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이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항공기가 어떻게 되나 지켜보고 있었으며[28], 소련측의 (정당한) 요격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이용해 소련을 악의 축으로 규정짓는 정보공작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결국 2017년에 이 음모론을 거의 정설로 채택하다시피 한 소설 "예언"을 쓰고 말았다.
미국 선댄스TV에서 방영된 도이칠란트 83(Deutschland 83) 시즌 1 에피소드 6 브랜디 스테이션(Brandy Station)에서 냉전 상황이 악화되는 계기로 등장한다. 드라마에서는 소련이 항공기 내에 미국 스파이가 승객으로 탑승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격추한 것으로 언급된다. 서독에 파견된 동독 스파이인 주인공 모리츠 슈탐(Moritz Stamm)이 서독으로 다시 파견되는 것을 거부할 때, 상관이 NATO의 선제타격 가능성에 대한 첩보와 이 사건을 함께 언급하여 주인공을 설득해 다시 서독으로 파견시킨다.
존 J. 낸스가 집필한 소설 '판도라의 시계'에서는 아크바르라는 이슬람 테러단체의 파일럿이 소련 출신으로, 소련 공군에 있을 시절 KAL기를 격추시켰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작중 전투기가 민항기를 공격하는 장면이나, 공격당한 민항기에 미국의 대사가 탑승하고 있다는 설정, 민항기 공격 사건의 배후에 정치적 이득을 꾀하는 미국 정부가 있다는 음모론적인 설정 등이 여러모로 이 사건을 연상시킨다.
사실과 완전히 동일하게가 아니라 다소 유사하게 묘사된 사례로는 장 끌로드 반담이 주연한 서극 감독의 작품인 《더블 팀》에서 묘사되는, 공식적으론 사망처리된 각국 정보요원들을 실제로는 피아 구분 없이 살려 쓰는 국제비밀첩보기관 '콜로니'의 정보력을 보여주는 한 예시로 나온 바 있다. 다만 영화상에서는 소련 영공에서 소련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북한 영공에서 북한이, 그리고 민항기를 군용/첩보기로 오인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북한 방공시스템의 테스트를 위해 미국이 민항기 근처에 전투기를 바싹 붙여서 비행시키다 그것을 감지한 북한이 미사일을 쏜 순간 전투기는 그 즉시 도피하고 애꿎은 민항기만 미사일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설정되었다.

4.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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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007편의 실제 비행항로와 비행 예정항로, 일본 상공을 통과해 서울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 점선이 비행 예정항로였고 007 뒤에 이륙했던 015편의 항로이기도 했다.
미사일 피격 144초후의 비행 데이터

5. 의문점 및 음모론


사건 당시 이 사건을 둘러싼 의문점은 여러 가지로 요약된다.
  • KAL기는 왜 3백마일 가량 항로를 이탈했나[29][30]
  • 소련은 왜 아직도 CIA 첩보작전으로 믿고 있는가?
  • RC-135 미국 첩보기는 왜 비슷하게 정찰했나?
  • 코브라 볼 비밀작전의 정체
  • 미국 정보기관들의 의회 내 비밀 보고회의 내용
  • 레이건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이 자료조사 완결 전부터 신랄하게 대소공격을 서둘렀던 이유
  • 국제민간항공기구 조사보고서의 골자는 무엇이었나?
  • 소련은 왜 캄차카 반도에서 격추하지 않고 사할린 섬을 지날 때까지 그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가.
  • 자동항로 추정기란 어떤 컴퓨터이며, 기장 천병인, 부기장 손동휘, 항공기관사 김의동의 실수라면 어떤 순서로 이루어졌을까.
냉전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고 적국 영공에서 벌어진 일인지라 당연히 음모론이 따라오게 되었다. 일단 고의 정찰설, 미국 방조설[31] 등이 주요 음모론이다. 5년 전인 1978년 일어난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과 너무 유사해서 대한항공이 미국의 비밀 작전에 동원되었고 소련은 낚인 것 아니냐는 음모론은 지금도 외국어 위키백과에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항로 및 침범 영공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음모론이 말하는 것처럼 거의 완전히 똑같은 사건은 결코 아니다. 902편 때와 007편이 침공한 영공은 전략적 가치가 완전히 다른 영공이다.
