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재령군 봉기

 



1. 개요
2. 사건 전개
2.1. 이후
3. 남한 측의 인식
4. 북한 측 주장
5. 진위 여부
5.1. 1972년 경향신문 기사
6. 기타


1. 개요


대한민국과 해외 학자들은 '''신천·재령군 봉기'''라고 하며, 정확하게 말하면 신천 말고 다른 지역에서도 함께 봉기했으므로 '''황해도 봉기'''이다. 이 사건은 1950년 10월부터 6.25 전쟁 기간 중 일어난 사건으로 황해도 신천군재령군에서 북한군과 공산당원에 저항한 사건과 그리고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던 사건을 말한다. 학살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주동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북한에서는 '''신천 대학살'''이라고 부르며 미군홀로코스트 전쟁범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거가 없고, 대체로 북한군의 철수 과정에서 범죄, 봉기 과정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상호학살로 많은 희생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1,출처2 조선Pub기사,[1] 또 이에따른 북한군중공군의 보복으로 많은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2. 사건 전개


전쟁 전부터 황해도 신천군에서는 김일성 일가와 소련군과 함께 비밀리에 연대한 반국가단체들이 저질렀던 사상검열, 학살, 이외에도 각종 갖은 박해와 재산강탈 및 문화재 반출, 소련군정의 지원아래 김일성 세력이 일방적으로 실시한 토지개혁 여파로 인한 재산 강탈과 그에 저항하는 갈등, 기독교 탄압 등에 맞서 저항하여 대한광복회·반적대(反赤隊)·반공구국동지회·구국기독동맹 등이 조직되어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북한의 남침 이후 북한당국의 감시를 받던 전 민주당원·반공적인 학생들이 북한군의 징병을 피해 구월산으로 도피하였다가, 1950년 7월 중순 반공단체의 대표들이 모임을 갖고 '구월산반공유격대'[2]를 결성하였다. 입산하지 않는 학생들도 각 면, 읍내 학교와 단체를 포섭하였다. 이들은 유엔군의 참전사실을 알고 대한민국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서로 연락체제를 갖추고 지하 조직을 강화하여 전단살포·총기 탈취·경비 초소 습격 등을 해 나갔다.
특히, 1950년 10월 9일 사리원에서 해주 방면으로 가는 무기수송 트럭이 재령을 통과하게 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자환·호순겸 등이 북한군 복장으로 가장하고 재령무장대와 함께 북한군 트럭을 급습하여 소련제 장총 100여 정을 노획하였다. 유엔군이 해주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12일 대원들은 무장봉기를 위해 총지휘관 신상규·구월산유격대 김옥·북부대 홍태환 등을 조직별 책임자로 결성하고 13일 신천과 재령에서 동시에 거사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12일 야간에 대원을 배치한 후 10월 13일 오전 9시, 내무서를 공격했으나 공산군의 저항이 강해서 이튿날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14일 정오 무렵 내무서를 점령했다. 맥주병으로 만든 화염병을 내무서에 투척하여 전소시켰다. 내무서원들이 도망가자, 감옥에 억류되어 있는 반공청년 80명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이틀 동안 적들에 의해 살해된 수많은 시체를 발견했다. 산천여고, 정치보위부 지하실, 군당방공호 등에서 발굴된 시체는 1000여구가 넘었다.[3] 반공무장대원들은 이에 흥분하여, 마을에서 공산주의자를 찾아내 사살했다. 민간에 대한 가택수색과 거리검문 등으로 많은 주민들이 연행당했던 신천 시가지에서 남산에 대형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속에 무장한 의거대원 3명이 3개 대로 나누어 시가지로 돌격해 왔다. 의거대는 검찰청·내무서·인민위원회·정치보위부 등을 점령한 다음 문화극장의 유선방송을 통해 의거대가 시가지로 진입한 것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각 면에서도 동시에 봉기하여 내무서 분주소와 면 인민위원회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공산당 군당본부로 집결한 내무서원과 공산당원들이 의거대를 공격해 왔고 해주로부터 22대의 트럭을 타고 반격해 왔다. 마침 이 때 아군 전투기 4대가 적측에 기총사격을 가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의거대는 일제히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10월 17일 적을 물리치고 18일에 입성한 유엔군에게 기간중 활동사항을 보고하였다.
의거대를 경찰대(대장 김장성)로 조직하여 치안유지를 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 지역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산천 무장치안대는 향토 사수를 다짐하고 구월산에 잠복해 있다가 하산하는 북한군 공비와 항쟁을 벌이는 한편, 재령 방면에서 공격해 온 북한군과 맞서 신천읍을 세 차례나 빼았기고 빼앗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였으나, 신천 무장치안대는 향토사수를 결의하고 잔류했다. 하지만 구월산으로 숨었던 북한군 패잔병들이 신천읍을 거듭 공격하여, 무장대원들이 이를 방어하는데 한계에 도달하고 피해가 누적되자 1950년 12월 6일 신천무장대 본대는 인근 섬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신천군 북부면·노원면, 산천면·용문면·용진면·두라면 등 면 단위 무장치안대는 철수를 거부하고 구월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각 면 단위로 활동하고 있는 무장대를 하나의 조직체로 결속시키기 위해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구월산전투사령부와 신천군 남부지역에 있는 두라산을 근거로 한 두라산전투사령부를 각각 창설하였다. 구월산전투사령부는 무장대원 800명과 비무장대원 400여 명이 있었고, 두라전투사령부는 무장병력이 400명에 비무장 대원 300명으로 이루어졌다. 전투사령부는 산악지대에 구축한 공작 비밀 아지트를 근거지로 하여 정보수집, 애국반공인사 구출, 교란작전을 수행하였다.

