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역사
[image]
1. 개요
1885년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설립한 광혜원(세브란스병원의 전신)과 역시 미국인 선교사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1885년 광혜원에서의 물리, 영어 교육, 1886년 구세학당에 이어 구세학당의 후신인 경신학교 대학부를 기초로 1915년 그가 설립한 조선기독교학교가 이 학교의 시초이며 1917년 조선기독교학교는 연희전문학교로 이름을 고쳤다. 해방 후 연희전문학교는 대학 인가를 받아 연희대학교로 개교했으며,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합쳐지면서, 두 학교의 머리글자를 따서 연세대학교가 되었다.[1]'''YONSEI, Leading the Way to the Future'''
'''존중하고 존경받는 대학'''
2. 제중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효시는 1884년 갑신정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등의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최측근 민영익은 정변 중 개화파 자객에게 피습당해 13번이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다. 고종 황제는 독일 외교관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조선에서 의사, 선교사로 활동하던 알렌에게 민영익의 치료를 맡겼다.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를 서양 의술로 치료하고 민영익을 소생시켰다. 이에 감복한 고종은 알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비단 옷과 부채, 도자기 등을 선물하였는데, 이 때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 설립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이 설립되었다. 고종은 설립 12일 뒤 이 병원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제중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건물, 운영비, 병원 업무를 보조하는 주사 등의 하드웨어를, 미국 북장로회가 의사, 간호사, 일부 운영비 등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일종의 합작 병원의 형태로 운영됐다. 이러한 진료 활동을 통해 서양 의학의 우수성이 널리 퍼졌다.
1886년 3월 29일에는 16명의 학생으로 '제중원의학교'가 문을 열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이 시작됐다. 알렌이 시작한 최초의 의료 교육은 현재로 따지면 간호사나 간호조무사 등에 해당하는 보조인력 양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의사는 단기간에 양성하는 것이 어렵고 알렌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별도의 의사 파견을 요청하여 1886년 4월 헤론이 파견되어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게 된다. 그 밖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윌리엄 스크랜튼[2] 이 제중원 운영을 도왔다.
알렌은 1887년 9월 주미 한국공사관의 개설을 돕기 위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알렌은 이미 귀국하기 전에도 의료 교육의 한계에 대해 언급했다.
알렌이 귀국한 후 제중원에서는 헤론, 엘러스, 빈튼 등의 의료 선교사들이 연이어 의료 활동을 폈다. 알렌에 이어 제중원을 운영하던 헤론이 1890년 7월 이질로 급사하자 제중원의 운영에 큰 어려움이 생겼다. 알렌이 시작한 제중원의 의료 교육 역시 헤론의 사망 즈음에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1891년 4월 헤론의 후임으로 빈튼이 부임했으나, 빈튼과 조선 정부간에 커다란 갈등이 생기면서 제중원은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또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도 운영에 비용이 드는 제중원을 포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편 아내가 제중원의 의사였고, 본인도 제중원의학교에서 기초 과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당시 위기에 처했던 제중원이 운영을 지속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언더우드 등 서울지부 선교사들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 왕립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선교와 왕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이점을 갖는다고 선교부를 설득했다.
언더우드는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캐나다 선교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던 토론토대학교 의학부 교수 올리버 R. 에비슨(O. R. Avison)을 만나 한국행을 권유했고, 에비슨은 1893년 7월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여 제중원에 부임했다. 에비슨과 언더우드는 제중원을 정부에서 독립시키기로 한다. 에비슨은 정부와 오랜 협상을 벌인 끝에 1894년 9월 제중원을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받았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정국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로써 제중원은 사립 선교 의료기관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정부로부터 독립하게 된 제중원은 에비슨과 언더우드의 긴밀한 협력으로 운영되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 소속 선교사들은 미국 선교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와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는 사립 제중원의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9년 미국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 씨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아내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도 언더우드였다. 세브란스 씨로부터 기증받았던 후원금으로 서울역 앞에 병원을 신축하여 1904년 완공했다. 기증자의 이름을 따 제중원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칭했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었다. (1886년 알렌이 세운 제중원의학교 교육은 1890년경 중단되었다.) 한국에 오기 전 토론토대 의대 교수였던 에비슨은 한국에 올때부터 이미 의학 교육기관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제중원에 부임했을 때부터 한국인 의료인 교육을 시작했다. 사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여기에서 교육받아오던 학생들이 있었고 이들도 모두 1899년 설립된 제중원의학교에 포함되었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 개원과 함께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서울을 방문한 세브란스 씨가 병원 외에도 학교 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3만 여 달러를 기부해 의학교 건물을 신축했다. 세브란스의학교는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면허를 부여받았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로 명칭을 바꾸었고,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다시 교명을 변경했다.
