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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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역사
4. 그 외
5. 관련 문서


1. 개요


神仙爐
한국의 요리 중 하나이자 궁중음식에 속하는 요리. 원래 명칭은 열구자탕(悅口子湯)으로, 신선로는 탕기를 칭하는 말이다. 별칭으로 '구자탕', '탕구자'라고도 한다.

2. 상세


둥근 탕기(湯器)인 신선로[1]에 고기, 해산물, 채소 등을 잘라서 넣고 소고기 육수를 부어서 끓이는 음식으로 밑바닥에 쇠고기, 무, 생선전, 천엽[2], 우간(牛肝)전, 미나리 또는 파를 담고 해삼, 전복을 넣어서 맨 위에 황백, 버섯, 홍고추, 완자, 깐 호두, 볶은 은행 등을 색조를 맞춰서 아름답게 돌려담은 음식이다. 한복과 같이 수려한 색의 조화와 다채로운 색채, 그리고 신선한 재료의 맛이 각각 느껴져야 하고, 육수를 먹을 때 모든 재료의 맛이 살아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포인트인 요리다.
색이 화려하고, 특이하게 생긴 조리기구를 써서 이색적으로 보이기에, 한국을 알리는 홍보 책자나 안내서 등에 표지모델로 자주 등장해서 한국을 상징하는 고급 음식이다. 다만 간장 등만 넣어 끓여 맛이 심심한 편으로, 자극적인 맛을 원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3. 역사


독특한 모양의 용기인 신선로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만, 후술할 정황과는 괴리가 있어 좀 걸러들을 필요성이 있다.
신선로의 유래는 사실 검소한 선비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당쟁으로 혼란스러운 현실 정치와 인연을 끊고, 재야로 들어간 조선 전기의 문신 정희량(1469~?)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497년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왕에게 경연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충언하던 강직한 신하였던 그는 무오사화가 일어나 사초(역사 기록) 문제에 연루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이후 유배지에서 풀려난 정희량은 가운데 구멍이 뚫린 대접 모양의 그릇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은둔 생활을 했는데, 이 그릇이 신선로를 만들 때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정희량이 만든 이 그릇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수화기제(水火旣濟), 즉 물과 불의 이치를 활용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정희량은 하룻동안 산과 들을 다니며 구한 채소들을 물이 담긴 그릇 주변으로 놓고, 그릇의 중앙에 뚫린 구멍에 숯불을 넣어 태워서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으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독특한 그릇은 정희량이 사망한 후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에게 신선의 기풍이 있다고 해서 이 그릇을 신선로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3]
이후 신선로는 궁중으로 전파되면서 여러 종류의 고기와 생선의 육수를 붓고, 갖가지 고급 재료와 양념을 넣어 만든 요리로 재탄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실 신선로라는 그릇의 형태 자체는 한국만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러시아의 사모바르(Samovar)를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훠궈[4][5] 등 비슷한 용기가 많은 지역에서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용기 중앙 격리된 공간에 연료를 넣고 가열하여 음식을 데우며, 용기 아래에는 산소를 공급해줄 구멍이 존재한다. 또한 뚜껑이 존재해 수분이 많은 요리를 조리할 수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6]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 문화권과 그에 영향을 받은 주변부에서 광범위하게 쓰고 있는 용기인 것이며, 결국 신선로도 이 것의 한 종류라고 보인다.
따라서 정희량의 일화가 진짜 신선로의 유래라고는 믿기 어렵다. 또한 <식탁 위의 한국사: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에서는 고서 <장음정유고>(1678)의 한 구절에 신선로를 '난주기'(暖酒器)라고 지칭하고 있고 '새로운 모양의 난주기는 중국에서 들어왔다'란 서술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난주기는 술을 데우는 그릇이란 말로, 사모바르 등이 원래 주전자로도 쓰인다는 점과 유사한 면이 있다. 18세기에 쓰인 <소문사설>에서도 신선로를 중국에서 온 그릇이라고 하고 있다. <동국세시기>, <계산기정>, <규합총서>, <임원경제지> 등에는 신선로와 열구자탕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고 있다. <무오연행록>에는 베이징에서 본 신선로 모양의 용기(훠궈)에 대한 묘사가 되어있다.[7][8]
정황을 종합해보면, 정희량이 신선로를 만들어냈다고는 믿기 어렵다. 다만 정희량이 중국을 통해 들여와 소개했을 가능성은 있어보이며, 18세기 경에는 조선의 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것을 알 수 있다.
신선로는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문화에 접촉한 일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조선요리저에서 애용되었다고 한다. 일본식 음식을 신선로에 내놓았다는 사례 등을 보면 그릇 자체로도 인기가 있었던 모양.
대한민국의 1960년대에도 고급음식으로 접대 등에 이용되었다.