사망한 탑승객 중 미국의 로렌스 맥도널드 하원 의원이 있던 것도 음모론의 근원인데 1983년이면 6.25 전쟁 휴전 30주년이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30주년이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 상원의원 대표단이 한국방문을 하려고 했다. 이 비행기에 탑승한 유일한 의원이 맥도널드 하원의원인 것도 미국이 방조했다는 음모론의 불씨다. 다행히 대표단은 10분 뒤 출발하는 다음편 항공기에 탑승한 덕에 주요 의원 몰살이라는 비극은 피했지만 하필이면 맥도널드 의원이 문제의 항공기에 탑승했으니...그래서 어떤 높으신 분들[32]의 암살작전이라는 게 음모론의 요지이다. 음모론 총정리 하지만 맥도널드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레이건 행정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소련에 대한 강경노선을 펼쳤고 미국의 극보수 단체의 회장까지도 역임했다. 심지어 대선 출마까지도 고려했다고 한다.
추락이 아니고 사실은 캄차카에 착륙했고 탑승객들이 '''전원 살았으며''' 맥도날드 의원은 루뱐카에 나머지 승객들은 시베리아 굴라그에 수용되어서[33] 사망했다는 음모론도 미국에서는 꽤 퍼져 있다. 이에 따르면 해상에서 발견된 파편은 소련이 비슷한 기체를 고의로 폭파시켰고 블랙박스는 소련이 당연히 입수해서 처리했다는 논지인데, 위에 서술한 대로 보리스 옐친이 블랙박스를 한국 정부에 넘겨주었고 그것에 따른 분석자료가 나와 있는 현재는 거의 '''폐기된 음모론이다.'''
사실 공개된 블랙박스는 불시착 또는 추락 이후 탑승객들의 사망이나 생존 유무를 식별하는 단서가 될 수가 없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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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007 격추 사건 위령비.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망향로 국립망향의동산에 1984년 1주기때 세워진 위령탑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훼손되어 2012년에 보수공사가 실시되었으나, 2013년에 마감도 못 한 채 방치된 적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관리는 타 시설물과 달리 보건복지부 국립망향의동산관리원이 아닌 대한항공이 맡는다.[34][35]
  • 일본 홋카이도 왓카나이시의 최북단 소야 곶(宗谷岬)에 위치한 소야미사키 공원(宗谷岬公園)에 이 사고로 인한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인 추도의 탑(祈りの塔)이 설치되어 있다.[36]
  • 사고 희생자들 중에는 가족단위 승객들이 많았다. 특히 힘든 동료를 위해 대신 비행기에 탑승하였다가 희생된 승무원, 병상에 있는 노모의 소원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마지막 근무를 위해 이 비행기를 탔다가 희생된 승무원, 두 달 전 부부가 나란히 박사학위를 받고 시어머니의 생신잔치 참석을 위해 4년만에 귀국하다 희생된 가족, 멕시코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남편의 임기가 끝났으나 짐정리가 늦어져 남편을 1주일 전 먼저 한국으로 보내고 뒤늦게 오다 희생된 가족, 손녀의 출산을 지켜보고 딸의 산후조리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 시어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귀국하던 길에 희생된 어머니, 한국으로 배치되어 한 달 전 미리 떠난 미군 남편을 따라 귀국하다 희생된 가족들 등 안타까운 사연이 많았다.
