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신상완은 1891년 5월 6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안녕면 송산동(현 화성시 송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수원 용주사에 들어가 불법을 공부했고, 1915년 12월 8일 강대련 용주사 주지가 겸무하던 평북 철산군 고성면 국청사(國淸寺) 주지를 맡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6년 3월 3일 평북 의주군 고녕삭면 영장사(靈藏寺) 및 평북 의주군 주내면 천왕사(天王寺) 주지 겸무가 되었으며, 1916년 3월 17일 평북 의주군 고성면 나한사(羅漢寺)의 주지겸무가 되었다. 즉, 그는 평북 철산 국청사와 의주의 영장사, 천왕사, 나한사 등 4개 사찰의 주지였고, 평안도 지역 용주사 말사를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신상완은 1917년 의주 나한사 주지를 맡으면서 남산교회와 남제교회의 소유권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하기도 했다. 두 교회가 차지하고 있던 토지는 1830년대까지만 해도 사찰 소유였다. 그러나 승려들이 이를 당지에 사는 조지봉(趙芝鳳)에게 헐값에 판매한 뒤, 조지봉의 자손이 기독교를 신봉하면서 1898년 9월 2일에 이들 건물과 토지 전부가 교회재산이 되어 교회당으로 활용되었다. 그러자 인근 사찰 승려들이 사찰재산을 늑탈하였다며 1898년 11월 고소하였으나 패소하였다. 1917년 나한사 주지 신상완은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917년 3월 13일 재판소에서 건물은 교회 소유로 판결하였고, 토지는 1917년 10월 임시토지조사국에서 교회소유로 고시함으로써 다시금 패소하였다.
이후 신상완은 1917년 11월 12일 국청사, 1917년 11월 13일 천왕사․나한사, 1918년 1월 17일 영장사 주지직을 사직하였다. 그러나 1919년 2월 3일 의주군 고성면 나한사(羅漢寺) 주지가 되었는데, 이는 용주사 말사들을 보현사 관할로 이전한 이후의 일이었다. 당시 신상완은 중앙학림에 재학 중이어서 주지 역할을 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나한사 주지를 역임한 것을 볼 때, 그의 신망이 당시 불교계에서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2.2. 3.1 운동
1915년 설립된 불교계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중앙학림에 재학 중이던 신상완은 학교를 대표하는 존재로 만세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3.1 운동 직전인 2월 28일 밤 한용운이 자신의 집에 긴급 소집한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한용운이 평소 신뢰하던 불교 중앙학림 학생들로, 모임 명칭은 '유신회'였다. 이들중 최연장자였던 신상완은 회장직을 맡았고, 김법린, 김상헌, 정병헌 등이 임원을 나누어 맡았다.
이들은 한용운으로 부터 3월 1일에 거행될 독립선언 준비에 관한 그 동안의 과정을 전해 듣고 독립선언서를 교부 받았다. 이후 신상완 등은 인사동의 범어사 중앙포교당에 다시 모여 독립운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의 긴급회의를 열었다. 우선 전국 불교계의 총궐기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중앙에 지도 연락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일행은 엄숙한 선서 아래 전운동의 중추기관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조직의 명칭은 ‘전국불교도 독립운동 총참모 본부'로 정해졌고, 신상완이 총참모가 되어 각기 부서를 정한 다음 밤을 새워가면서 실제 행동에 대한 준비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날 밤 인사동 범어사중앙포교당 회의는 새벽까지 진행되어 상당히 구체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방략이 논의되었다. 첫째, 연락처는 인사동에 소재한 신상완의 집으로 정해졌다. 둘째, 1918년 겨울 이래로 시국에 대하여 연락 협의해왔던 각 학교 학생단체와 제휴하여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으로 모여 민족대표 33인의 태화관 독립선언식과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로 나가 시위 행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셋째, 한용운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의 절반은 3월 2일 이른 아침부터 동대문 일대를 중심 삼아 각자 분담하여 시내 각처에 뿌리고, 나머지는 지방으로 파견원이 가져갈 것을 결정하였다.
