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샤 미하일로비치

 


'''시니샤 미하일로비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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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FC 1909'''
'''Bologna Football Club 1909 S.p.A.'''
''' 이름 '''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Siniša Mihajlović'''
''' 본명 '''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Синиша Михајловић
''' 출생 '''
1969년 2월 20일(55세) /
유고슬라비아SFR 크로아티아SR 부코바르스리옘주 부코바르
''' 국적 '''
세르비아
''' 신체 '''
185cm
''' 직업 '''
축구선수(수비수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HNK 보로보(1986~1988)
FK 보이보디나(1988~1991)
FK 츠르베나 즈베즈다(1991~1992)
AS 로마(1992~1994)
UC 삼프도리아(1994~1998)
'''SS 라치오(1998~2004)'''
인테르나치오날레(2004~2006)
''' 감독 '''
인테르나치오날레(2006~2008 / 수석코치)
볼로냐 FC(2008~2009)
칼치오 카타니아(2009~2010)
ACF 피오렌티나(2010~2011)
세르비아 대표팀(2012~2013)
UC 삼프도리아(2013~2015)
AC 밀란(2015~2016)
토리노 FC(2016~2018)[1]
스포르팅 CP(2018)[2]
볼로냐 FC(2019~ )
''' 국가대표 '''
63경기 9골(유고슬라비아 / 1991~2003)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4. 우승
5. 플레이 스타일
5.1. 프리킥
6. 지도자 경력
7. 여담


1. 개요


세르비아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9년부터 볼로냐 FC 1909 감독을 맡고 있다.

2. 클럽 경력


집시 출신의 세르비아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인 어머니를 두었고, 그의 고향 부코바르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접경지였다. 이 때문에, 미하일로비치는 유스시절에는 크로아티아 최고의 팀인 디나모 자그레브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디나모 자그레브는 미하일로비치를 테스트에서 떨어뜨렸고, 이후 절치부심한 미하일로비치는 다른 팀에서 커리어를 쌓은 뒤 만 21세의 나이에 겨울 이적시장을 통하여 유고슬라비아 최강의 팀인 츠르베나 즈베즈다에 입성한다. 이적 첫시즌만에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유고슬라비아 리그, 유로피언컵 우승등 더블에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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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의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입단 첫시즌에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챔스 우승을 달성하며 온 유럽의 주목을 받았던 시절'''[3]
다만 컵 대회에선 하이두크 스플리트에게 0-1석패로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고 트레블에 실패하고 만다. 그 다음 시즌에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는가 싶었지만 유고 내전이 발발하였고, 부코바르는 전쟁터가 되는등 악재가 터지고 만다. 결국 이런 상황에 미하일로비치는 1992년에 세리에로 건너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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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에도 로마와 삼프도리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특히 라치오와는 전성기를 함께하게 된다. 1999년엔 라치오의 유일한 국제 타이틀인 위너스 컵 우승과 2000년에 라치오 최초로 리그와 국내컵을 우승하며 더블 우승을 달성하는데 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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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테르에서 2시즌간 뛰다가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국대에서는 그가 승선할 무렵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유로 92 출전자격을 박탈당했고[4] 1994년 월드컵은 물론 그 다음 유로 대회도 유고 연방국은 출전 금지가 되었다.
1998년이 돼서야 세르비아 축구 대표팀 선수로서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을 뛸 수 있었고, 유로 대회도 2000년이 되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대회가 되었다. 그래도 월드컵은 16강 진출, 유로에서는 8강 진출에 성공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4. 우승


  • FK 츠르베다 즈베즈다 (1991.1월 ~ 1992)
    • 수페르리가(세르비아 1부리그) : 1990-91 , 1991-92
    • UEFA 챔피언스 리그 : 1990-91
    • 인터컨티넨탈컵 : 1991
  • SS 라치오 (1998 ~ 2004)
    • 세리에 A : 1999-00
    • 코파 이탈리아 : 1999-00 , 2003-04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 1998 , 2000
    • UEFA 컵 위너스컵 : 1998-99
    • UEFA 슈퍼컵 : 1999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4 ~ 2006)
    • 세리에 A : 2005-06
    • 코파 이탈리아 : 2004-05 , 2005-06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 2005

5. 플레이 스타일



강력한 킥력과 뛰어난 정확도를 바탕으로 언제나 질좋은 롱패스를 하였으며 터프한 대인방어와 대담한 플레이, 그리고 엄청난 투지를 보여주던 그는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볼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였다.

