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아즈리

 


Chinoiserie
[image]
프랑수아 부셰, "중국식 정원 (Le Jardin Chinois)"
1. 개요
2. 유행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유럽의 후기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미술에 가미된 중국 취미의 미술품.

2. 유행


당시 유럽에 들이닥친 중국의 수많은 공예품(주로 도자기)과 그림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미술품들을 뜻한다. 자포네스크와 마찬가지로 동양에 대한 판타지, 즉 '오리엔탈리즘' 취향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짝퉁 중국 미술. 사실 소위 '동양풍'의 원조는 이 시누아즈리가 먼저다. 물론 자포네스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서유럽을 문명적-이성적으로 바라보고 동아시아를 신비적-원시적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매우 많이 섞여있었다. 이는 시누아즈리보다도 더 전에 유행했던 오스만, 이집트 문화를 당시의 유럽인들이 바라볼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에는 자포네스크에 비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시누아즈리가 유행하던 시절은 아직 왕정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교적 중산충에게도 널리 알려진 자포네스크와 달리 시누아즈리는 주로 왕족과 귀족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중국풍 가구·도자기·칠기·정원 건축 등에만 남았다.[1] 단 이후로도 박람회에서 중국관의 개설을 통해 시누아즈리의 유산은 계승되었다.
당시 중국 가구나 도자기는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었다. 한마디로 왕족이나 귀족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거 사두고 다른 귀족들 불러 자랑하는 용도였단 이야기. 시누아즈리의 핵심에 있는 중국의 고가 도자기들은 이미 1세기 이전인 16세기 말부터 미친 듯이 긁어모아대었고, 1세기나 계속된 유행이다 보니 귀족들 사이에선 이를 모방하거나 변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근세에 시누아즈리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가 끝나가며 당시 대세를 이루던 고전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응이 미적지근해지면서 벌어진 일로서, 당대 유럽인들이 고전주의의 뚜렷한 형식미를 벗어나 자극적인 비장미를 추구하기 시작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중국 문화의 이국적 향취가 당대 유럽인들이 새로 찾아나서던 비장미를 구현하는 데에 안성맞춤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자극성을 목표로 유행하기 시작한 서브컬쳐라서 그런지 당시에도 고전주의 특유의 아름다움에 익숙한 기성세대들에겐 좋게만 여겨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고전주의 쪽의 기록을 보면 특히 중국 도자기 특유의 청·백이 주를 이루는 색상 배합에 대해 맹렬히 비판을 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19세기에는 고딕 리바이벌(Gothic Revival)이 유행하여 시누아즈리 열풍이 한 풀 꺾이는 계기가 된다.[2] 실제로 중국풍이 혼재되어 있던 로코코 양식과 달리 19세기의 빅토리아 양식은 디자인 측면에서 중세 유럽으로 부분적 회귀를 하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변화 덕분에 굳이 미술 분야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로코코 양식과 빅토리아 양식의 차이는 굉장히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건축 구조상 로코코 양식에 비해 고딕 양식이 사실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점도 원인으로 작용했는데,[3] 19세기 당시의 유럽 각국이 결국 반동주의를 도입하고도 정작 혁명 이전의 로코코 양식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던 것 역시 당시의 가파른 도시화를 고려했을 때는 고딕 양식의 경제성이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가이기 때문인지 중국 도자기에다가 청동 등의 금속으로 장식적인 보호틀을 결합시켜서 전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선지 유럽의 경매 등지에서 중국 도자기를 거래할 때 보호틀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는 가격이 높아진다고 한다.
한편, 아무래도 만주족 출신의 정복왕조라 개방적인 면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비슷한 시기 청나라에서도 유럽의 문명이 제법 관심을 끌었다. 서양의 천문학자들이 등용되어 본래의 한족 관료들을 몰아낸 것은 유명한 이야기고, 옹정제는 유럽식 가발을 쓰고 스타킹까지 신은 채 초상화를 남겼으며 건륭제는 유럽식 정원을 본딴 여름궁전을 짓기도 했다.[4] 강희제는 아예 유럽의 악기를 연주해보고 라틴어를 배워 라틴어 책을 읽기도 할 정도. 그러나 청나라에서 서양문화에 관심하는 정도는 귀족문화나 예술계의 유행이 아니라 몇몇 황제들이 심취했던 취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는 어쩌면 동서양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는 일이다.
왕가는 이슬람이지만 유럽과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치고받고, 교류도 나누며 맥락을 함께 하던 오스만 제국에서도 시누아즈리 열풍이 일었다. 오히려 유럽이 본격적으로 시누아즈리 열풍에 접어들기 이전부터 오스만 제국에서는 중국산 도자기를 수입해와서 부유층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톱카프 궁전의 군주의 부엌(Matbah-ı Amire)은 현재에도 2만 점이 넘는 중국, 후기에는 일본 청화백자 컬랙션을 소장 중이다. 대체로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인 16-18세기에 수입해온 ·시대의 자기가 많은데, 심지어 오스만 제국 측에서 중국에 발주를 넣어 쿠란의 문구나 오스만 제국 특유의 문양들을 넣은 물건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고가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서는 이즈닉과 퀴타햐의 도자기처럼 이를 모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특히 귀중한 도자기들은 금·은으로 보호 및 장식용 틀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깨진 도자기조차도 금이나 은으로 수리하기도 했다.

3. 기타


철냄비짱 때문에 시노와즈리(シノワズリ)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프랑스어
[
nwa
]
를 일본어에서 '노와(ノワ)'라고 옮김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데,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누아'이다.[5]
간혹 '중국풍 취향' 그 자체가 아니라, 중국에 환상을 품은 서양인들을 부르는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4. 관련 문서



[1] 프랑스 혁명 이후 기존의 왕족과 귀족들을 부르주아 계층이 대신하게 되었을 때는 새로 등장하던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에 영향을 받았기에 자포네스크가 더 유행했다. 결정적으로 중국이 20세기에 들어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으로 자국 문화를 신나게 말아먹어 시누아즈리는 더욱 재조명되기 힘들어졌다.[2] "Chinoiserie (design)," 《Encyclopædia Britannica》. Edinburgh: Encyclopædia Britannica Incorporation, 2013[3] Toman, Rolf. 《Gothic: Architecture, Sculpture, Painting》. Potsdam: Ullmann Publishing, 2011[4] 이게 바로 자금성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던 원명원이다.[5] 한편 1996년 표기법이 개정되기 이전에는 프랑스어에서의 "oi
[
wa
]
"가 "으와"였다.(마리 앙투아네트를 "마리 앙트와네트"로 표기했다) 이 예전 표기법을 적용하면 "시느와즈리"가 될 것이다. 현재는 "oi
[
wa
]
"를 "우아"로 적으므로 "시누아즈리"가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