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소련 국경분쟁

 

'''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상산하향 운동

중국-소련 국경분쟁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
홍위병 해산

중국의 고립주의 정책 폐기

중미접촉 시작


중국어: 中苏边界冲突(간체자) 中蘇邊界衝突(정체자)
러시아어: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 на острове Даманский, Советско-китайский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 на острове Даманский
1. 개요
2. 배경
2.1. 국제적 배경
2.2. 중국 내부의 배경
3. 전개과정
3.1. 극동에서의 충돌
3.1.1. 문제의 전바오 섬
3.1.2. 전바오 충돌
3.1.3. 3월 2일 전투
3.1.4. 3월 15일 전투
3.2. 고조되는 긴장
3.2.1. 중국 공산당 9차 전국대표대회
3.2.2. 신장성 충돌과 핵전쟁의 위기
3.3. 진정
3.3.1. 베이징 공항 회담
3.3.2. 중국의 전쟁 준비
3.3.3. 중소국경회담
4. 결과
4.1. 미중접촉과 중소의 계속된 대립
4.2. 린뱌오의 몰락
4.3. 북한 경제 몰락의 시작
5. 기타
6. 매체에서
7. 참고문헌


1. 개요


1964년~1969년에 걸친 중국-소련 간 적대적 대치 상황이 1969년에 이르러 무력충돌로 발전한 사건이다. 제3차 세계 대전 혹은 제한적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사건이었지만 중-소 양국 수뇌부의 극적인 협상 끝에 정리되었다.

2. 배경



2.1. 국제적 배경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뇌병변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소련에서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권좌에 올라 대대적인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였다. 스탈린에 대해 불만은 많았지만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크게 놀라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로 비난하게 되었다.[1][2] 거기에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흐루쇼프를 나약한 인물로 얕잡아보았던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에게 지속적으로 모욕적인 행동을 계속하였으며 핵무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계속 하여 핵전쟁을 방지하려는 흐루쇼프의 계획에 훼방을 놓았다. 1958년 진먼 포격전도 중국의 큰형 노릇을 하려는 흐루쇼프를 엿먹이려는 마오쩌둥의 고도의 계산이었다. 여기에 사회주의의 2인자였던 중국은 더 이상 소련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소련을 대체하려는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과시하려 하여 소련 지도부를 분노케 했다.
이리하여 양국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고 대약진 운동 절정기에 소련이 모든 기술고문 등을 철수시키면서 중소결렬이 일어났다. 이렇게 양국의 동맹관계는 청산되었다. 1963년, 소련 공산당은 <소련 각급 당 조직과 전체 공산당원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을 발표, 마오쩌둥이 착오적이고 치명적인 정책을 벌여 사회주의 국가간 상호관계의 원칙을 위배했다고 맹비난했고 중국도 이에 맞서 소련은 미국, 인도, 유고슬라비아와 힘을 합쳐 사회주의 중국과 모든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에 대항하여 수치스러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고 공격해댔다. 1963년에서 1964년에 걸쳐 양측간의 비난이 미친듯이 오갔고 중국은 소련에 대한 공격 카드로 소련이 '극동 지역과 다른 인근 지역'을 빼앗아갔다고 맹비난했다. 흐루쇼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난 약간의 오해는 우수리 강과 접경지대의 하천에 관련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하천은 세월에 따라 물줄기가 달라지고 때로 새로운 섬이 생겨나기도 한다. 중국과 이전 차르 정부가 체결한 조약에 따라 국제법상 통상적인 강물의 중간이 아니라 중국 측 강변을 경계로 삼았다. 따라서 만약 새로운 섬이 생겨난다면 러시아 영토에 속하는 것이 당연했다. (...) 나중에 상황이 더욱 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1962년, 중소 양국은 1964년 2월에 국경문제에 관련된 비밀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중국 측이 수로 문제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와 극동에 영토를 확장했던 문제를 새로 논의하자고 주장하자 흐루쇼프는 1962년 10월, 국경문제 협상 합의를 파기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주도로 실각한 후 새로 권좌에 오른 브레즈네프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방문한 저우언라이에게 만취한 국방장관 로디온 말리놉스키가 우리가 흐루쇼프를 쫓아냈듯이 당신들도 '낡은 덧신'인 마오쩌둥을 쫓아내라고 요구하면서 화해 가능성은 박살이 나버렸다. 저우언라이는 격노하여 연회장에서 퇴장해버렸고 다음날 브레즈네프가 직접 저우언라이를 찾아가서 사과했으나 저우언라이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고 선을 그어버렸고 자존심 상한 브레즈네프도 마오쩌둥과의 정상회담을 거부하면서 양국의 화해 가능성은 틀어졌다.
1965년 2월,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이 베이징을 방문하였으나 마오쩌둥과 류사오치는 코시긴에게 흐루쇼프가 과거 중국에 저질렀던 일을 마구 비난하며 앞으로 "소련과 계속 논쟁할 것."이라고 못을 박으면서 예전의 우호 관계로 돌아갈 생각도, 소련의 종주권을 따를 생각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 마오쩌둥은 소련이 극동 영토의 중국 소유권을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중소 국경지대에서 도발을 감행할 것을 지시했다. 1964년 10월부터 1969년 3월까지 총 4189건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는 1960년에서 1964년 사이에 일어난 충돌에 비하여 1.5배나 많은 횟수였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기 위해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에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한 소련은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한 사회주의 국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들이 개입할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고 중국에서는 이를 두고 사회적 제국주의라고 맹비난했다.

