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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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아하(taiaha)라고 불리는 무기를 든 마오리 전사의 모습.
1. 개요
2. 마나와 터부의 사회
4. 백인들과의 공존
5. 정치
6. 창작물에서


1. 개요


Māori.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원주민. 마오리어로 māori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형용사이며[1] 자신들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칭한다. '땅의 사람'이란 뜻. 한국사람들에게는 보통 코와 코를 비비는 인사법인 '홍이'(hongi)와 박력있는 전투춤인 마오리 하카(haka)로 잘 알려져있다.[2]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마오리족은 혼혈을 포함해서 70만 명 가량이고 취업을 위해 호주 등으로 이민간 마오리족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육박한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10~11세기 경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신화전설들을 통해서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저기는 섬이 아니라 '''긴 흰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아내의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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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들어도 하와이가 떠오르는 '하와이키' 섬의 전설은 폴리네시아 동부에 여럿 존재한다. "Avaiki"(소시에테 제도) "Savai'i"(사모아), "Havaiki"(레오 타히티). 후대에 이루어진 유전학과 언어학적 연구는 폴리네시아인들의 고향으로 서쪽을 지목했다. 폴리네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꼽는 지명이 있다. ‘아바이키’(소시에테 제도), ‘하바이이’(타히티), ‘하와이키’(뉴질랜드 마오리), ‘히바’(이스터 섬) 등이 그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이 이름들은 고대 폴리네시아 공용어의 ‘사와이키’(고향)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이 단어는 다른 뜻도 내포하고 있다. 소시에테의 ‘아바이키’는 그 자체로 저승을 가리키며,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사모아어의 ‘사우알리이’는 ‘영혼’을 뜻한다. 죽은 영혼이 향하는 곳은 해가 저무는 곳, 즉 서쪽이다. 사모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사바이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섬은 가장 서쪽에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DNA 연구 결과로서 밝혀낸, 사와이키의 위치는 사모아의 사바이이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그 섬은 다름 아닌 타이완이다. 지금도 대만의 원주민들은 수십에서 수백 부족까지 나누어지고, 폴리네시아인들은 아프리카 옆에 있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폴리네시아인들의 DNA가 말해주는 것은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 경에 타이완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파푸아로 들어왔고, 호주 인근의 섬을 징검다리 삼아 지금의 폴리네시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타이완 섬에서 온 건 아니고 6~8000년 전, 즉 중국에서 기원전 3000년 정도 쯤에 타이완 섬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사실 중국 남부는 거의 한나라 시절까지도 한족에게 있어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오스트로아시아어족 등의 이민족 오랑캐들이 우글거리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남만'이 바로 이들을 일컫는 것이며 후일 한족들이 본격적으로 장강유역으로 확장하기 시작하며 모두 동화되거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 동남아 국가들을 세운다. 다만 폴리네이시아인의 경우는 한족들이 장강으로 확장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대만 섬을 발판삼아 남태평양 곳곳으로 떠난 상황이었다. 링크
마오리족이 상륙하기 이전에 뉴질랜드는 무인도였으며, 섬에는 모아, 하스트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스러운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깡그리 씨가 말랐다.[4] 마오리족은 고구마[5]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돼지고기 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놓아서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6]

2. 마나와 터부의 사회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질서로 움직였다.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었으며, 여자와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마나(mana)였다.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족장이나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거나, 아니면 '''죽은 적의 살을 먹음으로써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7] 마오리족은 의식적으로 식인을 행했는데, 적의 살을 먹음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1643년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8]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에 질려버린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9]
마나에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른다. 영어의 터부와 같은 의미이다.[10]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라고 부르는 우상[11]을 모셔놓은 성소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로 나타났다. 가령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또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타뿌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치 않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 것으로 생각한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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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족의 마을 모습.
먼저 마을에 들어오려면 그 마을의 추장에게 입장하려는 "부족"[12]의 "족장"[13]이 선물을 바친 다음, 서로 마오리어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부족은 이런 역사를 지녔다던가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부족으로 들어오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문하는 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배틀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때문에 추장 뒤에 마오리 남성들이 있고, 그 뒤에 여성이 있다. 혹 싸움이 붙으면 남성이 대를 이을 수 있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들어오려는 부족장의 말이 끝나면, 부족의 사람들이 "후이에 타이에 타이키에"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족장이 말한) 이 말에 동의한다."라는 뜻이다.
