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도미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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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81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 가타야마 데츠 이후 역대 두 번째의 일본사회당 출신 총리이다.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였다.
자민당에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평생 현역으로 있었듯, 사민당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평생 현역으로 있다. 2019년 1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사망하자, 동시에 '''현재 생존 총리 중 최고령이자 마지막으로 생존한 다이쇼 태생 총리가 되었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큐슈 오이타현 오이타시에서 어부의 11남매 중 6째로 태어났다. 오이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1938년 도쿄로 상경해 도쿄시립상업학교 야간학부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1943년에 메이지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지만, 1944년에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동원령이 떨어져 도쿄의 이시카와섬 조선소(石川島造船所, 현재 주식회사IHI[1] 의 일부)로 동원되었다. 동원된 해와 같은 해인 1944년에는 징병검사를 받고 일본제국 육군 병사로 징집되어 이등병 신분으로 제23보병연대로 배속되었다. 2015년 8월 인터뷰에 따르면, 이때 전황의 악화와 상관의 부정으로 인해 배급받는 식량이 터무니없어 부실하여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물자부족으로 실총이 아닌 목총으로 훈련하였다는 증언은 덤. 그러나 가혹한 교육훈련과 부정에도 불구하고 '''절대복종'''이 상식이었던 상황에서 초년병 무라야마는 감히 이를 거역할 상상도 못하였다고 한다. 1945년에는 간부후보생 신분인 동시에 육군 군조(중사)계급으로 종전을 맞이하였다. 상관에게 절대복종하고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던 무라야마는 종전을 계기로 '''이것이 과연 옳았던 것인가'''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1946년에 메이지대학을 졸업했다.
2.2. 정계 입문 이후
1955년에 사회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 시의원과 현의원을 거쳐 1972년 첫 중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내리 8선을 했다. 1991년 사회당의 요직인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자 오자와 이치로의 신생당,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일본신당, 간 나오토의 사회민주연합 등과 연합하여 '''전후 초의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은 신생당과 일본 신당, 신당 사키가케 등의 자민당 탈당파들이 만든 신당에게 표를 잠식당하면서 의석 수가 기존 '''136석에서 70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당했으며 이 때문에 연립정권 내에서도 가장 많은 의석수를 가지고도 총리직을 일본신당 소속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넘겨줄수밖에 없었던것은 물론이고 각료 배분에서 고작 3자리만을 얻는 불이익을 당했다. 결국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야마하나 사다오 위원장이 물러나면서 2인자인 무라야마가 위원장 자리를 넘겨받게 되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사가와 규빈 사건로 퇴진한 후에는 오자와의 신생당·공명당과 대립하면서 연립에서 이탈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같은 구성으로 하타 쓰토무 내각 참여에 합의했다. 그러나 총리 지명 이후 연립 여당의 일원이었던 민사당이 사회당을 제외한 여당에 통일 회파의 결성을 호소하자[2] 이에 분노한 무라야마와 사회당은 하타 내각에서의 이탈을 선언했다. 결국 소수 여당으로 하타 정권은 2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2.3. 총리 재임 시절
1994년 6월 오자와 이치로가 조종하는 연립여당은 자민당의 카이후 토시키 전 총리를 수반으로 옹립해 자민당의 분열을 통한 정권 유지를 도모한다. 그러나 '''자민당은 사회당의 무라야마 위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정권의 수립을 결정하고, 여기에 오자와의 노선과 대립하던 신당 사키가케가 참여하면서 자민당과 신당 사키가케, 일본사회당이 연립한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했다. 이 당시만 해도 자민당은 미야자와 기이치, 고노 요헤이 등의 평화헌법을 지지하는 온건 보수세력이 주도하는 상황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오자와의 신당 세력보다 더 진보적인 부분도 있었다.
무라야마는 총리로 취임한 직후의 국회 연설에서 기존 사회당의 당론인 비무장 중립정책을 폐기하면서 미일 안보조약의 긍정을 표명했다. 이 노선전환은 당시 자민당과의 연립과정에서 당내의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고 발표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당은 내각 출범 초기부터 내분에 휩싸여 분당이나 해산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95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크게 패하면서 당내 지도력을 상실한 무라야마는 결국 1996년 1월 11일에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정계에서 물러난다.
2.3.1. 무라야마 담화
2.3.2. 평가
과거사를 반성하나 의석수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기존 자민당의 노선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다.[3] 무라야마의 재임기간은 1년 6개월 남짓으로 아주 길지도 또 짧지도 않은 편이었으나, 이 기간 동안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여러모로 우여곡절이 많았다.[4] 1995년 1월에는 토호쿠 대지진 이전까지 전후 최대규모의 피해를 낳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고, 불과 석 달 뒤인 3월에는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내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특히 고베 대지진에서 일본 정부의 늑장 대처로 피해를 확산시켰다는 비판이 일어나면서 내각 지지율이 급락했으며 이후 1년동안 무라야마 내각은 낮은 지지율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무라야마 본인도 개인은 파벌에 좌우되지 않는 청렴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의지가 약해서 재임 초반부터 사의를 밝히면 다른 각료들이 만류하는 식으로 간신히 내각을 이끌었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노선전환을 둘러싼 당 내분에 재임기간 내내 시달렸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1995년 8월 15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명기한 총리 담화'''(무라야마 담화) 발표, 피폭자 구제법 성립, 미나마타 병 미확인 환자에 대한 전면 구제 등의 업적으로 나름 사회당 정권다운 모습을 조금은 보여주었다. 다만 사회당 내에서는 무라야마가 총리가 되고 싶어서 여기 저기 기웃거려서 사회당이 결국 망한거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다. 실제 지지율도 낮았던데다가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물러난 이후 일본 사회당은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기는 했지만 되려 구 사회당 의원과 당원, 노조 등의 조직의 상당수가 사민당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서 신당 시기가케 탈당파 의원들과 합세해서 민주당(일본)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1996년 총선에서 고작 15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그 이후로는 1998년 참의원 선거와 2000년 중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중의원에서 10석도 못얻는 군소야당이 되어버린것도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불과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당보다 세가 월등히 작은 정당인 일본 공산당이 기본적인 당세 유지는 한 덕택에 사민당과 비교도할수 없이 큰 정당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정치인으로서 받는 비판은 어쩔 수 없으나, 일본사회당 몰락의 책임을 전부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 단독내각도 압도적 다수의 연립내각도 아닌 상황에서 당의,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사회당의 당세는 1960년대 이후로 나리타 토모미 위원장과 도이 다카코 위원장 시절을 제외하면 꾸준히 정체, 혹은 하락세였고 자민당에 밀려 정권을 잡은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수권능력이 부족한 면도 있었다.