2.2. 중국 내부의 배경


한편 중국에서는 1966년부터 중국의 흐루쇼프로 의심받은 국가주석 류사오치덩샤오핑을 겨냥한 문화대혁명이 한창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모든 저력을 바닥까지 떨어뜨렸고 국방력이나 외교역량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967년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탈권 현상은 중국이 과격한 혁명외교를 취하게 만들었고 이는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중국의 외교적 지위를 실추시킬 대로 실추시켰다. 홍위병들이 간부란 간부들은 죄다 끌어내어 조리돌리고 군부대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각부 장관들과 군구 사령관과 정치위원들까지 닥치는대로 끌어내서 때려죽이는 대혼란 와중에 당과 군부의 불만은 위험수위까지 올라갔다. 결국 마오쩌둥은 주중 영국 대표부 사건으로 크게 망신당한 후 중앙문혁소조의 강경파인 왕리, 관펑, 치번위를 소련과 국민당의 첩자, 사회주의 독초로 지목하여 숙청하면서 극좌파를 청소했다.
어쨌거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소련과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소련 대사관은 수정주의자 소굴로 몰려 포위당했고 마오쩌둥은 소련이 중국을 침공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소련은 (...) 시베리아와 몽골의 국경선을 침범하고 내몽골과 동북 지방을 침략하여 중국을 점령하려고 계획 중이다. (...) 이로 인해 인민해방군과 소련군이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레즈네프 독트린 발표 이후 소련에 대한 중국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이러한 상황을 내부 권력 강화에 이용하였다. 1956년 9월에 열렸던 제8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는 당헌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언급한 부분을 삭제하고 개인숭배를 비난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이는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1950년대 집산화 운동에서 초래된 사회 불안을 의식한 것이었다. 1969년에는 제9차 전국대표대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마오쩌둥은 9전대회에서 다시 마오쩌둥 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인정받아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련과의 불화 및 소련의 위협을 이용한 긴장감이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계속해서 대소 강경노선을 취했다.
여기에 중국 공산당 내부의 파벌 싸움도 한몫했다. 군부의 수장이자 2인자인 국방부장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는데 그는 문혁 초기까지만 해도 문혁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67년의 광풍을 겪고난 이후 자신의 지지기반인 군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문혁의 급진파인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과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린뱌오는 장칭 일파를 분쇄하기 위해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동맹을 맺고 군 원로들의 지지를 얻어 마오쩌둥이 천재라는 <천재론>을 내세우고 국가주석직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가올 9전대회에서 인민해방군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당내에서 군대의 역할을 정당화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 역시 소련과의 충돌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1968년 1월, 소련군이 우수리 강의 칠리심도(七里沁島)에 침입하여 중국 어민 10여명을 살상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1968년 10월,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에게 경계령을 하달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린뱌오의 저의를 의심하였으나 소련을 상대로 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동의하였기 때문에 이를 허락하였다. 국제적, 국내적 요인이 맞물려 중소 양국간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었다.

3. 전개과정



3.1. 극동에서의 충돌



3.1.1. 문제의 전바오 섬


소련에서 다만스키 섬이라 불리는 전바오섬(珍寶島, 珍宝岛)은 우수리강 하류의 중소 국경지대에 위치한, 길이 2킬로미터, 폭 800미터의 작은 섬으로 중국어로 보물섬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보물섬이라는 이름과는 별개로 전바오섬에는 약간의 자작나무와 사슴 약간이 서식할 뿐이었다. 1962년 10월, 흐루쇼프는 중국과의 국경회담 계획을 파기하였으나 새로운 국경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 제국 시절의 경계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소 양국은 국제법상의 관례에 따를 것을 동의하였는데 관례에 따르면 전바오섬이 우수리강 본류에서 서쪽에서 위치하기 때문에 중국에 속하였다. 하지만 흐루쇼프의 회담 거부로 인하여 소련이 전바오 섬의 중국 귀속에 합의된 바가 없었으나 중국 측에서는 소련이 국제법상 관례에 따르겠다고 동의한 점을 들어 전바오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image]
전바오 섬을 사이에 두고 말다툼하는 중소 국경수비대. 왼쪽이 소련군이고 오른쪽이 중국군이다.
이후 전바오 섬은 양국 국경수비대의 싸움터가 되었다. 처음에는 양측 장병들끼리 만나서 악수도 하고 담배도 교환할 정도로 원만한 관계였었으나, 이내 전바오/다만스키 섬이 어느 쪽 영토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양국 수비대는 갈고리 장대, 곰 사냥용 창, 못을 박은 몽둥이 등을 들고 가서 충돌했고 군용 트럭이 수백 명씩 병력을 수송하여 확성기로 군악을 틀고 서로를 도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화기가 동원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충돌이 심각해진 적은 없었다.

3.1.2. 전바오 충돌


[image]
흰 위장복이 소련군, 짙은색 군복이 중국군, 얼어붙은 강에서 벌이는 싸움이다.
결국 전바오 섬에서 양국 수비대의 신경전은 육탄전으로 번졌다. 패싸움으로까지 발전된 이 난투극에서 승자는 소련측이었다. 무엇보다 체구면에서 중국군은 소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중국군들은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마주친 소련군과 계속해서 패싸움을 벌였다. 그러던 중 일련의 패싸움에서 중국군 사병 일부가 사망하기도 했다.
체면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중국군은 일반보병인 경비대원들을 최정예 특수부대원들로 모두 교체했다. 교체된 병력은 동북지역을 관장하는 제49야전군에 배속된 특수부대원들이었으며, 난투극을 촬영하기 위해 파견된 기자 역시 특수부대 소속 교관요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무술 유단자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소련군은 마주친 중국 경비대원들을 놀려대기 시작하면서 양측간에 다시 패싸움이 일어났다. 물론 소련의 일반보병은 실전 경험이 많은 중국의 특수부대와 상대가 되지 못했고, 패배한 소련군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서둘러 퇴각했다. 갑작스런 패배에 당혹한 소련군 경비대장은 퇴각한 부하들로부터 정황을 보고받았다. 격투술 솜씨 등을 검토해본 결과 새로 교체된 중국군이 일반 보병이 아닌 특수부대원들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이를 상부에 보고하면서 소련군경비대장은 자신의 휘하에도 특수부대원들을 배속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그 후 소련군에서 '절뚝발이 중위'라는 별명을 가진 장교가 파견되었고, 중국군을 상대로 다시 승세를 가져오는 등 난투극이 이어졌다.
더 이상 국경 군사들 간의 패싸움으로 취급할 수 없었다. 상부에서는 자국군의 자존심이 높아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산둥성 출신의 '산둥꼬마'(小山东)라는 별명을 가진 특수부대 소속 초급장교까지 데려와 소련군을 상대했다. '산둥꼬마'는 산둥성에서 자라서 무예를 타고났기 때문에[3] 지휘부에서는 단지 소련군의 중위를 이기기 위해서 애먼 장교를 데려와 젠바오섬 경비대로 전출시켰다.