넷째, 국내 각계와 연락하여 운동의 정세를 총괄하도록 정보를 수집하며 특히 해외 운동의 실정을 탐지하도록 노력할 것을 결정하였다. 다섯째, 지방 파견원은 각사를 방문하여 동지를 규합하되 나이든 승려는 지방에서 원조토록 하고 청년승려는 중앙으로 와서 실제 운동에 종사하도록 했다. 여섯째, 중앙과 지방의 연락, 특히 국외 운동자의 원조 등 장기적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방의 후원동지를 통하여 모집하기로 했다. 일곱째, 지방 파견원은 각사를 방문하여 각각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선언서를 다수 등사하여 부근의 마을 및 도시에 가서 배부하고 선언식 거행, 만세시위를 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항을 결의한 이들은 3월 1일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각각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헤어졌다. 이들은 1919년 3월 1일 당일 파고다 공원에 도착하여 오후 2시부터 시작된 만세시위에 중앙학림 학생들과 함께 참가하여 시위대의 주력이 되어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 3월 2일 각자 분배된 선언서를 뿌리고 검거되지 않은 일행은 각자 맡은 지역을 향해 밤차를 이용하여 남북으로 출발해 만세운동의 전국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상완은 3.1 운동의 전국 확대를 이끌어낸 뒤 일제의 수사를 피해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으로부터 여비 100원을 받은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불교의 세력이 미약함을 느끼고 4월 상순 상하이를 떠나 4월 중순 국내로 귀국한 뒤 자금을 확보해 불교도의 세력을 확장시키려 했다. 그러던 4월 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다시 김법린, 백성욱, 김대용 등과 더불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접촉해 불교계의 민족운동 지도에 대한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 및 불교 비밀결사 조직활동에 착수했다.
신상완은 상하이에서 안창호의 강연을 들었고, 이동휘와 만나 격려를 받았다. 그리고 신한청년당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을 애독하면서 국제정세와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이후 김법린을 5월 중순경 귀국하게 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힘쓰게 했고, 7월 중순 백초월 및 김봉신(金奉信)으로부터 2천원을 송금받아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전달했다. 또한 불교계의 상징적인 인물을 포섭하는 작업에도 착수해, 김포광(金包光) 스님을 상하이로 모셔오기도 했고, 각 본산의 주지들을 비롯한 원로들이 보낸 대표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신상완은 이종욱, 김법린, 김상헌 등과 회합하여 상해에서 승려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승려 가운데 유력자였던 경남 합천군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을 상하이로 불러들여서 승려들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7월 중순경 백성욱을 국내에 파견해 이회광을 모셔오게 했다. 그러나 8월 중순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자, 신상완은 안창호로부터 이회광에 대한 권유장 및 신상완을 강원도특파원 및 내무부위원으로 임명한다는 뜻의 사령장을 받아서 다시 8월 하순 국내에 들어왔다.
이후 이회광과 접촉한 그는 상하이로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회광의 태도가 애매모호하자, 경성으로 돌아와 다시 백초월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및 여비로 3백원을 수령하였다. 하지만 안창호로부터 10월 1일을 기하여 제2차 독립선언을 할 것이니 강원도 일원을 담당하여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라는 명을 접함에 따라 상하이로 가려던 계획을 중지하고 9월 20일경 강원도 철원으로 가서 석탄 중매인 신원균(申垣均)의 소개로 대서업자 강대려에게 제2차 독립선언의 계획을 말하고 독립선언에 관한 주의서를 교부했다. 강대려는 이에 따라 1919년 10월 10일 철원에서 박건병, 오세덕 등과 함께 철원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한편, 그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적인 논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최초로 편찬한 역사적 저작물인 <한일관계 사료집>에 '일본이 한국 불교에게 대한 핍박'을 게재했다. 그는 먼저 일제가 실시한 사찰령의 폐해를 지목했다. 그가 지적한 사찰령의 문제점은 다음 4가지였다.
그는 이러한 사찰령의 문제점을 서술하고 난 뒤에 곧바로 '금강산 승려 신상완'의 이름으로 '일본이 한국불교에 대한 압박'을 게재했다. 그는 이 글에서 . 승려의 세력과 의승군의 전통 및 승려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 및 승려들의 단결력이 강고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다음을 제시했다.첫째, 새로운 사찰의 창건을 금지함으로써 불교의 발전을 억압하고 있다.
둘째, 절이 사유한 토지와 건물 등을 총독의 허가없이 처분할 수 없도록 하여 불교재산에 대한 총독부의 감시감독을 강화하고 있다.