참고로 말하는데, 들어가려는 마을 부족 추장이 아무리 환영하고 싶어해도 현대화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전통을 간직하고자 매우 진지하고 마치 화난 듯하게 말하는데, 진짜 화난게 아니다. 실제 일어난 일로, 마을의 8살쯤 되는 마오리 아이가 부족장이 말하는 도중에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하자, 부족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며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옛날과 다르다는 것.
적절히 협상이 끝나면 두 부족 사이는 적개심을 풀고 바로 위에 말한 얼굴 부비는 인사인 홍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땅에 뜨거운 돌덩이와 음식을 넣어서 만드는 항이(hangi)라는 전통 저녁을 만들어 방문하는 부족과 같이 식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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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족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화레 누낭아 - whare rūnanga)의 모습.[14] 또는 Rongomainohorangi(롱고마이노호랑기) 등의 집이 사용된다.이미지 본가는 Tauranga(타우랑가)라는 북섬에 위치한 지역에 있다.
보통 이곳 안에는 돌아가신 조상님 사진 혹은 그림이 달려있다. 조상님 나이와 마찬가지로 건물도 무지 오래된게 대부분.[15] 또한, 마오리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몸을 이곳에서 2~3일 정도 놔둔다고 한다. 그 동안은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뭔가 으시시하지만 조상님들이 보살펴주는 곳이라 한다.
참고로 시체를 자신의 부족의 화레에 모시는게 매우 큰 의미이자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어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부모와 남편이 시체를 서로 모시겠다고 '''맞짱'''을 뜬 경우가 있다.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것 또한 그 사람에게 존경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일로서, 그다지 나쁘게 보지도 않는다.
마오리족들은 과거에 위대한 인물이나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문신한 머리를 잘라내어 특수 처리를 한 후 미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문신 두상 미라를 토이모코(Toi moko)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토이모코를 18세기 후반부터 수집해 거래하다가 1988년때부터 마오리족들의 반환요구로 인해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서 반환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세계에 있는 토이모코들이 마오리족들에게 반환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세상을 뜨면 먼 친척과 아는 사람도 전부 와서 하루쯤 지내고 가는데,[16] 마오리 왕족이 죽었을 때 2만 5천명이 왔다 갔다고 한다.
이 마을 회관의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바로 '''사랑방'''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여기에 담요나 매트리스 등을 깔고 잔다는 건데, 마오리 조상님 사진이 달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실제로 뉴질랜드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의 수련회 비슷한 개념으로 이런 화레가 있는 마오리촌으로 캠핑을 가기도 한다. 넓은 화레에 학생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데, 마오리 특유의 토템문양들로 도배된 천장과 섬뜩한 문신을 한 조상의 사진을 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3. 전투민족



뉴질랜드 럭비팀과 호주 럭비팀이 각각 마오리 하카와 어보리진 전투 함성으로 기싸움을 벌이는 모습이다.
마오리족은 평상시에는 Tangata Whenua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구마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갈등이 붙으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싸웠다. 보통 싸움이 끝나면 패배한 부족은 이들을 이끄는 상위계급 전사나 족장들은 마나를 흡수할 요량으로 '''먹혔'''기 때문에, 부족간의 전쟁이 끝나면 이기는 쪽은 규모가 커졌다.