2.1. 이후


1951년 2월 15일 신천 10.13 의거 당시 주동 역할을 한 장재화가 대원 37명으로 유격 제1부대를 창설했다. 3월 3일 장재화·홍태환·박주경 등 37명이 신천·황주·사리원 주변의 적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무전기를 가지고 구월산과 두라산으로 침투했다. 무전기를 수 차례 떨어뜨려 고장이 났기 때문에 게릴라 활동을 했다. 신천내무서·군당·안악내무서·삼천 모나자이트 광산 등을 기습하다가, 그곳 산악 지대에서 전 치안대원과 현지 반공 청년들을 규합했다. 1951년 4월 18일 문홍주·차현무 등 37명과 현지에서 입대한 대원 등 60명은 현물세 보관창고 4곳을 습격했다. 당시 창고에는 1700~1800명도 함께 억류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엔군이 점령할 당시 경찰서나 치안대에 근무했거나 그 가족들이었고, 유격대원의 가족들도 있었다. 창고를 공격하자 약 400명이 탈출했으나, 중공군 토벌대가 도착하여 반격할 때 나머지 인원은 대부분 피살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과정에서 대원도 50명이 희생되었다. 대부분 죽거나 실종되고, 7월 27일 장재화 등 8명이 귀환했다.
그 후 북한은 주민등록과 성분 재조사사업시에 황해도 일대에 인근을 어느 곳보다 엄밀히 조사하여 관련 가족을 색출, 가혹한 탄압과 박해를 가했으며 특히 '처단자 가족' 들은 모조리 혹독한 중노동현장인 산간 벽지 벌목장, 광산, 탄전, 발전소, 건설장등지의 정치범수용소로 집단이주시켜 강제 혹사 시키거나, 집단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3. 남한 측의 인식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채 그런 거 없다거나 "사실은 북한이 다 죽여놓고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 것" 정도로 언급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신천 의거일이라고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간략하게 공산당의 가족 처단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고, 학살을 미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나온 《6.25와 민간항쟁》이라는 반공서적에 버젓이 나온 이야기이다. 오래된 국사 교과서에서는 신천 방공 의거로 간략하게 언급된 정도다. 검색 엔진에 '신천 10.13 반공 의거'나 '구월산 유격대' 같은 것을 넣어 보면, 적지 않은 미화 사례가 검색된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는 '''신천 10.13 반공 의거'''라 하여 공산당에 대항해 싸운 유격대를 기리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쪽 부분을 설명한 작품이 황석영의 《손님》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마을 사람들간의 학살로 다루고 있으며, 약간 무리하게 화해와 갈등 해소를 강조하는데, 막상 재미교포 일부에게는 미군의 학살을 은폐했다는 이유로 까인다고 한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4월 21일 방영분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북한 측 기록 영상 화면을 최초로 소개하였고 당시 관련자 인터뷰를 일일이 했다. 황석영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다는 점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곳에 나온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당시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당대에는 공산당과 김일성의 만행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탄압받던 우익들이 좌익과 투쟁하는것은 생존 그 자체의 문제였으며 그 와중에 저지른 무고한 인명에 대한 학살은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정도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4]