1916년 언더우드 타계 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양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된 에비슨은 두 학교를 동시에 대학 승격을 추진했고, 1917년 전문학교로 인가받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후 1923년 신교육령에 의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재인가되었다. 교명이 너무 길어서 보통 약칭 세브란스의전이라고 불렀다.
에비슨은 1935년 12월 세브란스의전 교장에서 은퇴했고,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에비슨은 한국에 영구 정착하기 위해 미국 친척들에게 인사하러 간다고 말하고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미국에서 아내가 병을 얻어 끝내 사망했고, 때마침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는 결국 영영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2.1. 교명 변화
- 1886년 : 제중원의학교
- 1909년 : 사립 세브란스의학교
- 1913년 :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교
- 1917년 :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 1923년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인가
- 1942년 : 아사히의학전문학교(일제의 강요로 변경하였다.)
- 1947년 : 세브란스 의과대학
- 1957년 : 연세대학교로 통합
3. 연희전문학교
1885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조선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한국인 교육 발전에 힘써왔다. 선교사로 파견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의학 교육을 받았던 언더우드는 1885년 설립된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병원 운영에 지속적으로 관여했고, 1886년 제중원에서 의학 교육이 시작되자 영어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후임인 헤론이 급사하여 제중원이 위기에 빠졌을 때 제중원의 유지에 크게 도움을 주었고, 1890년대 초 한때 미 북장로회 선교부가 경비가 많이 드는 제중원을 포기하려 했을 때,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서 제중원이 갖는 이점을 들며 제중원을 유지하도록 설득했던 이도 언더우드였다. 또 제중원이 정부로부터 떨어져 나와 사립으로 독립할 때 언더우드가 미국 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온 것이 제중원의 존속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울러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국인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언더우드는 1886년 고아원을 겸한 교육기관인 경신학당(현 경신중고교)을 설립했다. 참고로 아래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연희전문학교는 원래 경신학교 대학부로 설립되었다. 비록 연희전문의 모체가 되는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5년 3월에 설립되었지만#, 이화여대, 숭실대, 배재대 등의 예에서 볼때, 연희전문학교의 설립도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경신학당이 설립된 1886년으로 소급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 경신학당 전통 긍정론의 입장이다.
이후 경신학당은 1901년 '중학교'(중고교 포함)가 설치되며 중등교육 기관으로 발전하였으며, 1905년 경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아가 언더우드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1906년 경신학교를 중심으로 감리교측의 배재학당,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원 등을 연합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내부 의견 합일이 이루어지지 못해 실패했다. 이미 평양에 숭실학교 대학부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이 선교부의 결정적인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 반드시 대학교가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학 설립 추진을 이어갔다. 이때 대학설립을 추진하던 언더우드에게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에비슨을 비롯한 미 북장로교 선교부 서울지부 선교사들이었다.
