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 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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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a Kazan'''
'''1909년''' '''9월 7일''' - '''2003년''' '''9월 28일'''
미국의 영화감독.
1. 개요
엘리아 카잔 감독은 '''할리우드 50년대를 대표하는 명감독이자 연극 역사에 남는 위대한 연출가'''이며 '''메소드 연기를 도입한 선구자'''로 꼽힌다. 1909년 9월 터키 이스탄불에 살던 그리스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이름은 그리스계 이름인 일리아스 카잔조글루(Ηλίας Καζαντζόγλου). 터키식 이름은 일리아스 카잔즈올루(İlyas Kazancıoğlu).
그의 식구는 어린 그를 데리고 1913년 미국으로 이민갔으며 메사추세츠 주에 1926년 윌리엄스 대학교에 입학하며 다니다가 영화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뒤에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연출을 하다가 할리우드로 뛰어들어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40년대 후반 그는 리 스트라스버그 씨와 함께 Actors Studio를 설립하여 '''메소드 연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하고 신예 할리우드 스타들을 대거 발굴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엘리아 카잔 감독은 배역의 내면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 드부아(Blanche Dubois)의 무너진 내면을 깨진 거울로 표현하거나 워터프론트에서 흉폭한 테리 말로이의 내면의 변화를 손장갑으로 표현하거나 에덴의 동쪽에서 칼의 불안한 내면을 흔들리는 촛불로 표현하는 등.대표작으로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 에덴의 동쪽(1955) 등이 있다.
이렇게 보면 할리우드의 유명한 영화감독으로만 남아있을 이름이었으나 그에게 죽을 때까지 논란을 지핀 게 있으니...
2. 밀고와 누명, 그리고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
1950년대 미국은 레드 콤플렉스로 인한 매카시즘 광풍이 거세게 불어닥치는 중이었고, 이는 할리우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와중, 카잔은 1952년 미국 의회 반미조사위원회에 출두해 '''자신이 과거 공산당원이었음을 고백했고 옛 동료의 공산당 활동을 밀고했다.''' 사실 당시 미국 사회가 워낙 우경화되어 있었던 터라, 카잔 외에도 매카시즘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영화인들은 꽤 있었다.[1] 하지만 이들은 원래 보수 성향이어서 본인의 사상에 부합했던 매카시즘을 지지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론적인 비판을 제외하면 그 자체만으로 욕을 먹는 경우는 적다. 그러나 카잔은 '''스스로가 공산당원이었으면서도 동료들을 배반하고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밀고라는 비겁한 길을 택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총 8명의 동료들을 고발했는데, 심지어 이 명단에는 같이 액터스 스튜디오를 설립했던 친구인 리 스트라스버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가난한 조합원들의 월급을 활동비라고 잔인하게 뜯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동정심 따윈 없다고 변명했다.[2]
그 이후 그는 워터프론트(1954)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쥐게 된다. 하지만 매카시즘 열풍이 끝난 뒤 숨통이 트였던 헐리우드는 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찰리 채플린, 존 휴스턴, 줄스 다신 등 재능 있는 인재들이 무고로 인해 미국을 떠나거나 영화계를 떠났고, 심지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도 있었다.[3] 이 때 입은 인적 자원의 피해로 1950년대의 미국 영화계는 심각한 침체기를 겪었으며, 당시 막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던 TV로 인해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이후 헐리우드는 1960년대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나오고 나서야 겨우 다시금 활기를 찾게 된다. 이처럼 매카시즘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업계 중 하나인 헐리우드에서는 그 선봉에 섰던 엘리아 카잔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밀고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4]
1999년 그가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아카데미는 그 선정의 대가로 상당한 논란에 시달렸다. [5] 심지어 그의 시상식 때 으레 쳐 주는 기립박수마저 절반도 쳐주지 않았다. 이 때 에드 해리스, 닉 놀테 등은 냉담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짐 캐리 같은 이들은[6] 무표정하게 앉아서 박수만 쳐 주었다. 기립한 사람들조차도 미소지으며 진심으로 축하하듯이 쳐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훈훈함으로 가득차 있어야 할 시상식장이 객석이나, 시상자, 수상자 모두 어색함으로 가득하였다. 그리고 시상식장 밖에서는 그의 수상이 부당하다는 시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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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독으로서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지만,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위를 저지른 것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레니 리펜슈탈, 서정주,로만 폴란스키[8] 와 비슷한 케이스.
90년대에 국내에 나온 유태인 관련 책자에서 난데없이 카잔 감독이 유태인 출신이라고 나왔으나 엉터리다. 카잔 감독과 친했던 연기 지도자인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 1901~1982)야 확실한 유태인이고 그의 연기지도 충고를 카잔 감독이 참고하여 영화배우들에게 지시한 것을 보면 카잔 감독과 큰 영향이 있긴 하지만 카잔 감독은 그리스 정교인이었고 유태인은 아니었다. 하긴 이 책자가 유태인으로 언급한 사람들 중 하도 엉터리가 많았는데 스티븐 소더버그라든지 찰턴 헤스턴, 글래드스턴 등이 유태인이라고 엉터리로 기재했다.
3. 주요 연출작 일람
- 19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1954년 워터프론트
- 1955년 에덴의 동쪽
- 1961년 초원의 빛
4. 여담
두번째 아내였던 바바라 로든은 배우로 유명하며, 완다라는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이 완다는 1970년대 미국 여성주의 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손녀인 조이 카잔 역시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배우 폴 다노와 사귀고 있으며,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루비 스팍스에서 같이 출연했다.
파라마운트는 대부 1 제작 당시에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감독직을 앉혔지만 스튜디오가 전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를 해고할 시 대비하고자 대부의 백업 감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물론 해고된 일은 없었다.
[1] 존 웨인, 게리 쿠퍼, 월트 디즈니 등이 대표적이다.[2] 물론 저 월급 강탈 설이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정황상 말 그대로 카잔 자신의 배신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변명일 가능성이 크다.[3] 물론 실제 공산당원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대우가 부당한 것은 마찬가지이다.[4] 덕분에 양심과 고발을 다룬 워터프론트조차 감독의 자기 변명, 모순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5] 이 공로상 시상을 추진했던 사람 중 하나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밋치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칼 말든이다. 당시 그는 아카데미 의장을 맡고 있었다.[6] 그중 짐 캐리는 열성적인 민주당 지지자이자, 진보주의자이기에 더욱 못마땅했을 것이다.[7] 맨 첫 번째 사진에서 카잔 옆에 있는 시상자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다. 스콜세지는 유명한 뉴욕 토박이이며, 따라서 리버럴 성향이다. 다만, 칼 말든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엘리아 카잔의 공로상 시상을 부탁하자 스콜세지는 기뻐하며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8] 아동 성범죄로 인해 프랑스에서만 활동하게 되었고, 카잔 감독과 마찬가지로 논란이 있었지만 영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여받았다. 단 미국에 입국하면 체포되기 때문에 대리수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