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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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보리진 오스트레일리아인(Indigenous Australian)의 깃발.
토레스 해협인(Torres Strait Islanders)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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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북부 배서스트 섬의 주민. [출처]
1. 개요
2. 역사
2.1. 식민지 개척 이전
2.2. 식민지 개척 이후
3. 현재 상황
4. 창작물에서
5. 해당 인물
6. 관련 문서


1. 개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부터 거주하고 있었던 민족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애버리지니 (Aborigine, 어보리진이라 알려져 있다) 또는 Indigenous Australian(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라고 불리며 가끔씩 퍼스트 오스트레일리안(First Australi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Indigenous Australian이라는 개념은 다시 어보리진 호주인(Aboriginal Australians)과 토레스 해협인(Torres Strait Islanders)으로 분류된다. 최근 호주 원주민들이 '애버리지니'라는 명칭을 선호하지 않음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표현이 권장되고 있다.
퀸즐랜드 북부에선 파마(Pama)라고 하며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선 늉아(Nyunga)라고 스스로를 일컬었는데 (물론 지역차는 있다) 이를 따서 파마늉안어족이란 말이 생겼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파마늉안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북부나 태즈메이니아 섬 원주민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들의 인구는 어보리진 호주인은 60만 6164명(2011년), 토레스 해협인은 48,005명으로 호주 인구의 3%를 구성한다. 특히 노던 준주(Northern Territory)에선 인구의 30%가 호주 원주민이지만 나머지 지역에선 비중이 적다.[1] 원래는 250여개의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으나 지금은 상당수 언어가 사용되지 않으며 영어가 널리 사용된다. 그래도 칼라라가우야어피찬차차라어처럼 널리 쓰이는 언어도 존재한다. 이들 언어의 사용자 수를 모두 합치면 5만 명 정도로 호주 내 한국어 사용자 수와 비슷하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 3/4, 무종교인이 1/4이며 1%만이 전통종교를 믿고 있다.
1885년 출간된 독일의 백과사전 Meyers Lexikon에서는 이들을 흑인으로 분류했고 한동안 이러한 분류가 널리 통용되었으나, 흔히 생각하는 아프리카 계열 흑인과는 유전적 특징이 전혀 다르다. 최근에 하플로그룹 조사 등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독자적인 그룹인 오스트랄로이드인 것으로 여겨진다. 호주 원주민의 조상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공통조상과의 유전적 차이가 적어도 6~7만 년쯤은 떨어져있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추측하여 보면, 대략 5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반도예멘의 경류를 따라 남아시아로 진출한뒤 다시 오세아니아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주 루트가 뉴기니 지역을 통과해서 호주 대륙으로 정착한 것으로 본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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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유럽인과 마찬가지로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머리카락의 색이 다채로운 편이다. 갈색은 물론이고 금발도 흔한 편. 물론 흑발도 많긴 하다. 그런데 사실 이들 중에는 완전한 금발이나 완전한 흑발보다는 금발과 흑발이 반반씩 섞여있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 호주 현지에서도 이처럼 금발과 흑발이 묘한 비율로 섞여 있는 형태의 머리를 원주민의 상징들 중 하나처럼 생각한다.
또한 머리카락을 통해 성적 이형성(sexual dimorphism)이 발현되는 사례라서 남성들은 위의 사진과 같이 돌돌 말린 심한 곱슬머리가 나타나지만 여성들의 경우는 물결형의 머리가 많다. 이는 파푸아뉴기니를 포함한 멜라네시아 지역도 동일.
호주 원주민 남성들의 경우 할례를 받는데 통상적인 할례에서 끝나지 않고 요도를 절개하는(!) 할례의식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유명한 도구인 사냥도구 부메랑과 악기 디저리두가 있다. 해당항목 참고.