언더우드는 꾸준히 대학 설립을 추진하여 미국과 캐나다의 장로교 및 감리교 재단의 지원을 받아 1915년 4월 12일 경신학교를 중심으로 서울에 있던 다른 기독계 학교인 배재학교, 숭실학교의 연합 대학부 형태로 '조선 기독 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을 종로 YMCA 건물에 설립했다. 미국 기독교 재단들로부터 원활한 지원을 받기 위해 교명에 Christian을 넣었다. 사실 조선 기독 대학이라는 명칭은 대외적인 영문 명칭에 가까웠고 내부적으로는 경신학교 대학부라고 불렀다. 교장은 언더우드, 부교장은 세브란스 의학교의 교장이기도 한 에비슨이었다. 설립 당시 학과는 문과, 수물과, 상과, 농과, 신과 5과였으며 학생은 61명이었다. 그러나 학교 설립 직후 언더우드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1916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간 후 그해 10월 타계했다. (언더우드에 관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언더우드가 타계한 후 부교장인 에비슨이 뒤를 이어 교장이 되었다. 이로서 에비슨은 세브란스의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양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일제로부터 400명 정원의 4년제 전문학교로 인가받아 '연희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설립 당시부터 4년제 종합대학교를 계획했지만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고 일체의 대학교 설립 허가를 해주지 않았던 일제의 방침 때문에 대학교로 인가받지 못하고 구제전문학교[3] 로 인가가 떨어졌다. 문학과, 신학과, 농학과, 상과, 수학과, 물리학과, 응용화학과 등의 학과를 두었다.
아울러 설립자 언더우드의 형제이며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존 언더우드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에비슨은 고양군 연희면 신촌에 있는 연희궁터 일대의 넓은 교지를 매입했다. 1917년 9월 신촌에 교사를 착공하여 1918년 신촌 캠퍼스로 이전했다.
학풍은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동양과 조선의 사상 및 전통과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서양 선교사 출신의 교수들에 의해 서양 학문을 적극적으로 교육함과 동시에 민족주의 교육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서양 선교사 출신 교강사들은 세브란스의전과 겸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훗날 국학이라는 이름으로 계승되는 민족의식 교육의 산실이던 문과와 당대 사회과학 트렌드에 따라 유물론적 방법론을 도입하던 상과 교수진 등이 학풍을 주도했다. 특히 연희전문학교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학(官學)을 추구하던 경성 제국 대학의 학풍과 대립하면서 민족주의 학풍이 더욱 강해졌다. 당시 이러한 반(反)관학적, 민족주의 학풍을 이끌었던 이는 최현배, 정인보, 백낙준, 백남운 등이었다.
연희전문학생들은 1919년 3⋅1 운동, 1920년 조선 학생 대회, 1923년 조선 학생회 조직, 1926년 6⋅10 만세 운동,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등 민족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전의 교장을 겸했던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유지를 받들어 양교 통합을 추진해왔고, 이에 1926년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학원 교수와 이사간에 양교 합동안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간섭하에 양교 통합은 성취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일제시대 동안 몇 차례 더 양교 통합이 추진되었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연희전문학교는 일제의 가혹한 사상적인 탄압 대상이 되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등 일제가 일으킨 사상 탄압 사건에 주요 교수진이 검거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1938년 4월부터는 일본어, 일본사교육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1944년 4월에는 본 대학교를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몰수하고 총독부의 관리하에서 한국인 간부와 교수진을 추방하였으며,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라'고 고쳐서 1945년 8.15 광복까지 이르렀다.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자 접수위원(백낙준, 유억겸, 이춘호, 김윤경, 이묘묵, 조의설, 김성권)은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의 재산과 운영권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받아,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회복하였으며 유억겸 씨가 교장으로 있다가 1945년 12월 18일 백낙준 박사가 후임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연희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동시에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남녀공학제를 실시하는 대학교가 되었다. #
3.1. 교명 변화
- 1915년 : 조선기독대학(경신학교 대학부)
- 1917년 : 사립 연희전문학교
- 1923년 : 연희전문학교(일제의 신교육령에 의해 개칭)
- 1944년 :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일제에게 몰수 후 총독부에서 관리)
- 1945년 : 연희전문학교
- 1946년 : 연희대학교
- 1957년 : 연세대학교로 통합
4. 연세대학교로의 통합
두 학교는 초기에 모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에서 운영했다(제중원은 1894년 이후). 언더우드, 에비슨 등 학교 초기의 역사와 관련된 선교사들의 다수가 두 학교의 설립에 모두 관여했고 두 학교에서 동시에 강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 학교는 일제하의 암울한 시기에 전 조선인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 발전하였다. 이후 한국인 교수진이 확충되면서 사실상의 운영이 차츰 한국인의 손으로 이관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 직후부터 미 북장로회 선교부는 두 학교의 통합을 계획했다. 양교의 통합을 통해 종합대학교로 승격을 꿈꾸던 연희는 의대를 추가할 수 있게 되고, 서울역 앞 좁은 부지로 고민하던 세브란스는 신촌의 넓은 부지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언더우드의 후임으로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된 에비슨은 3.1 운동 후 일제의 유화적인 문화통치가 펼쳐지자 발빠르게 대학교 승격을 목표로 양교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와 일제는 1924년 경성 제국 대학을 세우고 그 이외의 대학 승격을 불허했다.