3.1.3. 3월 2일 전투


'산둥꼬마'의 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수십명의 중국군은 3월 2일, 얼어붙은 우수리 강을 건너 전바오 섬을 점령했다. 중국군은 이후 이루어진 패싸움에 항상 목봉을 들고 임했으며, 소련군 중위가 나섰음에도 무기를 소유한 중국군과의 패싸움에서 패배했다.[4]
상황이 불리한 중위는 순간적으로 '''권총을 꺼내들고 '산둥꼬마'를 향해 발사했다.''' 장교가 총에 맞고 쓰러지자 중국군이 소련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소련군 국경초소를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고 박격포가 가세하면서 싸움은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몇시간 뒤에 소련 증원군이 도착해 역시 중화기로 맞서기 시작하고 나서야 교전은 중단되었는데 산둥꼬마는 7발이나 총을 맞고도 당시 치고 받던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출처#1 출처#2 중국 측은, 장갑차를 비롯하여 4대의 차량에 나눠탄 소련군 70명이 선제공격을 해왔다고 주장했고 소련 측은 중국군의 기습으로 소련군 30명이 전사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상술했듯이 중국과 소련의 봉에 대한 인식 차이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소련군의 격투술은 '''맨손만을 사용하는''' 복싱이었고[5], 중국군의 격투술은 봉술이었다. 그래서 중국군은 몽둥이를 무기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소련군은 무기로 생각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소련군도 몽둥이로 대응을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소련군 측은 몽둥이를 무기로 생각한 듯하다. 일부에서는 경찰에게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면 경찰은 화기로 제압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들어 소련군의 편을 들기도 하지만, 냉병기(그것도 둔기)와 화기는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고, 몽둥이를 든 상대에 권총을 빼든 소련군은 딱히 중국군보다 더 정당했다고 보기 힘들다. 한마디로 말해서 주먹싸움을 봉싸움으로 가져간 중국은 도발 수위를 높였지만, 여기에 화기로 대응한 소련군도 도발 수위를 한 수 높였다.[6]
소식은 곧바로 소련 인민들에게도 전해졌고 분노에 찬 모스크바 시민들은 중국 대사관을 향해 잉크를 던지며 시위했다고 한다.

3.1.4. 3월 15일 전투


양측의 충돌이 일어난 후 반응이 격렬했던 곳은 소련이었다. 인민해방군이 소련을 침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련 지도부는 공황 상태에 빠질 정도로 흥분했고 국방장관 안드레이 그레치코가 즉각 중국의 공업 중심지에 핵공격을 감행하여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강경파들도 핵기지를 상대로 한 정교한 핵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동의 소련군 장성들은 정말로 중국 측에서 비무장 민간인 수백만 명을 마구 국경에 밀어넣는 식으로 소련측 방비를 무력화하여 극동을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브레즈네프는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고려했었다고 1973년 5월에 회고했으나, 결국 핵공격 대신에 다연장 로켓포를 동원한 포격을 허락하였다.
[image]
현장에 동원된 소련군 장갑차와 무장헬기
한편 마오쩌둥은 국경분쟁에서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소련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3월 12일, 전열을 가다듬은 수천 명의 중국군이 소련군을 기습했으나 이미 3월 2일에 한바탕 데었던 소련군은 탱크, 장갑차 등을 동원하여 강경하게 맞섰고 기계화부대와 보병부대의 격돌인지라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3월 14일, 중국군 보병부대 다만스키 섬을 점령하는 것이 포착되었고 소련군 야신 중령이 이끄는 8대의 BTR-60 장갑차들이 중국군을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 BTR 4대가 격파되었다.
3월 15일, 중국군 박격포가 준비 포격을 가하고 중국군 3개 보병 중대가 공세를 가했다. 소련군 BTR 2대가 추가로 격파당하자 레오노프 대령이 지휘하는 T-62 전차 4대로 이루어진 전차 소대가 반격을 가했고 그 과정에서 선두의 레오노프 전차가 중국군 RPG-2 대전차화기에 격파당했다. 레오노프 대령은 탈출하던 중 중국군 저격수에 사살당한다. 해당 T-62 전차는 이후 중국군에 입수되었다.
이후 탄약이 고갈된 소련군은 다만스키 섬을 떠나야 했고 BM-21 다연장 로켓포가 해당 위치를 집중 포격했다. 그 결과 중국군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되었다.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소련군 199 차량화 소총 사단 예하 대대 병력이 반격을 가해 다만스키 섬을 점령한 중국군을 격퇴했다. 저녁에도 중국군은 세 차례나 공세를 했지만 모두 소련군의 막강한 기계화 부대 화력에 밀려 격퇴당했고 더 이상 중국군의 적대행위는 포착되지 않았다.
종합해보자면 이때 중국은 전선에서 부대가 대규모로 전진하는 구시대적인 전술을 구사했고, 이에 대응하는 소련군의 전술은 독소전쟁을 통해 완벽히 익힌 '''바로 저런 전술을 격파하기 위해 만든 종심 전투 교리였다.''' 소련군은 병력은 적었으나 강력한 화력으로 계속 중국군을 포격했고, 중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측의 피해규모는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중국 측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군은 1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소련군은 27대의 장갑차량(전차 포함), 1대의 지휘차량, 다수의 트럭을 손실했다. 반면에 소련 측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군은 150여 명의 사상사가 발생하고 중국군은 800여 명이 전사했으며 전차 1대를 손실했다.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측의 피해는 최대 800명 규모에 달한다.
이미 1968년 10월부터 소련과의 국경출동을 상정하여 경계령을 내린 상태였던 중국 지도부는 경서빈관에서 상황을 지휘했다. 3월 15일의 궤멸적인 패배가 있자 마오쩌둥은 더 이상 싸우지 말 것을 지시했다.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이미 얻을 것을 다 얻은 후였다. 하지만 2주일 후에 있을 9차 전국대표대회를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선전부는 "전쟁을 대비하라!"라는 선전 문구를 걸고 호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마오쩌둥은 대전투와 속전은 물론 핵전쟁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전국을 겁주었다. 하지만 사실 중국 지도부는 전바오 섬의 충돌을 별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이 더 이상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3.2. 고조되는 긴장



3.2.1. 중국 공산당 9차 전국대표대회


대략 2주 후, 1969년 4월 1일부터 4월 24일까지 중국 공산당 9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베이징에 도착한 대의원들은 소련과의 긴장을 이유로 대회에 관련해서 어떠한 얘기도 주고받아서는 안된다는 주의를 받았다. 개막식에서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교시했다.

