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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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Invasion of Panama
(Operation Just Cause / Invasion of Panama)
1. 소개
2. 배경
3. 경과
4. 미군 피해
5. 민간인 피해
6. 여파
7. 여담
7.1. 노리에가 플레이리스트
7.2. 사설경비업체의 창궐
7.3. 라이베리아의 야망
8. 의의
8.1. 군사적 의의
8.2. 정치적 의의
9. 참고자료
10. 매체에서


1. 소개


파나마 침공은 1989년 12월 20일, 미국파나마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조지 H. W. 부시, 국방부 장관은 딕 체니, 합동참모의장은 콜린 파월이다.

2. 배경


1988년 2월 5일, 미국은 파나마의 실권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마약밀매 혐의로 마이애미주 연방법원에 기소했다. 노리에가는 미국파나마 운하 장악을 위하여 자신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25일에는 방미 중이던 에릭 아바투로 델바예 파나마 대통령이 노리에가의 해임을 발표하였다.
3월 11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파나마 운하 사용료 7백만 달러 지불 중지 등 파나마에 대한 경제제제 조치를 발표했다. 4월 5일에는 미군 1천 3백명이 파나마에 증원되었다.
9월 27일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쿠데타 음모 가담 혐의로 파나마인 26명이 검거되었다.
1989년 5월 7일, 파나마에서는 총선이 있었다. 노리에가가 지지하는 민주혁명당 카를로스 두케 후보와 야당연합인 시민민주동맹의 기예르모 엔다라 후보 간에 대통령 선거가 벌어졌다.
하지만 엔다라가 유효득표의 2/3를 넘는 득표를 기록했음에도, 투표종료 16시간이 지난 8일 까지 파나마 당국은 어떤 발표도 하지 않았다. 이에 부정선거 행태에 분노한 수만명의 시민들이 항의 시위에 나서게 된다.경향신문(1989.5.9)
5월 9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 선거참관인단으로부터 노리에가 정권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보고를 받고, 기자회견을 통하여 노리에가에게 선거결과에 승복하고 군사령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했다.동아일보(1989.5.10)
5월 10일, 파나마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 선거가 '''야당이 끌어들인 외국인들'''에 의하여 방해공작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외세의 개입과 광범위한 선거부정"을 이유로 대통령 선거를 무효화 한다고 밝혔다.한겨레(1989.5.12)
9월 1일,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나, 로드리게스는 노리에가의 '꼭두각시','허수아비' 취급을 받았고, 미국은 파나마와 외교관계단절 및 강력한 경제제제 조치를 시작했다.한겨레(1989.9.3)
10월 3일, 군부 내에서 소장파 장교들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노리에가는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미국에서는 이를 부정하였다. 파나마 방위군 내에서 노리에가의 지지는 굳건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쿠데타의 실패로 노리에가의 지위는 더욱 강고해진 것으로 보였다. 미국에서는 노리에가가 마약밀매업자를 지원하는 댓가로 막대한 돈을 얻어 방위군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동아일보(1989.10.4)동아일보(1989.10.4)
10월 6일, 파나마 정부는 야당을 쿠데타의 배후세력으로 규정, 9월 20일 부터 단식투쟁을 하던 기예르모 엔다라 당수는 교황청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노리에가는 고작 두달 만에 엔다라와 자신의 처지가 뒤바뀔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경향신문(1989.10.7)
10월 4일,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은 노리에가에 대한 군사력 보유를 선언하였고, 8일에는 베이커 국무장관과 딕 체니 국방장관이 10.3 쿠데타에서 파나마 주둔 미군 사령관에게 '무력사용없이' 노리에가를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는걸 밝혔다. 10일에 파나마는 미국의 침략에 대처한다며 전시법을 선포했다. 13일에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노리에가 축출을 위해서라면 '''군사력 사용도 반대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파나마를 겨냥하여 미국 내 기관에 각종 권한이 부여되었다. 15일에는 FBI가 외국의 미국법 위반자들을 해당국 정부의 동의없이 체포, 압송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27일에는 미 상원 정보위원회가 CIA의 외국 쿠데타 개입 규제를 완화하기로 합의하였다.
12월 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WBC 슈퍼미들급 챔피언쉽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대회는 미국의 슈거레이 레너드와 파나마의 로베르토 두란이 대결하게 되었다. 노리에가는 이 타이틀 전을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전이라고 선언하며, 여러 방송국의 전국 네트워크를 통하여 동시 중계하도록 지시하여 애국심 고취에 활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란은 레너드에게 판정패 하였고 파나마의 분위기는 썩 좋아지지 않았다.동아일보(1989.12.9)
12월 16일, 파나마 의회는 파나마가 미국과 '전쟁상태'에 있다고 선언하는 한편, 마누엘 노리에가 군 총사령관을 정부수반으로 공식 임명하였다. 노리에가를 "민족해방 투쟁의 최고지도자"로 임명했다고 발표,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보다 노리에가의 권한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공식화 했다. 노리에가는 이미 이전부터 파나마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로서 공식적으로도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노리에가의 마지막 영광이었다.경향신문(1989.12.16)
16일 밤, 파나마에서 미군 장교 1명이 살해되었고, 18일에는 미군 장교 1명이 파나마 교통경찰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하는 등. 긴장이 극도로 조성되었다.한겨레(1989.12.20)