사례로 1853년에 채텀 제도에 살고 있는 모리오리족[17]을 공격했다.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500명이 11월 19일에 침입했고, 12월 5일에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이들은 모리오리족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리오리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이를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모리오리족은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 회의를 열어 맞서서 싸우는 대신에 평화와 우정을 제안하며 물자를 나눠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 마오리족은 한꺼번에 공격해왔다. 며칠만에 수백명의 모리오리족이 살해되고 많은 시체를 먹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들조차도 몇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죽여서 대부분이 사라졌다.[18]
하지만 이 방식으로 세를 불린 부족이 생기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섬인 뉴질랜드에서 이런 식으로 싸웠다간 손해도 손해지만, 언젠간 마오리족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하카(haka)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19]
전투를 벌이기 전에 두 부족은 모든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집결해 일정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모욕하면서 부족 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고 혀를 빼밀며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20] 양쪽 모두의 하카가 끝나고, 한쪽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세가 밀린다고 싶으면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며 전쟁은 그걸로 끝났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여겼으며, 패배한 부족도 자신들의 소중한 인력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이익인 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하카를 끝나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알짤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파투(patu)라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21]와 타이아하(taiaha)라는 기다란 나무막대기를 들고 싸웠다. 이외에도 도끼, 창, 원시적 수준의 칼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무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재료가 목재다. 날카롭게 깎아서 찌르거나 벨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둔기다. 이런 무기로 죽을 때까지 싸우려면 힘이 어지간히 세야 할텐데 마오리족의 피지컬을 생각한다면 어째 납득이 가게 된다.
19세기에 들면 유럽 상인들을 통해 머스킷을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전투는 더더욱 처절한 양상을 띄었다(일명 머스킷 전쟁). 1840년 마오리 부족들간의 갈등을 중재한 영국과 마오리 부족장들 사이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이후 부족들의 갈등은 마무리되었지만, 그때까지 마오리족은 '''이미 서로 2만명 이상을 살상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직전의 인구 추정이 10만명 정도인데, 머스킷 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유럽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5만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스킷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마오리 부족들도 이 시기 상당히 정리되었다.
이들의 대범함은 해외원정으로까지 이어졌는데, 1850년대 일부 부족들이 영국 상선을 고용해서 평화로운 원주민과 풍부한 사냥감이 있다는 채텀 제도[22]로 쳐들어가서 그곳 원주민들을 정복한 사건도 있었다. 채텀 제도의 원주민들은 마오리족에게 '''잡아먹혀서''' 아예 멸족당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책 《총, 균, 쇠》에 나오는 이야기로, 마오리족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원정이라고...[23]
양차대전,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저격수의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참호전 속에서도 하카를 추는 대범함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을 상대해야 했던 군인들은 "이건 뭐, 총을 갈겨도 맞고 쓰러져도 신음소리도 안 내고, 또 다른 놈들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개돌해서 아군 진지를 피범벅으로 만들더라..."라고 하며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만약 마오리족이 독일을 도왔다면 전쟁을 이겼을 것'이라고 한탄했다는 카더라가 존재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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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하카를 추는 마오리 전사들.
또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마오리족 역시 자신들의 의지로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파병을 자청했다. 이 당시 뉴질랜드 지상군이었던 Kayforce의 마오리족 비율은 7.5%였지만 전쟁 후반부에는 지원군의 약 1/4 가량이 마오리 전사들이었다. 출처 "창과 화살을 들고 갔기 때문에 미군에게서 총을 얻어다가 싸웠다"라는 루머가 있으나, 상술했다시피 1, 2차 세계 대전에서 뉴질랜드군으로 현대무기로 싸운 마오리족이 6.25 전쟁에 냉병기를 들고 참전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24] 이 때 참전용사들에 의해 마오리족 민요인 '''Pokarekare ana'''가 한국에 전해졌고 이 곡은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이란 가사로 시작되는 '''연가'''로 번안되어 불렸다. Pokarekare Ana, 한국에 알려진 연가 버전, 링크 그밖에 이탈리아 공수부대 군가 당신의 공수부대, 하늘의 대담한 전사로서 등도 마오리족 민요에서 가져온 것이다. 전자의 경우 한국에선 복음성가 예수 이름으로 곡조로 쓰인다.
전투종족이지만 Deadliest Warrior이란 프로그램에서는 소림승에게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25] 다만 이 프로그램은 시즌 2까지 시대상 불평등한 대결이나 편파적인 요소가 많았고, 몽골군이 아파치 전사와 싸우는 장면[26]처럼 한쪽이 어이없을 정도로 멍청하게 나오거나,[27] 무기 데이터를 뽑을 때도 비전문가가 나와서 들고 설치는 것도 있었다.