경성 제국 대학이 세워지자, 오히려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전 양교 통합에 관한 내부 조율이 빠르게 진척되어 1926년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전 이사 및 교수진간에 양교 합동안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 및 제지로 성취되지 못했다. 이후 몇 번에 걸쳐 합동안이 다시 제안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양교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8.15 광복 이후 양교의 통합이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두 학교의 통합을 전제로 1949학년도부터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예과가 연희대학교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통합은 6.25 전쟁으로 다시 지연되고 말았다.
휴전 이후 연희대학과 세브란스 의과대학 통합 위원회가 한국 전쟁 이후 처음으로 개최되어 합동안을 제정했다. 한때 이화여대의 합류 가능성도 잠시 논의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과들이 중복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의견 제기 수준에서만 그치고 불발되었다. 연희와 세브란스 두 학교는 통합에는 이미 뜻을 같이 했지만 정작 통합된 학교의 교명에 대한 이견 때문에 오랫동안 통합이 지연되었다. 연희대학교 측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연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브란스 의과대학 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연희대학교 세브란스 의과대학이라는 명칭도 제안되었지만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결국 1955년 연희와 세브란스이 앞글자를 따 붙여서 연세대학교라는 새로운 교명을 만드는 것에[4] 양측이 합의하였다. 1956년 재단법인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었고, 1957년 1월 5일 통합 '''연세대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초대 총장은 백낙준, 부총장은 최현배였다. 이후 5월 둘째주 토요일을 창립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5. 4.19 혁명 및 6월 항쟁
연세대학교의 구성원 들은 정치 및 사회의 모순 및 불합리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사회참여를 해왔고, 4.19 당시의 최정규 군(의예·59)을 비롯, 6월 항쟁 당시의 이한열 군(경영·86), 1996년 노수석 군(법학·95) 등의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6. 의과대학 원주분교 (現 미래캠퍼스)
1977년 12월 의과대학이 원주분교를 설립하고, 1981년 원주분교가 원주대학으로 승격하면서 10개 학과로[5]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 때 까지는 원주대학 자체가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취급되었는데, 점차 학과가 많아지면서 여러가지 단과대학들로 분리되고 이들을 원주캠퍼스로 묶어 부르게 되었다. 2019년에는 미래캠퍼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7. 국제캠퍼스
2010년 송도캠퍼스란 명칭으로 개교했다가 곧 국제캠퍼스란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1] 통합 당시부터 지금까지 부총장급 직위인 세브란스 의료원장 등은 의대 교수들이 선거로 직접 뽑고 있다.[2]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 어머니와 함께 선교를 하러 한국에 왔다.[3] 당시 일본 제국에서 공포된 '전문학교령'에 의거하여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을 일컫는다. 연희전문학교 외에는 대표적으로 1905년에 설립된 보성전문학교가 있다.[4] 단순히 이름만 붙인게 아니라 세상을(世) 이끄는(延) 인재를 기르는 대학이 되겠다는 의미까지 맞췄다.[5] 의예과, 의학과, 보건학과, 영어영문학과, 경제학과, 경영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