2. 역사



2.1. 식민지 개척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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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5만여 년 전에 호주에 도착했으며,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지만 발달된 기술 없이도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었다. 잘 알려진 것이 "세계의 배꼽" 이라고 불렸던 울루루. 다만 태평양 섬 지역에서는 비교적 널리 보급되었던 농경은 척박했던 북부로부터 인류가 유입되는 바람에 호주에서는 사라졌다. 또한 기후 변동이 심하고 토질이 좋지 않은 특성상 농경이 도입되었어도 실패했을 확률이 높았다.[3]
한편, 물이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기후가 적합한 동남부 지역에서는 야생 기장을 수확하고 화전을 통해 지력을 향상시키는 방식을 통한 원시적인 농업이 행해졌으며 어장과 수로를 통한 물고기의 양식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인근의 마오리족, 뉴기니 섬 등과 비교해도 기술적으로는 발전 정도가 낮았다. 만일 마오리족이나 파푸아인들이 기후가 비슷한 호주 동남부 원주민들과 인접해 있었더라면 이들의 농업기술이 호주에도 대대적으로 전해졌겠지만 뉴기니와 뉴질랜드의 거리는 호주 남동부와는 너무 멀었다.
이외에도 노던 준주퀸즐랜드에 살던 원주민들은 해삼 채집을 위해 온 동남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인들과 자주 접촉했고, 교역도 이루어졌으며 인도네시아 역사책에서도 호주 원주민에 대한 내용이 일부 나오기는 하지만, 카누 제조법과 같이 원주민의 관점에서 쓸모있어 보이는 몇몇 기술을 제외하곤 이들이 보여준 농경이나 철 제련법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발전된 형태의 국가도 나오지 않았다. 이 당시에는 해삼무역이 크게 이뤄졌기 때문에 호주 북부지역에서 해삼채집이 광범위하게 벌어졌으며 일부 중국인 상인들도 호주에까지 와서 해삼을 가져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다만 일부 호주 우익들을 중심으로 호주 원주민들이 '''불을 피울 줄 몰랐다'''는 황당한 얘기가 돌기도 하는데, 이는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고립된 원주민들이 불을 피울 줄 모른 것을, 호주 전체 원주민들이 그러기라도 한 냥 뒤집어 씌운 것에 불과하고, 또한 당대로써는 나름대로 문명국이라 할수있는 인도네시아와의 교류가 이루워졌다는 점을 철저하게 무시한 무식한 얘기에 불과하다. 호주 원주민들이 남긴 유물들 중에는 현지의 스피니펙스 (Spinifex) 관목에서 고무를 채취해서 활용한 물건들이 많이 보이는데, 고무를 실생활에 쓰일 수 있게 가공한다는 것 자체가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참고로 유럽은 18세기까지도 고무를 실생활에 활용하지 못했다. 이는 물론 유럽 현지에는 고무나무가 전혀 자생하지 않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고무나무를 발견한 것은 대항해시대였기 때문에 장장 2세기 이상 고무를 활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4]
이는 "제련술"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오롯이 철기시대의 기준으로만 국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방식인데 현대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잘못된 전제인 것으로 보고있다. 당장에 이 기준에 따르면 메소아메리카잉카 제국도 "제련술이 없었다"고 해야 하지만 이 경우도 사실 철기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 귀금속을 가공해서 유물을 남긴 사례가 차고 넘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2. 식민지 개척 이후