4. 백인들과의 공존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선원들이 오가기 시작했으며,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땅이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터졌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시원하게 태워버려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와이탕이 조약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로, 영국인과 마오리족의 관점의 차이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저항에 대응하기 어려웠던 뉴질랜드 정부는 마오리족에 대한 회유책으로 1867년도부터 마오리족의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해줬고, 마오리 선거구도 설정되어서 뉴질랜드 의회에 자체적으로 마오리 의원도 선출할 수 있었다. 이는 호주 원주민과 미국, 캐나다의 원주민들이 20세기까지 참정권을 가지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뉴질랜드 정부는 마오리어를 법적 공용어로 인정해주었고[28] 국가도 마오리어와 영어 순서로 부른다. 정부 홈페이지도 마오리어와 영어 모두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유권자의 대다수가 백인이었기 때문에 마오리족이 정계에서 쓸 수 있는 힘은 제한적이었고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꽤나 오랜기간 동안 마오리 문화 전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교육에서도 영국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서 마오리족들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나마 마오리족의 대다수가 농어촌에서 살았을 때는 마오리 문화의 전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도시화의 바람이 불면서 마오리 문화의 대다수가 사멸위기에 처했다. 6, 70년대 마오리족이 대부분 도시로 이주함으로써 대다수가 고유 문화에서 이탈해 마오리 언어와 문화가 사멸 위기에 처하자 마오리 언어와 문화 보전에 노력하지 않았던 뉴질랜드 정부에 대해 마오리 문화/언어를 보급하는데 노력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따라 1987년부터 마오리어가 법적 공용어가 되었다. 뉴질랜드 정부는 현재 마오리족을 대상으로 마오리어 보급운동을 벌이고 있다.
마오리족은 현재 뉴질랜드 인구의 1/6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위와 같이 그나마 백인에게 꿀리지 않고 저항한 역사 때문에 호주어보리진이나 북미 원주민들에 비하면 나은 사회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 편이고[29] 마오리족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각종 복지 혜택과 정부 지원금을 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문화를 잃어가며 가난 속에서 고통받는 마오리족도 적지 않은 편이다. 가난한 마오리족들은 범죄에 노출되기 쉬워, 2005년에는 전체 감옥 수감자 비율의 절반 가량이 마오리족일 때도 있었다. 기사 실제로 오클랜드 남부의 일부 지역(오타라라던지..)들은 슬럼에 비유되는 경우가 있는데 많은 주민들이 마오리를 포함한 남태평양 원주민 계이기는 하다. 뉴질랜드 정부는 범죄에 노출되는 마오리를 보호하고자 각종 복지 사업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로 인한 역차별 문제도 발생하고 있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다. 해당 상황에 대한 창작물은 밑의 창작물에서의 마오리족 문단 참조.
제임스 쿡 상륙 25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행사 때문에 논란이 있는데, 당장 마오리족들은 반발이 큰 상태이다.#

5. 정치


앞서 언급했듯 19세기 말부터 뉴질랜드 의회에는 마오리족을 위한 의석이 마련되어 마오리족이 의회에 진출해 자신들의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1996년 이래 뉴질랜드 의회 120석 언저리[30] 중 7석이 마오리족을 위한 의석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뉴질랜드 전역을 7개 지역구로 나누어 해당 지역구에서 1명씩 선출한다. 선거권은 마오리족만이 가지지만, 출마 자격은 마오리족이 아닌 뉴질랜드인에게도 주어진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노동당 지지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현재뿐만이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지속된 현상이기도 하다. 한편 마오리족의 권리를 대변하는 마오리당도 꽤 지지를 얻는 편이다. 1996년 총선에서 뉴질랜드 제일당이 7석 전석을 싹쓸이해 노동당에 충격을 안겨준 바 있지만 당이 우경화되면서 다시는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마오리인 총리는 없지만,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마오리인을 총독으로 임명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2020년 12월에는 마오리족 출신 여성이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화제가 되었다.