3. 경과


12월 20일, 미국에서는 새벽에 전격적으로 파나마를 공격하였다.
미국에서는 파나마 주둔 미군에 더하여, 미국 본토에서 9500명의 해병대, 육해군을 추가 동원하였다. 침공에 동원된 미군은 2만 1천여명이다.
미국은 파나마가 작은 나라라고 얕보지 않고, 철저하게 준비를 하여 공격했는데 스텔스 폭격기, 아파치 공격헬기 등 최신 장비까지 동원하였다. 파나마 침공은 F-117의 최초 실전으로 알려져 있다.경향신문(1989.12.25)
당시 파나마 군은 1만 5400명, 장비도 미군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 시티는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미국은 이전 총선에서 승리가 확실해졌으나, 노리에가가 선거 자체를 무효화하여 집권 기회를 놓쳤던 기예르모 엔다라를 수반으로 하는 친미 정권을 승인하고, 기존에 발효했던 대 파나마 경제제제를 모두 해제하였다.
마누엘 노리에가는 국영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 참호전을 수행하고 있으며 우리의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발언하는 등 독전 연설을 하기도 했으나 결국 행방이 묘연해졌다. 3일간 파나마 군은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고, 노리에가가 바티칸 대사관으로 도피하면서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24일 오전, 마누엘 노리에가는 파나마 시내의 바티칸 대사관에 나타나 바티칸으로의 망명을 요청하였다.매일경제(1989.12.25)
기예르모 엔다라 파나마 대통령은 요한 바오로 2세앞으로 서한을 보내서 노리에가를 내놓는 것이 파나마인의 생명을 구하는 길이며, 그와 추종자들이 저항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편으로는 호세 세바스찬 라보아 대사는 교황청 대사관 직원들이 노리에가와 그 일당에게 인질로 붙잡힌다면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할 권한을 미군에게 부여하였다.한겨레(1989.12.29)
미국은 외교적으로 교황청에게 강력한 압력을 넣는 한편, 미군은 교황청 대사관을 탱크철조망으로 포위하고, 대형확성기를 설치하여 을 시끄럽게 틀어서 대사관에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한겨레(1990.1.5)
해가 바뀌어 1월 3일, 노리에가는 밤 8시 50분에 교황청 대사관에서 걸어나왔다. 당시 목격자들은 노리에가가 하얀 장군복 차림에 수척한 모습으로 대사관에서 걸어나와 미 마약 단속국(DEA)요원들에게 체포되었고, 헬리콥터에 실려 미군 기지로 갔다고 한다.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노리에가가 자발적으로 미국에 투항하였다고 밝혔으며, C-130 수송기로 플로리다로 이송되어 마이애미에서 마약밀매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밝혔다.동아일보(1990.1.4)
미군에 연행된 노리에가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재판을 받고, 마약거래, 마약조직으로부터의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40년 형의 실형 판결을 받고 미국의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4. 미군 피해


23명의 미군이 희생되었으며, 전쟁 비용으로 1억 6360만 달러를 치렀다. 노리에가를 압송하고 재판하는 데는 2천 3백만 달러가 소모되었다.동아일보(1992.4.17)

5. 민간인 피해


1992년 발표된 미 하원의 발표에 따르면, 파나마 정규군 전사자는 65~70명이며, 민간인 피살자는 230명 이상, 행방불명자는 약 70명이다. 민간인 피살자의 대다수는 약탈자 혹은 노리에가의 비정규군 소속 대원이었으나, 무고한 구경꾼도 60~86명이 끼어 있었다.동아일보(1992.8.5)