4. 북한 측 주장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군과 국군이 북진하면서 미군들이 38선을 넘어와 황해도 신천군을 점령하면서 '해리슨 중위'라는 점령군 사령관의 지시로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지어 반미 교육으로 이용하고 있다.
휴전 1년 전인 1952년, 국제 사법단체로 공산주의 계열의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5]에서 북한의 요청으로 북한 지역을 돌며 ‘한반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 계급의 신천 점령군 지휘관과 예하 미군 1개 중대 그리고 국군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려 약 3만 5천여 명,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측 선전화를 찍은 사진이 있는데, 흑백 사진이지만 일방적인 '''대학살 현장'''을 찍은 사진이 들어 있으니 주의.(#)

5. 진위 여부


북한은 학살 주체를 미군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군이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다. 당시 미군은 북진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또한 북한이 주장하는 신천 점령군 사령관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대장은 당시 미군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명단 그 어디에도 없다. 이름만으로 따지면 미8군 부사령관 윌리엄 켈리 해리슨이 있지만 그는 신천이나 그 근방까지도 아무련 연관이 없는 인물이다.[6]
더군다나 북한이 주장하는 수많은 잔학행위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점령군이 피점령인을 재미와 공포로 살해하기에는 너무나 이념적 적개심이 가득한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강간이나 칼로 살해한다는 등은 난징대학살이나 다른 미군 범죄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머리에 노동당원증을 못박았다든가, 코를 꿰서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일은 하기도 힘들고 피학살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로 크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는 현재까지는 전혀 없지만 학살 자체는 존재했음이 인정되며 이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신천군 주민들 사이에 '좌우 대립' 격화로 우익 세력들이 학살을 주동하여 3~4만명의 좌익계열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학살 사례를 보자면 치안관리라는 명목으로 좌익 혹은 무고한 주민 학살에 나선 일이 대부분이다. 이런 걸 볼 때 마을 단위에서 일어난 우익의 학살극이 미국에 의한 학살 의혹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우군이 진격한 후 즉시 대한민국북한을 접수하였더라면 이렇게 처참한 피의 복수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치안대 등 민간에 방임한 탓으로 무수한 무명의 부역자 가족이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쉽게 말해 국군미군이 북진에만 혈안이 돼서 점령지 관리를 내팽개친 탓에 이런 헬게이트가 열렸다는 평가.
추모행사는 열리고 있지만 학살의 희생자가 아닌 '반공 의거' 때 사망한 반공주의자들을 추모하는 성격에 가깝다. 오히려 '''유엔군 측 자료'''에는 많이 나오는 이야기이다.(한겨레 21 2002년 4월 17일 405호 기사)
한국의 민정 경찰[7]이나 우익 민병대, 게릴라부대 내지는 청년단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민간인을 '''불법으로 처형''' 내지는 부상자들을 고의로 방치시켰던 건 의외로 많이 소개되었다. 1950년 황해도에서는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주민들을 학살하고 부상당한 민간인들에게 미군이 지급한 식량과 의약품도 갈취하는 반공 유격대의 만행에 격분한 영국군 정보 장교가 반공 유격대장 머리에 총을 겨누고 후에 미군 사령부에 항의한 기록도 존재한다.
이를 좀 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당시 민간인 유격대나 자경단은 좌우익 할 것 없이 양 진영 모두 있었고, 좌익이 점령하면 좌익 자경단이 우익을 살해하고, 우익이 점령하면 우익 자경단이 좌익을 살해하는 등, 막장일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북청년단도 비슷하게 탄생한 부류이며, 소련김일성 일가 때문에 갖은 박해를 다 받다가 하루아침에 전 재산 다 날리고 좌익 민병대에 공격 받은 우익 세력의 분노와 보복극이 빚어낸 참사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좌익들도 미군정 이후 갖은 탄압을 받았기에 6.25 전쟁 초기에는 좌익들의 우익 학살도 많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좌우파나 사상, 국가의 숭고한 명예 그딴 거 모르는 순진한 주민들이 단순히 평소의 친분 혹은 친인척·학연 등으로 같이 묶여서 절단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 아들이나 아버지가 사병이나 장교로서 국군으로 열심히 싸우는데도 가족이나 친척이 이렇게 학살당해 나중에 그걸 알고 절망감에 탈영[8]하거나 군을 그만두고 지금까지도 한국군에 대한 증오를 쏟는 생존자[9]도 있다. 당시 증언자들 중에는 "그때 중학교 동창 5명이 끌려갔는데, 나 빼고 나머지 애들은 지금도 행방불명됐다. 이런데 참을 수 있느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당시 학살과 보복 학살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져서 아직도 화해하지 않고 있는 마을이 대한민국에도 여럿 있다.