"나는 우리 대회가 충분히 잘 진행되어 단결의 대회가 되고 승리의 대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현재까지의 경과는 비교적 명확하다. 정치노선이나 조직노선, 사상 방면에서 모두 뚜렷하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이 제1차 대회를 충분히 단결하는 대회로 이룰 수 있다. 이런 단결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겠는가? 이 대회를 승리의 대회로 이끌 수 있겠는가? 대회 이후 전국에서 더욱더 큰 승리를 이룰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단결의 대회와 승리의 대회를 열 수 있고, 대회 이후 전국에서 더욱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마오가 말하는 '단결'이란 문혁의 기반이었던 '무산계급 독재 아래의 계속혁명'의 마오이즘을 중국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매기자는 얘기였다. 이어 린뱌오가 제8차 중아우이원회를 대표, 장춘차오야오원위안이 작성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준비,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과정, 성실한 투쟁과 비판, 개혁을 잘 수행하는 문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정책, 중국 혁명에 관한 최후 승리, 당의 정돈과 건설, 중국과 외국의 관계, 전당과 전국 인민이 단결해 더욱더 큰 승리 쟁취 등 총 8개 부문의 정치 현안 보고서를 낭독하였다. 4월 2일의 분조회의에서 장칭저우언라이는 린뱌오를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바오 섬 전투에 참전하였던 29세의 지휘관 쑨위궈가 초대되었다.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융성이 그를 직접 소개하였으며 마오쩌둥은 그를 크게 환영하였다.
4월 14일, 9차 전국대표대회 2차 회의가 개최되자 마오쩌둥은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의 주역인 왕훙원을 발언자에 포함시켜주었다. 결국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며 마오쩌둥 사상이 다시 당장에 삽입되었다. 4월 24일, 새로운 중앙위원회 선출을 마지막으로 9전대회는 폐막하였다. 4월 28일, 9기 1중전회가 소집되어 정치국 위원을 선출하였다. 마오쩌둥은 여기서도 문혁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나의 말은 항상 하는 말이다. 모두들 알고 있는, 새로운 말이 아니다. 단결이다. 단결의 목적은 더욱 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승리는 무산계급 지도를 보증하면서 전국의 광대한 군중이 단결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혁명은 끝나지 않았으며 현재 예를 들면 투쟁과 비판,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 (...) 보건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기초는 공고하지 않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상당히 큰 다수 공장의 우두머리, 지도권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있지 않다. 노동자 군중의 수중에 있지 않다. 무산계급 독재를 공고히 해 공장, 농촌, 기관, 학교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

여기에 마오쩌둥은 전바오 섬 사건을 언급하면서 전쟁 준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군사위원회가 조직, 마오쩌둥이 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었고 국방비를 34% 증액하자고 제안했다. 마오쩌둥의 목적은 달성된 듯 했다. 1969년 5월 24일, 중국 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전바오 섬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였으며 평화적 담판에 의해 중소 국경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고 발표했다. 5월 31일, 마오쩌둥은 가벼운 마음으로 우한으로 지방순시를 떠날 정도로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련이 얼마나 열받았는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3.2.2. 신장성 충돌과 핵전쟁의 위기


중국이 낙관하는 사이, 국경에선 계속 충돌이 벌어졌다. 4월부터 6월에 이르는 기간, 극동과 신장에서 계속 충돌이 벌어졌으며 1969년 7월 8일, 흑룡강성 고르진스키 섬에서도 충돌이 벌어졌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은 1969년 8월 13일, 신강성 유민현 사건이었다. 중국군은 이전부터 카자흐스탄 국경지대의 잘란스콜 호수를 자주 침범했고 소련군은 참호를 구축하고 BTR 장갑차 두 대를 전진배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긴장이 고조될 때 중국군이 기관총을 발사했고 소련군은 곧바로 맞보복을 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곧 이어서 소대 규모의 수십명의 중국군이 대전차화기로 무장한 채로 공세를 취했고 언덕 하나를 점령했다. 그러자 소련군 차량화소총부대가 반격을 가했고 언덕은 탈환되었다. 중국군은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채 패퇴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한 반면 중국군은 2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포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중국군의 TT 권총 4정, SKS 소총 9정, RPD 기관총 4정, 대전차 수류탄 4기, 수류탄 27개, 영화 카메라 2개, 카메라 1기 등이 노획되었다.[7]
이 사건 이후 소련은 '''핵공격'''을 언급하는 강경한 노선을 취했다. 프라우다는 중국이 위험한 나라로 변했다고 비난했으며 소련군 기관지 <붉은 별>은 '현대의 모험가'들에게 압도적인 핵공격을 안겨주겠다고 선언했고 소련이 중국을 핵으로 공격하기 위해 동유럽의 지지를 호소한다는 소문도 흘러나왔다. 워싱턴의 소련 대사관은 백악관에 소련이 중국 핵시설을 공격할 경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해 비밀리에 타진했고 미국 정부는 대답을 회피했다. 가을 들어서는 소련이 신장의 중국군 핵무기 실험장에 핵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외신과 소식통을 등해 들려오는 핵전쟁의 위험에 마오쩌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중국은 핵무기미사일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없고, 사정거리 2,000km 정도의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 정도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모스크바를 타격하기에는 무리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군의 기계화 빈도는 1966년, 마오쩌둥이 군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뤄루이칭, 양상쿤 등을 펑더화이 파벌로 몰아 숙청해버린 탓에 건국 이후 거의 진행되지 않아 공군이나 기갑부대는 195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으며 공군의 경우 야간 전투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문화대혁명의 직격타로 수많은 고급 장교들이 박해를 받아 인민해방군은 정규전을 치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에 망명해 있던 왕밍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들에게 중국에 대한 무력개입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중국의 현재 정세는 사회주의 진영과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1956년 헝가리 사건보다 더 위험하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 우리는 그들에게 정치적 지원은 물론이고 무력을 통한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고, 가능하다면 중앙아시아와 몽골인민공화국의 민족들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해야만 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련군이 극동과 신장은 물론,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 몽골 국경에까지 군대를 배치하자 8월 27일, 마오쩌둥의 제의로 저우언라이가 전국인민방공지도기구를 설립, 전국적으로 방공공사를 세우게 했다. 8월 28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몽골과 소련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모든 성에 군사 동원령을 하달하고 전국에 적색경보를 발령하여 군민, 군정 단합을 강화하고 파벌의식을 타파하며 반침략전쟁을 빈틈없이 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각 성, 직할시, 자치구에서 선전대회가 열렸으며 저우언라이의 지도 아래에 대대적인 베이징 소개 작업이 이루어졌다. 마오쩌둥은 건국 20주년 기념식에 쓰일 원고에 "전 세계 인민들은 단합하여 모든 제국주의, 사회제국주의가 발동하는 침략전쟁을 반대하며 특히 원자탄을 무기로 한 침략전쟁을 반대하자!"라는 문구를 추가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유럽에 신경 쓰기도 바빴던 브레즈네프는 중국 역시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역시 만약 소련이 중국에 핵공격을 가할 경우 미국이 우호적인 중립을 취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해왔다.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이 중국에 핵공격을 가할 경우 '''130개의 소련 도시에 핵공격을 가할 계획을 수립했고''' '행동'에 옮긴다면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주미 소련 대사관에 경고했다.#그렇지만 마오쩌둥 지도부를 매우 혐오하고 불신했던 브레즈네프는 마오쩌둥과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시긴 수상에게 중국과 협상할 것을 지시했다. 7월 26일, 소련 외교부는 중국 국무원에 서신을 보내 중소고위급 회담을 열어 긴장관계를 완화시키자고 제안했으나 8월 13일의 신장성 유민현 공격이 있자 중국은 격노하여 어떠한 형태의 대화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는 한편 소련에 대한 외교 공세에 나섰다.