  • 사고 당시 007편은 비행기의 크기나 인명 피해 규모에 비해 의외로 승객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보잉 747-200의 표준 좌석 수는 일반석, 우등좌석, 일등석을 모두 꼬박꼬박 배열할 경우 366석이었는데[37], 당시 007편에 탑승한 항공권을 제대로 구매하고 탑승한 승객은 245명, 승객으로 탑승한 전체 인원수는 24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245명 탑승도 공기수송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보통 항공편을 띄울 때의 손익분기점이 좌석점유율이 70% 정도인데, 사고편은 67% 정도로서 사고일이 비수기에 해당함을 감안할 때 승객 동원은 그래도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보는게 좋다. 그래도 이익이 되는 비행 일정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 요약해 보자면 좌석 동원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공기수송도 아닌 애매한 정도라고 보면 될 듯하다. 1960년대 및 1970년대 당시 대한항공이 어려웠던 이유도 자국민이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서였던 게 크다. 저 시점에서는 그나마 나아졌지만. 게다가 1983년 저 시절에 비행기 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지 생각해보자. 1989년에서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고 그 이전에 해외여행 규제가 엄격하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그 1명은 비행 스케줄을 끝내고 귀국하던 대한항공 소속 기장 안인수 씨였다고. 사실 앞의 링크에 나오듯이 안씨는 격추당하지 않은 015편의 기장 박용만 씨로부터 "내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겠느냐"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안씨는 "가족 생각이 나서 빨리 가야겠다"라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박씨가 한 번만 더 붙들었거나 안씨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면 참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합동위령제는 1983년 9월 7일에 서울운동장 축구장[38]에서 진행되었다. 위령제에는 10만 인파가 운집했고,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와 함께 각 부처 장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날 희생자유가족대표로 연단에 섰던 007기 부기장 김희철 씨[39]의 장녀 김수지 양[40]이 고별사를 낭독한 것은 그날 언론 톱으로 다뤄졌다. 당시 김수지 양은 "소련놈들아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라"라며 격양된 어조로 고별사를 낭독했다. 합동위령제는 전국 생중계되었고, 주요 외신들도 취재를 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사였다.
  • 아천미술관 설립자 류수택의 동생이자 승마선수였던 류춘택도 이 비행기를 탔다 변을 당했다.[41]
  • 당시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이었던 권정달도 이 사고로 중앙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딸을 잃었다.
  • 2, 4, 5대 국회의원을 지낸 오위영의 딸도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 당시 KBS 제2라디오에서 이 사고의 7시간 추모 방송을 했던 성우 정경애는 1997년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남편인 성우 장세준과 장남 장성민, 차남 장재민과 함께 사망하여 대한항공기와는 묘한 악연을 맺게 되었다.
  • 이 사고로 희생된 한 승무원의 부인은 14년 후에 발생한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때 조카와 여동생이 희생되어 대한항공과 또 다시 원치 않는 악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 1991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에 당시 동경으로 특파된 이낙연 기자가 이 사고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희생자의 시체 일부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음. 혐오 주의 그런데 이 기사를 보면 오시포비치는 KAL기가 민간기라는 것을 알고 격추했다고 하는데, 1997년 동아일보 전화 인터뷰와 2003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는 몰랐다고 말을 바꿨다. 그리고 항공 사고 수사대 인터뷰에서는 아예 나는 아직도 007기가 스파이기였다고 믿는다는 뉘앙스의 말을 남겼다. 일단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 나온 전문가들은 자신이 수백 명의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어서 자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월간조선이 이 사건에 대해서 기사를 여러 번 냈다.[42] 그리고 2003년에는 비행기를 격추시켰던 오시포비치와 인터뷰까지 했었다. 요지는 나는 잘못 없고 미국 정찰기를 잡은 것이고 여객기는 결코 추락시키지 않았다는 것. 대충 보면 이건 뭐 수준이지만 사실 자랑스러운 조국을 위해 명령을 받고 출동 후 규정에 따른 접근 이후에 정찰기로 확신 후 지시하에 격추시킨 비행기가 알고 보니 정찰기가 아니라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탄 여객기였단 걸 알게 되면 PTSD를 앓지 않을 수 있을까... 스파이 기가 맞고 여객기는 다른 무엇이 격추시켰다는 것을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라는 내용 뒤에도 마지막 부분을 자세히 읽다 보면 직접 자필로서 '만약에 그게 여객기였다면'이라는 가정을 담았지만(읽다 보면 알겠지만 정말 안쓰러울 정도의 자기방어기제다.) "자신이 격추시킨 것은 정찰기이고 그것을 굳게 믿지만 만약 그것이 여객기였다면 머리 숙여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용서를 구하겠다."라고 말했다.
