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 특별선언
첫째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 둘째는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할 것입니다. 셋째는 과소비와 투기 또 퇴폐와 향락을 바로 잡아 일하는 사회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 당시 대통령 노태우 (해당 동영상 4분 28초)
1. 개괄
1990년 10월 4일, 보안사 윤석양 이병에 의해 노태우의 친위 쿠데타 계획인 청명계획이 폭로되면서 여론이 끓어오르자 정국을 전환하기 위해 13일 등장한 대통령 특별선언이다. 이름 그대로 범죄와의 전쟁을 치러 근절시키겠다는 이야기였다.'''범죄와의 전쟁'''
사실, 조직폭력배같은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작업들은 과거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이후 군사독재 정권시대가 되면서 화랑동지회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을 무더기로 체포하던 일이 많았기 때문에,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슬로건 자체는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또한,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역시 삼청교육대 등으로 상징되는 치안정책을 폈었다. 결국, 그 시절에도 검찰과 경찰이 늘상 해왔던 작업이었던 것이다. 다만 범죄와의 전쟁이 상기된 치안 정책과 다른 점은, 그 범위와 깊이에 있다. 즉 그 이전에는 군사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소위 뇌물의 형태를 띈 상납금을 제대로 내지 않은 조폭들만 그것도 일부를 본보기로 골라서 잡았다면, 이 때는 더욱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대대적으로 때려잡은 것이다.
노태우는 1990년 5월 7일에 특별담화를 통해 법질서 확립에 대한 결의를 표명했으며, 3일 후에 치안관계 장관들은 유례없는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 범죄와 폭력을 발본색원할 것을 크게 다짐했다.
제5공화국~6공화국 당시에 공안정국을 조성하면서 경찰력 상당수가 간첩조작 및 민주화 세력 탄압에 사용되면서 치안공백이 지적되었고 강력 범죄가 급증했다. 한편으로 1986년 3저 호황으로 인해 유흥업 수요가 급증하면서 인신매매와 납치가 여성을 중심으로 극성을 부렸다. 네이버 과거 기사 검색으로 납치를 검색하면 1980년대에 수많은 기사가 검색된다.
당시 윤락업은 흑산도 같은 섬 지역이나 경북의 내륙 깊은 시골에까지 뻗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인신매매 괴담의 상당수가 이때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납치되었다가 경찰의 윤락가 단속 혹은 자력탈출로 인해 신변이 확인된 여성의 수가 많았다. 여성뿐만 아니라 어선 등으로의 남성 납치와 매매도 존재했다.
특별선언의 1년 전인 89년부터 치안본부는 이미 5대 사회악의 특별단속을 지시하여 실행 중인 상황이었다. 경찰은 단속강화를 위해 인력 및 장비를 보강하였고,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등 6대 도시에 무술유단자 등의 전문요원을 뽑아 각 사안별로 편성해 운영하는 한편, 광역화된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공조수사 체제를 구축하였다.
검찰도 역시 89년부터 범죄 단속을 위해 조직을 강화하였는데, 대검찰청에 민생치안문제를 전담하는 강력부를 신설하여 인신매매, 가정파괴, 조직폭력, 마약, 부정식품 사범 등 5대 사회악에 강력 대처하였다. 검찰은 이와 함께 공직자의 뇌물수수 사건 등 공직부패사범에 대한 국민들의 수사 요구가 높아지자 이를 직접 조사하기 위한 조사부를 서울지검 등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 선전포고는 TV로 생중계될 뿐더러 거의 모든 일간지 톱 기사를 장식했다.
2. 후속작 - 새질서 새생활 운동
또 1990년 11월에는 범죄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새질서 새생활 운동'이란 캠페인이 전국을 휩쓸었다.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에선 2억 원의 예산을 들여 아르바이트 대학생까지 동원해 연말까지 3백만 명이 참가하는 캠페인까지 벌이기에 이르렀다. 또 당시 경북도지사 김우현이 "근무자세가 해이한 자는 직위 해제시키겠다"고 경고하자, 경북지역 내 시장/군수들은 현수막과 입간판 등 가두 홍보물이 얼마나 설치되었는지 일일이 확인하느라 진땀을 빼기까지 했으며, 일선 시/군 단위 공무원들은 "이건 홍보물 설치 전쟁과도 같다"고 하며 "이래저래 죽어나가는 건 말단 공무원들뿐"이라고 불평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건지 언론 역시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신문 1990년 11월 20일자는 '새질서 새생활 운동'을 위한 결의대회에 공무원이 대량 동원되어 행정공백현상이 나타나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다고 보도하였고, 사흘 뒤 조선일보에선 새질서 새생활 운동에 공무원은 물론 직장인, 국민학생들까지 총 동원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중앙일보 12월 1일자 기사에선 모 도교육 위원회가 새질서 새생활 운동에 동원된 13만 명 중 학생이 전체의 90%였다고 보도했다.