3.3. 진정



3.3.1. 베이징 공항 회담


[image]
1969년 9월 11일 베이징 공항 회담
그러던 중 1969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사망했다. 9월 8일, 저우언라이는 조문단을 이끌고 하노이에서 열릴 호찌민의 장례식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소련 대표단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9월 4일 기습적으로 조문을 하고 당일치기로 중국으로 돌아가버렸다. 9월 8일, 하노이에 도착한 코시긴은 저우언라이가 하노이에 체류하고 있을 것이라 여기고 주월 중국 대사에게 저우언라이를 만나고 싶다고 타진했다. 이는 베이징으로 전달되었고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 코시긴을 만나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코시긴과 만나겠다고 동의하였으나 소련의 위협에 대한 불쾌감을 표출하기 위하여 회담 장소를 베이징 공항으로 잡았다.
9월 11일, 알렉세이 코시긴과 저우언라이 사이에 3시간 동안 회담이 열렸다. 저우언라이는 회의 시작에 앞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는 현재 국내 일을 처리하기도 바쁘다. 왜 전쟁을 하려 하겠는가? (...) 당신들이 중국의 핵 기지를 선제공격 수단을 없애버리겠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전쟁, 침략으로 선포하고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소련측은 이를 중국 측이 소련의 핵위협에 겁을 먹었으며 자신들이 소련과 전쟁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고 시인한 걸로 인식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코시긴에게 3가지 사항을 제시했다.
  • 1. 중소변계 협상은 어떠한 위협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 2. 이를 위해 변계의 현상태를 유지하며 무력충돌을 피한다.
  • 3. 분쟁지역에서 쌍방의 무장력이 접촉하지 않게 한다.
코시긴은 이에 동의하며 쌍방에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변방 부문에서 서로 연계하여 처리하게 하자고 보충했다. 저우언라이는 이에 동의하였고 최종적으로 현재의 국경 상태를 유지하고 각국 지도부 간의 전화 연계를 회복, 양국 간에 서로 대사를 파견하여 무역 회복, 차관급 차원의 국경회담을 열기로 합의하였으며 이를 쌍방의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동의를 얻어 실행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써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아직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가 남아 있었다.