  • 2014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다만 이 사건은 항로를 이탈하지도 않고 정규 비행을 하고 있었는데 격추했다.[43] 오인으로 인한 격추인지, 고의인지는 당사자들이 해명하지 않아 불명이다. 다만, 격추직후 반군들은 격추된 항공기가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인것은 분명 명백하게 알고있었다. 잔해 옆에서 해맑게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 동년 1월 8일 007편은 폭탄 테러 미수를 겪은 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기장이 나리타 국제공항에 긴급 착륙했으며, 샅샅이 수색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폭탄은 없었고, 범인은 정신이상 중국인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44]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규탄 결의안에 중국이 기권하고 폴란드가 반대한 사실이 일본 정부가 공개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당시 결의안은 안보리 이사회 통과 직전에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결국 채택되지 못했다.
  • 이 사건 39일 뒤인 10월 9일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소련과 북한의 도발로 인해 1983년 가을 한반도 정세는 유례없는 일촉측발의 위기상황이 전개되었다.
  • 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가 자신의 1983년도 앨범 의 수록곡 를 통해 이 사건을 비판하였다.[45]
  • 80-9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세대는 "소련에서 가장 악랄한 조종사 이름은?" 같은 넌센스 유머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답은 '카르쏘아노프'. 바로 이 사건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46]
  • 어이없게도 격추된 그날 9시 뉴스에서 다뤘던 첫 기사가 전두환이 청진동에 가서 청소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에는 보도지침에 따라 전두환 소식을 먼저 다루는 것이 보도국 간부들과 양대방송사 임원진에게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지고 9시 뉴스 톱에 올리지 못했다면서 기자한테 징계를 내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007편 격추사건이 그만큼 특급 뉴스였음에도 전두환 소식을 먼저 다뤘던 것이었다.
  • 서구권 소빠들은 KAL007기가 스파이기였기 때문에 격추는 정당했다는 망언을 한다.#
  • 북한 역시 KAL007기가 미국이 운용하는 정탐용 항공기이며 인공위성과 우주왕복선과 연계하여 소련 영공을 침범하다 격추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 격추전에 속도를 줄여 007편보다 소련의 전투기가 앞서 나갔을때, 오시포비치는 보잉 747시리즈의 2단의 창문 등을 보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민항기이고 보잉기라는것을 보고 했다면,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 말했듯 오시포비치는 군용기를 민항기로 위장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인터뷰한 바 있으니, 의미없는 가정이다.
  • 박용만 기장은 유가족이나 언론에 한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 때 증언했다면, 원치 않는 거짓말을 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정권 시기이기도 하고 민간인 한 명이 코렁탕을 먹는 것은 그리 어려운 시대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55세로 퇴직 후 인터뷰와 증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 이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방에서는 소련제 항공기 착륙을 금지시키고, 국제조종사협회는 보복으로 60일간 모스크바 취항을 중단하기로 하는 등 소련에 대한 분노가 격앙되었다. 또한 앵커리지와 동북아 지역을 횡단하는 R-60항로가 한동안 폐쇄되었다.