이 캠페인은 199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거기에 '30분 더 일하기 운동'과 '10% 씀씀이 줄이기 운동'까지도 가세했다. 중앙일보 1991년 12월 7일자에서 해당 운동에 동원된 연인원은 대한민국 인구의 9배에 이르는 3억 4,925만 3천여 명, 연단체/기관 수는 254만 5,812개에 이르렀으나 이들 대부분이 각종 결의대회, 기관장 간담회나 피켓/어깨띠를 동원한 가두 캠페인 등 구호 차원의 참여밖에 없는 대회뿐이었다.
3. 빛과 그림자
조직폭력단체의 활동이 크게 줄어들었다. 모든 조폭을 뿌리뽑지는 못했지만 양지에서 대놓고 활동하는 폭력조직은 대부분 소탕되었으며, 살아남은 단체들도 상당한 타격을 입고 음지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이 때 한바탕 정리함으로써 한국에는 마피아같은 거대한 조폭단체는 없어지게 되었다. 21세기 현재 일반 국민들이 범죄조직을 무서워하지 않고 마음놓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의 안정된 치안이 만들어지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대통령령이기 때문에 그 전에는 적당히 묵인되었던 조직들도 싸그리 소탕되었고 1년 동안 전국 2백여개 조직에서 7백여명이나 구속되었던 대규모 체포가 이뤄졌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범죄와의 전쟁'은 보안사 청명계획 폭로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홍보전쟁'이었다.
처음에 이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는데, 정부 통계에 따르면 당시 살인사건이 평균 이틀에 세 건, 강간사건이 하루에 열두 건씩 발생하고 있었으니, 범죄에 염증을 느낀 국민 입장에선 거창하게 벌인 '범죄와의 전쟁'에 호의적 평가를 내린 건 당연지사. 실제로 1990년 10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선 조선-갤럽 공동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77%가 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잘한 일'로 평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직 홍보뿐인 '범죄와의 전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각종 관제운동 전개와 홍보물 대량 설치, 무장 군인들의 시내 순찰과 실적 위주의 인권유린이 가세된 공포 분위기 조성용 '홍보'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문제는 '인권침해' 문제였다. 범죄와의 전쟁 과정에서 높으신 분들이 전국의 경찰국과 경찰서에 실적을 올리라고 압력을 넣는 바람에 애꿎은 사람들이 사소한 트집 하나로 범죄자로 몰려 수없이 체포되었고, 고문수사 및 진술강요 역시 늘어나면서 문제시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시기에 일어났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경우, 화성의 사건 현장 주변지역의 어지간한 남성들은 죄다 끌려가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그 와중에 크고 작은 폭행과 고문, 협박을 당했다. 1990년 10월 ~ 1991년 4월까지 경찰의 가혹행위로 3명의 애꿎은 남성이 정신분열증에 걸리거나 자살하였고, 8차 사건은 경찰이 부실조사 끝에 윤 씨에게 누명을 씌우고 20년을 감옥에 가뒀다. 그러고도 정작 훗날 밝혀진 진범인 이춘재는 전부 빠져나갔다.
특히 세계인권선언 42주년을 맞이한 1990년 12월 10일 대한변호사협회는 "범죄예방을 빙자해 선량한 시민이 부당하게 자유를 억압당하거나 범인 검거 구실 하에 불법연행과 폭행, 고문 등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하며 "정치지도자들은 국민의 기본권 옹호를 위해 비민주적인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혁신적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대한변협이 낸 1990년 인권보고서에선 "범죄와의 전쟁 선포 뒤 불법 가두검문 및 검색, 불법연행, 총기사용의 남용 등으로 인권침해가 커졌다"고 하여 "1990년 11월 기준 시국 관련 수감자(양심수)는 1,295명이었고 이 중 국가보안법 위반자는 전체의 40%인 513명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특히 1991년 '범죄와의 전쟁 1돌'을 맞이해 '범죄소탕 70일 작전'이라는 실적 위주의 작전으로 인해 수사 도중 인권침해 사례[1] 가 대량으로 속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허위신고 하나에만 의존한 채 20대 여성 두 명에게 가혹행위를 해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가 하면 열 살 짜리 국민학생을 조폭으로 둔갑시켜 소년원에 보내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그렇다고 경찰들만 탓할 수 없는 게, 왜냐면 정부가 '민생치안평가제'라는 실적주의 방식을 도입하여 일선 경찰관에게 실적을 올리라고 닥달하는 바람에 말단 경찰관들이 출동해 과도한 비상근무로 인한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고 심지어 사망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정국전환용 쇼라는 민주화 세력의 비판이 거세었다. 이 때 소탕된 범죄조직 수가 적지 않았으며 이 기간 동안 숨죽이고 있던 범죄자들도 많아 대외적으로는 치안이 상당히 좋아지는 효과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미 1989년부터 진행됐던 검찰 수사로 폭력조직 상당수가 검거된 상황에서 선포된 것으로, 검찰의 수사 실적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범죄율이나 마약사범이 감소되었다고 하지만 2년도 안 가 동아일보에선 시사만화로 노태우가 범죄와의 전쟁이라고 크게 소리치고 조폭들이 귓구멍을 막고 비웃는 게 실리기도 하여 장기적으로 별 효과가 없다고 풍자되기도 했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 체포, 수감되었던 범죄 조직원들이 기간을 채우고 풀려날 2000년대 초중반에 조직이 재건될 것이라고 경찰에서 우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검거된 범죄자들이 형량을 마치고 점차 풀려나와 조직 재건을 시도하다가 꼬리가 잡히는 경우가 있었지만 치안에 큰 영향을 줄 정도의 사회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가시적인 피해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조직들은 법인을 내세우는 '기업형 조폭'을 표방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조직들을 지탱해오던 수익구조가 시대가 바뀌면서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폭력을 통한 보호비 갈취가 주였지만 지금은 주식, 부동산, 금융, 이익단체 등에 개입하며 불법적인 성향을 내포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2] 비교적 실체를 파악하기 쉬웠던 범죄와의 전쟁 전의 조폭들과는 달리 현대의 조폭들은 점조직의 네트워크로 움직이며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므로 이전처럼 대통령의 결단으로 대대적인 발본색원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이다. 물론 완전 근절시키는 것은 힘들어도 색출과 검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업가 행세를 해도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검찰은 2만명에 달하는 조폭들을 관리하고 있으며 한번 조폭 명단에 오르면 그 이름을 빼지 않는다.