여기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유럽인 도래 이후 학살과 억압 정책의 피해를 당했다.
18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 전염병이 들어와 1788년부터 1900년까지 원주민의 90%가 감소했으며 19세기경엔 이에 학살까지 더해져 감소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침략에 저항해 3,000여 명을 살해했지만[5] 저항하는 백인 이민자들은 이보다 많은 수를 살해해 (약 1만명 이상) 원주민 인구는 18세기 약 50만여 명에서 5만 명으로 10분의 1으로 줄어들었다. 원주민 인구 50만이 다시 회복된 건 2000년대에 들어와서 였다.
흔히 원주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북서부를 중심으로 살았다는 통설이 돌고 있지만, 《총, 균, 쇠》에 따르면 사실은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 동부에서는 다 죽거나 쫓겨나고 백인들이 그 곳에 적합했던 지중해성 작물을 기반으로 정착하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엄밀히 따져보면 현재 원주민 비율이 30%에 육박하는 노던 준주의 경우 분류상 동부에 속한다. 그리고 지금도 원주민 인구만 놓고 보면 동부에 가장 많이 거주하는 건 마찬가지로 2016년 기준 원주민 인구 64만 중 뉴 사우스웨일스와 퀸즐랜드, 빅토리아 주에 사는 원주민 수를 합치면 45만에 육박한다.
백인들이 호주를 완전히 장악한 이후 원주민들은 광산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세계대전 때에도 군인으로 참전하기도 되었다. 1930년대부터 원주민 인구는 다시 늘기 시작했으나 이미 태즈메이니아에서는 절멸된 후였다. 다만 순혈이 절멸되었을 뿐 일부 백인과의 혼혈들은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원주민들에게는 백인 (주로 아일랜드계[6])의 피가 흐른다.
비교적 자신의 입지를 빨리 확립한 뉴질랜드마오리족과는 달리 인구에서 백인에 압도적으로 밀려 20세기 중반까지 상당히 핍박받으며 지내왔다. 심지어는 시민이 아니라 '''자연 유산'''으로 분류되기도 했을 정도. 호주가 백호주의를 버리기 시작한 1960년대에 와서야 국민들 대다수의 투표로 다른 민족들과 함께 선거권을 인정 받았다. 인종차별이 사회적 문제가 됐음에도 다수결 투표에서는 권리 보장 쪽으로 결론이 났다는 점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례와 비슷하다.
1900년부터 1972년까지 호주 정부와 교회는 원주민 개화 정책으로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해 10만 여 명이 입양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원주민 언어는 금지당했고 부모들이 찾지 못하도록 아이들은 어디로 보내졌는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뿐더러 방문과 편지조차 금지되었다. 이들은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라 불린다.[7] 2007년 9월에 들어서야 이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2008년 호주 총리 케빈 러드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그리고 호주 정부는 원주민들에 대해 피해자 배상을 시작했다.#

3. 현재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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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선 저소득층에 속하는 경우가 많으며, 소득은 호주의 타 인종의 평균 3분의 1에 불과하고 실업률과 범죄율은 3배 이상에 달하며 평균수명은 타 인종보다 20세 가량 짧은 60세 남짓에 불과하다.
호주 원주민들은 비원주민 인구에 비해서 사회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다. 원주민들의 대다수는 도시 외곽이나 빈민촌에 살아서 인프라와 공공시설의 부족 등으로 인해서 비원주민보다 평균수명이 짧다.
또한 교육수준도 낮아 12학년을 모두 마치는 비율도 39%에 불과하다(일반 호주인은 75%). 또한 그들은 아직도 남아있는 인종차별 등으로 인해 취직하기도 훨씬 어렵고 원주민들은 비원주민 인구에 비해 수감율이 15배나 높고 특히 청소년 수감율은 28배나 높다. 인종차별은 그 외에 원주민에 대한 여러 비하어에서도 나타나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이들을 알코올 중독자라든가 살인자, 강간범, 도둑 등으로 여기는 선입견을 가지기도 한다.
캔버라의 옛 국회의사당 앞에는 호주를 침략한 백인들에게 항의하기 위한 원주민 천막대사관이 있다. 이 대사관은 1972년 4명의 애버리진들이 비치 파라솔을 펴서 시작한 시위였다.
이들은 1967년이 돼서야 호주인으로 인정받고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1984년이 되어서야 투표권을 인정받았다. 한편 2011년 호주의 최대 야당인 자유당의 토니 애벗 당수[8]가 애버리지니 천막대사관이 무의미하다고 철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원주민 시위대가 백인의 도착을 기리는 호주의 날 행사에 참석한 총리를 습격하고 국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때 전 뉴 사우스웨일스 주지사 밥 카[9]는 "원주민 천막대사관은 진작에 없어졌어야 했다"며 원주민의 과격한 행동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원주민 천막대사관은 원주민 평등화와 호주 원주민 인권 운동의 상징이다.
최근에는 기념일인 호주의 날(1월 26일)을 원주민 입장을 고려해 침략의 날로 간주하여 기념일 날짜를 다른 날로 바꾸자는 의미로 SNS 상에 해시태그인 #changethedate를 붙이는 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여담으로 헛리버 공국같은 초소형 국민체의 자양분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호주 공영 방송 ABC 방송은 앨리스 스프링스의 한 호텔에서 원주민 투숙객들에게는 상태가 좋지 않은 방으로 안내하라는 등 직원들에게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2020년 5월. 호주 광산 회사 리오 틴토는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주에 있는 원주민 동굴을 파괴하였다.# 원주민 유적법 (National Heritage Act)에 따라 고발 중이고, 거센 비판이 쏟아졌다.# 9월에 경영진들의 사퇴가 이뤄졌으며, 공식적인 사과는 물론 원주민을 회사의 리더 역할로 끌어들이는 데 전념하기로 했다.