4. 그 외


궁중 음식이자 고급 음식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쉽게 접하지 못하는 음식으로, 만드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게다가 요즘 가정에서는 신선로 그릇을 가진 곳도 드물고, 그릇의 가격도 비싼 편이라 한정식 집이나 고급 음식점 등이 아니면 만나기조차 힘들다. 이러다보니 아예 (음식이 와장창 나오기로 유명한 전라북도-남도 지역 한정식집을 제외하면)[9] 아예 지방에서는 '한정식집에 가도 볼 수 없는 요리' '만날 TV에는 나오는데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하는 요리' 취급을 받았다. 특히 1988 서울 올림픽 때는 TV에 한국의 얼이나 맛이라고 허구헌날 신선로 영상이 나오니 더 이런 인식이 심해진 감이 있다.
조선 궁궐에서는 은으로 만든 신선로를 많이 썼는데, 독살을 방지하는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1인용 신선로도 존재한다. 일반적인 신선로는 유기로 만들어지고, 싼 것은 백동 등을 사용했다.
<소문사설>에서는 신선로를 대합이라고 지칭하며, 요리를 중국의 것이라고 묘사하면서 '잡탕'이라고 하고 있다. 중국사람 여럿이 함께 먹는다고 되어 있다. 각상을 놓으면 운치가 없는 것이라고 하며, 중국의 풍속에는 (조선처럼) 밥상을 따로 놓는 예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조선에서 야외에서 뭘 먹거나 술 마실때 뭘 먹기 좋아 이 그릇을 사오는 경우가 있다는 서술이 있다. 오늘날 신선로가 한국의 고유 식기/음식처럼 인식되고 있으며 각상을 하는 것이 한국인에게 낯설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조미료 미원과 맛소금 등에 나온 로고도 이 신선로를 본따왔다. 참고로 이 로고가 아지노모토 로고와 비슷하다고 법정공방까지 벌이다가 패소한 인도네시아에선 이 로고를 못 쓴다고 한다.[10]
음식의 형태나 기원 등을 볼 때 샤브샤브와 연관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비슷한 형태로 '벙거짓골'이라는 요리법이 있다. 벙거지 모자처럼 생긴 그릇에 가운데에는 육수를 넣어 화로에 올리고 둘러앉아서 테 부분에 음식을 구워 먹는 일종의 회식이다. 고기를 테 부분에 구우면 육즙과 지방은 가운데의 육수로 흘러들어가고, 재료가 탈 것 같으면 국물에 덤벙 담갔다가 다시 올려 구웠다. 구울 재료가 다 떨어지면 육즙을 잔뜩 머금어 맛이 풍부해진 육수에 밥이나 면 등을 넣어서 싹싹 긁어 먹어치우는 아주 경제적인(?) 요리법이라고 한다.
터키에서는 신선로와 모양과 구조는 같지만 목적이 정 반대인 도구가 있다. 에흘리 케이프(ehl-i keyf)라고 부르는데, 동으로 만든 용기 가운데 부분에 술병을 넣고 가장자리를 얼음으로 채우면 술이 차가워지거나 차가운 상태로 유지되는 기능이 있다.구글 이미지 검색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이 대한제국에 방문 했을떼 고종 황제가 대접한 음식중 하나다.

5. 관련 문서



[1] 탕기 중앙에는 숯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여기에 불피운 숯을 넣어 음식을 따뜻하게 유지한다.[2] 의 위 부위로 만든 전.[3] 정희량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로 인해 삭탈관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후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하던 중 단옷날 바닷가에 신 두짝만 남기고 사라졌다고 기록돼있다. 이 보고를 들은 연산군은 그딴 나쁜 놈 찾아 뭐하겠느냐는 투로 그냥 넘겼다. 평소 정희량은 점복에 능해 앞날을 잘 보았다. 은둔 생활 중 곧 다가올 큰 화(갑자사화)를 인지하고 일부러 자살로 위장하고 미친 중으로 여생을 보냈다는 설이 조선시대 내내 퍼졌다. 아무튼 이런 행보 덕에 벽초 홍명희임꺽정 등 소설에서는 전우치처럼 도술에 능한 기인으로 나온다.[4] 현대에는 가스레인지 등을 통해 외부에서 가열하기 때문에 훠궈 용기가 중앙의 연료통이 사라졌지만, 청나라 시절의 묘사 등을 보면 신선로와 비슷한 형태를 훠궈라고 불렀다. [5]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고 북경에 본점을 둔 동래순이라는 훠궈 체인에선 아직도 전통적인 형태의 용기를 사용중인데 영락없는 신선로다.[6] 물론 차이점도 있다. 중앙아시아나 러시아의 사모바르는 수직으로 긴 편이고 수도꼭지가 달린 경우가 많은데, 사모바르는 주전자 용도로 쓰는 경향이 강하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범용적인 조리기구로 쓰기에 큰 것이 많이 보인다. 반면 동북아와 동남아에선 탕을 끓여먹는 냄비에 가까우며 수평으로 넓다.[7] 중국에서는 6세기의 <위서>에 훠궈의 모양과 같은 형태의 용기에 대한 묘사가 있으나, 대중화된 것은 청나라이후로 보인다.[8] 2015년 출토된 전한 폐제의 무덤에서 훠궈와 비슷한 형태의 청동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9] 사실 전라도 한정식에서도 반찬 가짓수가 많다뿐이지 신선로를 내오는 곳은 드물다. 오히려 신선로가 유행한 곳은 일본인들이 (자기네들은 신분 때문에 감히 손댈 수 없는 구 일본황족/화족 요리 대신) 마음껏 조선 궁중요리를 맛볼 수 있는 중부지방, 특히 서울 을지로였다.[10] 다만 아지노모토 로고는 국그릇 위에 다른 국그릇을 얹어놓은 모양으로 신선로와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