6. 여파


노리에가 정권은 붕괴되었으며, 이후 파나마에는 기예르모 대통령이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엔라다 정부가 그리 유능하지 않았던탓에 정국 혼란은 가중되었고 결국 1994년 대선에서 우익진영의 분열속에 민주혁명당이 재집권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1]
유엔에서는 미국의 파나마 침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한겨레(1989.12.31)
1992년 6월 11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파나마를 방문하여 연설을 하려 했으나 갑자기 성난 군중 수천명이 몰려와서 대피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동아일보(1992.6.12)

7. 여담


작전 명칭인 'Just Cause'는 직역하면 '정당한 명분'이란 뜻이 된다. 이 작전명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다. 본래 정한 작전명은 'Blue spoon', 즉 '파란 숟가락'이었다. 그런데 당시 특수작전사령부의 제임스 린지 대장은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인 토머스 켈리 중장에게 작전명을 바꿀 것을 건의했다. 이 때 린지 대장은 "나중에 당신 손자들에게 '이 할애비는 파란 숟가락 작전을 행했단다.'라고 말하고 싶소?"라고 말했고, 켈리 중장도 이 비유를 듣고 작전명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참모차장인 조 로페즈 준장과 상의한 끝에 'Just Cause'로 정하게 되었다고. 출처
나중에 이 작전명은 역시 중남미를 무대로 하는 액션 활극 게임인 저스트 코즈 시리즈의 유래가 된다.

7.1. 노리에가 플레이리스트


24일 노리에가가 교황청 대사관으로 도피한 이후, 미군은 교황청 대사관을 포위하고 , , 소울, 펑크 등의 음악을 시끄럽게 방송하여 대사관과 노리에가를 압박한다. 방송은 라디오 신청곡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곡의 제목과 가사의 내용을 통해 노리에가를 조롱하는 노래들이 주를 이뤘다. 미군 SOUTHCOM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음향공격에 사용된 곡들은 다음과 같다. 29일 이후에는 신청곡 재생을 중지하고 빌보드 차트 등 각종 음원차트 상위 40개 곡을 재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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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곡들의 제목과 당시 노리에가의 상황을 연결지어 생각해보자. 약올리기의 진수를 느껴볼 수 있다.
당시 사용된 곡들의 플레이리스트는 유튜브스포티파이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7.2. 사설경비업체의 창궐


미국은 노리에가 정권에서 꿀을 빨며 하수인 노릇을 하던 파나마의 경찰과 군대를 해체해버렸는데, 치안을 유지하던 미 헌병이 작전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리자 당연히 치안 유지 능력이 상실되고 범죄가 들끓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기예르모 엔다라 정부는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잘못하면 당대의 콜롬비아나 브라질같은 나라들처럼 무법천지로 변하겠지만 무역 국가인 파나마는 기업 활동이 활발하고, 기업인들은 자본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력으로 치안을 유지하고자 했다. 게다가 마침 경찰과 군대가 해체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군인과 경찰'''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들을 고용해서 사설경비업체를 차렸고, '햄버거 하나 사려 가려 해도 경비원이 없으면 안되는 상황'이라 너도나도 경비업체를 차리면서 경비업체의 숫자와 인력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전에는 10개 정도 밖에 안 되던 사설경비업체가 1992년 시점에서 내무부에 등록된 것만 1백개 이상, 그 종사자는 약 1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하여 M16 소총이나 UZI 기관단총으로 무장하여 군대급 무장을 하고 백주대로에 범죄를 소탕한다고 총기난사 사건을 벌일 지경에 도달했다.
새 정부에서는 군경찰 출신자라고 굶어 죽으라고 할 수도 없고, 치안이 막장이라 정부가 해결 못하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걸 말릴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허가를 내려보니 정신차려보니까 노리에가 정권 때 군경찰이 사설업체의 껍질을 쓰고 복귀해버린 꼴이라 전전긍긍하게 되었다.경향신문(1992.7.27)