4. 창작물에서


도둑맞은 세대에 관한 소설로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바 있는 《니웅가의 노래》가 있다. 저자는 원주민 혼혈로 외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오빠가 도둑맞은 세대 출신으로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그 외 국내에도 개봉한 《토끼 울타리》라는 영화도 도둑맞은 세대에 관한 영화로 유명하다. 배즈 루어먼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다루긴 했지만 그닥 좋은 평은 못 듣는다.
도둑맞은 세대 이외에도 니컬러스 로그의 《워크어바웃》이나 워릭 손턴의 《삼손과 데릴라》, 프레드 세퍼시의 《지미 블랙스미스의 노래》, 롤프 더히어의 《열 척의 카누》와 《찰리의 나라》, 캐트리오나 매켄지의 《새틀라이트 보이》, 제니퍼 켄트의 《나이팅게일》 같은 영화에서도 이들의 문화와 힘든 현실을 다루고 있다. 특히 《워크어바웃》에 나오는 애보리지니 배우인 데이비드 걸필리는 이후 꾸준히 활동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영화계에서 중견 배우로 자리잡았으며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비중있는 역으로 출연한다.
호주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어드벤처 게임 Beneath A Steel Sky에서는 유니언 시티 바깥 야생지대인 갭에서 살고 있으며, 주인공 로버트 포스터를 키워준 부족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도입부에서 유니언 시티 측에게 폭격을 당해 전멸.

5. 해당 인물



6. 관련 문서



[출처]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1] 다만 비중이 적다 뿐이지, 호주 원주민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뉴 사우스웨일스 주로 원주민의 1/3이 이 곳에 거주하며, 노던 준주는 네 번째다.[2] Y염색체 기준으로 따졌을 때 하플로그룹 S가 강하게 나타난다.[3] 스웨덴의 경영학자 칼 에릭 스베이비의 《모든 것을 살아있게 하라》에 나오는 한 예로 달링 (Darling) 강 인근에 거주했던 바르킨지 (Barkindji) 부족은 농경을 시도해 보았지만 생산성 면에서 수렵이나 채집보다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 이외에 다른 원주민 부족들, 특히 물이 풍부한 뉴 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 지역의 원주민들은 원시적인 형태의 농경을 했다는 증거들이 남아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에서 만일 호주 대륙에 유럽인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들 부족들을 중심으로 호주 남부에서 기장을 바탕으로 한 농경 및 물고기의 가축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예상했다.[4] 이는 원주민을 비난하려다 자책골이나 차넣은 것이다. 만일 실제 역사와 달리 호주의 정치적 주도권을 원주민들이 쥐게 되었는데 "유럽인들은 철기를 사용했던 것 같긴 하지만 18세기까지도 고무를 사용할 줄은 몰랐으니 불을 피울 줄 몰랐던 것이 확실하다"는 발언이 등판했다면 당연히 얼토당토 않은 논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유럽계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에 대해 아주 비슷한 망언을 한 것이다.[5] 그중에는 페뮬우이라고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한 사람도 있다.[6] 당시 호주에서 아일랜드계들은 일제시대의 조선인들과 비슷한 신분으로, 부유하지 않으면 결혼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원주민들과 피를 섞었다.[7] 이는 콰키우틀이나 알공킨, 크리, 하이다 족 등 캐나다의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비슷하였다.[8] 이후 총리(2013~2015)를 역임한다.[9] 이후에 시드니 공과대학에서 호주-중국 외교위원회장을 역임하며 일대일로를 찬양하는 친중 발언을 하며 호주에서도 많은 욕을 처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