3.1. 한국에서 조직폭력배는 왜 쇠퇴했는가
한국에서 조직폭력배가 쇠퇴한 주된 이유는 한국의 민주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첫째로 민주화 이후 사회적으로 부패도가 많이 줄어들면서 조직폭력배의 활동 기반이 되었던 권력과의 유착이 과거보다 힘들어졌다. 잘 알려진 정치깡패 이정재처럼 과거에는 대놓고 윗선과 조폭이 연결되어 있었고 많은 특혜를 얻었지만 시대가 갈수록 그것이 힘들어진 것. 물론 버닝썬 게이트 등을 보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과거처럼 대놓고 형사들이 조폭을 봐주고, 정치가들이 조폭을 움직이고 하기는 힘들어졌다. 공권력이나 정치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본가들은 주목을 덜 받기 때문에 노동조합 탄압을 위해서 용역깡패를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상당히 흔하긴 하다.
둘째로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경제가 급속도로 어려워지면서 전통적으로 조직폭력배들이 많이 진출하던 사업들 역시 쇠퇴했다. 일본의 경우도 버블 경제 시절에 야쿠자들이 활발히 활동했지만 버블이 꺼지자 그 세가 크게 쇠퇴했던 사례가 있다.
셋째로 언론자유가 늘어나고 정보화매체의 발달 등으로 사회가 투명해지면서 과거처럼 음지에서 행패를 부리기가 쉽지 않아졌다. 한국의 조직폭력배들은 음지에서 소수의 약자를 향해서 행패를 부릴 수는 있어도, 사회적 주목을 받으면서 공권력과 맞설 힘은 없다. 외국에는 정치에까지 주도적으로 영향을 미칠 정도의 힘을 가진 폭력조직들이 많지만, 한국에서는 그러한 일은 과도기였던 1950년대 정도를 제외하고는 있어 본 적이 없으며, 그나마 50년대 그 시절 전성기에도 몇몇 외국처럼 거대한 힘을 가진 배후세력까진 못 되었고 기껏해야 정치가, 자본가들의 돌격대장이자 따까리로 쓰이다가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정도 오해가 있는 주장 중 하나는, 삼청교육대 같은 군사 정권 당시의 퍼포먼스들로 인해서 조직 폭력배들이 쇠퇴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삼청교육대에 신상사나 조일환, 구달웅 같은 한국 조직범죄사의 굵직굵직한 거물들도 죄다 끌려가서 일시적으로 탄압 받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빠르게 풀려나와 유흥가의 성장과 함께 폭력단의 기세는 그다지 그치지 않았다. 즉 일시적으로 누른것에 가깝고 큰 효과는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4. 관련 문서
- 사건 사고 관련 정보
- 노태우 정부
- 홍콩할매귀신, 빨간 마스크 : 이들 괴담이 나온 배경 자체가 당시 치안이 불안해서라고 하는 정설이 지배적이다.
- 폭력단 대책법 : 정치까지 연줄이 있어 근절이 쉬워보이지 않았던 일본의 야쿠자의 세력을 1/10까지 줄여놓았다.
[1] 당초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알려진 2인조도 이에 의한 경찰의 실적채우기 목적으로 인해 강제자백을 받았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실제 사건이 일어난 시기(1990년), 이들이 대대적으로 초기 수사를 받은 1991년 11월은 이 10.13 특별선언이 집행된지 1년 1개월이 지난 시기였다.[2] 황정민, 이정재, 최민식 주연의 영화 신세계가 이런 세태를 보여준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김민정, 박희순 주연의 2009년작 작전(영화)이 있다. 철거현장 용역깡패를 하던 박희순은 겉으로는 조폭 생활을 청산했다면서 합법적인 금융투자회사를 차리는데, 실제로는 온갖 불법, 편법,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주가조작으로 큰 돈을 번다. 한국 증권시장의 소위 작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여기서 조폭들이 어떤 역할을 맞는지를 비교적 현실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