3.3.2. 중국의 전쟁 준비


최고조에 다다랐던 긴장은 일단 수그러들었지만 마오쩌둥은 여전히 소련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국경에 대규모 소련군이 여전히 배치되어 있던 것은 물론이고 9월 11일 베이징 공항 회담 이후 발송된 소련 측 합의서는 중소 변계분쟁지역 및 쌍방 무장부대가 분쟁지역에서 접촉하지 않을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소련이 변계 협상을 구실로 습격해 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9월 17일, 천이, 예젠잉, 쉬샹쳰, 녜룽전 등 4명의 원수가 "미국이 중소 간의 모순을 이용하려 하고 소련은 중미 간의 모순을 이용하려 하는데 우리도 마땅히 미소 간의 모순을 의식적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하였다. 예젠잉이 삼국지를 인용하며 제갈량이 오나라와 손잡고 위나라에 북벌을 거행한 것을 본받아 미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별개로 소련의 침공에 대비한 <삼선작업>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전국 각 지역에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지하도시 건설이 행해졌고 베이징에서만 85제곱킬로미터 규모의 지하도시가 건설되었으나 전문 공학자들을 부르주아로 몰아 숙청해버린 탓에 기술적인 설계 없이 마구잡이로 흙을 파서 공정이 이루어졌고 전국 각지에서 매몰 사고나 지반 함몰 사고가 일어나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또한 지하대피소를 만들기 위한 벽돌 기증하기 운동이 벌어져 전국 각지에서 대약진 운동 시절의 토법고로를 되살려 벽돌 굽기가 대유행하였다. 당연하지만 급조한 가마에서 제대로 된 벽돌이 나올 리가 없었으므로 멀쩡한 집을 마구 부수어 벽돌을 조달해야 했다. 가마 역시 위험천만하긴 마찬가지라서 폭발, 붕괴 사건으로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편 인민해방군도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공군에 최고 수준의 경계령이 하달되었고 린뱌오가 10월 1일 국경절 행사를 틈타 소련이 베이징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베이징의 저수지에서 모두 을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저우언라이의 저지로 중단되었다. 마오쩌둥은 모든 공산당 간부들에게 지방으로 대피하라는 비밀 지령을 하달했고 숙청당한 간부들도 모두 지방으로 보내졌다. 천이는 스자좡, 녜룽전은 한단, 류사오치와 쉬샹쳰은 카이펑, 예젠잉은 창사, 류보청은 항저우, 덩샤오핑과 천윈은 난창, 주더와 리푸춘은 광동성 충화현으로 피신했는데 이는 군부 내부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원수들을 지방에 보내려는 린뱌오의 의도가 일부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에서 예젠잉은 천보다 조사 임무 때문에 돌아왔다. 정부 기구 역시 최대한으로 축소되어 각 부처와 기구가 중국 각지로 분산되었고 베이징과 각 도시 시민들도 집과 소지품을 처분하고 시골로 대규모 피난을 떠나야 했다. 잔류한 시민들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전쟁시 대피요령, 응급처치 요령, 화재진압 요령, 소련과 미국 항공기 식별법 등을 공부하며 전쟁을 대비했다. 마오쩌둥 역시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한에 머물렀다. 오직 저우언라이만이 수도에 남아 작전 참모들과 지하 작전 상황실에서 상황을 지휘했다.
10월 17일, 쑤저우에서 휴양 중이던 린뱌오는 지하벙커로 들어가서 인민해방군에게 비상경계를 발동하고 도시에서 피신하라는 제1호 명령을 전군에 하달했다. 린뱌오의 보고를 받은 우한의 마오쩌둥은 1호 명령을 승인했고 2시간 후에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융성이 전국 각지에 1호 명령을 하달했다. 100만명에 달하는 병력과 4000대의 전투기, 600대의 전함이 소련의 기습에 맞서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로 이동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총격전 조금 일어난 것 가지고 전쟁이 일어나겠냐면서 혼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생필품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농민들은 곧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얼마 남지 않은 가축들을 도살하여 먹어치우기도 했다. 심지어 지하활동 중이던 반정부 조직들이 미국과 소련과 힘을 합쳐 마오쩌둥을 타도해야 한다는 민주화 운동을 하기도 했다.

3.3.3. 중소국경회담


하지만 운명의 10월 20일에는 중국의 우려와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 대표단은 평화적으로 도착하였고 저우언라이는 11월, 전국에 내려진 긴급상황을 취소하였다. 하지만 협상은 난황을 겪었다. 중국 측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전개했다.
  • 1. 지금의 국경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불평등조약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 2. 이들 조약을 기초로 현재상황을 고려하여 국경문제를 정하여야 하나 중국은 러시아와 체결하여 빼앗긴 영토를 요구하지는 않겠다.
  • 3. 이 조약을 위반하고 침략 점거한 영토는 원칙상 상대방에게 귀환시켜야 하나 쌍방은 평등협상에 의하여 서로 양보한다는 원칙 아래 당지 거주민들의 이익을 고려하여 필요한 조정을 실시환다.
  • 4. 중소평등신약을 체결하여 중러불평등구약을 대체하고 국경을 정한다.
  • 5. 중소국경 문제는 평화적 담판에 의하여 전면적 해결을 하며 현상유지를 통하여 무력충돌을 피하고, 국경 분쟁지역에서는 스스로 철군하거나 들어가지 않는다.
허나 소련은 중소국경에 분쟁지역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중국이 제시한 쟁의지구의 개념은 소련에 대해 영토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따라서 쟁의지역의 영토를 소련 영토로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소련이 베이징 공항 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고 1969년 1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주하자 이를 이유로 협상을 중단하였다. 어쨌거나 세계를 3차 세계 대전으로 몰아넣을 뻔 했던 중소간의 분쟁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허나 마오쩌둥이 사망하던 순간까지 중국은 소련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중국과 소련의 국경선은 평화가 온 뒤에도 불확실하다가 결국 소련이 해체된 뒤에야 국경 분쟁을 완전히 마무리지었다.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전바오/다만스키 섬은 1991년, 고르바초프의 합의로 국경협정이 체결되어 중국에 귀속될... 뻔 했으나 그 직후 소련이 붕괴되는 바람에 승인되지 못하고 한참을 표류하였고 당사국이 소련 한 나라에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신생국들로 늘어나면서 매우 복잡해졌다. 결국 1996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이 고르바초프의 중러 동부국경협정을 준수하기로 합의하면서 겨우 협상이 재개되었고 2004년에야 최종적으로 국경협상이 완료되어 2005년에 중국 전인대와 러시아 국가두마에서 비준됨으로 최종적으로 국경이 확정되었다. 다만스키 섬은 넘겨받았지만, 중국측이 다른 곳에서 크게 양보해서 경상북도만한 영토가 러시아측으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두 국가의 국경선이 워낙 넓어서 눈에 띄지도 않는다. 이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강의 퇴적지대와 사막 같은 땅들로 이뤄져 있어 쓸모있는 용도로 사용될 여지도 적다. 그런데도 여전히 중국-러시아 국경은 워낙 길고 땅이 얼었다 풀리는 환절기에 국경이 불명확해지는 일이 계속 발생해서 양국 간에는 매년 국경 재획정을 위한 협의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러시아 지도를 매년 구입해서 보면 매년 어딘가 미세하게 조금씩 바뀌는 국경선을 볼 수 있다.

