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전쟁

 

1. 개요
2. 선제공격과의 차이점
3. 실제 사례
4. 가상세계에서의 구현
5. 관련 문서


1. 개요


Preemptive Strike는 상대가 선빵치기 전에 먼저 선빵을 치는 개념이고, Preventive는 조금 더 머나먼 미래의 위협에 대비하는 개념이다. 학계에서는 두개를 구분하니 주의 요망. 예방전쟁의 사전적 정의는 아래와 같다.

"적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겨지는 정세, 특히 적의 공격에 방어로 일관하는 것보다 먼저 공격을 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군사적 판단에 근거하여, 아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는 전쟁"

즉 예방전쟁은 '''지지 않으려면 선제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근거로 자행되는 외국에 대한 침공행위이다. 침략전쟁과는 사전적 정의로는 쉽게 구분이 가능하나, 예방전쟁의 결과가 침략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현실적 측면에선 두 전쟁의 구분이 쉽지 않다.
현대 국제법에서 예방전쟁은 국가의 자위권 행사라는 근거 하에 제한적으로 용인이 가능하다는 견해가 있다. 국가의 자위권이 발동되기 위해서는
  • 사태의 긴급성. 즉, 서둘러 대응하지 않으면 국방에 현저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 행동의 필요성. 즉,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 외교, 경제, 문화 등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어도 소용이 없었거나 이를 총동원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 수단의 정당성. 즉, 위의 두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 이상의 군사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며, 이 조건이 달성하는 경우 해당 국가는 전쟁 발발로 발생한 희생자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 외에는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범주를 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예방전쟁 역시 국제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 예방전쟁 긍정론자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경우 사태의 긴급성 및 행동의 필요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란 적어도 당대에는 쉽지 않으며 후대에 이르러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예방전쟁은 매우 특이한 상황이 아니면 현실적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견해가 더 많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앞의 두 조건이 성립할 만한 상황이라면, 세 번째 항목은 자동으로 성립할 수밖에 없으므로 애초에 논외이기 쉽다. 물론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공인될 수 있는 테러리스트 조직 같은 세력을 상대할 때는 이 문제까지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이미 전력을 다해 맹공을 퍼부어 승리하지 않는 한 국가의 생존이 불분명할 경우 한정으로 앞의 두 조건이 성립하게 되므로 자동으로 세 번째 조건이 성립하는 것이다.
또한 그나마 순군사적 측면에서도 공격이 방어보다 불리하기 쉽다는 수많은 실전 전훈 때문에, 예방전쟁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클라우제비츠조차도 군사적 관점에선 일반적으로 선제공격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언급을 저서에서 하고 있다. 사실상 예방전쟁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선제공격을 통해 다대한 손실을 입을 위험성보다도 선제공격의 목적을 달성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욱 커야만 한다는 군사적 전제조건이 필요하며, 아울러 그런 상대와의 전쟁에서라면 어지간해선 예방전쟁을 일으킬 의미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2. 선제공격과의 차이점


내용 자체로 보면 선제공격 전략, 이른바 선제 전략(Preemption)과 동일하지만 동시에 두 개념은 달리 분석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선제전략과 예방전쟁의 차이는 결국 정치적 사항을 중시하는가? 군사적 사항을 중시하는가? 이 두가지의 간단한 차이를 갖고 있다. 선제공격의 전략을 수행하려면 명확한 명분이 있어야한다. 즉 정치적으로 공격이 가능한 형태에 대해서 나올수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반면에 예방전쟁은 철저하게 군사적 위협을 기준으로 군사적 행동에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치적 명분은 차후 문제로 보는 식의 수행을 이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양자 모두 선제공격이라는 추종은 동일하지만 정치적 명분을 동반하는 것과 군사적 위협만으로 대응하는 것의 차이의 갭이 크게 있다.
전자인 선제공격의 경우 정치적 명분이 탄탄하다면 선제공격을 함과 동시에 선전포고를 수행하고 이를 통하여 그 자위권의 존중을 받을수 있다. 대표적으로 UN은 51조의 자위권 항목에서의 선제공격에 대한 정치적 명분의 사례를 남겨두었다. 즉 WMD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갖추고 정치적-군사적 위협을 감행할경우의 선제전략은 자위권의 수단으로서 부분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보증하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명분에 입각한 선제공격의 한계는 결국 그 정치적 명분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이며 그 명분을 납득하게 할수 있는가 여부도 달려있다. 당장 국제사회의 정치현실만 보더라도 그 내세운 명분을 부정하는 대립적 관계의 국가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반면에 예방전쟁은 철저하게 군사적 입장에서 위협을 인지하고 결심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자위권으로 해석할수 있으나 명백하게 군사적인 추정사항에 의거해서 움직인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UN헌장에서 정한 51조의 자위권 항목의 침해소지가 매우 크다. 이는 강대국에게도 해당되어서 오히려 정치적 명분이 없거나 거짓으로 드러났을 경우에 오는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포함한 정치적 역풍은 피할 수 없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등은 정치적 명분이 없거나 거짓으로 드러난 바 있는데, 예방전쟁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3. 실제 사례


