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뉴턴 알렌

 

[image] '''주한 미국 공사'''
공사

공사

총영사
존 실
'''호러스 뉴턴 앨런'''
에드윈 모건
[image]
Horace[1] Newton Allen
(1858년 4월 23일 ~ 1932년 12월 11일)
1. 개요
2. 생애
2.1. 조선 왕실 의사가 되다
2.2. 이권 챙기기
2.3. 고종과 미국 사이에서 줄다리기
2.4. 러일 전쟁 후 행보
3. 여담


1. 개요


미국 북장로교 선교 의사이자 조선 왕실부 의사를 지낸 인물이다. 이후 한반도에서 미국 공사, 즉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이름은 안련(安連).
현대 외과 의학을 조선에 도입한 공로가 있다. 하지만 의료 선교보다 개인의 영달과 로비스트 활동에 더 치중하는 등 위선자적 면모도 많이 보인 인물이다. 즉, 의사가 필요 이상으로 사욕이 많아서 쌓아놓은 공로도 깎아먹은 반쪽짜리 인물.
후술되어있듯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2]인 광혜원(제중원)[3]을 설립한 인물이기도 한데[4], 행보가 이렇다보니 또 다른 연세대 설립자격인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에 더 비교되는 안습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조선 왕실 의사가 되다


오하이오델라웨어에서 출생하여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로 중국에서 의료 활동을 하다가 1884년 한국에 들어와 주한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지내면서 개신교 선교 사업을 겸하였는데,[5] 그해 겨울에 터진 갑신정변 때 첫 희생자로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수술해 목숨을 구해준 것[6][7]이 계기가 되어 신임을 받아 왕실 의사 겸 '''고종황제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그리고 1885년에 조선 말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인 광혜원(제중원)[8]이 세워지자 의사와 의학 교수를 겸하면서 운영까지 담당했다. 1890년에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의료 활동 대신 외교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전권 공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우선 고종황제와 가깝다는 점을 이용해 하와이의 노동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와이 이민자 모집을 공고하였는데, 그 처리 과정에서 하와이 사탕 수수 농장의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로 볼 때 조선인들에 대해 저평가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지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인들은 중국인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라.”고 했다. 또 이를 잘못 뽑는(...) 의료 사고가 났을 때 이를 은폐하기도 했다.

2.2. 이권 챙기기


조선의 각종 이권을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해 미국으로 넘겼다는 점도 그가 비판받는 부분이다. 큰 건수만 보아도 나라 빚을 다 갚고도 남았을 거라는[9] 운산 금광 채굴권, 경인선 철도 부설권, 서울 시내 전등·전차 부설권 등... 그러고도 1904년에 고종은 미국과의 관계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알렌에게 훈일등 작위와 태극대수장을 수여했다. 허나 이 당시 알렌은 고종에 대해 혹평했다.
특히 왕비의 한마디에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하루 아침에 하사받게 된 알렌은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조선 개광 회사를 설립,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는데 아무래도 운산 지역의 도로나 물류 상태가 미비했기 때문에 10만 달러로는 개발이 택도 없었다. 결국엔 동업자를 모집하여 1897년 헌트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자본금 500만 달러를 들여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 OCM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제가 중일 전쟁으로 미국 자본의 자국 송금을 제한한 1937년까지 30여년 동안 자본금 투자의 3배에 달하는 수익 당시 시세로 1,500만 달러를 남겼다. 현재 시세로는 투자금 500만 달러는 2014년 기준 약 1.3억 달러에 해당하고, 수익금 1500만 달러는 지금 가치로 2억 ~ 3억 달러 정도를 남겼다.[10]
다만 성공적인 투자이긴 했지만, 초기 투자 7년 동안은 전혀 배당이 없다가 이후 30여년간 회수가 되었기에 투자 당시 가치로는 초대박 수준은 아니었다. 대략 투자금 대비 50% ~ 170% 수익률 정도 올렸다고 보면 된다. 중박에서 대박 사이 정도 친 것. 그 후 1939년 OCMC는 중일 전쟁 이후 수익이 급감하자 대유동 금광을 경영하던 일본 광업 주식회사에 800만 달러를 받고 운산 금광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1941년 이후였으면 적대국 자산이라 강제 몰수당할 것이었지만 매우 운이 좋은 편.
미국의 실(J. M. Sill) 공사는 이 계약에 대해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다고 했으며, 알렌은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 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자세한 기록은 링크를 참조.
이 때문에 알렌은 금광 회사로부터 일종의 두둑한 커미션을 받게 되고, 제물포에 근사한 별장까지 거느리게 된다. 자신의 친구인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렌은 "모스와 헌트는 그들의 이익이 확보되고 금광이 원활하게 운영되자 나에게 2번에 걸쳐 현금과 선물을 주었다."고 하였다. 결국 그도 여느 외국인과 다를 바 없이 '''개인의 영달과 자국의 이득을 최대한으로 챙기는데 전력 투구'''했다는 점에서, ‘환자’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의술 활동에 전념했다고 흔히 묘사되는 대중 매체 속 그의 모습은 여러모로 설득력을 잃게 된다는 것. 때문에 의료인이지만 자기 사업(?)에 치중했던 알렌은 동료 의사인 존 헤론과도 마찰을 빚었고, 결국 대한제국 황실의 비호 아래 재산을 치부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2.3. 고종과 미국 사이에서 줄다리기