셋째, 30개로 나누어 본산을 정함으로써 조선승려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넷째, 조선의 전통적인 주지상속은 일종 승려 가운데 상당한 자격을 갖춘 자를 뽑아 썼는데, 사찰령 이후 주지 선정방식이 일본식으로 하여 승려들의 불평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는 조선 총독부가 이러한 조선 불교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사찰령을 비롯하여 불교계에 대한 탄압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가 본 불교계에 대한 총독부의 분열책은 다음 5가지로 정리된다.첫째, 대한승려들 세력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다. 승려 세력 그 자체도 그렇지만 사찰의 광대한 토지와 삼림 및 사찰에 속한 소작인을 비롯한 30만 명과 100만의 신도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승려세력의 잠재력에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동시에 소작인과 신도 130만 명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둘째, 의승군의 애국열과 역사적 전통을 들고 있다. 서산대사와 사명당 등 진속무이(眞俗無二)의 정신으로 의승군(義僧軍)을 조직했던 불교전통을 지닌 승려의 애국열을 꼽고 있다.
셋째, 한민족의 이권과 자유를 빼앗고 정의, 인도를 파괴하는 일본을 반대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라는 것이다. 한국인의 독립 요구와 이에 따른 행위는 부처와 예수 등 성인의 소원인 바 승려의 당연한 각오이라는 인식이다.
넷째, 대한의 사찰 전부는 한일합방 이후 총독정치로 함몰되었지만, 승려들은 단결력을 강고하게 함으로써 일본 승려의 야심이 실패하였다.
특히 총독부는 어용 불교단체를 조직하여 식민통치에 활용하고자 하였는 바, 총독부의 사주로 만들어진 친일적 불교단체인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와 불교옹호회(佛敎擁護會)가 그것이다. 그는 이러한 일제의 압박과 탄압에 맞서 불교계의 분투를 기원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지었다.1. 사찰령이라는 간교한 법률을 제정하여 사찰의 재산을 반관적(半官的)으로 간주하고 무상으로 수용했다.
2. 승려의 세력을 빌려 기독교도의 세력을 감쇄하고자 했다.
3. 승려를 허수아비로 사역하여 한국과 일본이 동근일체(同根一體)라는 허위무근의 역사를 선전케 했다.
4. 승려교육의 내정을 노골적으로 간섭하여 관사와 고문을 승려학교에 두었다.
5. 각 승려학교에서 지망하는 영어와 역사 등을 엄금하여 일본의 노예될 승려를 양성케 하였다.
1919년 11월 철원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이끌어낸 후 상하이로 돌아온 신상완은 1919년 11월 15일에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 집필에 관여했다.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는 독립운동선상에 불교세력을 결집, 강화하기 위하여 집필된 것이었다. 이 선언서는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에 참여한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이후 불교도 가운데 목숨과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자부했다. 또한 일제가 경찰과 군대를 증가시켜 더욱 한민족에 대한 억압정책을 자행하고 민중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가 국난을 당하여 의로써 일어났음을 임진왜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서산대사와 사명당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 불교의 호국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일제가 한국의 역사와 민족적 전통 및 문화를 전부 무시하고 각 방면에 대하여 일본화 정 책 및 압박정책으로 한민족을 전멸하고자 한다고 파악하면서, 이로써 불교도가 응당 궐기하는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봤다. 이러한 선언서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마무리된다.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 발표 하루 전인 1919년 11월 14일, 신상완은 여운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실 여운형의 일본행은 임시정부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다. 이동휘를 비롯한 원로들은 일제에 매수되어 친일파로 전락할 수 있음을 들어 강력하게 일본행을 반대했다. 그러나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던 안창호 등은 여운형의 도일을 찬성했고, 안창호는 여비로 3백원까지 마련해 주었다.이로써 우리들은 일어나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1천년 영광의 역사를 지닌 대한 불교를 일본화와 절멸로부터 구하기 위하,, 우리 7천 승려는 결속하여 일어나서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기를 발원함과 의를 중하게 여기고 삶을 가볍게 여기는 의기를 누가 막을 것인가. 한번 결속하여 분기하는 우리들은 대원을 성취할 때까지 오직 전진과 혈전만이 있을 뿐이다.
여운형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신이 맡고 있던 임시정부 외교차장․상해교민단장․교회 주사 등 모든 공직을 사임했으며, 나아가 일본 방문이 순전히 개인자격이며 임시정부와 무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일본에 가서 일본정부 당국에게 한민족의 독립운동의 열정과 한민족의 의사가 절대독립의 요구에 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신상완이 왜 여운형과 함께 일본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하건대 일본인들이 불교에 대한 믿음이 크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고,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를 발표한 직후 일본에 가서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새로운 방면으로 전환시키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여운형과 함께 일본으로 간 그는 11월 18일 도쿄에 도착한 뒤 일본 정부 인사들과 접촉해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으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2월 10일 상하이로 돌아갔다.