그렇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 예방전쟁을 일으킨 경우는 다수 국가와 다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일 때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14년 8월 독일 제국에 의한 프랑스 침공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한 세르비아 침공(제1차 세계대전), 1967년 6일 전쟁이다. 사실상 이 두 차례 전쟁을 제외하고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의 기준으로라도 예방전쟁 개념이 성립하는 전쟁'''은 사실상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독일 제국의 프랑스 침공은 예방전쟁이 아닌 침략전쟁이고, 6일 전쟁은 예방전쟁이라는 사실은 인정을 받되, 예방전쟁을 한 게 옳았다는 평가와는 별도의 이야기이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에게 다른 선택권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국토가 좁고 다수의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방어전에 직면한다면[1]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6일 전쟁 당시의 선제타격은 불가피했다고 봐야 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시 민족 구성이 복잡했던지라 자국 내 슬라브계가 전체 제국민의 60퍼센트나 차지할정도로 제국에게는 큰 시한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서서히 민족주의의 기운이 돌고있었고, 이웃의 슬라브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남쪽 슬라브계 주민들 사이에서 분리주의를 선동하면서 해당 지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제국의 육군 참모총장이였던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오랫동안 이러한 세르비아에 대항해 예방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마침 세르비아인에 의해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이런 견해도 있다. 이스라엘은, 특히 이스라엘 군부는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생각은 없이 정치적 제스처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정치가들 및 주요 지휘관 전원의 회고록에서 일관되게 확인된다. 이 견해로 보면 이스라엘이 6일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이집트군과는 달리 시리아군은 무능한 주제에 깽판만큼은 도를 넘어서게 쳐대고 있으므로 시리아를 공격해서 박살내고 싶은데, 시리아에 전면 공격을 감행하면 이집트가 시리아 편을 들어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세에 나설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 된다.
다만 독일 제국의 프랑스 침공 자체는 예방전쟁 및 국가의 자위권 문제가 명백히 명시되기 전에 있었던 전쟁이기 때문에 엄격한 현대 국제법의 잣대를 들이대기 어렵다는 이야기만 있다.
'''핵무기 사용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수 있다.''' 핵전쟁 상황에서는 선제공격이 매우 크게 작용하기 때문. 이것을 막기위해 양쪽 다 공멸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둠스데이 머신 등이 개발되었다. 결국 핵전쟁이 벌어지지않고 냉전이 종식되었기에 이쪽에서도 당연히 예방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89년에 벌어진 파나마 침공과 2003년 벌어졌던 이라크전의 미국의 개전 형태가 이러한 예방전쟁에 해당된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의 여수전쟁, 여당전쟁 사례에서 요서 공격과 요서 지역에서의 군사적 활동이 대표적이다.[2] 그전에도 북제에 대한 거란을 활용하여 공격해본 사례가 있으며 발해도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한 사례가 여기에 해당된다. 신라왜구의 침입이 잦아서 쓰시마 섬으로의 예방전쟁 이야기가 기록에서만 두 번 나왔는데[3] 두 번 다 대신들의 반대로 중단했다. 고려때 흥료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거란공격사례도 대표적 케이스이다. 후에 고려조선이 실시했던 여진정벌대마도 정벌도 예방전쟁이다. 조선의 여진정벌은 '한민족은 평화의 민족'이란 인식에 반박하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4] 다만 조선전기 때의 여진족들은 단순히 만주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노략질과 살인을 저지르며 조선에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여진 정벌은 범죄자 토벌의 성격도 강했다.
중국의 경우 한국전쟁때 개입과 중월전쟁의 개입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특히 중국의 예방전쟁에서 가장 최고의 성과라고 말한다면 한국전쟁의 개입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자국의 최고 핵심 전략종심이자 수도인 베이징으로부터의 국가위협과 안보적 안위를 지켰을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두개의 국가를 유지함으로서 중국의 정치적 입장을 강요할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동시에 오늘날 북한이라는 존재가 대미전선에서 미국을 상대로 완충지대의 역할과 동시에 러시아의 남진견제에도 효용성을 갖출 수 있었다.[5] 동시에 한국에게는 자신들의 정치적 우위를 강요할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국으로서는 매우 장기적인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중월전쟁때의 경우 한국전쟁보다 더 시원치 않은 고전에 가까운 결과를 냈으나 베트남의 팽창을 저지함으로서 남중국지역의 자국의 영향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내륙지역의 국가들을 대베트남전선의 친중주의의 국가들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6] 중국의 두 경우의 예방전쟁의 결과론적인 성공사례도 중요한 예방전쟁의 사례가 된다.
일본에서는 정한론을 내세워 19세기 말 부터 한반도를 식민화한 것을 예방전쟁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방전쟁의 요건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면에서 오히려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평가된다. 현재에도 일부 일본의 극우들이 그 사상을 그대로 주장하고 있다. 여전히 일본 일부의 극우 정계와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같은 넷 우익들은 암암리에 신정한론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며 군사력을 증강하고 자위대의 국방군화를 요구하고 있다.

4. 가상세계에서의 구현


가상에서의 예시는 엔더의 게임(영화화판 기준) 후반부에서 인류군 지휘자측에서 이번에 외계인을 격파해야할 명분으로 예방전쟁론을 주구장창 늘어놓는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격전의 아제로스에서 실바나스 윈드러너텔드랏실을 공격 하는 가시의 전쟁을 벌인 명분이 얼라이언스 매파가 호드를 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자는 예방전쟁론이다.[스포일러] 이후 얼라이언스도 잔달라의 호드 가입을 위협으로 보고 같은 명분으로 줄다자르 공성전을 일으킨다.

5. 관련 문서



[1] 더욱이 1967년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여전히 아랍권보다 열세였다.[2] 다만 이 경우는 예방전쟁보다는 선제공격의 사례로 더 크게 활용되는 경우가 크다.[3] 유례 이사금, 실성 마립간[4] 이게 한두번도 아닌 여러번 한번 했다 하면 다 헤집는 경우도 많았다.[5] 이는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북한이 소련에게 한 정치행보로도 확인된다. 물론 당시 중국을 상대로도 비슷한 짓을 해서 욕을 먹긴한게 북한이다.(...)[6] 지금도 캄보디아-라오스는 친중성격이 매우 강하다.[스포일러] 예방전쟁은 구실일 뿐, 사실은 전쟁에서 죽는 이들의 영혼을 나락의 간수에게 바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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