5.1. 프리킥



데이비드 베컴지쿠와 더불어 프리킥의 달인 중 한명이며 세리에 A 프리킥 골 통산 최다기록인 28골을 넣었다.
1998년, SS 라치오 소속으로 전 소속팀이었던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전/현역 축구선수들을 통틀어서 '''그 누구도 기록하지 못했던 세계 축구 역사상 최초로 프리킥으로만 3골을 넣는 해트트릭을 성공시켰다.##'''[5]

6. 지도자 경력


AC 밀란을 맡으면서 필리포 인자기, 셰도로프 전임 감독 때보다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세리에 리그에서 6위를 기록중이고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결승전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잔루이지 돈나룸마를 발굴한 것도 그가 밀란 감독을 맡았을 때의 업적이다.[6]
그러나 2016년 4월 12일 미하일로비치는 팀 성적 부진의 책임으로 밀란의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남은 경기는 브로키가 지휘했다.
그리고 2016년 5월 25일 토리노와 계약 기사가 떴다.
그러나 끔찍한 경기력으로 경질되었다.
2018-2019시즌엔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필리포 인자기 대신 볼로냐를 맡았고, 전반기에 강등권에서 놀던 팀을 최종 순위 10위로 마무리시키며 매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2019년 7월 백혈병이 발견되어 사임했으나, 투병하면서 감독직을 병행하기로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백혈병을 앓았기에 고위험군에 속해 물리적 거리두기 뿐만 아니라 팀에 대해 회의를 할 때도 화상회의로 진행 하는 등 철저히 대비하였으나, 8월 중순 경 코로나에 감염 되었다가 다행히 9월 초에 완치 했다고 한다.#

7. 여담


세르비아계 친구들과 가까이 지냈었다는 이유로 유고 내전후 고향을 방문했더니 크로아티아 영토가 된 부코바르에서 축구팀 사진 중 자기 혼자만 구멍이 나있는 등 고향 사람들은 미하일로비치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미하일로비치는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은퇴할때까지 세리에 A에서만 뛰었다.
성질머리가 매우 더러운 편이라 파트리크 비에이라와 경기 도중 비에이라가 미하일로비치에게 먼저 "집시 쉿"(Gypsy Shit, 쓰레기 집시라는 뜻.)이라고 그의 면전에서 대놓고 말했다가 이걸 들은 미하일로비치는 가뜩이나 유고 내전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분노하여 비에이라한테 "네로 데 메르다"(Nero de merda, 깜둥이란 뜻.)라고 욕을 했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비에이라에게 자신은 원숭이 같은 인종차별주의적인 욕이 아닌 민족 관련 욕을 경기 도중 듣게 되어 자신도 맞불로 같은 욕을 하게 되었다고(...)# 나중에서는 서로 화해했다고 한다(...) 이렇게 욱하는 성질 때문에 곤욕을 많이 치렀다.[7] 그리고 경기 중에 fuck을 날리는 것은 덤(...). 게다가 유년 시절 친구 중에 세르비아 극우파들이 있어서 크로아티아인들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크로아티아계였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상대로도 인종차별 폭언을 했던 전력도 있다.[8]
참고로, 이 사건 이후 즐라탄의 변호인이 독순술 전문가까지 고용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내려고 했는데,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말해서 못 알아냈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래도, 감독을 맡게 된 이후에는 거친 성격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9]
[1] 2017-18 시즌 도중 해고.[2] 선임 10일만에(...) 경질되었다.[3] 참고로 사진에서 빅 이어의 왼쪽 하단에 누워 환호하는 앳된 선수가 바로 미하일로비치다.[4] 유고 대신에 출전한 덴마크가 유로 대회를 우승했다.[5] 또한 미하일로비치는 프리킥으로 헤트트릭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였으나, 터키 2부리그인 TFF 1.리그에 속해있는 발르케시르스포르의 선수 타쉬큰 찰르시가 아키사르스포르를 상대로 전반 41분, 45분, 후반 추가시간에 프리킥 헤트트릭을 달성했다.링크[6] 돈나룸마는 20세도 안되는 나이에 유럽리그 선방률 4위를 기록했다.[7]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자신의 고향이 전쟁으로 박살이 나고 고향 사람들이 미하일로비치에게 적대적으로 대한 탓으로 인해 성격이 이렇게 변해버렸다는 것이 유력하다. 지도자 커리어로 넘어간 이후에는 성격이 상대적으로 유해졌지만 지금도 전쟁에 대한 기억은 생각하기 싫다고 한다.[8] 놀라운 건 즐라탄이 인테르로 이적했을 때 미하일로비치는 인테르의 코치로 있었고, 둘은 오히려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즐라탄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만큼 프리킥에 관해 많은 걸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고...[9] 미하일로비치와 같은 성질의 로이 킨이 선더랜드 감독이 된 이후에도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팀성적도 안 좋았던 걸 보면 아주 대비되는 삶. 반면 현역 시절 성질 더럽기로 유명했던 로베르토 만치니는 성격이 많이 유해졌다. 미하일로비치와 성질이 비슷한 슈테판 에펜베르크 역시 파더보른 감독을 맡았는데 초반에는 좋았다가 나중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