이 시기 신상완은 일본 정부로부터 불교계의 주요 독립운동가로 인식되고 있었다. 1920년 1월 15일 상해 총영사 아마자키 케이이치(山崎馨一)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상해 임시정부 관련 독립운동가 25명 가운데 불교계 인사로는 신상완이 유일하게 거론되고 있다. 또한 1920년 2월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조사한 중요한 독립운동가들의 약력에는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일제 첩보 문건은 신상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여운형, 손정도, 현순, 박용만, 신규식, 김규식, 이광수, 신채호, 최근우, 김립, 김구, 장건상, 정인과, 김철, 유정근, 김성근, 박은식, 조동우, 신상완, 유동열, 김덕, 도인권, 문창범, 김진무, 김규홍, 고일청, 노백린
이렇듯 상하이에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승려들을 조직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한 끝에 1920년 1월 21일 상해에서 안창호를 방문하고 ‘승군 조직’을 건의했다. 그리고 1월 24일 재차 안창호를 방문하여 ‘승려의용대 편제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뒤에 <임시의용군군헌제>로 구체화된다. 이후 그는 1920년 2월 말 비밀리에 귀국하여 불교계에 대한 조직화와 독립자금 모금 활동 및 유력한 승려를 상해로 망명시키는 일에 박차를 가하였다.“경기도의 승려로 佛敎上의 修養도 상당히 지니고 있고, 僧侶界에는 세 력이 있어 그 代表者로서 상해에 왔다. 항상 조선의 僧服을 입고 다닌다."
1920년 3월 8일. 신상완은 독립운동 자금모집을 목적으로 경상북도 영천군 은해사로 가서 주지 지석담(池石潭)과 만났고, 3월 24일 경남 동래 소재 범어사포교소에서 동지 김상호와 논의하여 운동자금을 제공받을 방안을 구상했다. 그 후 3월 17일 김상헌을 은해사로 파견하여 독립자금을 받아낸 뒤 귀경하였다. 또한 동지 이석윤(李錫允)에게 강원도 특파원에 임명하는 뜻의 사령을 주어 운동자금을 조달하도록 지시하여 강원도 간성군 건봉사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석윤은 1919년 10월 14일 안성에서 검거되었다.
한편, 신상완은 김상헌을 지휘하여 다른 날 승군 활동의 목적에 쓰기 위해 조선 전도 600매를 구입하였고, 석왕사 주지 강청월에게 제공받은 금 1000원 가운데 200원을 함께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진교에게 송부했다. 또한 백성욱으로부터 전달받은 <임시의용승군헌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를 석왕사, 해인사, 통도사에 송부했고, 불교계 30본산 중 15개소를 택하여 기밀부를 설치하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1920년 4월 6일 종로경찰서에 체포되면서 무위로 그쳤다.
2.4. 5년간의 옥고, 그 후
1920년 4월 6일 철원애국단 단원들이 검거되면서 위치가 탄로나는 바람에 체포된 신상완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후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정치범죄처벌령 등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3년 5월 출옥한 그는 1923년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조선 불교 당국 여러분께>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조선일보에 3회에 걸쳐 개재했다. 그는 이 기고문에서 청년 승려들의 불교유신회(佛敎維新會)와 원로 승려들의 불교협성회(佛敎協成會)의 대립을 비판했다. 즉 청년 승려를 중심으로 하는 유신회 측의 과격함과 기존 30본산 주지들로 대표되는 원로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듯한 태도를 모두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사찰령철폐 운동에 대하여도 보다 점진적으로 자신이 속한 사찰에서부터 시작하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면서 현재 총무원, 교무원의 싸움으로 피폐해진 승려교육의 현실과 승려 사회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즉, 불교진흥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한 노력은 곧 교무원과 총무원의 통일을 통한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유신회를 이끌며 불교 전반의 조속적인 개혁을 부르짖는 한용운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그는 불교계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은둔했다. 그의 스승이었지만 친일파로 변질되어 불교계를 친일적인 세력으로 이끌었던 용주사 주지 강대련이 입적한 직후 1942년 4월 25일에 실시된 된 대본산 용주사 주지 선거에서, 그는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선출되지 못했다. 또한 그의 옛 동지였던 여운형이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축했을 때, 그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지속했다. 그렇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51년 1월 28일 용주사에서 입적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신상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