7.3. 라이베리아의 야망


1989년 미국은 11월 30일에는 파나마에 대한 제재 조치가 강화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는 중대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모든 파나마 국적 선박'''은 90년 2월 부터 미국 입항이 금지될 것이라고 밝힌 것.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선박등록세가 낮은 파나마에 편의상 선적을 둔 편의치적 선박이 많았으며, 파나마는 제1의 편의치적국이었다.
물론 이는 파나마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미국에 입항할 수 없다면 파나마 선적을 유지할 이유가 없기 때문. 이 조치가 실현되면 파나마는 2백만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물론 더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전 세계로서, 전 세계적으로는 선박등록세, 변호사 비용 때문에 6천만 달러 이상의 비용이 나갈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당시 주요 해운사 선박이 파나마 선적으로 되어 있던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므로 당시 관민대책회의가 열리는 등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한편, 이 무렵 세계 제2의 선박치적국이었던 라이베리아는 이 참에 파나마에 뒤지던 치적선박수를 따라잡기 위하여 3~4개월이 걸리던 선적취득절차를 20일로 단축 파나마보다 비싸던 선박등록세도 비슷한 수준으로 조정하였다.
하지만 결국 파나마 침공으로 모든 경제 제제 조치가 풀리면서 라이베리아는 김치국을 거하게 들이킨 셈이 되었다(…). 물론 이미 발빠르게 옮긴 경우도 있어서 어느 정도 이득을 보긴 했지만.
참고자료 : 한겨레(1989.12.22)

8. 의의


사실 전후사정을 보면 넘사벽 그 이상급에 해당하는 미군이 한줌도 안되는 파나마군을 찍어 누르는 기세라 전쟁이나 분쟁이란 단어도 없이 그냥 '파나마 침공' 정도로 불린다. 다만 불과 며칠에 걸친 분쟁 치고는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이야기거리가 있다.

8.1. 군사적 의의


군사적인 부분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극비로 비추어졌던 F-117 스텔스 전투기의 실전 투입 되었다. 하지만 전과가 워낙 미미해서[2] 그 위력은 훗날 걸프전에서야 드러난다.
그 다음은 미국인 커트 뮤즈 구출작전으로, 이는 미국의 대테러 특수부대인 델타 포스가 최초로 성공적으로 완수한 인질구출 작전이다. 이 역시 영화처럼 헬기를 탄 델타포스 대원들이 강습하여 뮤즈를 구출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뮤즈와 델타포스 대원들이 탄 헬기가 추락하여 관련 인물들이 중상을 입은 체로 방어전에 돌입하는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M551 셰리든 14대가 투입되었고, 그 가운데 10대가 당일 공수로 투입되어 최초로 전장에 낙하산 강하로 투입된 공수전차라는 기록을 남겼다. 셰리든은 파나마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며, 이로서 신속대응이 가능한 공중수송차량의 유효성이 실전에서 입증되었다.

8.2. 정치적 의의


베트남 전쟁 이후로 한동안 의기소침해져 있던 미국은 파나마 침공으로 아직 미국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남미의 반미 정치적 움직임을 군사적 위협으로 일단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때문에 오히려 반미 세력은 더욱 미국에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고 주권 침해라는 논란은 전 세계의 반미 세력에게 두고두고 씹히는 문제거리가 되었다. 물론 노리에가가 좋은 사람은 아니긴 했지만, 노리에가는 원래 CIA의 지원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파나마의 정점에 오른 노리에가가 미국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 들자 미국이 노리에가를 치우고 새로운 친미 정권을 세우려 했던 것이 파나마 침공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애꿎은 파나마 민간인들까지 수백명 살상당했다.
파나마 침공에서는 소위 세계의 경찰로서 미국의 모습이 강렬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국가 지도자인 노리에가가 미국에 체포되어, 미국 법정에서 재판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로서 외국의 국가 지도자라고 해도 미국 법정에 세울 수 있다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는 노리에가가 권력자이기는 했지만 의전서열로 보면 대통령이나 총리급은 아닌 국방부 장관 정도에 해당되었던 인물이라서 명목상으로는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오른것은 아니고 미군이 주둔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 만큼 미국이 잡기가 쉬웠다는 점도 있었다.
노리에가를 잡을 때 펼친 락음악 소음 심리전도 이후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9. 참고자료


미 파나마 분쟁일지한겨레(1989.12.21)

10. 매체에서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에서 프랭크 우즈알렉스 메이슨의 마지막 미션 배경이다.
[1] 다만 민주혁명당도 이전정부와는 경제정책면에 있어서 크게 다른것은 아니었다.[2] 목표를 타격하긴 했는데 파나마군은 방공망이 거의 없던거나 마찬가지라 소 잡는 칼로 닭 잡은 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