7. 관련 문서



7.1. 유사 사건[47]



7.2. 그 외



7.3. 외부 링크


[1] 대한항공 007편 재현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떨어질 때에는 강으로 떨어졌다.[2] 루프트한자의 자회사인 콘도르 항공에서 1972년 3월 17일에 첫 운항을 하다가(콘도르 항공 시절 기체 등록번호는 D-ABYH) 조기 퇴역한 기체를 1979년 2월 3일에 대한항공에서 중고로 들여온 기체이므로, 콘도르 항공도 루프트한자의 고객 코드(BCC)를 따른다. 루프트한자도 BCC가 30번이다.[3] HL7742와 헷갈릴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둘 다 사고로 말소된 기체 등록번호이다.[4] 공항 뒤쪽으로 그 유명한 구룡성채가 보인다. 또한 해당기체는 I New York 특별도장을 하고 있었다.[5] 무기에 의한 민항기 격추사건.[6] 전에 나무위키에 등록되어 있던 영어자막 버전과는 다르게 한글 자막과 영어자막도 나와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7] 바로 뒤에 날아오던 KE015과 한국어로 설악산 단풍 구경하기 좋은 때라는 등 잡담을 나눈 내용도 있다. 당시 교신내용을 들어 보면 같이 KAL007편 조종사가 같이 단풍 구경 가자고 했는데 소련에 의해 격추된 탓에 같이 못 가게 되었고, 나중에 교신내용이 세상에 공개될 때 이 내용이 녹취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8] 당시 한국에서 미국 동부 지역으로 가는 여객기는 제2세계 국가인 소련의 영공을 통과할 수 없었을 뿐더러, 당시 여객기의 부족한 항속거리 때문에 그나마 거리 손실이 낮은 알래스카앵커리지 국제공항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 연료 보급, 승무원 교대가 이루어졌다. 현재 앵커리지 국제공항은 화물기들이 주로 중간 기착한다.[9] 이 의원은 민주당 소속이기는 한데, 남부 조지아 주의 의원으로 웬만한 공화당 의원들보다도 강경한 보수 성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중간 선거 이전까지는 미국 남부에서도 민주당이 꽤 강한 조직력을 유지하고 있었다.[10] 이 경악한 국가는 소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 공군의 정찰기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잔해를 확인한 뒤 민항기였다는 것을 알아낸 뒤에는 경악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 내용은 군과 정부만이 알고 있었고 유류품들과 잔해 블랙박스를 재빨리 수거해 소련 해체 이후 한국에 반환할 때까지 극비리에 관리했다.[11] 당시에는 제2세계 국가와 절대 수교하지 않았다.[12] 위 CVR영상의 28초 부분[13] 이러한 방식으로 영공 근처를 지나가거나 살짝 침범하는 도발은 현재도 미, 중, 러가 서로 자주 행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도발하면 정찰기에 집중되는 레이더 전파 들을 수집(ELINT)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중, 러, 일이 한국 방공식별구역을 통보없이 들낙날락 거리는것도 이런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14] B747에 장착된 4개의 유압시스템중 승강타를 조작할때 쓰이는 3번 유압은 비상강하를 하던 007편이 다시 상승하지 못한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파괴되었다고 볼수있다.[15] 한소정상회담 전날인 1990년 6월 3일 대한민국 정부는 "한소관계의 개선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보장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불행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한소관계의 개선 노력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혔고 이 사건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전에 일어났음을 지적하면서 "이번 한소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로 소련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건설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16] 이 때 당시 대통령이던 보리스 옐친노태우 대통령에게 국회에서 직접 전달했다.[17] ICAO가 직권으로 조사를 하는경우는 지금까지도 손에꼽을수 있을정도로 초극소수인데 그정도로 007편 사건이 외교적으로 복잡하게 엮어져있다는 뜻이다.[18] 통칭 HDG(헤딩) 모드[19] BEA와 ICAO가 미국과 러시아 양국의 눈치를 봐서 알아내지 못한척한게 아니라, 조종사들 끼리 항법과 관련된 대화가 아예 없어서 도저히 알아내지 못한것이다.