6.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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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개봉된 뉴질랜드 영화 'Once were warriors'(한국 개봉명은 '전사의 후예')는 도시에서 빈민층으로 살아가는 마오리족의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니 마오리족의 역사에 관심이 많으면 한번 보자.[31]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중 한 명이 스타워즈의 장고 펫으로 유명한 테무에라 모리슨. 감독은 마오리와 백인 혼혈로 어나더데이(영화)를 감독하게 되는 리 타마호리.
2002년에 개봉했던 영화 '웨일 라이더'(Whale Rider)에서는 현대를 사는 마오리족이 전통적으로 이어온 아들 선호사상과, 부족 선조의 마지막 자손으로서 '지도자' 자질을 지녔으나 지도자는 장남이어야 하는 관습 때문에 차별당하고 외면받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데드랜드'(The Dead Lands)에서는 부족간의 갈등으로 인해 부족이 몰살당한 주인공이 저주받은 숲에 사는 '괴물'과 힘을 합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부족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으로 한국에선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당시 마오리족의 생활풍습을 이라던지 전통문화 등을 알 수 있다. 배우들도 마오리계 배우들을 캐스팅 하였고 대사도 전부 마오리어로 말한다.[32] 참고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로렌스 마코아르는 딱 봐도 정말 무섭게 생긴 마스크를 지닌 거구의 사나이로 반지의 제왕호빗에서 러츠와 오크 고스모그, 아조그의 아들 '볼그'를 연기했다.
[1] 영원한 신들과는 달리 죽는 본인들은 '보통의 존재'.'일반적인 존재'란 의미라고 한다.[2] 뉴질랜드의 럭비팀인 All Blacks는 경기 전마다 하카를 추는걸로 유명하다.[3] 이 설화에서 등장하는 땅이 실제로는 뉴질랜드가 아니라 남극대륙이었다는 주장이 뉴질랜드의 역사학자들로부터 제기된 바 있었으나, 주류 학계는 정화의 명나라 함대가 아메리카까지 갔다 수준의 낭설로 보고 있다.[4] 그나마 모아는 작은 종은 19세기까지 살아남았다.[5] 폴리네시아인들의 조상들이 남미까지 건너가 수입해왔다.[6] 이런 요리법은 전체가 화산섬인 아이슬란드에도 발달해 있다.[7] 맨 앞의 것은 마오리족이 나름의 세습제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물론 다른 사람이 족장보다 마나가 더 높아지면 어떻게 될진 모를 일이지만) 중간의 것은 마오리 족이 전쟁을 많이 하는 민족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8] 이 탐험대는 뉴질랜드 상륙 후에 호주로 향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드니 근처에서 배를 돌리는 바람에 호주의 신천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네덜란드는 이전에 빌럼 얀스가 발견해서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발견자가 호주 북부 지방의 영 좋지 않은 땅에 실망해 가버렸기 때문에 적극적인 탐사를 할 생각이 없었다. 반면에 영국 선장은 동부 해안의 좋은 지형을 발견했고 후에 영국이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게 했다. 만일 얀스와 쿡 둘이 서로 반대 지역을 발견했거나 혹은 타스만이 먼저 시드니를 발견했다면 호주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타스만은 남방대륙 탐사와 식민지 개척의 주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인도 회사에서 비난을 받았고(네덜란드는 새 항로 개척은 별 관심이 없었고, 한다고 해도 성공이 확실해 보일 때 투자를 했다) 말년이 비참해졌다. 그래도 태즈메이니아 섬 등을 최초로 상륙한 등의 업적이 있기에 다수의 지리적 위치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곳이 있다.[9] 번개를 쏘는 우상까지 들고 있는 낯선 전사들을 본 마오리족은 분명 이들의 마나가 자신들보다 높다고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적으로부터 마나를 흡수하는 방법은 아까도 말했듯이...