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녜스 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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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벨기에 출신 프랑스 영화감독.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누벨바그 분파 중 센 강 좌안파에 속하는 인물. [1] 2010년대에도 여전히 꾸준한 활동을 보였던 노익장 감독이기도 했다.
브뤼셀에서 엔지니어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아를렛이였으나 19살에 개명해서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부계 혈통은 소아시아 출신 그리스인이라고 한다. [2]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사실 영화광들로 유명했던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과 달리 처음엔 영화랑 별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 [3] 문학이나 미술을 좋아했지만 처음엔 큐레이터가 될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후 에콜 드 보자르에서 사진을 공부하긴 했지만 그때도 영화 감독이 될줄은 몰랐다고 한다. [4] 1955년 데뷔작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도 영화로 찍을 생각은 없었고, 라 푸앵 쿠르트 사진을 찍어서 친구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즉흥적으로 영화 카메라를 빌려 다큐멘터리와 전문 배우를 캐스팅해 픽션을 엮어서 영화를 만들었다.
14,000달러 저예산으로 빠르게 찍었던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은 카예 뒤 시네마 세대보다도 5년 일찍 새로운 영화를 발명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바르다를 주목받는 감독으로 만들었다. 편집 과정에서 알랭 레네나 알랭 로브그리예 같은 좌안파 멤버들을 만나 친해지고, 훗날 남편이 되는 자크 드미[5] 을 비롯해 장 뤽 고다르[6] , 프랑소와 트뤼포, 에릭 로메르 같은 누벨바그 멤버들도 알게 된다. 그렇게 두번째 영화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와 행복을 통해 아녜스는 페미니즘적 주제와 사회비판,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간의 경계 허물기 같은 진보적인 실험을 내세워 평단의 지지를 받았고 후배 샹탈 애커만과 더불어 현대 여성 영화 감독의 선구주자가 된다.
이후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제인 버킨과 샬롯 갱스부르 모녀가 바르다의 아들인 마티유 드미가 출연한 아무도 모르게라던가 상드린 보네르가 주연해 히트쳤던 방랑자 같은 영화를 발표하면서 활동했다. 자크 드미가 세상을 떠난 1990년대부터 천일야화를 마지막으로 극영화는 손을 뗐지만 되려 2000년대에는 이삭줍는 사람과 나를 통해 다큐멘터리로 활동 무대를 전환하면서 DV/디지털 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였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전보다 느긋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면서 2017년 공동 감독 JR과 함께 신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내놓았다.
영화 주제로 보자면, 여성의 위치에서 페미니즘적인 고찰과 비판 [7] 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간의 모호한 경계, 마르크스적 고찰, 이면화 작업을 특징으로 꼽는다. 이외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어서, 2000년대 이후로 디지털 매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페드로 코스타 같은 혁신적인 디지털 다큐멘터리 흐름에 동참하기도 했다.
여성 영화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감독인데, 바르다 데뷔 이전까지 여성 영화 감독은 도로시 아즈너나 아이다 루피노, 자클린 오드리 같은 케이스를 제외하면 감독 되기도 힘들었고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바르다는 그 점에서 여성 감독의 선구자적인 가능성을 선보였고, 지금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기에 존경받는다. 더불어 자크 드미와 함께 누벨바그 세대 감독 중에서는 유일하게 할리우드에 정착해 활동한 적이 있는 감독인지라 [8] , 할리우드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감독이다.
자식으로는 감독이자 배우로 활동하는 아들 마티유 드미와 프로듀서인 딸 로잘리 드미가 있다. 자식사랑이 지극한지 '''자식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어서 영화에 출연시켰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본인도 유명한데다 남편 자크 드미 역시 프랑스에서 흥행 감독으로 입지가 있어서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면 카트린 드뇌브나 제인 버킨을 비롯한 쟁쟁한 스타들과 같이 찍은 사진들이 자주 나온다. 의외로 고급 에로 영화로 유명했던 잘만 킹 부부하고 친했다고 한다. 때문에 장례식 전 추모 행사에도 드뇌브를 비롯해 마리옹 코티야르와 기욤 카네, 상드린 보네르, 자크 오디아르, 제인 버킨 같은 명사들이 얼굴을 보였다.
2019년 3월 29일 암 합병증으로 타계하였다. 유작은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9]
한국에는 200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로 내한한 적이 있었다. 2017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같은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을때, 건강 문제로 내한하지 못했지만 축사 영상을 찍어 보냈다. 직후 개봉할떄도 공동 감독 JR과 함께 다시 한번 축하 영상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참조한 글
[1] 센 강 좌측에 있고, 좌파적인 정치 견해를 보였기에 붙여진 별명. 누벨바그보다 훨씬 일찍 활동했으며 기억에 대한 고찰과 영화의 형식을 실험하는 난해하고 급진적인 스타일로 유명했다. 알랭 레네, 크리스 마르케, 알랭 로브그리예, 장 마리 스트라웁,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이 분파에 속한다.[2] 아녜스의 삼촌은 유명한 화가였던 장 바르다였고, 아녜스가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다.[3] 그나마 에릭 로메르가 비슷하게 영화랑 연관이 없었다.[4]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데뷔작 편집을 맡았던 알랭 레네는 영화를 보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하고 닮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한 바르다의 대답은 '''비스콘티가 누구임?'''였고 레네가 당황했다고. 바르다는 데뷔작의 혁신성을 영화광적 지식과 상관없이 그냥 스스로 발명해버린 셈이다. (본인은 윌리엄 포크너를 예로 들었다.) 바르다 본인도 레네 때문에 영화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고 밝힌바 있다. 참고로 25살에 본 영화가 딱 10편 정도였는데, 그 중엔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도 있었다고 한다.[5] 쉘부르의 우산으로 유명하다.[6] 마지막 누벨바그 생존자라는 공감대가 있고 초기엔 바르다 영화를 칭찬하기도 했으나, 고다르 성격이 워낙 오만하고 까칠한지라 불화가 있다. 평소에도 별로 만나지 않는 듯 하며 2017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혹시나 하고 스위스에 사는 고다르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 당하고 디스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7] 다만 바르다는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상당히 논쟁적인 감독이였다. 극영화 시절엔 아이러니와 은유, 모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형적인 여성상을 인식하고 비판하는 페미니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언제든지 대체될수 있는 가부장 체제의 여성의 위치를 아이러니로 비판한 행복은 공개 당시 마지막에 패배한 주인공 결말로 불편한 반응과 동시에 가부장제의 불륜을 옹호하는거 아닌가라는 논란이 있었다.[8] 의외로 누벨바그 감독들은 전성기에도 프랑스에 남아서 활동했다. 영어 영화 역시 고국이나 영국에서 주로 찍었다. 가장 할리우드 친화적이었던 트뤼포조차도 화씨 451에서 영어 영화 만들기의 곤란함을 겪고 줄곧 프랑스 영화만 찍었다.[9]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후속 다큐멘터리로 2010년대 이후 작업들과 회고를 다룬다. 베를린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서 첫 공개. 바르다의 방랑자로 함께 작업한 상드린 보네르가 오래간만에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