알렌은 고종에게

'미국 국민은 대한제국이 만일 곤경에 빠질 경우에 강력하고 사심없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국민이 될 것이다'

'미국은 다른 조약 체결국들이 대한 제국의 독립을 강탈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어렵게 만들 것이다.'

라고 표현했다. 당시 외교 독립론에 빠져서 '''미국이 큰 형처럼 느껴진다'''[11]라고까지 할 정도로 미국과 손잡으려 애썼던 고종 입장에선 이보다 달콤한 말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렌은 '고종이 멋대로 미국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제물포 조약의 우호 관계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한다. 당혹스럽다.'라는 식으로 미국에 전문을 보내는 것으로 고종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알렌이 초창기에 미국대한제국에 대한 긍정적인 전문을 보내고, 대한제국이 독립국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주장을 해서 고종의 알렌 매수설이나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대립씩이나 하게 된 배경이 바로 이 이권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권을 계속 얻기 위해서는 고종이 군주로 있는 대한제국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었던 것.

2.4. 러일 전쟁 후 행보


이런 알렌의 생각도 러일전쟁이 현실로 다가오는 과정에서 변화한다. 사실 알렌의 생각은 알고 보면 단순했는데,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이 중립국으로 존재하고 이것을 미국이 중재하면서 자신과 미국이 이권을 얻는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 제국칭다오를 확보하고, 러시아가 이에 자극을 받아서 뤼순과 다롄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국제적 왕따가 되면서 사정이 변화한다.
국제 정세가 미국이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대한 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그를 통해서 이권을 획득하는 것보다는, 일본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해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게 낫다는 쪽으로 러일전쟁이 점점 현실화되면서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의 변화를 인식한 알렌은 태세를 전환하여 자신이 반일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1902년과 1903년[12] 미국 본국에 전보를 보내면서 대한 제국의 독립을 유지할 가능성에 대해서 엄청나게 혹평을 한 것이다. 심지어 이중엔

"러일 전쟁에서 만일 일본이 승리하면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 더욱 적합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을 정도였다.

"알렌은 한국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수십 번 말했으며, 더욱이 한국이 망하고 있다는 것에 즐거움마저 나타낸 일이 있었다."

알렌과 함께 공사관에서 일했던 F.H.해링턴의 말이다.
이 과정에서 고종에 대한 평가도 바뀐다. 일찍이 고종과 친하게 지내서 이권을 받을 때는 좋게 평가하던 고종을, 1904년에 이르면,

'이 나라의 거대한 해충이 되어있고, 저주의 대상이 되어있다. ... 로마 제국이 불타고 있는 동안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네로 황제처럼 무희들과 노닥거리고 있다.'