[10] 사실 taboo는 같은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인 통가족의 언어 'tabu'에서 기원했다.[11] 한국의 장승과 비슷한 것으로 인상도 장승이랑 닮았다.[12] 여행객이라면 여행 같이 하는 분들.[13] 다만 마오리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보통은 가이드가 담당.[14] 2011년 뉴질랜드 지진사태 이후 이 화레누낭아를 중심으로 지진피해자들의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마오리족들이 지진피해 복구과 구호활동에 앞장서서 이목을 끌고 있다. 보통 때의 쓰임새와 비슷하다. 관련자료[15] 50년대에 만들어진 것도 수두룩하다.[16] 가까운 친척은 며칠을 화레에서 시체와 같이 잔다고 한다(!). 물론 붙어서 자는건 아니고 그냥 같은 방에서 잔다.[17] 마오리족 사촌뻘되는 민족이다. 둘 모두 원래는 어업이 활성화되어있었는데 모리오리족은 고립되어 다시 수렵채집 사회로 돌아갔다.[18] 제레미 다이아몬드 <총,균,쇠> 2016, 73~74p[19] 비단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폴리네시아 문화권 및 고립된 특징이 있는 섬나라 전반에 해당하는 사항이다. 단적인 예가 일본의 와(和) 사상과 영국의 블랙 유머.[20] 마오리족 특유의 혀를 내미는 동작은 사실 '''너를 잡아먹어버리겠다!'''라는 뜻의 위협이다(!). 전쟁 한번 터지면 한쪽은 다른 한쪽을 잡아먹으니만큼 훌륭한 위협 내지 도발이었을 듯.[21] 몽둥이라고는 하는데 생긴 모양새가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밥주걱(...)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이나 상아 같은 특별한 재료로 된 걸 소지했다.[22]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으로 부터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제도로 현재는 뉴질랜드의 자치령이다.[23] 총, 균, 쇠 권두에 여러 민족들의 사진이 몇 장 실려있는데, 여기에 그 채텀 원주민의 최후의 후예라는 어떤 할머니의 사진이 있다.[24] 이미 마오리족은 그 전부터 서양무기를 들어와서 자체적으로 무장을 해서 타지역 원주민을 정복하는 등 이에 대한 역사가 깊다.[25] https://www.dailymotion.com/video/x6mt5te[26] https://www.youtube.com/watch?v=uEOHT0yEeck[27] 더할나위 없이 아메리카 원주민은 현명하고, 몽골인은 멍청한 바바리안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그대로 적용됐다.[28] 말장난같은 이야기지만 영어는 뉴질랜드의 법적 공용어가 아니다. 단지 대다수 뉴질랜드인들의 모어가 영어이고 공식적 상황에서 널리 통용되어 실질적 공용어 역할을 하는 것이다.[29] 물론 북미 원주민이나 호주 어보리진들도 타탕카 이요탕카페뮬우이처럼 백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한 자들도 있었으나 마오리족만큼의 위협이 되진 못했다. 북미 및 호주의 원주민은 유럽인들의 탄압이 시작될 때 즈음엔 뉴질랜드 마오리족만큼의 인구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30] 연동형 비례대표제 때문에 선거 결과에 따라 1석 혹은 2석 정도의 정원초과가 발생할 수 있다.[31] 옛날 외화로 더빙해서 방영해 주었다. 특히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베스 성우는 최문자. 영화 이야기는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마우리족 한 가정을 보여주는데 처음에는 성실한 것 같던 가장이 그냥 실업수당이나 받아 챙기면서 살려고 한다. 당연히 아내는 화를 내는데 이 가장이라는 놈이 폭력을 마구 휘두른다. 결국 첫째 아들은 갱단에 들어가고 둘째는 소년원 등 막장이 따로 없다. 심지어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보는데 자신은 아버지 같은 것 없다고 말할 정도이다. 나중에 아버지의 폭언을 견디지 못한 성실하고 대학에 갈 수 있던 딸은 결국 자살한다. 이렇게 가족이 붕괴될 것 같은데 다행히 첫째 아들은 좋은 스승을 만나 마오리족의 기상을 배우고 베스도 아이들을 대리고 남편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여기에서 폭력 가장은 다시 돌아오면 용서해 주겠다고 개소리를 하지만 베스는 미련 없이 떠난다.[32] 다만 일부 인물은 발음이 영 아니었는지 어쩔 수 없이 더빙을 한게 티가 난다.