[20] 블루세이버는 현재 블랙이글스의 전신이며 역사상 통틀어 소위 계급으로 팀원이 된 경우는 천병인씨가 유일하다. 즉 조종실력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이다.[21] 사실은 대통령전용기 조종사들 중 가장 나이가 적어서 부기장이지만 실제로 주도적으로 조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22] 여러(諸)섬 즉, 제도(諸島)를 의미한다. 즉 니어 제도(Near islands)로 애투섬(Attu island), 아가투섬(Agattu island), 알레이드섬(Alaid island), 니즈키섬(Niziki island), 쉐미아섬(Shemya island)등으로 구성된다.[23] 실제음성에서는 마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었어?"처럼 들린다. "진행방위가", "저기 방위가" 등으로 추측된다.[24] 대참사를 피할 수도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25] 원 출처: <KAL 007: The Cover-Up>. David E. Pearson. 1987.[26] 1925년생 배우로 제시카의 추리극장에서 주인공 제시카라든지, 미녀와 야수미세스 팟 목소리 역으로 유명한 배우.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배우로 데뷔했다가 1944년에 미국으로 귀화했다.[27] 015B의 베이시스트 조형곤과 그의 형 조형민이 만든 그룹. 참고로 이 앨범은 희귀판이다.[28] 후술할 음모론에서 소개되는 미국 방조설이다.[29] 현재로서는 이륙직후 INS모드를 설정하지 않은채 HDG모드를 사용해 계속 비행했을 가능성, INS데이터를 잘못 입력해 이탈했을 가능성만이 추정되고 있다.[30] 박용만 기장이 증언한 발언 연료를 버리고 회항했을 때, 기장과 항공사의 신뢰도 저하, 권위를 잃는다, 체면이 손상된다, 오점 만회가 불가능하다고 증언하였다.[31]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영공침범을 알았는데도 소련 방공 시스템의 정확도나 신속성을 테스트하고자 고의로 놔두었다는 이야기. 설마 격추까지는 안 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는데...[32] 대부분은 소련이라고 하지만 일부 음모론에서는 미국을 지칭하기도 한다.[33] 냉전 종식 후 냉전 시대에 자유진영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굴라그에 수용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공개되었다. 특히 1970~1980년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된 미 정찰기 관련 인사들의 이야기는 유족들이 소련의 매장지에 방문할 정도인데, 굴라그 관련 서적에도 KAL기 생존자 관련 증언은 없다. 물론 음모론자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를 들어서 어린이를 포함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실어주기도 한다.[34] 접근하기가 그리 쉬운 편이 아닌데, 그 이유가 경부고속도로 옆에 있고 천안 지역에서 좀 떨어진 곳이다.[35] 시내버스로 방문하려면 천안 버스 200, 천안 버스 201을 타야 한다.[36] 실제로 사고기에 탑승한 일본인도 한국인과 미국인 다음으로 많았다. 이는 당시 대한항공이 일본 항공사들에 비해 운임이 저렴하여 이 항로를 타고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37] 당시 대한항공에서 좌석을 정확히 얼마나 배열했는지 알수가 없어서 표준 배열을 따른다.[38] 동대문운동장, 지금 DDP 자리다.[39] 격추 시 사망. 문서 윗부분에는 부기장으로 손동휘라는 이름의 인물이 나오는데, 장거리 비행이었던 만큼 복수의 부기장을 두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40]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41] 당시 LA에서 열렸던 프레올림픽승마대회를 참관하러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직원 두 사람과 함께 갔다가 돌아오던 중이었다.[42] 그 기사들 중에서는 훗날 월간조선 편집장을 지낸 조갑제 기자가 쓴 기사도 있었다.[43] 단, 007편 사건으로 인해 개정된 시카고 협약에 따르면, 설사 민항기가 항로를 이탈해 격추했다 하더라도 이를 격추할 시 모든 책임은 격추한 주체에 있다.[44] 다만 이 사건에 연루된 기체가 해당 문서의 주인공인 HL7442인지는 불명이다.[45] 가사 중에 "러시아인들이 한국으로 향하던 비행기를 격추시켰습니다(The Russians have shot down a plane on its way to Korea.)"라는 가사가 있다.[46] 실제 조종사의 이름은 겐나디 오시포비치.[47] 무기에 의한 민항기 격추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