라며 네로급 암군(...)으로 혹평했다. 돌아가면서는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한국 황제같은 인종은 처음 봤다."'''며 무지막지하게 비난했다.
결국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대립한 전적이 있던 알렌은 1905년 3월에 해임당한다.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에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을사조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어서 한국에서 떠났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알렌의 후임 공사도 존재한다. 바로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있던 에드윈 V.모건이다. 그리고 이 모건도 을사 조약에 반대 입장을 표시했었다. 때문에 알렌이 친한파라서 해임되었다거나, 을사 조약이 체결되어서 자연스럽게 출국했다는 것은 잘못된 소리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돌까? 다시 해링턴의 말을 인용하면,

"이제 와서 알렌은 자신을 한국의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으며, 일본의 지배로부터 한국을 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해임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였다. 그리고 실제로 갑자기 생각을 틀었는지 혹은 너무 진행이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을사조약 이후 공사관의 철수가 너무 빠르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일본은 결국 미국의 태평양 정책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며 언젠가 미국과 충돌할 것이다."''' 라고 말했으나 친일 성향이 강했던 루스벨트는 이 말을 '''씹었다.'''[13] 그리고 30여년 뒤 태평양 전쟁이 터지며 그의 말은 현실화되었다. 물론 이에 대해 외교관으로서 과정이 너무 급하다고 비판했던 것 뿐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일리나 루즈벨트가 조선에서 환대를 받고 돌아간 지 몇주만에 미국은 공사관을 철수시켰는데, 이게 외교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알렌은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의사로 살다가 1932년 12월 11일에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가족으로는 아내 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과 1남 1녀가 있다.

3. 여담


사람에 대해 평하기를 좋아했는지 직접 쓴 인물평들이 꽤 남아 있다. 그 중 하나가 한때 영민하다며 높은 평가를 남겼던 이완용인데 '''"한 마디로 기계(로봇) 같은 사람이다"'''라는 혹평을 남겼다. 물론 후에 이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는 딱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이 초대원장을 지낸 광혜원(제중원)[14]은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되고,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1957년 합쳐지면서 두 학교의 머리 글자를 따 연세대학교가 된다. 자세한 건 연세대학교/역사 참조.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에서 션 리차드 가 알렌역을 맡았다.

[1] 철자로 인해 '호레이스'로도 알려져 있으나 해당 이름의 영어 발음은 [ˈhɒɹəs~ˈhɔɹəs\]로, '호러스'가 실제에 더 가깝다.[2] 다른 하나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조선기독대학(경신학교 대학부)-연희전문학교.[3] 이후 세브란스 병원 및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이어져 연희전문학교와 통합 과정을 거쳐 연세대학교가 된다.[4]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연세의료원서울대학교병원 사이에 정통성 논란이 있기도 했다. 제중원 정통성 논란 문단 참조.[5] 다만 알렌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오게 된 건 그가 중국에서 심각한 의료사고를 저지른 것에 대한 좌천성 인사조치로 봐야 한다.[6] 이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외과 수술로 기록된다.[7] 참고로 이 때 알렌은 민영익으로부터 수술비 외에 별도로 감사의 뜻으로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받았는데 그 액수가 무려 '''10만냥'''에 달했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거냐면 당시 한양에서 3천냥 정도만 있어도 부자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8]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세브란스 병원.[9] 사실 대한 제국 초기에는 빚이 없었다. 당시 외세는 국채를 넘기기보다는 이권을 확보하는데 골몰했고, 고종도 재정 유지에 발악적으로 움직인 것도 있기 때문에, 빚이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할 수가 없었고 설혹 존재했다고 해도 고종의 개인 재산이 내장원 소속 재산보다도 많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빚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국채보상운동 때문인데, 이것은 러일전쟁 이후에 일본이 억지로 떠넘긴 것이지 이전부터 존재하던 빚이 아니었다.[10] 링크에선 1913년부터 가능한데 1913년 기준 3.6억 달러, 1920년 기준 1.8억 달러, 1930년 기준 2.1억 달러, 1936년 기준 2.6억 달러이다.[11] 고전적 사대 외교에서 형제지국의 관계라는 의미로 발언한 것일 수도 있다.[12] 참고로 러일전쟁은 1904년에 터진다.[13]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친일이었던 게 아니라 일본 문화 자체에 심취한 상태였다. [14] 인터넷 백과에도 보통 이 사람이 설립했다고 나와있는데, 정작 제중원 항목엔 아니라고 되어있다. 일반적으론 알렌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광혜원을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서울대학교병원 측에 따르면 제중원은 엄연히 국립(당시엔 왕립)기관으로 선교회는 위탁 운영만 했지 소유권은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로 설립자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단 고용되어 초대원장을 지낸 운영자인 것은 맞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