2.4. 정계 은퇴 이후
1996년 정계 은퇴 이후에는 고향 오이타시와 도쿄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창설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5] 의 이사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에서 몇 안되는 진보파 출신 전임 총리로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70살에 총리가 되었는데, 최고령이나 최장수는 (일본이야 장수국가니까 당연히) 아니지만 90살까지도 정정하게 활동하는 것은 보기 드문 모습이다.
2013년에 아베 신조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파기하느냐 계승하느냐로 말이 많은 가운데, 무라야마는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무력으로 타국에 들어가면 그게 침략인 건데 뭐가 다른가?"'''라고 일갈했다. 또한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의 폐기 또는 수정 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또한 한국의 JTBC와의 인터뷰에서도 아베 신조 총리의 발언은 국제적 고립만 심화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2013년 8월에는 아베 정권의 개헌시도에 맞서서 호헌을 기치로 야권세력이 뭉쳐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호헌을 기치로 한 야권재편은 쉽지 않은 상황인데, 애초에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이 민주당, 일본 공산당, 사민당 등에 퍼져있는데다 이들이 호헌만을 가지고 뭉치기에는 너무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민당에도 우경화에 반발하는 온건우파 정치인이 제법 있고, 반대로 야권에도 개헌에 찬성하는 극우파 정치인이 상당수있다.'''[6] 다만 무라야마 전 총리는 사민당에 대해서 야권 재편과정에서 해체될수도 있다고 말해 사민당 중심이 아닌것을 분명히 했다.
2014년 2월 11일,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의 초청으로 방한하였다. # 한일관계 관련 논의를 위해 방문하였으며, 위안부 피해자들과의 만남을 갖기도 했다. 청와대를 방문해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고려하였으나, 일정 상 성사되지는 않았고 대신 정홍원 국무총리와 면담하였다.
2015년 8월 3일, 개헌과 집단자위권을 주장하는 아베 신조를 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2018년 9월 24일에는 자신의 건강 비결에 대한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건강 비결은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런 기분으로 사는 것'''이라고. 해당 강연회를 소개하는 기사에 따르면, 무라야마 전 총리는 비가 오지 않는 한 동네를 산책하고 라디오 체조를 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종전 75주년 맞아 '신(新) 무라야마 담화'를 공개했다.
사민당이 분열되고, 입헌민주당에 참여하는가 참여하지 않는가로 당이 갈린 상태에서, 무라야마 전 총리는 '''힘 합쳐 정치이념실천을 지향'''이라는 발언으로 입헌민주당 참여의 의향을 표했다.* 그래도 당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고령을 이유로 명예 당수와 고문 직을 사임했다.#
3. 소속 정당
4. 선거 이력
5. 이야깃거리
- 1995년 10월 10일 참의원 본회의 답변에서 "한일합병은 국제법상 유효했다."고 발언해 한국에서 비판받았으나, 11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당시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 2014년 당시 모습. 개요에서 언급한 것처럼 90살이 넘은 나이에도 거의 현역처럼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8] 최근 일본의 우경화 행보에, 얼마 안되는 혁신계열 전직 총리로서 국민들의 경각심을 높이려고 노력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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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언급한 바 있듯 돈짱(トンちゃん)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일본의 중공업 회사로 이시카와섬-하리마 중공업을 뜻하는 영문명의 이니셜이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IHI[2] 오자와 이치로가 사회당을 배제한 정계재편을 위해 민사당을 배후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정설이다.[3] 연립 내각을 구성한 정당 중 자민당이 절대 다수당이었기 때문에 고노 요헤이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비롯해 자민당 소속 의원들이 내각 내 요직을 독점한 수준이었기 때문.[4] 여담으로 김일성이 죽은 사건이 총리에 오른 직후에 터졌다.[5] 무라야마 전 총리는 아직도 속죄금이라는 의미의 "츠구나이킨"이 위로금이라는 의미로 잘못 전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고 한다.[6] 예를 들어 2011년 마지막 민주당 총리를 지낸 노다 요시히코는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자민당보다 훨씬 더한 극우 정치인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민당 극우파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또 반대로 대내 정책에 있어서 상당한 개혁파였는데 심지어 '''여성 천황 즉위'''까지 주창하면서 관련법의 개정을 은근슬쩍 떠봤을 정도. 여전히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가 무의식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아시아에서 그것도 천황 일가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일본의 총리가 저런 주장을 한 것은 여간 개혁적인게 아니면 불가능한 일.[7] 일본 중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8] 김대중 전 대통령 및 최근 타계한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동갑이다!![9] 인형도 나왔었다. 무라야마 총리 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