5.1. 1972년 경향신문 기사


1972년 관련자의 증언(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북괴위 분류에 의한 처단자 가족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은 황해도 10.13 반공의거사건에 가담했거나 연계를 맺었다가 체포되어 처단된 사람들의 가족이다. 이 황해도 10.13 반공의거사건은 50년 6.25 동란 발발 2개월전인 4월 17일 조선민주당 재령군당 위원장 김씨와 정씨가 주동이되어 조직한 대한광복회의 발족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대한 광복회는 10월 9일 '하오 2시에 사리원으로부터 해주 방면으로 무기를 수송하는 괴뢰군추럭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기탈취 작전을 벌였다 정씨을 비롯한 수명의 동지는 괴뢰군복으로 가장하고 신대리에 있는 권씨 과수원에 대기하고 있다가 기다리던 트럭이 지나 가자검문형식으로 차를 멈추고 괴뢰군 군관과 운전사를 끌어내려 군관은 즉결처단하고 운전사를 귀순시킨후소련제 장총 2백 14정을 노획했다.그리고 그 중 1백14정을 광복회신천 지부장 김씨댁에 전달하여 폭동에 대비토록 했다. 이렇게 무장을 갖춘 재령·신천지구 애국자들은 10월 13일에 무장봉기할 치밀한 계획을 짜고 탄약의 보충, 태극기와 의료 약품 준비등을 해나갔다.
10월 13일 하오4시 먼저 재령읍 남산 산마루 높이 태극기가 꽂히는것을 신호로 장총으로 무장한 청년들을 앞세운 시민들이 봉기했다. 총소리와 함께 교회 종이 일제히 울렸으며 사기 충정한 무장 의거군은 제1중대 제2중대 제3중대 특공대 선무공작대 연락대로 각각 대오를 나우어 괴뢰 검찰 소를 비롯하여 내무성 정치보위부 우편국 군·면 인민위원회등 각 기관으로 물밀듯이 진격하여 삽시간에 모두 점령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다른 면들에서도 괴뢰 지서와 면 인민위원회를 습격, 점령했다. ''대한민국 만세!''소리와 애국가의 합창소리가 재령군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에 극도로 당황한 북괴는 괴뢰군 대부대를 재령땅으로 급파했다. 의거군은 한동안분전햇으나 역부족으로 신천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신천에서는 신씨의 지휘 아래 밤9시 총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각 기관으로 진격하다가 재령에서온 동지들과 합세했다.
10월 14일 새벽, 날이 밝자 의거군은 총기이외에 수류탄 대용으로 휘발유가 든 사이다병, 솜 마개에 불을 지르며 쳐들어가 내무서를 비롯한 각기관을 노 도와같이 습격, 점령했다. 또한 15일에는 괴뢰 군당을 포위하여 이를 점령하고 범바위 산등에 자리자고 최후 반격을 시도하는 잔당을 소탕했다. 그리고 16일에는 새로 내습해 온 괴뢰군부대와 치열한 잔당을 소탕했다. 그리고 16일에는 새로 내습해 온 괴뢰군 부대와 치열한 야간전투를 전개하여 양랑리 온천면 용문북부 토성리 남률 북률 서호등지에서 적을 격퇴했다. 특히 17일 북부 의거대는 괴뢰 황해도 인민위원장을 사살하여 북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리하여 의거 5일만인 18일 밤 10시, 재령·신천일대를 평정한 상태에서 유엔군의 입성을 마지하였다.
바로 그 이튿날 의거군으 유엔 주둔군사령부에 다음과 같이 전과를 보고했다.
전리품=자동차 1백18대, 야포2문, 반전차포 37문, 소총 4천46청, 따발총3백 14정, 중,경기관총 195정, 수류탄 1트럭분, 탄환 수백상자, TNT 2트럭분, 권총 46정, 우마차 3백여대.
괴뢰군 생포=1078명.
애국동지 희생자=5백24명.
이러한 전과보고와 함께 전리품 일체를 유엔군에 인계하고 다음날 순국동지의 합동장례식을 거행했다. 이와 같이 황해도 10.13 반공의거사건은 북괴를 공포속에 몰아넣고 심대한 타격을 가한 대대적인 애국적 거사였다. 그래서 북괴는 이 사건 가담자와 관련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 학살하였고 그 가족에게 '처단자 가족'이라는 딱지를 붙여 온갖 학대와 박해를 가하고 있다.