4. 결과



4.1. 미중접촉과 중소의 계속된 대립


중국은 이 분쟁의 결과로 전바오 섬과 그 주변을 점령했으나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8] 중국은 소련이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1969년의 위기는 소련이 중국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경한 노선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 중국 역시 소련의 영토를 일부분이나마 점령해서 당시에도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맺은 조약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미국'과 '수정주의 소련'의 두 적대적인 초강대국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오쩌둥은 중국이 고립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닉슨 행정부에서 내밀던 유화의 손길을 잡게 되었다. 1971년, 미국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극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졌고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짐으로 양국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과학 기술, 문화예술, 무역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인 1979년에는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때마침 인도파키스탄의 전쟁까지 일어나자, 카슈미르 영유권 문제로 인도와 대립하던 중국은 파키스탄과 동맹관계를 맺고, 인도는 중국 견제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소련과 손을 잡는다. 인도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기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한다. 이로써 미국 + 중국 + 파키스탄 vs 소련 + 인도[9]라는 거대한 대립관계가 나타났다. 여기에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중국에서 생산한 저가의 소련 무기 복제판을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게릴라에 건넸다.
소련은 소련대로 불쾌감을 느꼈다. 일단 소련의 전술, 전략적 우위가 확보되었고 고질적이었던 중소국경의 불안정한 상태는 해소되었으나 브레즈네프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과 손잡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서유럽을 향한 유화정책이 강화되었고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선으로 1969년 9월 서독 총리로 당선된 빌리 브란트와 회담, 1970년 8월 12일, 서독-소련 불가침 협정인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서독이 폴란드의 프로이센 영토를 포기하게 하였다. 1971년 9월, 서방도 서베를린이 서독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하고 소련과의 대화에 나섰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SALT 협정, ABM 조약이 체결되는 등 한동안 순풍이 불었으나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을 계기로 틀어졌고 브레즈네프와 나름대로 친밀했던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빌리 브란트가 귄터 기욤 사건과 성추문으로 사임함에 따라 난황에 부닥쳤다. 결국 인권외교를 주장하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소 관계는 끝내 틀어지고 데탕트는 종식되었다.

4.2. 린뱌오의 몰락


한편 이 사건으로 가장 피해자가 된 것은 국방장관 린뱌오였다.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로 공인받는 과정에서 군의 영향력을 과시함으로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도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이 중국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외교에 관한 문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소 위기가 중국에 엄청난 피해와 민중의 불만을 야기하자 마오쩌둥은 모든 원인이 린뱌오가 함부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린뱌오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1970년 장시성 루산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9기 2중전회에서 천재론과 국가주석직 부활을 주장한 린뱌오와 천보다는 장칭과 장춘차오에게 난타당했으며 마오쩌둥이 군부 지도자와 당내 이론가의 연합이라는 보나파르티즘의 징조를 보고 크게 경계하여 장칭과 장춘차오를 지지하고 천보다를 숙청해버림으로써 린뱌오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1971년 미중접촉이 시작되자 린뱌오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 때문에 마오쩌둥으로부터 고립주의자, 대국 쇼비니스트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 대열에서 사실상 탈락했고 마오쩌둥은 계속 천보다 비판대회를 여는 한편 린뱌오의 측근들이 분파주의자라고 질타하고 린뱌오의 권력기반인 베이징 군구를 개편하여 린뱌오의 권력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군내에서도 당내에서도 입지가 심각하게 축소된 린뱌오가 비군사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가뜩이나 심약한 기질이 있던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자아비판 요구를 묵살하고 북대하의 요양소에 칩거하여 571 공정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준비하게 된다.

4.3. 북한 경제 몰락의 시작


한편 이 중소국경분쟁의 여파가 엉뚱한 결과를 낳았으니, 바로 북한 경제가 몰락하는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원래 북한은 1960년대 초에 들어서 한국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10] 경제개발 계획이 잘 풀렸다. 이미 1960년 북한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 액수)는 137달러로 남한의 94달러에 비해 1.5배였다. 다른 추계방식으론 북한의 GNP는 325달러로 남한의 3.5배였다. "쌀은 곧 사회주의다."라는 기치 아래 벌인 수리화,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 등 농촌 4화 운동도 성공을 거두어, 북한은 당시 경작지가 남한보다 적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량에서는 남한을 훨씬 앞서 있었다. 이토록 경제 상황이 좋자, 김일성은 1962년 신년사에서 "머지않아 모든 인민들이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게 해 주겠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11]
그런데 저런 북한 경제에 1960년대 중반부터 큰 위기가 닥쳐온다. 바로 1964년부터 중국과 소련이 서로 사회주의 노선 변경 문제로 인해 시비를 벌이면서 국경 분쟁에 돌입했는데, 두 나라 사이에 낀 북한은 혹시 둘 중 하나가 북한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일까봐 두려워하여 군사비를 크게 늘렸다.[12] 19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던 북한의 국방비가 1967년에는 30.4%로 뛰어올랐다. 그래서 북한은 1966년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을 당초보다 3개년 연장하는 수정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팝, 고깃국, 비단옷,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꿈이 날아간 것이다.[13]
자고로 군대는 끝없이 소비만 하지 결코 생산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군사비 증강은 최후의 수단이지 최선의 선택이 아니다. 소련이 결국 붕괴된 이유 중 하나도 미국보다 빈약한 경제력을 가진 상태에서 미국보다 더 많은 핵무기를 유지하는 등 군비 증강에만 열을 올리다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저렇게 전체 국가 예산의 30%를 군사비에 쏟는 비정상적인 정책을 하며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중국과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려고 혼신의 힘을 쏟다가 그만 경제가 무너지고 말았다.

5. 기타


당시 이 분쟁에 투입된 소련의 최신형 전차 T-62 한 대가 전투 중에 파손되어 전장에 유기된 것을[14] 중국군이 노획했다. 일부 밀덕들이 소련 T-62의 활강포를 중국군이 무식해서 '강선도 없는 불량품 주포'로 오인, 비웃었다는 도시전설이 있지만, 당연히 중국군도 소련군 전차포가 자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것을 봤으므로, 불량품이라고 비웃었을 리가 없다. 불량품으로 비웃기는커녕 성능이 인상적이었던지 중국도 활강포 연구를 시작했다.
중국군은 이 노획 차량을 가지고 69식 전차와 자체 활강포를 개발하는데 썼다. 그런데 69식은 100mm 활강포를 달았다가 성능 미달로 강선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당시 노획한 T-62는 현재도 중국의 박물관에 전시된 신세다.