6. 기타


[image]
입체파의 대표화가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대학살》도 위의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자세한 것은 파블로 피카소 문서 참조.massacre in korea(한국에서의 학살)
미국 여권을 가진 최재영 목사가 북한의 황해도 신천군을 방문했을 때, 신천군에서 가난한 노비와[10] 빈농 및 소작농 같은 하층 계급들이 좌익 계열에 가담했다고 밝혔다. 최재영 목사가 직접 만난 신천 출신의 실향민들은 6.25 당시 부유한 지주와 중농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의 사고 의식의 저변에는 노비와 빈농 출신들이 대부분인 좌익 계열의 주민들을 매우 업신여기고 모멸하는 정서가 매우 강해서, "그런 보잘 것 없는 인간들(빈농, 소작농, 노비)이 김일성 정부가 들어서며 시절이 바뀌니까 몇 달간 어디 가서 빨갱이 교육을 받고 와서 우리들 앞에 나타나 거들먹거리며 상전 노릇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중략).. 결국 보복이 두려우니 그들을 안 죽이면 내가 죽으니 그들을 먼저 죽였어야 마땅하다"는 말을 당당히 했다고 한다.노비와 빈농 소작농들은 좌익 계열에 가담했다. 그리고 이런 빈부에 따른 좌우 대립 문제는 교회 안으로도 번져서 지주나 부농 출신의 부유한 신자들은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을 적극 반대하는 반면 전답이 없는 빈농이나 소작농 같은 가난한 신자들은 적극 찬성함으로써, 결국 교회가 찬반양론으로 나눠져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하였고 급기야 신천군에서 주민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잔인한 학살극에 돌입했던 것이다.

[1] 1957년에 나온 신천군 반공의거를 다룬 조동환의 책 항공의 불꽃에도 학살의 근원적 책임은 북한에게 있다고 했지만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묘사하고 있다.출처 블로그, 2002년경 나온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7회 신천군 사건편에서도 당시 생존해있던 신천 출신 반공 의거인들의 인터뷰를 수록한게 있는데 북한과 좌익의 괴롭힘과 학살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히 하고 있지만, 좌익에게 당해 분노한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해서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유튜브 영상[2] 구국동지회 내에 유격대를 편성했다.(조동환, '항공의 불꽃', 보문각, 1957, 89-97면)[3] 조동환, 항공의 불꽃, 369-371면[4] 홍위병이나 나치 친위대 잔당들처럼 시류에 휩쓸려 만행을 저지른 자들의 상당수는 자기가 저지른 짓을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나치 독일 전범들에게 각국 사람들이 "잘못을 반성하느냐?"라고 묻자 그들의 대답은 대부분 그 시절이 자랑스럽다는 것이었다. 다큐 영화 액트 오브 킬링 역시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5]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6] 한 과학자 출신 탈북인은 이 사건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가진 나머지 자신의 지역으로 이사온 신천군 출신 여성에게 생활품을 뇌물 형식으로 주면서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여성은 "미군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라고 했다고.[7] 내무부 소속이 아니라 점령지에서 피점령 주민으로 구성된 자치부대.[8]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국군으로 열심히 싸우던 이진태(장동건)가 북한군으로 넘어간 동기.[9] 2002년 당시 77살인 김창남(사병) 씨와 74살인 안종식(당시 소위) 씨가 증언하길, "우린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한국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러는 조국이란 것은 보답으로 내 부모와 친척을 이렇게 빨갱이라며 죽였다. 그래서 시체조차도 집단으로 매장하거나 바다에 버려서 가묘와 추모비로 제사를 지낸다. 정말로 빨갱이라면 우린 이렇게 나서서 큰소리도 못낸다. 그분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순박하게 농사짓고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냥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빨갱이라는 증거도 그렇더라고 할 뿐, 당시 지휘하던 이들도 증거라는 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피해다닌다. 이러는데 나라사랑? 대한민국? 이럴 수 있느냐?"라고 50년 동안 참았던 울분을 쏟아부었다. 출처는 지리산 킬링 필드.[10] 해방 이후에도 노비가 있었다는 말에 이상하게 여길 사람도 있겠으나, 남한에서도 1960년에 머슴이 무려 24만 명이나 되었던 현실을 감안한다면, 한국 전쟁 무렵 신천군에 노비가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