6. 매체에서



2015년 11월 2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내용 해설 여기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재현 장면에서 박명수유재석이 특별출연했다는 점인데, 무도드림에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팀이 정형돈을 적극적으로 낙찰 받으려고 왔으나 정형돈의 하차 발표 당일날 촬영했기 때문에 평소에 이 프로그램 팬이었던 정형돈을 위해 유재석과 박명수가 재연배우로 출연했다. 목봉술의 달인인 국경수비대 중국 장교 '산둥 꼬마', 박명수는 '''마오쩌둥'''[15]으로 출연하였다. 마오쩌둥 역은 원래 정형돈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이후 2015년 12월 5일자 무한도전을 통해 정형돈이 서프라이즈 방송에 유재석과 박명수를 보았다고 인증샷을 찍었다. 여담으로 유재석이 목봉술의 달인 산둥 꼬마로써 출격하자 소련 장교가 한 매뚜기 같이 생겨서 힘이나 쓰겠냐는 대사는 유재석의 공식 별명을 의식한 추가 대사다. 여담으로 특이점이라면 보통 외국 사건을 재현할 경우 영어 대사로 이야기하나, 이번에는 중국어, 러시아어 그대로 이야기한다.
미국의 작가 리처드 매드슨포스트 아포칼립스 SF소설 나는 전설이다의 두 번째 영화화 버전인 <오메가 맨>은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결국에는 핵전쟁과 세균전을 포함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어 세계가 멸망한다는 내용에서부터 시작된다.
소련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는 대체역사 게임인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는 미국이 단독으로 태평양 전쟁에 승리해 일본을 점령하자 위기를 느껴 1946년에 중국을 침공해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어 버린다. 다만 이 세계관에서는 소련과 장제스중화민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기 때문에 현실의 중소 국경분쟁과는 차이점이 있다.
레드 던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유일한 세력이 6억명의 인구를 가진 중국 밖에 없다고 했는데, 작중에서도 대릴이 10억 중국이 아니냐고 묻자. 앤디가 '''한때는 그랬다(There were)'''라고 답한 걸 보면 이 분쟁의 여파로 핵전쟁이 터진 걸로 추정된다.
황혼의 투쟁에서는 충격과 공포의 카드로 등장한다. 중기 미국 3Ops 카드로, 효과는 이렇다. ''''미국 플레이어가 차이나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 차이나 카드를 즉시 플레이할 수 있는 상태로 받아온다. 이미 가지고 있을 경우, 아시아에 한 국가당 최대 2, 합계 4만큼의 미국 영향력을 놓는다.'''' 소련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손해, 미국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이득이다. 미국의 소리, 대소련 곡물 수출과 함께 중기 냉전 소련의 우주행 1순위 카드.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는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자 소련이 베트남을 도와 중국을 공격하는 미션이 등장한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플레이하며, 북한의 지원을 받아 소련군을 물리치는 것이 목표다.
다만 본작의 마지막 시나리오 '제 2차 한국전쟁'에서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해체로 소련이 영향력을 상실하자, 아시아의 공산국가인 중국북한하고 관계를 개선하고 대한민국을 침공한다는 스토리다.

7. 참고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중국현대정치사, 로더릭 맥파커 등 공저, 푸른길.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실패한 제국 2권,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아카넷.
  • 중국당대40년사, 신승하, 고려원.
  • 중국근현대사 4권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1945~1971), 구보 도루, 삼천리.
  • 중국공산당역사 2권 하,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지 하 대란대치편, 현이섭, 인물과사상사.

[1] 중국의 비난은 심지어 베이징의 소련 대사관 근처의 거리 이름을 '수정주의로'라고 바꿔서 소련을 비웃을 정도. 이원복 <현대문명진단> 출전.[2] 심지어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와 소련에 대해 사회제국주의(Social Imperism)라는 비난까지 했었다.[3] 문화대혁명 및 중국의 근대화 때문에 전통적인 무림은 없어졌지만, 제도권으로 편입되어 무술가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각종 무술학교가 세워졌기 때문에 중국의 무술이 소실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군인들의 대접이 좋았기 때문에 무술가들이 대거 입대했다. 현재도 중국의 여러 체육학교의 무술전공 학생들은 군경으로 간다.[4] 중국은 당시 봉술이 일반적인 격투술이었다. 때문에 목봉을 무기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신체를 다루듯이 다루곤 했다.[5] 소련은 실제로 올림픽에서도 복싱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올림픽 메달 순위를 보면 소련과 러시아가 계속 2~3등을 유지하고 있다.[6] 그래도 이것이 반면교사가 되었는지 2017년 중국군과 인도군3년 후의 같은 나라들은 접경에서 서로 몽둥이와 돌팔매질로 싸웠지만, 양군은 끝까지 화기사용을 자제했고, 결국 심각한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2020년에는 냉병기만을 이용한 분쟁치고는 사상자가 꽤 나욌다.[7] 아마도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상황을 낙관하면서''' 전투 후 선전영화 촬영용으로 챙겼을 가능성이 높다.[8] 대한민국의 온라인 상에서는 대규모 교전이 벌어지거나 소련이 중국 영토를 점령한 것처럼 설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소규모 교전에 중국에 의한 소련 영토 점령이었다. 그래서 분쟁 이후 압도적으로 소련에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었던 영토는 일부분이나마 중국에게 소유권이 넘어간다. 중국과 비슷하게 영토 반환 문제가 있는 일본에서는 오오무라 다이지로(大村大次郞) 같은 인물들이 이 분쟁을 두고 소련으로부터 영토를 다소 강제로 반환받은 중국을 칭찬하기도 하였다.[9] 여기에 통일한 베트남도 친중이었다가 친소련으로 돌변하였다.[10] 흔히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한국전쟁에서 북한도 굉장히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은 평양과 원산과 신의주 같은 북한의 주요 도시들에 전략폭격을 퍼부어 초토화시켰는데, 평양에 멀쩡한 집이 두 채 밖에 없다는 말을 김일성이 할 만큼 평양은 폐허가 되었을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미 공군 조종사들이 북한을 폭격하는 임무를 맡으러 가기를 꺼려했는데, 이유는 북한을 하도 폭격해대서 더 이상 폭격을 할 건물이나 시설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출처: 폭격/ 김태우 저/ 창비/ 2013년 7월 27일[11]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187쪽[12] 여기에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한 나라를 편들 수 없다는 약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13]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195쪽[14] 중국군의 대전차로켓에 피격되어 조종수가 사망하고 전차는 격파되었다.[15] 본래 정형돈이 할 역할이었다. 각본은 이미 써져 있었다. 무한도전에선 중국인 역할이라고만 했는데 그 중국인이 마오쩌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